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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배우 복귀했습니다-7화 (7/167)

이 길 끝에 있다 (1)

백승결과의 미팅이 끝나고, ‘종갓집 막내딸’ 제작진이 한자리에 모였다.

“어땠어요, 백승결씨 연기?”

처음 백승결에게 연락했던 보조 작가가 서은영 작가에게 생수병을 따주며 묻는다.

그러자 서은영 작가가 입으로 가져가던 병을 내려놓았다. 얼른 말하고 싶어 물 마시는 시간도 아깝다는 듯이.

“잘해, 잘해. 뮤튜브에서 봤던 그 어딘가 애절한 느낌을 원했던 건데, 그걸 뛰어넘는 연기를 보여주더라. 그것도 아직 대본 분석도 안 된 상태에서! 자기한테 맞는 옷인 거지. 내가 꽂힌 이유가 있다니까?”

“다행이다···.”

“응? 뭐야, 왜 네가 다행이야?”

“그냥 뭔가 응원해주고 싶은 느낌이라서요. 그분.”

그녀의 말에 서은영 작가가 손가락을 튕겼다.

“너도 느꼈구나? 내가 그것 때문에 뽑은 거야. 시청자들도 응원하게 되는 캐릭터!”

생각보다 더 극적인 반응에 팀원들의 흥미가 점점 커졌다. 그럴수록 의문도 늘어난다.

그렇다면 PD님은 왜 저러고 있는가?

모두의 의문을 조연출이 대변했다.

“PD님은 어떠셨어요?”

자연스레 이목이 집중되었다.

입술을 매만지다가 고개를 든 유종원 PD.

미팅 직후부터 묘한 얼굴이었던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나? 나야 뭐.”

느릿하게 서문을 연 그가, 표정과는 전혀 다른 말들을 내뱉는다.

“기대 이상이었어. 기대를 별로 안 하긴 했는데. 아마, 기대를 잔뜩 했다 하더라도 똑같이 놀랐을 정도로.”

“그럼 좋은 거 아녜요? 왜 그렇게 심각하세요?”

“하하, 내가 좀 그래 보였나. 지금 머릿속이 좀 복잡해서.”

“···?”

점점 더 미궁으로 빠져드는 듯한 팀원들을 향해 유종원 PD가 덧붙였다.

“처음엔 놀라서 그랬는데. 지금은······.”

사뭇 그의 표정이 의미심장해진다.

“어떻게 해야 시청자들도 나만큼 놀랄지. 그거 생각하느라.”

#

—어땠어?

“연락 주시겠대.”

—그거야 당연히 하는 말이고. 너 어땠냐고. 잘한 거 같아? 지금 다들 궁금해하고 난리다.

“다들?”

말꼬릴 올리자, 핸드폰 건너의 현태 형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 직원들. 아주 일들에 집중을 못 해. PD님, 미팅 언제 끝날까요? 끝났을까요? 붙었으면 좋겠다. 붙긴 뭘 붙어. 무슨 시험이냐고.

기분 좋게 투덜거리는 그의 말에 덩달아 입꼬릴 올린다.

—다들 널 좋게 봤나 봐.

“감사하네.”

—전해줄게. 그러니 이제 말 좀 해봐. 어땠어.

어땠냐고?

덜덜거리는 버스 뒷좌석에 앉아 방송국에서 있었던 일들을 천천히 곱씹어본다.

여의도에 비해서 확실히 크고 깔끔했고, 직원들의 시선은 조금 부담스러웠었고, 유종원 PD는 유쾌하면서도 심드렁한 사람이었고, 서은영 작가는 날 좋게 봤는지 시종일관 흐뭇한 표정이었지. 그다음엔 대본을 받았고······.

떠오르는 것들을 현태 형에게 풀어놓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대본을 읽고, 그에 대한 두 사람의 반응을 지나, 작품에 대한 내 생각들로 이어졌다.

그렇게 한참을 떠들다가, 건너편에서 흘러들어오는 현태 형의 낮은 웃음소리에 말을 멈췄다.

“왜?”

—네가 이렇게까지 뭔가에 들떠 있는 거, 처음 보는 것 같아서.

그런가?

···하긴. 나조차도 이렇게 누군가에게 열정적으로 떠들어댄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심지어 아직도 부족한 것 같단 말이지.

—그나저나, 느낌 좋은데?

“응, 좋더라. 캐릭터들도 마냥 가볍지 않고, 특히 상황 묘사가 눈앞에 그려지게······.”

—야야, 드라마 말고. 너 말이야 너. 캐스팅될 것 같다고. 아직도 대본에 빠져있네, 얘.

아? 대본 얘기가 아니었구나?

“캐스팅···. 되면 좋고.”

—안 돼도 괜찮은 것처럼 얘기한다?

무심코 던진 말에 정곡을 찌르는 현태 형.

심장이 크게 덜컹거렸다. 물건을 가득 실은 육중한 트럭이 커다란 방지턱을 거칠 게 넘어간 것처럼.

나도 모르게 딱딱한 말투가 튀어 나간다.

“아니, 전혀 안 괜찮을 것 같은데.”

—푸핫. 세상 욕심 없는 것처럼 말하더니?

“욕심이 없긴. 이렇게 넘쳐 흐르는데.”

—그 정돈 아니고. 이제야 좀 정상인 범주에 들어온 거 같네. 평소엔 진짜 이렇게 욕심 없는 애가 있나 싶을 정도였는데 말이지. 순진해가지고. 누가 사기 치면 어쩌나 항상 걱정한다 내가.

“나 안 순진해. 형, 나한테 속은 거야.”

—속기는. 네가 누굴 속여.

어림도 없다는 듯 단언하는 현태 형의 반응에 입맛을 다셨다.

그것부터 속았다고, 이 양반아.

‘선택? 어린 애가 무슨 선택? 그리고 아역이 기복 좀 있을 수도 있지.’

아역 때 얘기가 나올 때면 매번 자기 일인 양 속상해하던 형이기에 괜스레 미안해진다. 아마 진상을 알면 적잖이 놀랄 것 같지.

그런 날이 올진 모르겠지만.

이제 와 ‘나 사실 연기 못하는 척했었어.’라고 말하는 것도 웃기잖아.

현태 형과 전화를 끊고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통화의 뒷맛이 달달한 건, 아마도 그와 직원들이 보내온 응원 때문이리라.

그래서 지금 더욱 만감에 휩싸이나 보다.

쏟아지던 비난의 화살이 여전히 익숙한 내가, 이런 것들로 즐거워하고 있음에.

마음 놓고 웃어도 되는 걸까.

저 응원들이······.

‘백승결! 너 대체 왜 그래! 제대로 하라고! 내가 너 믿고 사업도 크게 벌였는데, 네가 이따위로 하면 그 빚 다 어떻게 갚으라고!’

또 그렇게, 원망과 비난으로 바뀌진 않을까.

······빠르게 스치던 차창 밖 풍경처럼 시간이 흐른다.

그 사이로 내심 기다리던 연락 하나가 파고들었다.

‘종갓집 막내딸’에 나의 합류가 결정되었다는 소식이었다.

#

성인이 된 직후부터 지금까지, 3년 가까이 다녔던 택배 회사를 그만뒀다.

향후 계획은 비밀로 했다. 캐스팅 소식은 어디에도 말하지 말아 달라는 제작진의 신신당부가 있어서.

그리고 며칠 뒤, KNS 방송국으로 한 번 더 방문했다.

지난번보단 조금 더 길었던 미팅이 끝나고, 비로소 나는 3회분의 대본을 손에 쥐었다.

어렸을 적, 새 학년 새 학기 교과서를 받아들 때도 이렇게 흥분하진 않았던 거 같은데.

“집에 가서 찬찬히 읽어보세요. 궁금한 게 있으면 보조 작가 통해서 연락 주고요.”

유종원 PD는 여전히 유쾌하고, 친절했다.

하지만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는 확연히 달라진 분위기를 느낀다.

그가 날 보는 눈에 기대가 걸려있달까.

그나저나 궁금한 게 하나 있었는데······. 아, 맞다.

“대본 리딩은 언제쯤인가요?”

내 물음에 유종원 PD는 대답 대신 서은영 작가를 돌아보았다. 그녀 또한 마찬가지로 홱 유종원 PD를 본다. 뭐지?

이윽고, 다시 날 본 유종원 PD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아, 그건···. 아마 5월 중순쯤일 거 같은데. 디테일하게 일정 나오면 연락을 줄게요.”

“알겠습니다.”

뭔가 있는 것 같긴 했지만, 지금 말해줄 생각은 아닌 것 같아 그러려니 넘어갔다.

두 사람뿐만 아니라 제작진에게도 잘 부탁드린다고 인사를 돌리고서 빠른 걸음으로 방송국을 빠져나왔다.

조금 급한 감이 있었다. 얼른 손에 들린 이걸 펼쳐 읽고 싶어서.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곧장 침대에 걸터앉았다.

책상 식탁 대용인 소파 테이블을 끌어다가 대본을 올려놓고 첫 장을 펼친다.

사락—.

첫 미팅 때 읽었던 부분이었다. 내 역할인 안주연은 등장하지도 않는.

하지만 건너뛰지 않고 한 글자, 한 글자. 소리내어 읽기 시작했다.

처음 ‘해별이네’의 대본을 받아 집에 돌아왔을 때.

그때 그랬던 것처럼.

“어머. 방에서 무슨 혼잣말을 그렇게 하나 했더니, 우리 승결이 대본 읽고 있었어?”

문을 열고 들어온 엄마를 보며 어린 내가 끄덕였다.

“엄마 설거지 끝나면 같이 읽자니까.”

“그치만, 기다리기가 힘들어서···.”

내 말에 엄마가 활짝 웃었다. 그리고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내 머릴 쓰다듬는다.

“대본 읽는 게 재밌어?”

“엄청!”

“무슨 내용인지 이해하면서 읽은 거야?”

“응!”

자신 있게 답하자 ‘평소에 책도 잘 안 읽었는데 이걸?’이라며 갸우뚱하는 엄마.

“아무튼, 다행이다. 어디 엄마랑도 한번 볼까? 이거 외워야 하는 것도 알지?”

“응. 감독님이 외우라고 하셨어. 다음에 만났을 때 시험 본다구.”

“그러니까. 엄마랑 같이 노력해서 시험 백 점 맞자? 승결이가 외워야 할 부분을 형광펜으로 밑줄 쳐줄게.

“어, 근데 엄마.”

“응?”

“다 외웠는데?”

그러자 눈을 끔뻑이며 날 바라보던 엄마가 이내 작게 웃으며 대본을 내 쪽으로 돌렸다.

“알겠어. 승결이가 외운 부분 한번 말해볼래? 엄마가 한번 봐줄게.”

잠시 대본을 내려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드는 대신, 시선을 올려 엄마와 눈을 맞췄다.

“해별이가 개나리 가득한 길을 지나 집으로 향한다. 허름한 대문이 반쯤 열려있다. 문을 밀고 들어가자 낯선 목소리가 들려온다.”

“······?”

“할매, 여기 땅을 우리 아버지가 댁한테 준 게 아니라니까. 옆에 증조부 산소. 저거 관리하는 대신 여기서 먹고 자면서 밭 갈고 농사하라고 빌려준 거잖아. 근데 아버진 돌아가셨지. 나는 돈이 필요하지. 그러니 할매가 집을 나가야겠어요, 안 나가야겠어요?”

“무슨······.”

입을 벌린 엄마가 대본을 도로 가져갔다. 그리고 페이지를 넘겨 첫 장으로 돌아간다.

그러는 사이 나는 첫 장의 내용을 넘어갔다.

계속 읊었다. 다음 장도, 그리고 다음 장도.

좌우로 움직이던 엄마의 눈동자가 어느새 나를 향한다.

“승, 승결아.”

“응?”

“너 어디부터··· 아니, 어디까지 외운 거니?”

“어디까지라니?”

난 그제야 뭔가 이상하단 것을 느꼈던 것 같다.

“방금 다 외웠다고 했는데···.”

······불쑥 끼어든 기억을 밀어냈다.

그 속에 그리운 얼굴이 보여 반가웠지만, 한편으론 그녀에 대한 죄책감이 뒤따라서.

가족을 망가트렸던 연기를, 내가 다시 하고 있다는 게 미안해서.

후우.

마음을 다잡고, 다시 대본을 읽어내려갔다.

모든 내용을 머릿속에 차곡차곡 집어넣으며, 페이지를 넘겼다.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더는 넘길 페이지가 없어졌다.

끝났다. 받아온 대본이 전부.

아쉬움에 괜히 몇 장 앞으로 돌아가 다시 끝까지 읽었다. 서너 번 정도···.

그리고 표지를 덮고서 침대에 누웠다.

그 상태로 가만히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시야가 꺼지자, 대본 속에 갇혀있던 사람들이 내 머릿속에서 날뛰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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