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길 끝에 있다 (2)
“좋은 오후—.”
“오셨어요?”
세트장 점검을 다녀온 조연출이 손을 흔들다가 평소와는 달리 어수선한 분위기에 의문을 표했다.
“뭐야, 무슨 일 있었어?”
“좀 전에 CP(책임 프로듀서)님 왔다 가셨어요.”
속삭이는 팀원에 조연출이 덩달아 목소릴 낮추고 묻는다.
“왜. 왜 오셨는데?”
“왜겠어요. 유 PD님한테 부담을 팍팍.”
팀원이 후춧가루 뿌리듯 손 모양을 만들어 흔들어댄다.
“PD님은?”
“저기 오시네요.”
때마침 믹스 커피 하나 들고서 사무실로 들어오는 유종원 PD.
조연출이 얼른 다가간다.
그의 급한 발걸음을 보고 유종원 PD가 헛웃음을 지었다.
“괜찮으세요?”
“안 괜찮을 거 뭐 있나.”
“CP님이 엄청 부담 주셨다면서요.”
“불안해하셨지. SBC에선 미역으로 때리고, NBS에선 옆집 아들이 내 아들이고 이러는데 우린 뭐 없냐고.”
“아니, 막장을 원하셨으면 서은영 작가를 쓰면 안 됐죠. 언제는 가슴 따뜻한 가족 드라마로 차별을 주는 거 좋다고 하셨으면서.”
“그랬는데 막상 양옆 집에서 난리부르스를 추니 내심 걱정되시나 봐.”
“그래서요. 뭐라고 하셨어요?”
호록. 종이컵을 입가에 가져간 유종원 PD가 말했다.
“우린 그런 거 없이 진검승부할 거라고.”
“더 불안해하셨겠네요.”
“그래서 살짝 귀띔해드렸지. 뜻밖에 굴러들어온 칼이 보기엔 낡아서 닭이나 잡을 수 있나 싶었는데, 막상 칼집에서 뽑아보니 소도 잡겠다고.”
두루뭉술한 비유에 눈을 좁힌 조연출이 되묻는다.
“백승결이요?”
유종원 PD가 주억인다.
이에 조연출은 콧잔등을 긁적이며 생각했다.
이해는 간다고.
처음 미팅 땐 PD님과 서은영 작가의 반응이 과하지 않나 싶었는데, 최근 미팅에 함께 들어가 직접 보니······.
‘입이 떡 벌어졌지.’
아역 때의 심각했던 발연기가 무색할 정도로 연기가 안정적이었다.
솔직히 신인 배우가 맡을 법한 역할에 소모되기엔 아까울 정도란 생각까지도 했다.
게다가 백승결에겐 신인배우가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바로, 화제성.
일일연속극을 시청하는 연령대에는 더더욱 강력한 무기였다.
그들은 해별이를 보며 울었던 세대니까.
그러니 이미 출연 확정 기사까지 난 다른 주연들 보다, 백승결에게 소잡는 칼이니 뭐니 기대를 거는 것도 이해는 가는데······.
“안주연 역으로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지 않아요?”
“그렇지. 안 그래도 이따 회의 때 말해주려고 했는데, 서 작가가 그 문제로 어제 전화했었어. 최대한 대본 안 건드리고 안주연 분량을 늘려보겠다고.”
“허, 그게 무슨 돈은 쓰는데 통장은 안 줄어든다는 소립니까.”
조연출이 탄식을 흘렸다. 그게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 알기에.
특히나 항상 시간이 빠듯한 일일연속극에선 거의 일어나지 않는 일이지.
“배우 한 명 투입됐을 뿐인데······ 은근 다들 열정적이 되는 거 같네요.”
“그러게.”
남 얘기하듯 툭 답하는 유종원 PD을 보며 조연출이 덧붙였다.
“PD님도요.”
“나? 에이, 내 모토 알잖아. 잘하려고 오바하다가 삐끗하지 말고 중간만 가자.”
“압니다. 근데 요즘은 아니신 것 같아서 그러죠.”
유종원 PD가 눈을 끔뻑이다가 이내 흐흐 웃으며 실토한다.
“맞아. 사실 욕심이 좀 생기네.”
#
유종원 PD, 서은영 작가.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제작진의 욕심이 조금씩 덩치를 불리며 커져가는 사이.
그동안 그려왔던 청사진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대본 리딩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이른 아침부터 KNS 드라마국 회의실이 분주해진다.
제작진들 사이에 적당한 긴장감이 흘렀다.
누군가는 과자를 종류별로 뜯어 테이블 위에 쫙 깔고, 다른 누군가는 길게 붙여놓은 회의 테이블이 한 화면에 들어오도록 카메라를 세팅하며 대본 리딩을 준비한다.
“······.”
유종원 PD가 가장 상석에 앉았다. 그의 시선이 세팅 중인 카메라로 향한다.
옆엔 그의 파트너, 서은영 작가가 지난달에 비해 5년은 늙은 얼굴로 앉는다.
이윽고 시간 맞춰 하나둘 도착하기 시작하는 배우들.
자신의 자리보다 PD와 작가가 있는 곳으로 먼저 달려온 그들을 두 사람이 반갑게 맞이했다.
“어머, 제일 먼저 왔네?”
“하하, 원래 가장 멀리 사는 사람이 일찍 오는 법이잖아요.”
“그건 진짜 누가 법으로 정해놨나 봐. 아 참, 이사는 잘했어? 구리 쪽에 전원주택이랬지?”
“네. 그래서 저 이제 열심히 일해야 해요. 은행이랑 너무 친해졌어요.”
“너도 걔랑 친하냐? 나도 한 10년째 걔랑 손절을 못했다. 이쯤이면 가족인가 싶기도 하고.”
“우리 가족 같은 PD님, 작가님. 저도 왔습니다.”
“어, 왔어?”
남자주인공 역을 맡은 이강현 배우가 친근하게 웃으며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
뒤이어 도착한 원로 배우가 유종원 PD 가장 가까이에. 그다음엔 부모 역할을 맡은 중년 배우들이.
그다음 빈자리의 주인이자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기도 한 최지연이 회의실로 들어와 사교성 좋게 여기저기 인사한다.
“PD님, 저 오늘 어때요?”
극 중 할머니와 부모 역할을 맡은 배우들에게 먼저 인사를 하고서 빙그르르 돌며 다가오는 최지연.
“···?”
유종원 PD가 미간을 찌푸린 채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서은영 작가가 웃으며 말했다.
“안보라 역할에 맞게 입고 왔구나?”
“역시 작가님!”
“그랬냐.”
“네, 그랬네요.”
눈을 흘기는 최지연에 유종원 PD가 머릴 긁적였다.
서은영 작가는 앞에 놓인 과자를 까먹으며 그런 그를 놀린다.
“연출자가 그걸 못 알아보면 어떡해요. 믿고 내 글 연출을 맡길 수가 있겠나.”
“그렇게 세 번째 같이 하고 있으면서 뭘.”
“그러니까요. 내가 어쩌다···.”
“네 번째도 나랑 할 거지?”
“으악. 소름 돋았어. 팔뚝 봐봐.”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보며 숨이 넘어가라 웃던 최지연이 불현듯 뭔가 떠올랐는지 손뼉을 치며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아니 그래서, 우리 오빠 누구예요? 오셨나?”
그녀가 여기서 친오빠를 찾을 린 만무했다.
다름 아닌 극 중 오빠 역할인 배우가 누군지 찾는 것.
그 질문이 흥미로웠는지, 각자 이야기 중이던 배우들의 시선이 몰려든다.
“맞아요, 저도 안주연 역할 누군지 궁금했는데.”
“나도 그거 몇 번 물어봤는데, 아무도 대답을 안 해주더라고.”
“아직 안 놨나? 빈자리가······어, 저기네. 안주연.”
중년 배우가 종이로 만들어진 명패를 가리킨다.
유종원 PD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서은영 작가도 마찬가지.
둘의 반응에 배우들이 눈을 좁히며 구시렁거렸다.
“엄청 숨기시네. 뭐 이민호라도 오나.”
“오겠냐.”
“그럼 대체 누구지?”
유종원 PD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그리고 대본 리딩 현장을 찍고 있을 카메라를 의식하며 무거웠던 입을 뗐다.
“자, 이제 종갓집 막내딸, 대본 리딩. 시작하겠습니다.”
그러자 몇몇 시선들이 안주연이라 적힌 자리로 향한다. 저 자리가 비어있는 상태로 대본 리딩이 시작되었으니 의아할 수밖에.
“아, 그리고 지금 보시면 빈자리가 하나 있는데요.”
오늘 대본 리딩이 끝나자마자 현장 사진이 기사로 나갈 거다. 영상도 내일이나 모레 중으로 공개되겠지.
그러나 이제 5월이다. 방영일까진 아직 꼬박 2달이 남은 상태.
벌써부터 관심을 받으려 패를 까보이는 건 별로 좋지 못한 선택이라고 유종원 PD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검을 검집에 꼭꼭 숨기기로 결정했다.
“오늘은 안 옵니다. 안 불렀어요.”
#
<일일연속극, ‘종갓집 막내딸’ 대본 리딩 현장···빈자리에 앉을 배우는 누구?>
KNS 새 드라마 ‘종갓집 막내딸’가 화기애애한 대본리딩 현장을 4일 공개했다.
유종원 PD, 서은영 작가가 세 번째로 의기투합한 ‘종갓집 막내딸’은 말 그대로 종갓집 막내딸인 안보라의 따뜻한 가족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로, 주인공 안보라 역엔 최근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최지연 배우가 캐스팅되어 기대를 불러일으킨다.
한편, 이날 대본리딩 현장엔 극 중 ‘안보라’의 오빠인 ‘안주연’역을 맡은 배우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의문을 자아냈는데.
유종원 PD가 일부러 해당 배우를 부르지 않았다는 이야길 전해, 그가 숨기고 있는 배우가 누구인지 관심이 커지고 있다.
—엥, 관심이 커져? 그걸 누가 궁금해한다고···.
—기자 본인도 안 궁금하면서 궁금한 척하네.
—일일연속극에 어떤 배우가 나올지 관심 가지는 사람이 어딨음. 요즘은 그냥 어떤 막장 내용이 나올까, 그걸 궁금해하지.
—그러게요. 잘 짜인 각본, 강렬한 연기, 멋진 배우 보려면 영화나 넷플리스 보죠.
—그래도 각본 서은영 작가에 최지연 주인공이면 괜찮지 않았나? 나머지 배우들도 빠방하고.
—근데 주인공도 아니고 주인공 오빠역을 숨기는 건 또 뭐야. 최지연보다 인지도 높은 배우가 나오려나?
—최지연이 탑급 배우는 절대 아니지만 그래도 일일드라마에선 탑티어가 맞을 텐데, 그것보다 인지도가 높은 배우가 나오긴 힘들 듯. 끽해야 이름 없는 아이돌이겠지 뭐.
“······.”
일어나자마자 핸드폰부터 들여다봤다.
어제 보조 작가가 보안 유지에 각별히 조심해달라는 말과 함께 보내준 기사.
하룻밤 사이 댓글이 꽤 달리긴 했다. 물론 좋은 반응이라기엔 무리가 있어 보이지만.
이러다 나인 거 알면 뭐라고 하려나······.
“뭘 뭐라고 해. 황당해하겠지.”
뻔하다.
내가 다시 연기를 시작한 이상, 과거의 발연기 꼬리표가 다시 들러붙을 거란 건 너무 당연하잖아.
그게 내심 겁날 때도 있지만, 그래도 연기를 하게 된다는 만족감이 훨씬 큰 걸 어떡해.
솔직히 꼬리표를 떼어낼 자신도 있고.
“해보자. 제대로.”
나름의 마인드 컨트롤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귀찮아지기 전에 얼른 따뜻한 침대에서 튀어나와 얇은 겉옷을 챙겨 밖으로 나선다.
빌라를 나서자마자 가볍게 지면을 박찼다.
매일 아침마다 그랬던 것처럼, 근처 공원 쪽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점차 호흡이 가빠진다.
댓글을 보며 차올랐던 잡생각들이 가라앉고.
그 공간을 오로지 안주연에 대한 고민들로 가득 채운다.
안주연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
안주연이라면.
안주연은···.
#
한편 대본 리딩을 마친 직후, 본격적으로 드라마 촬영이 시작되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여전히 집과 공원만 오가며 홀로 연습했다.
그리고 며칠이 더 지나.
—승결 씨 첫 촬영 날짜 잡혔어요.
가득 채웠던 고민들을 쏟아낼 차례가 다가왔다.
“후우, 가자.”
설레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첫 촬영은 방송국 안에 마련된 세트장. 정확히는 극 중 안주연의 자취방.
방송국에 도착해 보조 작가한테 연락하자, 주연 배우가 지금 촬영 중이라며 나를 곧장 대기실로 데려왔다.
준비된 옷을 입고 텅 빈 대기실에 앉아 대본을 펼쳤다.
내용이야 전부 머릿속에 있었지만, 내가 따로 적어놓은 것들이 많아서.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안녕하세요. 이 방에 물이 없을 것 같아서요.”
양손에 생수병을 든 앳된 얼굴의 남자가 고개를 빼꼼하더니 쭈뼛거리며 들어온다.
마지막 미팅 때 소개받았던 얼굴이었다. 팀의 막내 FD라고 했었지 아마.
테이블에 생수병을 올려놓은 그가 머뭇거리더니 툭 던지듯 말했다.
“저 그거 봤어요. 해별이네.”
“네?”
“선배님들도 보면 좋을 거라고 하셔서 봤는데. 와, 저 엄청 울었잖아요. 어쩜 그렇게 연기를 잘하는지. 아니, 잘하셨는지라고 해야지. 암튼, 저 완전 팬 됐어요.”
“그것만 보시는 걸 추천할게요. 그 이후에 찍은 영화들은··· 아무튼, 몇 없을 팬을 잃기는 싫어서.”
내 대답에 웃음을 터트리는 FD였다. 진심인데 가볍게 들었나 보네. 이렇게 팬을 또 하나 잃는구나···!
촬영 준비가 끝나면 오겠다고 말하며 나간 그가 다시 돌아온 건 1시간이 더 지나서였다.
“오래 기다리셨죠? 촬영이 조금 딜레이 돼서. 이제, 세트장으로 가실게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장 대기실을 나와 복도를 걷는데, FD의 다급한 목소리가 나를 불러세웠다.
“배, 배우님!”
“네?”
“이거요. 대본 두고 가셨어요.”
아···.
그가 건네는 대본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더는 필요 없었다.
이제 곧 안주연이 되어 카메라 앞에 서게 될 텐데, 안주연이 안주연 설명서(?) 같은 걸 들고 있는 것 자체가 모순 같아서.
근데 이렇게 가져다주는데 필요 없다고 말하기도 뭐하잖아.
다 외웠다고 으스대며 튀고 싶은 건 더더욱 아니고.
“감사합니다.”
“넵, 응원할게요!”
양손을 가볍게 말아쥐어 흔드는 그에게 빙긋 웃으며 고갤 숙였다.
그리고 다시 걸음을 옮겨 복도를 걷는다.
두근, 두근.
걸음마다 머리가 울린다.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미팅 때와는 차원이 다른 압박감이 스멀스멀 몰려온다.
스스로 등졌던 연기가, 이 길 끝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