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만의 오디션 (3)
유종원 PD의 그런 태도는 어쩌면 당연했다.
해별이, 백승결한테 연기를 제안한다? 그건 퍽 이상한 일이니까.
누가 내 연기에 기대를 하겠나.
연기논란에 파묻혀 사라져버린 게 마지막 모습일 텐데.
게다가 연기는 완전히 끊고 택배 일만 했다고 인터뷰에서 다 말했는데.
결국, 연기력은 기대 않고 화제성만 가져가겠다는 거다.
그건 좀 입맛이 쓰네···.
“자, 여기.”
서은영 작가가 자신의 앞에 있던 종이 뭉치 하나를 건넸다.
새하얀 종이 위에 적힌 ‘종갓집 막내딸’이란 제목.
어느새 유종원 PD의 기대 않는 반응은 머릿속에서 뒷전이 되어버리고, 표지를 만지작거렸다.
마치 잘 포장된 선물을 받아들고, 그 안에 뭐가 들었을지 상상할 때처럼.
이 순간을 어린아이처럼 즐기고 싶지만, 아쉽게도 상대는 그럴 틈을 주지 않는다.
“간단하게 시나리오를 얘기하자면, 가족극이에요. 주인공인 안씨 집안의 막내딸, 안보라가 패션 디자이너로서도 성공하고, 사랑도 이루는. 그리고 우리가 백승결 씨를 염두 중인 배역은 안주연. 안보라의 첫째 오빱니다. 극 초반엔 완전 한량같은 이미지인데······ 사실 가족들 몰래 오디션을 보러 다니는 약간의 반전이 있는 인물이죠.”
끄덕이며 대본을 펼쳤다.
포장지가 뜯어지고, 그 안에 활자인 척 숨어있는 인간군상을 마주한다.
“······.”
사락, 사락.
손이 바빠진다. 눈은 더더욱.
꽤 긴 시간을 그러다가 아차 싶어 고갤 들었다.
조용해진 두 사람이 보인다.
어쩐지 흡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서은영 작가.
그리고 유종원 PD.
그는 살짝 황당한 표정으로 날 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흠흠, 목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자, 여기서 그걸 다 읽을 순 없겠죠?”
“하하, 그렇죠.”
사실 가능한데. 당신들만 기다려준다면 말이지.
시간을 좀 더 주면 아예 외울 수도 있고.
“아무튼, 이제 승결 씨 연기를 한번 보고 싶은데. 거기 대본에 색지로 마킹되어 있는 페이지. 맞아요. 거기 형광펜으로 체크된 부분부터 한번 읽어볼래요? 부담가질 필요는 없고, 편안하게.”
저 말에 얼마나 많은 신인 배우들이 불편해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그가 짚어준 부분을 내려다보았다.
어디 보자. ‘안주연’이란 극 중 이름이 보인다. 그다음엔 콜론(:).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그의 대사.
첫줄을 읽는 순간,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새어 나올뻔했다.
[나, 연기가 너무 하고 싶었어.]
#
사실 유종원 PD에게 ‘안주연’역은 누가 맡느냐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캐릭터였다.
주인공 가족의 일원이지만 분량이 많지 않으니 중요도가 확실히 떨어지지.
자신의 작품을 애지중지하는 서은영 작가의 입장은 다르겠지만, 그에게 이번 드라마는 통과의례 같은 것이기에 더욱 그랬다.
물론 그렇다고 대충해도 된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더 중요했다. 지금 자신의 처지가 시험대 위에 올려진 생쥐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
어느 정도 시청률이 보장되는 일일연속극에서 삐끗하면, 그건 타격이 클 수밖에 없으니까.
최악의 결과를 떠올린 유종원 PD가 부정 탈세라 얼른 고갤 흔들었다.
그리고 앞에서 주구장창 대본을 넘기고 있는 백승결을 보았다.
이 자리에서 대본을 다 읽어버릴 기세다.
그 모습을 보며 서은영 작가는 만족스러운 눈치였다. 그녀가 그린 안주연의 모습이 딱 저런 느낌이었기에.
삶에 열심이란 게 없는 것 같은 한량이지만, 연기에 관련된 건 만큼은 세상 진지한 캐릭터, 그게 ‘안주연’이니까.
물론 저 모습이 연기에서도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자, 여기서 그걸 다 읽을 순 없겠죠?”
퍼뜩 정신을 차린 백승결에게 리딩할 부분을 짚어주었다.
그의 눈이 다시 대본으로 향하고, 잠시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고개가 수면에 떠오르듯 천천히 올라오며.
“나, 연기가 너무 하고 싶었어.”
그것은 지문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분명 ‘울먹이며’라고 적혀 있는데, 시작이 너무나 덤덤하다.
하지만 그게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짙은 감정이 전해진다. 사실 그게 진짜 어려운 건데······.
“하, 뜬금없지? 갑자기 연기라니. 근데 엄마. ······10년이다? 10년 동안 이 꿈을 못 버렸어. 포기가 안 돼. 그래서 나는···나는···.”
그제야 백승결의 목소리가 떨려온다. 억누르던 감정이 비로소 얼굴을 내민 거다.
그 감정의 민낯을 오롯이 바라보며, 유종원 PD 또한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는 지금 놀라고 있다. 그것도 아주 크게.
몰래 연기 학원이라도 다닌 건가? 아니, 저렇게 연기할 수 있으면서 왜 진즉에 연기를······.
순간, 서러운 표정을 그려내는 백승결의 얼굴 위로, 한때 연기 천재라며 매스컴의 찬사를 받았던 해별이가 겹쳐 보인다.
자신도 극장에서 울었고, 전율했던 천만 명 중 하나였음을 기억하며 돋아나는 소름에 몸을 떨었다.
그때 고갤 기울여 속삭이는 서은영 작가.
“괜찮죠?”
괜찮냐고? 저게?
저건······.
그런 정도가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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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각, ‘종갓집 막내딸’ 제작진의 관심도 블라인드로 가려진 미팅룸에 쏠려 있었다.
“진짜 오랜만이긴 하네. 해별이라니. 언제 저렇게 컸대. 새삼 내가 늙긴 늙었단 생각이 드네.”
“그러니까요. 그땐 완전 어린애였는데.”
“뭐야, 너랑 나이 비슷하지 않나?”
“그러니까요. 저도 그랬다고요.”
민망하게 웃는 팀원을 보고 피식거린 조연출이 들고 있던 펜으로 머릴 긁적이며 추억에 잠긴 눈을 했다.
“아직도 기억난다. 천광윤 배우가 그 집 부수러 갔을 때. 거기서 할머니 지키려고 악에 받쳐서 소리 지르던 거. 슬프다가 소름 돋다가. 진짜 저게 연기 처음 하는 아역의 표정이 맞나 싶었는데.”
크으, 하고 감탄까지 하던 그가 끄덕이는 팀원들 사이에서 멀뚱멀뚱 눈을 굴리는 막내 FD를 발견했다.
“넌 모르겠구나.”
“예, 제가 그때 초등학생이었어서요.”
“언제 한번 봐봐. 플롯은 지금 보면 조금 뻔할 수 있는데, 연기들이 뻔하지가 않아.”
이에 다른 팀원들도 한마디씩 덧붙였다.
“그중에서도 해별이랑 천광윤 배우가 부딪히는 씬들이 진짜 최고였죠.”
“그때도 천광윤 배우는 탑급 연기자였는데, 웬 아역이 나와서 에너지로 비등비등하니까 다들 경악을 했었죠.”
선배들의 후기를 듣고, 막내는 더욱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근데, 그런 아역이 왜······.”
“왜 망했냐고?”
“네.”
“다음 작품부터 줄줄이 망했거든. 연기도 딴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이상해지고. 아마 부담감 때문이었지 않았을까 싶긴 한데.”
“어렸으니까 그럴 수 있겠네요.”
“그렇게 생각하니 좀 불쌍한데요.”
“근데 좀 심하긴 했어.”
그 뒤로 서너 작품. 최고의 배우들 사이에서도 빛이 나던 소년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첫 작품의 영광이 없었더라면 아마 그렇게까지 기회가 주어지지도 못했을 정도로.
게다가 참여한 영화가 줄줄이 망하면서 무슨 불운의 아이콘이 되어버렸다.
그러니 정글 같은 이 업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리가.
“그러면 PD님은 그런 분을 왜 고민하고 계신 걸까요?”
이어지는 막내의 질문에 조연출이 자신의 추측을 풀어놓았다.
“화제성이 있으니까. 일일연속극은 상대적으로 화제성이 떨어지잖아. 물론 적당히만 하면 제일 안전하지만, 그래도 만드는 우리 입장에선 화제가 되고 싶단 말이지. 그래서 미역 싸대기 같은 희대의 장면이 나오기도 하는 거고.”
“아, 그거······.”
제작진인 그들에게도 그 장면은 충격적이었는지, 몇몇은 몸을 떨었다.
이에 조연출이 헛헛하게 웃으며 말을 잇는다.
“그러니 이번 오디션은 저···누구야. 해별이.”
“백승결 씨요.”
“그래, 백승결. 그 친구한테도 지금이 딱 좋은 기회야. 적당히만 하면 안주연 역으로 낙점될 테니까. 물론 그 적당히 조차 안 되면 뭐······.”
‘다시 연기하면 안 되지.’ 라고 덧붙이는 순간. 미팅룸 문이 열렸다.
안에서 먼저 나오는 건 유종원 PD.
그의 얼굴을 확인한 팀원이 갸우뚱했다.
“PD님 표정이 왜 저러시죠?”
“그러게. 연기가 그렇게 별로였나?”
하지만 그렇다기엔······.
“내부 회의 해보고 연락 드릴게요.”
“네, 알겠습니다.”
뒤이어 백승결과 함께 나온 서은영 작가의 입꼬리가 광대랑 하이파이브를 한다.
연기가 별로였다면 캐스팅 때문에 한동안 예민 보스였던 그녀가 저럴 리가 없었다.
생소한 그림에 유종원 PD를 잘 알고 있는 조연출조차도 고개를 기울였다.
벙찐 표정하며, 어색하게 웃는 것까지. 넋을 놓고 있는 것 같달까.
“분위기 진짜 이상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