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9화 – 크루 미팅 (2)
늦은 오후, 지놈의 스튜디오.
“아이고, 어서 오십쇼들.”
“오랜만입니다.”
“아, 정말 오랜만이에요! 대회 이후로 처음이네요!”
“맞네, 데시벨 님이랑 이클 님은 그러네요.”
퍼지데이 크루 회의를 위해 4명의 멤버들이 모였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지놈이 먼저 손뼉을 쳤다.
“자, 공식적으로는 방송에서 하겠지만 먼저! 데시벨 님의 크루 합류를 환영합니다!”
“잘 오셨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할게요.”
기존 멤버인 두 사람도 따라 손뼉을 치며 그녀에게 환영인사를 건넸다.
데시벨은 그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양손을 맞잡았다.
“아, 정말 감사합니다! 진짜 이렇게 흔쾌히 받아주실 줄은 몰랐어요…! 저, 진짜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감격어린 그녀의 말에 다들 웃음을 흘렸다.
“아니, 밈이 아니라 진짜 신입사원 같으시네.”
“노력해주시면 감사하지만 너무 부담은 갖지 마세요.”
“같이 방송 재미있게 하려고 모인 거 아니겠습니까. 오늘도 그렇고요.”
“아, 넵넵! 정말 시간 내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데시벨도 그에 수긍하며 웃었다. 이내 지놈이 그녀와 이경복에게 눈을 돌렸다.
“아니, 근데 두 사람 퍼플오피스에서 봤다면서요? 무슨 문제는 없었어요?”
“아, 저도 듣고 진짜 놀랐습니다. 잘못하면 퍼플 님 얼굴이 노출 될 수도 있었는데…”
이클립스도 동조하자 데시벨이 슬쩍 눈치를 봤다. 반면 이경복은 여유롭게 손을 내저었다.
“아무 문제없었어. 그리고 데시벨 님한테는 먼저 말은 했는데, 두 사람한테도 말 하려고 한 게 있거든.”
“응?”
“저희에게요?”
이경복은 그에 데시벨에게 말한 것처럼 고민을 털어놓았다. 이에 지놈과 이클립스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경복은 그 반응에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사실 나도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는데, 시청자분들이 보내주는 성원이나 애정이 너무 커서 고민을 안 할 수가 없더라고.”
“아… 그건 확실히 그렇지.”
“어, 사부님이 이제 5개월이셨죠? 어우, 말하고도 안 믿기네.”
“5개월이 아니라 5년차 스트리머라고 해도 못 믿을 수준이긴 합니다.”
다른 멤버들이 수긍하자 이경복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내가 좀 그런 게 있어. 다른 사람 대할 때 거울처럼 대하거든. 잘 해주든 못해주든 그대로 돌려줘서.”
호의에는 호의로 돌려준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세 사람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뭐, 대부분 그렇지 않나? 사람 마음이 다 그런 거지.”
“저는 실제로 그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으, 오히려 잘 대해줘도 푸대접하면 이상한 거잖아요?”
이경복은 그 반응에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이게 시청자들에게도 마찬가지라서. 저번에 뒤풀이에서 가면 쓰고 나온 것도 그렇고 브이로그에서 어느 정도 얼굴을 보여준 게 그거 때문이거든. 시청자분들이 날 아껴주시니까, 그만큼 나도 내 모습을 드러내는 게 맞겠더라고.”
“확실히 시청자분들이 엄청 좋아해주셨으니까.”
“와, 사부님 진짜 대박이셨죠.”
지놈과 데시벨은 즉각 수긍했지만 이클립스의 반응은 약간 달랐다.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간 공개를 안 하신 이유가 있으시지 않습니까? 이제는 괜찮아지신 건가요?”
순간 정적이 내려앉았다.
다른 두 사람은 이경복의 표정을 살폈고 이경복은 신중히 말을 고르고 있었다.
“음, 완전히 그런 건 아니죠. 그랬으면 고민할 필요도 없을 테고. 그래도 처음 방송할 때보다는 확실히 나아졌습니다. 이것도 시청자 분들 덕분이긴 하고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이클립스의 얼굴에 부러움이 떠올랐다가 이내 씁쓸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퍼플 님이라면 현명한 선택을 하실 겁니다.”
이에 지놈이 눈치껏 나서서 정리를 했다.
“크흠, 사실 이게 정답이 없어요. 야, 나 봐라. 얼공하니까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있었잖아? 좋을지 나쁠지는 까봐야 아는 거거든. 그런데 이거 하나는 내가 하나 확실하게 말해줄게.”
그가 자신 있게 목소리를 높이자 다른 사람들이 시선을 모았다.
“만약 네가 얼공을 한다? 시청자들은 물론이고 여기 있는 우리 멤버들, 무슨 일이 생겨도 전적으로 너 지지할 거야.”
“아, 그쵸. 그건 확실하죠. 저야 뭐, 리겜 대회 나간다고 그냥 공개를 해버렸긴 한데… 아무튼 중요한 건 결국 어떤 방송을 하느냐니까요!”
데시벨이 지원하듯 말을 덧붙이자 두 사람도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옳은 말씀이십니다.”
“그러네요. 합방 준비하러 온 건데 잠깐 얘기가 샜습니다.”
분위기가 전환되자 이경복이 가볍게 손뼉을 쳤다.
“그럼 데시벨 님이 준비해 주신 컨텐츠를 한 번 살펴보죠!”
* * *
데시벨이 준비한 게임들의 확인이 끝났다. 각자에게 생소한 게임도 있었기에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나름 시간이 소요됐다.
“자, 다들 봐서 알겠지만 데시벨 님이 진짜 고심한 흔적이 보이지? 인지도는 물론이고 게임성도 준수하게 잘 뽑으셨네.”
“안 해본 게임이 많다는 게 새삼 느껴집니다.”
“그러니까요. 정말 시간 많이 투자하셨을 것 같습니다.”
멤버들의 칭찬에 데시벨은 입가에 떠오르는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아니, 뭐 조금 노력하긴 했죠. 그리고 이게 또 제가 그냥 고른 게 아니거든요. 합방이니까 다른 분들 특성도 고려해서 선정했어요!”
“오? 특성이요?”
데시벨은 그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한 명씩 시선을 주었다.
“일단 사부님은 만능이시니까 오히려 예외! 솔직히 뭘 골라도 잘 하시니까요.”
“아, 이거 팩트지.”
“음, 저도 인정합니다.”
이경복이 그에 실소를 흘리는 사이 데시벨이 이클립스를 돌아봤다.
“이클 님은 누구나 아시다시피 근접전은 또 대단하시잖아요. 그래서 아예 근접전이 없는 게임들은 배제했어요.”
“확실히 근접전을 못 하면 좀 곤란해지긴 합니다.”
이클립스가 멋쩍게 웃으며 인정했다. 이내 지놈이 기대어린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놈 님은… 솔직히 말해 피지컬은 다른 두 분에 약간 부족하긴 하죠.”
“데시벨 님, 살살 찌른다고 안 아픈 거 아닌데요.”
지놈이 장난스럽게 정색하자 데시벨이 빠르게 손을 내저으며 덧붙였다.
“아, 물론 어디까지나 상대적이에요! 대신에 지놈 님은 머리회전이 엄청 빠르시고 근접이나 원거리나 경험이 풍부하신 올라운더에 가깝죠!”
“혹시 이 형 삐졌다고 지금 급하게 지어낸 건 아니죠?”
이경복이 슬쩍 장난을 치자 데시벨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아니에요! 진짜, 진심!”
“야씨, 또 뭘 삐돌이로 몰아가냐. 그럼 데시벨 님 본인은요?”
“어? 뒤끝? 삐진 거 맞는 거 같은데?”
“아이, 아니라니까 정말!”
지놈이 억울해하자 다들 웃음을 흘렸다. 이내 데시벨은 잠시 주저하다가 곧 당당히 입을 열었다.
“저,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놈 님보다는 피지컬 좋은 것 같아요.”
“아니, 여기서 또 팩트를?”
“근데 저는 대신에 근접전은 아직 익숙하지가 않아서요. 무기를 다뤄본 경험이 적어서 실력이 좋지는 않고, 대신 사격 실력은 저번에 사부님 코칭 받고 많이 나아졌어요!”
“아, 그건 인정합니다. 방송 보니까 불렛타워 클리어 하셨던데.”
지놈이 그에 동의하며 장난기를 지워냈다.
“데시벨 님이 자기 객관화를 또 잘하시네. 아무튼 그렇게 해서 각자 역할군이 있는 게임들을 준비하신 거네요?”
“네네! 각자 잘하는 걸 해야 또 재미있을 것 같아서요.”
그녀의 당찬 대답에 다들 미소 지었다. 그 사이 지놈은 목록을 빠르게 구분, 크게 2개의 분류로 나누었다.
“자! 이쪽은 ‘협동’, 반대쪽은 ‘경쟁’입니다. 전부 한 팀이 되느냐, 아니면 양 팀 혹은 개인전인 건데…”
이경복은 그에 어느 쪽이 나을까 신기를 가늠해보았다. 하지만 그 보다 먼저 지놈이 조심스럽게, 그러나 확신하는 표정으로 손을 움직였다.
“이번 방송과 ‘경쟁’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 과감한 결정에 다들 놀랐다. 하지만 이경복이 놀란 이유는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역시 형이네.’
그의 직감 역시 지놈과 동일한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자, 들어보세요. 합방에서 크루 멤버들끼리 경쟁하는 거? 물론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합방에서 데시벨 님이 원하는 게 뭐였어요? 시청자들에게 인정받는 거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여기서 경쟁 게임을 들고 간다? 이러면 안 됩니다. 왜냐? 시청자들도 파벌이 갈리게 되거든.”
지놈은 엄지를 굽혀 손가락 4개를 펼쳐보였다.
“물론 시청자분들은 우리 넷 다 좋아합니다. 근데 공평하게 좋아하느냐? 그건 또 아니거든. 넷 중에 한 사람 혹은 팀을 응원하게 된단 말이죠. 그럼 또 어떻게 됩니까? 응원이 빠질 수 없잖아요.”
“아무래도 자기가 응원하는 사람에게 더 몰입하게 되고 자기가 응원하는 사람이 잘 하면 더 재미있으니까.”
“그래, 바로 그거지. 이렇게 누군가를 응원하게 되면? 당연히 상대 팀한테는 반감이 생긴단 말이에요. 물론 이게 노는 거니까 가볍죠. 가벼운데 이게 또 ‘크루’라는 느낌이 줄어들 수밖에 없단 말이죠.”
지놈의 설명에 다들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그렇긴 하겠습니다.”
“이번에는 데시벨 님이 크루에 자연스럽게 합류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되니까.”
“아… 맞네요. 하나의 크루라는 느낌을 주는 게 더 좋겠어요. 와, 역시 지놈 님이 분석은 진짜 잘하신다.”
멤버들의 수긍에 지놈은 흡족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튕겼다.
“좋습니다. 그럼 다들 합의한 걸로 알고, 이번 게임은 ‘협동’ 중에 하나를 골라보죠.”
다시 후보군이 압축되었다. 멤버들은 새삼 목록을 살폈고, 이경복은 그중 가장 느낌이 좋은 게임을 짚었다.
“이거, 헬라포머스 어때요?”
헬라포머스(Hellaformers).
4인 협동 SF 슈팅 게임이었다. ‘테라포밍’을 응용해 만든 제목처럼 지옥을 개척하는 특수부대가 되는 게임이었다.
“아, 이거 저도 재미있어 보이더라고요. 뭔가 엄청 캐릭터들이 멋져서.”
“슈팅 게임인데도 근접무기가 다양한 게 마음에 듭니다. 따로 직업군이 나눠져 있기도 하고.”
“오, 이거 확실히 괜찮지. 슈트 디자인도 잘 뽑혔고, 이펙트도 화려하거든. 시청자들 보는 맛이 또 중요하잖냐.”
다들 그에 긍정적으로 의견을 표했다. 이내 네 사람 모두 한마음처럼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사부님 픽으로 갈까요?”
“햐, 이걸 단번에 딱 골라버리네.”
“역시 재미에 미친 스트리머라서가 아닐까요.”
이경복은 멤버들 반응에 웃음을 흘리고는 달력을 불러왔다.
“그럼 이제 일정만 정하면 되겠네요.”
“언제가 좋으려나…”
“저는 언제든 좋습니다.”
“어디 보자, 퍼플 오피스는 내일이 마지막이지? 그럼 그거 끝나고 모레는 어때?”
지놈의 말에 다들 눈빛을 교환했다. 달리 부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 그럼 모레로 결정! 이게 우리 크루가 또 시청자들이 중복되는 분이 많거든. 퍼플오피스 끝나고 헛헛할 때 딱! 우리가 합방으로 채워주는 거지.”
“넵! 그럼 모레로 픽스하겠습니다!”
“오랜만에 새로운 게임이라 이거 벌써 기대가 됩니다.”
“아, 진짜 재미있겠네요.”
합의를 끝낸 멤버들은 이내 자리를 정리했다.
“햐, 근데 퍼플오피스가 벌써 내일이 마지막이야? 내가 엊그제 일하러 간 것 같았는데.”
“아, 진짜요. 시간이 왜 이렇게 빠르지?”
“원래 좋은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 법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무탈하게 끝나서 다행입니다.”
지놈은 슬쩍 이경복을 보며 물었다.
“그래도 마지막 날인데 방송에서 뭐 혹시 따로 준비한 거 없어?”
“일단은 평소대로 소통하면서 소감을 나누려고 했는데. 아, 하나 다른 게 있긴 하다.”
이경복의 말에 세 사람 모두 호기심어린 눈으로 돌아봤다. 뭐가 다르단 말인가?
이에 그는 웃으며 답했다.
“마지막 날이니까 오로라 쪽에 부탁한 게 있거든.”
* * *
비슷한 시각, 서영선의 사무실.
“4개 지점 모두 확인이 끝났습니다.”
비서는 공손하게 보고를 올렸다.
“내일, 4개 지점 모두 팝업스토어 행사장만 밤 12시까지 연장 오픈으로 확정했습니다.”
“그래요, 수고했어요.”
서영선은 미소와 함께 단답했다.
그녀가 지시했고, 지시대로 이루어졌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참, 당돌하단 말이지.’
그녀는 이경복과의 통화를 떠올렸다. 누가 이런 요청을 자신에게 직접 할 수 있겠나.
제 3자가 봤다면 황당하고 무모한 일처럼 보일 수 있었다. 혹 드라마에 심취한 사람들은 서영선이 이경복의 도전정신을 높이 샀을 거라 생각할 지도 몰랐다.
그러나 당사자인 서영선의 기준은 그들과 달랐다.
‘그래도 오로라에 아주 큰 도움이 되겠어.’
그녀에게 중요한 건 실리였다.
무례한 이득이 예의바른 손실보다는 월등히 나았다. 하물며 이경복의 요청은 무례가 아니라 애교로 봐줄 수 있는 수준이 아닌가.
‘우리가 부담할 건 기껏해야 야간 근무 수당뿐.’
서영선은 머릿속 계산기로 이번 결정을 검산했다.
그녀의 지시로 각 지점의 안전요원들은 때 아닌 야간 근로를 하게 됐고, 그 비용은 확실히 챙겨줘야 불만이 없을 터였다.
‘그 대가로 얻는 건 퍼플오피스의 마지막 순간.’
처음만큼이나 특별한 게 바로 마지막이었다. 서영선은 이경복의 요청을 듣자마자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졌다.
모든 불이 꺼진 백화점 안, 오로지 퍼플오피스만이 밝혀져 있을 것이다. 그 앞에는 수많은 팬들이 줄을 서서 그 마지막 순간을 기다릴 것이다.
‘고객들은 그때의 감정을 절대로 잊지 못할 거야.’
기억은 감정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팬들은 그 마지막을 제 머릿속에 아로새길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의 장소, ‘오로라 백화점’역시 같이 기억된다.
‘그것으로 퍼플과 오로라의 이미지가 동기화된다.’
퍼플오피스는 사라져도 추억은 남는다. 그 감정의 잔향은 팬들이 백화점을 방문할 때마다 떠오를 터였다.
서영선이 이번 팝업스토어 이벤트에서 그렸던 그림이었다. 그 마지막 조각을 이경복이 제시해준 것이다.
‘…말 그대로 완벽해.’
그녀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이경복이 많은 이들에게 사랑 받는 이유, 그리고 그것이 지속될 거라는 확신.
서영선은 이경복이 한낱 유행이 아님을 실감했다.
‘팬들, 고객을 향한 마음인가.’
마케팅에서 흔히 사용되는 문구다. 그것은 실상 허울 좋은 말에 불과했다.
그러나 달리 말하면 그만큼 좋은 마케팅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앞으로도 가까이 해야겠어.’
이경복은 아무렇지 않게 그것을 실현하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