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8화 - 새 피규어는 어디서? (4)
일본의 굿즈 제작 업체는 많았다. 샵팬덤은 그중에서 특출난 업체만을 선정해 시장 공략을 준비하고 있었다.
앞서 답사를 마친 3개 업체가 바로 그런 곳이었다. 이에 대표도 자신감 있게 소개를 했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약간 달랐다.
“마지막으로 방문할 곳은 ‘마스터피스’라는 곳입니다. 이름 그대로 명작과 걸작으로 여겨질 정도의 굿즈를 만드는 곳이죠.”
활기찼던 말투는 조곤조곤해졌다. 오히려 신중히 말을 고르는 듯 그의 눈이 이리저리 돌아갔다.
“퀄리티는 일반 피규어든 액션 피규어든 상관없이 업계 최고라 자신할 곳입니다.”
“해피페이스나 맥시멈 워크스가 제일 뛰어난 게 아니었나요?”
앞서 했던 자신의 설명과 모순적인 평가였지만 대표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팔짱을 끼며 살짝 코끝을 찡그렸다.
“그게 좀 범주가 다릅니다. 마스터피스는 오로지 프리미엄 굿즈만 취급하는 업체거든요.”
“프리미엄 굿즈 전문 업체라는 건가요?”
“그럼 여기만 봐도 되는 거 아닌가…?”
다른 팀원들이 어리둥절했다.
애당초 프리미엄 피규어 제작을 어느 곳에 맡길지 확인하기 위한 답사가 아닌가.
“마스터피스만 답사하기 어려운 이유가 있습니다. 단점이 없는 곳은 아니거든요.”
대표가 이에 차분히 설명했다.
“일단 업체 자체에서 호불호가 좀 심합니다.”
“호불호?”
“보통 굿즈 제작은 IP가 인기를 얻으면 제작 업체 쪽에서 IP 소유한 쪽에 컨택을 하거든요? 그런데 여기는 그 반대입니다.”
“반대라면… IP를 가진 쪽에서 요청을?”
“네, 그렇죠. 그만큼 마스터피스 굿즈 퀄리티가 뛰어납니다. 업계 내에서도 명인이라 부를 정도로 실력 있는 기술자들을 확보했으니까요.”
그 설명에 다들 짧은 경탄을 흘렸다. 대표는 그에 웃다가 살짝 코끝을 찡그렸다.
“그래서 오히려 마스터피스에서 IP를 심사합니다. 굿즈로 만들 가치가 있는지 평가를 하는 거죠. 그 안목도 굉장히 까다롭고요.”
“아니, 그런데도 장사가 되나?”
“어느 정도로 뛰어나기에…”
“안 사고는 못 배길 정도인가 봐요.”
팀원들은 그에 의아해했지만 박주호와 이경복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잠깐 견본을 찾아봤었는데 퀄리티가 다르긴 했다.”
“뭐, 그래도 난 퍼그말리온 님 작품이 더 좋지만.”
퍼그말리온이 그 평가에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참는 사이 대표가 말을 이었다.
“그게 또 장점이자 단점입니다. 마스터피스는 퀄리티가 뛰어난 만큼 비용을 아끼지 않아요. 자연스럽게 제품 가격이 상승할 수밖에 없습니다. 최소가 50만 원 선이에요.”
“50만 원!? 진짜요?”
“확실히 프리미엄 가격이네…”
다들 놀라자 대표가 짧게 헛기침을 했다.
“크흠, 너무 안 좋은 이야기만 한 것 같지만 훌륭한 업체라는 건 사실입니다. 그렇게 깐깐한 사람들이 이번 답사를 허락한 것도 꽤 이례적인 일이고요. 사실 저희도 오퍼 넣으면서 기대는 하지 않았거든요.”
그는 이경복을 바라보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런데 역시 우리 퍼플 님은 다르더라고요. 퍼플 님 소개랑 제작할 피규어 예시를 보내주니까 또 긍정적인 답이 돌아오지 않습니까? 이게 또 일본 내 퍼플 님의 입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거든요.”
“아, 우리 사장님이 월클이긴 하시죠.”
“직접 보면 만들고 싶어진다니까요.”
흡족해하는 팀원들의 반응에 이경복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보다는 퍼그말리온 님이 보내주신 작품이 좋았던 걸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퀄리티를 중요시 여기는 사람들이면 장인 정신 같은 게 자극받은 거 아닐까요?”
“아니, 제 작품이 그 정도는…”
퍼그말리온이 재차 쑥쓰러워하면서도 미소를 짓자 다들 웃음을 흘렸다.
“아, 거의 다왔네요. 나머지는 직접 보고 확인하시면 되겠습니다.”
* * *
이경복을 비롯 일동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알 수 있었다.
마스터피스의 분위기는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일단 마중 나온 사람부터 공장장이 아니었다.
“어서 오십시오.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안내를 맡은 직원 역시 말과는 달리 웃음기 없이 사무적인 태도였고 그 옆에는 업체 쪽 통역인도 대동하고 있었다.
“약소하지만 감사 선물입니다.”
소개를 마치고 준비해 온 전통주를 내밀어도 그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 선물로 인한 특혜는 없을 겁니다.”
“아, 예…”
최병훈이 그에 눈치를 살피며 대표에게 물었다.
“저기, 대표님. 이거 촬영 허가는 받으신 거죠?”
“네? 아, 네네. 분명 괜찮다고 확인 받았는데…”
“촬영은 가능합니다.”
불쑥 직원의 말이 끼어들었다. 이전과 달리 업체 쪽에서도 통역이 있으니 한국어를 다 이해한 덕이었다.
“저희 마스터피스는 이미 여러 차례 취재를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악의적인 비방이나 왜곡이 없다면 자유롭게 촬영이 가능합니다.”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최병훈은 멋쩍은 표정으로 물러났다. 안내 직원은 이내 일행을 둘러보고는 돌아섰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그를 따라 공장에 들어서며 답사가 시작됐다. 이경복은 이내 눈가를 찡그렸다.
‘…뭐지?’
뭔가 껄끄러운 느낌이 들었다. 공장 어디에선가 미묘하게 불쾌한 기운이 맴돌았다.
‘약간 좀 다른데…’
기존에 느꼈던 적의나 악의와는 종류가 달랐다. 더욱이 그 기운이 명확히 강한 것도 아니라서 더 거슬렸다.
“오, 뭐야?”
“아니, 여기는 거의 다 사람이 하네?”
그 사이 다른 팀원들은 제작 공정을 보고 감탄을 터트렸다. 공정이 5단계로 나뉘는 것은 여타 업체와 같았지만 마스터피스는 기계를 거의 쓰지 않았다.
“프린팅만 기계로 하고 나머지는 전부 원형사들이 직접 수작업을 거칩니다.”
안내 직원은 자부심 가득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에 다들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거 괜히 비싼 게 아니긴 하네.”
“이렇게 기술자들을 갈아서 만들면 비쌀 수밖에 없겠군.”
“엄청 세심하게 작업할 수 있겠네요.”
그리 작업 과정을 지켜보던 도중 생각지 못한 모습이 보였다.
“지금 그냥 버린 거야?”
“아니, 왜…”
“멀쩡해 보였는데요?”
원형사가 뭔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작업하던 파츠를 살펴보다 바로 폐기해버렸다. 그 서슴없는 행동에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희는 어떤 불량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또한 현장의 판단을 전적으로 존중하죠. 작업을 맡은 담당자가 만족하지 못하는 작품은 절대 통과할 수 없습니다.”
반면 안내 직원은 오히려 이게 당연하다는 듯 담담히 설명했다. 그에 팀원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진짜 장인 정신이네요.”
“퀄리티를 위해서 무엇이든 희생하는 건가.”
“근데 이러면 제작 시간이 좀 많이 걸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저는 실수 없이 조형하려고 신중하는 편인데, 저랑은 다른 의미로 시간이 오래 걸리겠네요.”
제작 속도가 빠를 수가 없는 방식이었다. 그에 다들 우려를 표하며 마지막 공정까지 확인한 뒤의 완성품을 확인했다.
“와! 이거 뭐야!?”
“미쳤다 진짜.”
“엘든소울의 에이든이죠? 대박이다…”
엘든소울의 보스, 결정자 에이든의 스태츄 피규어였다.
거대한 왕좌와 균열, 망국의 알현실에 걸맞은 분위기까지 표현되어 있었다.
이경복도 옆에서 세세히 살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와, 이건 캡슐 속에서 그대로 꺼냈다고 해도 믿겠는데요.”
직접 게임 속에서 목격한 만큼 그 느낌이 달랐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눈을 빛내는 이가 있었다.
“무너진 기둥이랑 왕좌, 색감은 물론이고 명암 표현까지…! 게다가 탈착까지 된다고요?”
퍼그말리온은 홀린 듯이 이리저리 돌며 관찰하다가 이내 자신에게 쏠린 시선을 깨달았다.
“아, 그… 퍼무새 피규어는 안 만들어도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네요.”
이 정도라면 시제품을 만들어 볼 필요도 없지 않겠나. 다들 그에 동의하는 도중 직원이 끼어들었다.
“미니 피규어 건이라면 저희로서도 제작해보고 싶습니다.”
“아, 그러신가요?”
팀원들은 그에 서로 눈빛을 나누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도 업체 쪽에서 욕심이 있다는 뜻 아니겠나.
“다만 한 가지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부탁…?”
“저희 공정상 모델링은 원안을 맡은 원형사가 하는 것이 규칙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직접 모델링을 진행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제가요?”
“예. 다만 사내 보안상 다른 분들은 여기 남아주셔야 합니다. 통역은 저희 쪽에서 진행할 테니 걱정하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조대한은 그에 멀뚱히 눈을 껌뻑였다. 이내 다른 팀원들은 이경복에게로 눈을 돌렸다.
‘뭔가 좀 걸리긴 하는데…’
이경복은 잠시 고민했다. 불쾌한 느낌의 출처가 바로 이것이었을까.
그러나 그가 바로 거절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이런 건 또 처음이네.’
상황 자체는 부정적인데 이 선택은 해도 좋다는 직감이었다.
‘퍼그말리온 님이 워낙 좋은 분이라서인가.’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길한 기운이 부정한 기운을 상회했다. 이경복은 이에 결정을 내렸다.
“이왕 비교하는 거 4가지 다 하는 게 확실하겠죠.”
그는 웃으며 퍼그말리온을 돌아봤다.
“잠깐 다녀오세요.”
* * *
퍼그말리온은 직원의 안내를 따라 방으로 들어섰다.
“이곳이 저희 원형사들이 모델링 할 때 쓰는 공동 회의실입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아, 네네. 여기요.”
그녀는 직원에게 퍼무새 피규어를 건넸다. 직원이 스캐너 위에 피규어를 올리자 바로 스캔이 시작됐다.
이윽고 회의실 중앙에 스캔된 퍼무새 모델이 홀로그램으로 투사됐다.
“이곳에서는 별도 도구 없이 증강 현실 기술로 모델링이 가능합니다.”
“우와…”
“한 번 직접 해보시죠.”
홀로그램을 그저 손으로 만지는 것만으로도 모델링을 바꿀 수 있었다. 그녀가 신기해하며 모델을 다듬는 사이 누군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오셨습니까.”
“이분이신가?”
낯선 인물의 등장에 그녀는 눈치를 살폈다. 안내 직원이 깍듯하게 대하기도 했고, 그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도 비범했다.
“이쪽은 저희 마스터피스 최고기술책임자, CTO를 맡고 계신 마루야마 님이십니다. 조형기술 만으로 일본 인간국보로 등재되신 분이십니다.”
“아, 네네. 안녕하세요…”
퍼그말리온은 그 소개에 주눅든 채 인사를 건넸다.
‘우리나라로 치면 인간문화재? 근데 그런 사람이 갑자기 왜…?’
혹시 회의실을 쓰게 됐으니 자리를 비켜달라는 말일지도 몰랐다. 이에 그녀가 방을 나설 준비를 하려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자리를 마련해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실례라는 걸 알면서도 욕심이 나더군요.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인간국보의 말이 통역되자 그녀의 눈이 절로 커졌다.
“저, 저요?”
“예. 나쁜 이야기는 아니라 자신합니다.”
그녀가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그가 짧게 헛기침을 했다.
“사실 이번 답사를 허락한 건 굿즈 생산 계약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였죠.”
인간국보가 가볍게 손짓하자 퍼무새 모델링이 사라지고 새로운 피규어 모델이 나타났다.
그녀가 이경복을 위해 처음으로 만든 바이오 크라이시스 피규어였다.
“사진으로 보내주신 걸 구현해본 겁니다. 다시 봐도 놀랍군요. 이토록 복잡하고 세심한 피규어를 혼자서 만드셨다니, 그저 감탄이 나옵니다.”
“아, 그, 감사합니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했다지만 조형의 기본은 가상의 존재를 현실로 구현하는 능력이죠. 거기에 그냥 구현만이 아니라 자신만의 재해석까지 완벽했습니다. 이런 재능이 있는데 이제껏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니…”
인간국보는 탄식하더니 이내 미소 지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의 재능을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염치불구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저기, 무슨 말씀이신지…”
“스카우트 제안입니다.”
돌아온 통역에 그녀의 턱이 떨어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그 턱은 도저히 제자리로 돌아올 수 없었다.
“지금 어떤 계약을 하셨든 상관없습니다. 위약금은 자사에서 전액 부담하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저희와 함께하시면 계약금으로 5천만 엔, 거주지와 통역도 제공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초봉으로 2천만 엔을 약속드리죠.”
그녀는 눈을 껌뻑였다.
머릿속에서 숫자가 이리저리 돌아갔다.
‘5천만 엔이면 우리나라 돈으로 5억? 게다가 연봉으로 2억이라고?’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단위였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취업에 번번이 좌절해 스스로 눈칫밥이나 먹고 있지 않았나.
“아니, 그, 제가 이해가 잘 안 되는데…”
“거짓말이 아닙니다. 계약서 역시 이미 준비해두었습니다.”
그 말에 안내 직원이 전자 계약서를 띄웠다. 그것도 일문과 국문, 2종류였다.
“물론 이 자리에서 결정하라는 건 아닙니다. 메일을 알려주시면 저희가 제안서를 보내드릴 테니 충분히 고려해주시고 답변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에 퍼그말리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갑자기 숨 쉬기가 어려워졌다.
‘어떡해? 진심인가 봐…!’
그녀는 심장이 떨린다는 표현이 실제로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었다. 몇 번이고 의식적으로 심호흡을 하고 나서야 겨우 숨통이 트였다.
그 와중에 상대는 차분히 그녀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윽고 그녀가 말문을 열었다.
“이렇게 좋은 평가는 살면서 처음 받아봤어요.”
그 통역을 들은 인간국보의 표정이 환해졌다. 퍼그말리온도 그를 향해 미소 지었다.
“메일은 안 주셔도 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