377화 – 해외 출장 계획 (2)
정기 팀 퍼펙트 회의.
널찍한 회의실 중앙에 여러 개의 지도가 떠올랐다.
“샵팬덤에서 보내준 답사 일정입니다.”
이어 그는 메일 전문을 작게 옆에 띄웠다. 하지만 글자에 눈을 두는 사람은 없었다.
“퍼파고 요약 스타트!”
최병훈이 장난스러운 말을 던지자 박주호가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하지만 실제로 그가 할 일은 최병훈의 말 대로였다.
“업체별로 순서에 일부 차이가 있을 뿐 동선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원하는 동선을 택하고 일정을 정리해 답변을 부탁한다는 내용입니다.”
“오… 답변도 빠른데 엄청 편의를 봐주는 느낌이네요!”
“그러게요. 어제저녁에 문의한 거 아니었어요? 진짜 빠르다…”
조대한과 매드맨이 만족스러운 듯 미소 지으며 답했다. 이경복도 이에 웃으며 지도를 살폈다.
“공단 위치가 돗토리 현? 나는 처음 들어보는 곳인데?”
“오사카는 들어봤지? 그쪽이랑 가깝다. 3D 프린터 기술이 발달하기 전에는 굿즈 공장이 대부분 중국에 있었는데 지금은 여기로 옮겼다는군.”
박주호의 설명에 조대한이 첨언했다.
“아, 이쪽은 또 제가 친척들한테 들은 게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 중국에 위탁생산하는 방식이었는데 ‘해피 페이스’라는 업체가 있거든요? 거기는 일본 생산을 고수했다고 하더라고요.”
“아, 이 업체죠?”
이경복은 그에 웃는 얼굴이 그려진 로고를 가리켰다. ‘해피 페이스’라는 이름 자체는 일본어로 쓰여 있었기에 읽을 수 없었지만 마스코트가 확실했다.
“네네, 맞아요. 그래서 원형사나 관련 굿즈 기술자들이 돗토리 현에 거주했고 이후에 다른 업체도 기술자 따라 공장을 세워서 공단이 만들어졌다고 하더라고요.”
“오? 나름 정통성이 있는 곳인 거네요?”
“네네. 회사 이름은 몰라도 ‘해피로이드’라는 브랜드로 더 잘 알려져 있죠.”
“이야, 예전이었으면 답사한다고 일본이 아니라 중국에 갈 뻔했네.”
최병훈이 실소를 흘리며 말했다. 이경복은 다시 일정에 집중했다.
“아… 근데 이거 이동시간이 꽤 걸리는구나.”
“항공편으로 오사카 항공에 내리고 다시 기차를 타야 된다. 대략 5시간 정도 걸리지.”
“거기에 공장 답사까지 하면 아마 반나절은 족히 걸리겠네요.”
이경복은 그에 눈을 굴렸다.
“당일치기로 하자면 할 수 있긴 한데… 왕복 시간까지 생각하면 진짜 쉴 틈이 없잖아?”
하루 만에 끝내자면 강행군이 되는 일정이었다. 이경복은 곧바로 결론을 내렸다.
“당장 쫓기는 상황도 아니니까 여유롭게 가는 편이 좋겠는데.”
“나도 그게 좋을 것 같다. 휴방일 껴서 1박 2일로 일정을 잡는 게 컨디션에도 무리가 없지.”
박주호는 그에 수긍했다. 하지만 이경복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한 발 더 나아갔다.
“아니면 아예 이런 건 어떨까?”
그는 박주호와 조대한 쪽을 순차적으로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이번 출장에서 주호랑 대한 씨는 필수잖아? 거기에 퍼그말리온 님까지 합하면 총 넷이거든.”
이경복을 포함해 매니저와 통역 및 가이드, 그리고 원형사까지 4인의 출장은 확정이었다.
“그런데 퍼그말리온 님은 아직 우리가 낯설 거란 말이지? 게다가 혼자 여성분이시니까 어색하게 같이 다니기도 부담스러우실 거고.”
“그건 그렇긴 하겠지.”
“따로 답사하겠다고 하실 정도로 열의가 있으시긴 한데, 막상 오시면 힘드시긴 할 거예요.”
박주호와 조대한도 그에 수긍했다. 비슷한 입장인 매드맨도 동감을 표했다.
“저는 뭐 원래 얘랑 알고 지냈으니까 적응이 빠른 편이었죠. 아니었으면 확실히 부담스럽긴 했을 거예요.”
“오올? 그래도 내 덕인 줄은 아는구나?”
“으휴, 제발 칭찬한 보람이라도 느끼게 해줘라.”
장난스럽게 으스대는 최병훈을 흘겨보며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경복이 그에 웃으며 가볍게 손뼉을 쳐 주의를 돌렸다.
“그렇죠. 그런데 대한 씨가 또 아이디어를 줬잖아요? 가서 브이로그 한 번 찍어보기로. 여기에 이왕이면 영상 감독도 가는 편이 퀄리티가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영상 감독이요?”
“나 말하는 거?”
그에 영상을 담당하는 편집팀 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자신들도 같이 데려가겠다는 말이 아닌가.
“그렇지. 솔직히 방송 시작한 뒤로 휴가다운 휴가도 없었잖아? 엄밀히 말하면 휴가라기보다는 일종의 사내 워크샵이라고 해야 하나. 어떻게들 생각해요?”
그 물음에 팀원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결론을 내기까지 걸린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확실히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
“다 같이 갈 수 있으면 더 좋죠! 제가 찍는 거보다 편집팀장님이 더 실력이 좋으실 거고요!”
“아, 진짜 솔직히 말하면 나도 오프라인 촬영 맡기는 건 좀 불안하긴 했어. 편집으로 어떻게든 살려보겠지만 직접 구도 잡는 건 또 다르거든? 내가 또 카메라를 딱 잡아야 이게 각이 산다니까?”
“야, 제발 겸손함을 좀 배워라. 아무튼 저도 찬성이에요. 퍼그말리온 님도 같이 계시면 저도 편하죠!”
다들 들뜬 표정으로 동의했다.
“좋습니다. 그럼 이번 출장은 워크샵인 걸로 하죠! 주호야, 이거 정리해서 퍼그말리온 님께 전달 좀 부탁할게.”
“알았다.”
이경복은 그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다들 기뻐하니 그 역시 기분이 좋았다.
* * *
원형사, 퍼그말리온의 집.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을 떼었다. 그 앞에는 완성된 아크릴 박스와퍼펙트 야미 피규어가 있었다.
“끝났다…!”
작은 탄식과 함께 그녀는 기지개를 켰다. 이렇게 또 하나의 선물이 완성됐다.
‘전달은 저번처럼 지하철 보관함으로 하면 되려나?’
그녀는 예전 기억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당시에는 뜻밖의 선물을 받지 않았나.
그녀의 시선은 이내 진열장으로 향했다. 자신이 만든 작품 가운데 싸인이 새겨진 가면이 자리하고 있었다.
“응?”
기분 좋게 기억을 되새기던 중 들려오는 알람소리가 새로운 메일의 도착을 알려주었다.
송신자 이름을 본 순간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매니저 님?’
이전에는 기뻐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공장 답사를 하고 싶다는 메일을 보낸 이후로 그녀는 전전긍긍 해왔다.
이유는 간단했다.
‘무리한 요구라고 불쾌해하시면 어쩌지!?’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편한 요청은 아니었다. 그녀는 떨리는 마음을 다잡고 조심스럽게 메일을 열어보았다.
“어…?”
조금 전까지 긴장한 게 무색하게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 자신이 읽은 내용이 맞나 다시 또 읽어봤지만 당연히 내용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나만 가는 게 아니라? 다 같이 답사를…?!’
믿기지 않는 내용이었다.
이경복은 물론 그 매니저와 편집 팀까지 전부 다 함께 답사를 가자는 내용이었다.
‘그게 끝이 아니라 나까지 배려를 해주시다니.’
내용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혹시라도 그녀가 불편할 수도 있으니 별도로 첨부된 일정도 나와 있었다.
동행이 힘들다면 숙소는 물론 이동 편까지 따로 준비를 해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와…”
자신을 위한 세심한 배려였다.
그녀는 마음 깊이 차오르는 감격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감사와 함께 걱정도 머릿속에 피어올랐다.
‘이거 괜찮나…?’
메일 내용 중에는 브이로그 촬영에 관한 것도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차후 영상에 들어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걱정하는 건 그쪽이 아니었다. 자신의 목소리 따위는 얼마든지 써도 좋았다.
‘퍼플 님의 진짜 얼굴을 직접 본다고?’
그의 팬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일이었다. 퍼그말리온 역시 이경복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이것은 평범한 팬이라면 누릴 수 없는 특권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녀가 걱정하는 이유가 있었다.
‘머릿속에 각인이 되어버리면 어떡하지?’
그 이유 역시 그녀가 이경복의 팬이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강박적인 특성상 이경복의 얼굴을 보고 그것을 피규어에 반영할지도 몰랐다.
혹시라도 그렇게 반영된 얼굴을 보고 누군가 이경복의 신상을 알게 된다면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아니, 이건 자의식 과잉이야. 너무 지나친 걱정이잖아.’
그녀는 스스로를 나무라보았지만 걱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만큼 이경복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고 싶었다.
그녀는 진정한 팬이었고, 팬이라면 좋아하는 대상이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따로 가면 또 그것대로 민폐인데…”
퍼그말리온은 머리를 헝클었다.
혼자서 답사를 가겠다고 한 건 이런 일정이 없던 때의 이야기였다. 이렇게 답사 일정을 짜두었는데 따로 가게 된다면?
이경복 쪽이나 업체 쪽이나 여러모로 번거롭게 될 건 분명했다.
‘전부 솔직히 이야기하자.’
고민 끝에 그녀는 결정을 내렸다. 진심 어린 배려에는 진심으로 답해야 할 터였다.
* * *
이경복은 구청에서 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박주호가 안경을 고쳐 쓰며 물었다.
“내가 말했지? 금방이라니까.”
“아니, 진짜 빠르네? 여권 갱신이 원래 이렇게 빨랐나?”
회의가 끝나고 두 사람이 구청을 방문한 이유였다. 해외 출장에 앞서 이경복의 여권을 갱신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 학교 다닐 때만 해도 한 1주일은 걸렸잖아?”
“학교라니… 비교 기준이 너무 오래전이잖아. 요즘에는 신원만 확실히 확인되면 끝이다.”
박주호는 실소를 흘리며 차에 올랐다. 이경복이 뒤따라 오르자 그가 시동을 걸며 말했다.
“나는 일처리 속도보다 네가 10년 동안 여권 갱신을 안 했다는 게 더 신기한데.”
“아니, 뭐 해외 나갈 일이 없었으니까.”
이경복이 멋쩍게 웃으며 옛 기억을 떠올렸다.
“우리 고딩때 수학여행 때문에 여권 만들어보고 진짜 오랜만에 꺼낸 거야. 집에서 나올 때도 시간 좀 걸렸었잖아? 솔직히 찾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릴 줄은 몰랐네.”
“하기야 네 이전 직장들 생각하면 그럴 만하지.”
박주호는 이내 수긍하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깐, 생각해보니 수학여행 때도 결국은 안 갔었잖아?”
“어, 그리고 어릴 때는 또 몸이 안 좋아서 국내 여행도 제대로 못 가봤거든.”
“그럼 너 이번이 첫 해외여행인가?”
“듣고 보니 그렇게 되네.”
이경복은 약간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신병에 시달릴 때에는 여행은 엄두도 못 냈다. 언제 몸이 아파올지 모르니 부모님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도 수학여행 안 간 거는 후회 없어. 솔직히 우리끼리 학교에 남은 게 더 재미있지 않았냐?”
“확실히 그건 잊을 수가 없지.”
박주호는 그에 바로 수긍했다.
이경복과 박주호, 그리고 최병훈까지 세 사람은 수학여행에 불참하고 학교에서 자습을 했었다.
“텅 빈 학교에 나오는 쪽이 웬만한 수학여행보다 더 특별한 추억이니까.”
“그러니까. 아, 감독하는 선생님만 없었으면 딱이었는데. 그때 급식도 안 해서 선생님까지 넷이서 밥 먹으러 나갔잖아.”
“우리가 땡땡이 칠까 봐 그런 거 아니냐.”
“하긴, 선생님 없었으면 놀다 들어왔을 것 같긴 해.”
이경복은 옛날로 돌아간 것처럼 장난스럽게 웃었다. 박주호도 그에 따라 당시를 추억하며 미소 지었다.
“솔직히 나는 내 첫 해외여행이 지금이라서 더 다행인 것 같다.”
“그래?”
“괜히 껄끄러운 애들 사이에 끼어서 가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내가 믿고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가는 건데.”
이경복의 말에 박주호는 눈을 크게 떴다. 이내 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일은 일이야. 놀러 가는 거 아니다?”
“그건 원래 사장이 할 말 아니냐?”
그의 너스레에 이경복이 웃으며 받아쳤다. 그리 농담을 주고받는 와중이었다.
짧은 알림음과 함께 편지 아이콘이 홀로그램으로 떴다.
“아, 퍼그말리온 님이 답장하신 모양이다. 운전 중이니까 대신 확인 좀 해라.”
“이 자식이 이거, 자꾸 사장을 부려먹어? 어휴, 이런 걸 시청자들이 알아줘야 되는데.”
이경복은 장난스럽게 푸념하며 메일을 열었다.
“음…?”
“왜? 무슨 문제 있으신가?”
“아니, 좀 애매하네. 문제라고 해야 되나 이거?”
이경복은 박주호에게 내용을 설명해주었다. 퍼그말리온이 밝힌 사정에 두 사람은 침음을 흘렸다.
“으음, 좀 지나친 걱정이 아니신가 싶은데.”
“근데 본인한테는 중요한 문제인 거잖아? 그리고 나를 걱정해주신 거니까 나쁜 의도도 아니고.”
“그거야 그렇긴 하지. 그럼 어떻게 하려고?”
박주호의 물음에 이경복은 고민했다. 신기로 미루어 보아 불길한 예감은 아직 없었다.
“메일 보낸 지 얼마 안 됐지?”
“그렇지. 회의 도중에 정리하고 보냈으니까.”
“그런데 바로 답 주신 거 보면 시간 여유가 좀 있으신 거겠지?”
“…설마 직접 만나려고?”
이경복은 그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안 그래도 굿즈 관련해서 계약하러 가야 되잖아?”
“음, 그건 전자 계약이나 내가 가면 충분하긴 한데…”
박주호는 이내 천천히 차를 세울 준비를 했다.
“직접 만나는 게 확실하다는 거지?”
“그게 제일 좋지.”
이경복이 직접 확인하는 편이 제일 좋은 방법이었다.
“직접 만나서 걱정을 덜어드리자고.”
그녀만이 아니라 양 쪽 모두에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