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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배우 복귀했습니다-9화 (9/167)

그래, 저거였어. 저거 (1)

“그래서, 오빠는 언제 와요?”

바로 옆에 만들어놓은 세트장으로 자릴 이동한 유종원 PD가 고갤 돌렸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 최지연이 촬영이 끝났는데도 안 가고 기웃거리는 중이었다. 어김없이 오빠타령을 하며.

“안 가니? 오늘은 영화 촬영 없어?”

“그거 끝난 지가 언젠데요.”

“지난달에 들어간다고 하지 않았어? 금방 끝났네?”

“네. 죽었거든요. 연쇄살인마한테. 꽥.”

그녀가 엄지로 자신의 목을 긋는다.

“로맨틱 코미디라며.”

“로맨틱 코미디 스릴러.”

······다 섞네 아주.

고갤 내저은 유종원 PD가 말했다.

“그럼 집에 가서 좀 쉬어. 이제 앞으로 쉬고 싶어도 못 쉬는 거 알지?”

“안 그래도 갈 거예요. 제 오빠가 누군지만 보고요. 이 나이 먹도록 친오빠가 누군지도 모른다는 게 말이 돼요? 흑흑. 엄마는 친엄마 맞으시죠?”

“대본에도 없는 막장 스토리 쓰고 있네. 넌 작가 하지 마라.”

“왜요. 요즘 이런 게 먹히던데. 미역 싸대기!”

“서 작가 앞에선 그런 소리 절대 하지 마. 잡혀서 한 시간동안 웰메이드에 대한 연설을 들어야 돼.”

헙, 하고 놀란 최지연이 입을 잠그는 시늉을 했다.

어쩐지 급 피곤해진 유종원 PD가 눈곱을 뗀다.

그러면서도 굳이 백승결을 숨기기 위해 최지연을 돌려보내진 않았다.

주인공인 최지연이 오빠역인 그와 마주치는 건 어차피 불가피하니까.

조만간 한 씬에 담길 일 투성이었다.

재잘거리는 최지연을 조용히 구석에 조용히 있으라며 내쫓고, 필드 모니터에 비친 세트장을 마저 확인한다.

일일연속극치고 돈을 좀 더 썼더니, 확실히 돈값을 한다. 디테일이 달라. 디테일이.

그렇게 물질만능주의자가 되어가던 유종원 PD 앞으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오늘 내용에 맞게 멀끔히 차려입은 백승결이었다.

“PD님. 안녕하세요.”

“어, 승결 씨 왔어요? 이제 테스트 촬영부터 들어갈 거예요.”

“알겠습니다.”

세트장으로 발길을 돌리려던 백승결이 멈춰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손에 들린 대본을 만지작거리며.

“그건 그냥 여기 두고 가도 돼요.”

“아, 네.”

백승결이 간이 테이블 위에 대본을 내려놓고 세트장으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유종원 PD가 빤히 지켜본다.

‘몸에 힘이 너무 들어간 거 같은데?’

그럴 만도 하지. 무려 십수 년 만에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거잖아.

초반엔 긴장해서 버벅거릴 수도 있겠단 생각을 하는데, 옆에 인기척이 들려오며 최지연이 스윽 얼굴을 들이밀었다.

“저분이에요? 와, 잘생겼다.”

“넌 그게 먼저지?”

“시청자는 아닐 거 같아요?”

···10년 차 PD로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답이었다.

그나저나, 최지연은 외적인 것 말고는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해별이인줄 모르는 거다.

하긴, 그녀가 해별이네를 봤다 하더라도 이제 20대 중반에 접어든 백승결을 알아볼 순 없겠지.

‘뮤튜브를 봤으면 모를까.’

유종원 PD는 굳이 백승결의 정체를 말하지 않았다.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를 모르는 사람이 그의 연기를 봤을 땐,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

세트장 한가운데 서 있는 게, 무슨 이산가족 상봉인 양 반갑다.

나를 바라보는 카메라들의 시선도, 내리쬐는 조명도, 그리고 이곳 특유의 냄새까지도.

새로 지은 방송국인데도 이런 냄새가 나네. 소품들 때문인가?

‘감격스럽네.’

이 모든 분위기가······.

너무나 오랜만이라.

아닌 척하고 13년을 참았는데, 막상 이곳에 있으니 내가 얼마나 연기를 그리워했는지 알게 된다.

그리고 이런 감성적인 마음과는 다르게 이성은 쉼 없이 내게 경고한다.

가장 큰 희열인 동시에 좌절이었던 이곳에, 다시 발을 디뎠다고.

이제 더는 돌이킬 수 없다고.

“자, 촬영팀 테스트 촬영 준비하시고, 카메라는 녹화 없이 화면만 체크할 게요. 승결씨도 카메라 안 돌아가니까 긴장 풀고.”

복도에서부터 치솟던 압박감이 마침내 왈칵 넘쳐흐른다.

슬며시 눈을 감았다. 주먹을 꽉 쥐었다 피고, 피가 도는 것을 느끼며 느릿하게 심호흡을 하고.

“슛 들어갈게요!”

메아리처럼 울리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안주연이 오디션장을 가기 전, 집 앞 복도에 누군가 버려둔 거울을 바라보며 넥타이를 맨다.]

그것은 더는 글자가 아니었다. 지문도 아니다.

그저 안주연의 행동. 배우 오디션을 위해 준비 중인 나의 현재였다.

“아씨···떨리네. 좀.”

대사가 아닌 말을 내뱉고.

[안주연의 몸짓이 부자연스러워진다. 스스로도 그걸 느껴 낭패인 표정을 지으며.]

지문이 아닌 행동를 한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흠흠. 아아. 안주연이라고 합···크흠. 아에이오우, 아에이오우. 으아, 미치겠네.”

[안주연은 머리를 헝크러트렸다.]

그리고······.

“컷!”

다음 순간 귀에 꽂히는 유종원 PD의 목소리에, 시간이 멎는 것 같았다. 안주연의 시간이 멈춘 거다.

머리에 올라간 손을 내리고, 몰입에서 벗어난다.

아주 짧은 씬이 끝났다.

이 세상에 백승결은 완벽히 사라지고, 배역만이 남았던 시간.

그속에서 나는 미칠듯한 희열을 느꼈고, 온몸이 오랜만이라며 격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내가 테스트를 왜 시켰지? 방금 꺼 진짜 좋았는데!”

큰 목소리로 아쉬워하는 유종원 PD. 그의 주변에서 사뭇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제작진의 시선들.

하하. 웃음이 새어 나온다. 어쩌지. 너무 즐겁잖아!

자연스럽게 미소를 머금고, 유종원 PD에게 말했다.

“이번엔 더 좋게 해볼게요.”

“오, 자신감 좋아. 방금 느낌 살려서 다시 가보자고.”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었다. 해당 씬은 한 번에 오케이가 났다. 다른 각도에서의 촬영도 마찬가지.

속도감이 붙는다.

그럴수록 나는 더욱 빠르게 백승결을 지운다. 더더욱 빠르게 안주연에 몰입할 수 있게 된다.

“좋다, 좋아. 아니, 승결 씨. 너무 좋은데?”

“하하, 감사합니다.”

곧바로 다음 씬으로 넘아갔다.

이번 씬은 나 혼자서 하는 게 아니었다. 함께 씬을 완성할 배우가 있었다.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여성이 세트장 쪽으로 다가온다.

아까 보조 작가에게 언뜻 듣기로는 연극을 오래 하신 단역 배우라고.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잘부탁드립니다.”

연신 허리를 굽히며 세트장으로 들어오는 그녀.

가장 먼저 모호한 초점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

언뜻 보면 티 날 정도는 아니었지만, 분명히 떨고 있었다.

이런 촬영은 처음인 건가?

조금 시간이 필요해 보였지만, 촬영은 이미 화살처럼 쏘아졌다.

“자, 슛 들어갑니다!”

다행히 커피가 담긴 컵을 나한테 쏟는 씬은 흰 와이셔츠가 서너 번 더럽혀지는 거로 끝났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너무 떨어서 불안 불안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어······.”

촬영 직전, 그녀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눈으로는 자신이 지나온 길을 허겁지겁 훑으며.

아무래도 프린트해온 대본을 찾는 눈치인데.

오래전 촬영장에서도 이런 상황을 몇 번 본 적 있었다.

긴장한 나머지 머릿속은 백지장이 되고, 심지어 대본을 어디에 뒀는지도 기억 못 하는 배우들 말이다.

주연들이야 죄송하다 하고 매니저한테 찾아오라 시키면 그만이지만, 단역은 이야기가 달랐지.

가만히 지켜보다가 안 되겠다 싶어 말을 붙였다.

“배우님.”

“네. 네?”

“조명 옮기는 동안 저희 좀 맞춰볼까요?”

“어, 그, 근데 제가 지금······.”

어찌할 줄 몰라하는 그녀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이걸 어쩌면 좋나. 그러게 왜 남의 집 거울 앞에서 그러고 서 있어. 옷이 다 더러워졌네. 어디 봐··· 이거 비싼 건 아니지? 라고 물어보시면서 손으로 여길 닦으려 하시면, 제가 이렇게 뒤쪽으로 움직일게요.”

무언가 말하려고 뻐끔거리던 그녀의 입이 벌려진 채로 굳었다.

눈을 크게 뜬 그녀가 나를 멍하니 바라본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끝을 올렸다.

“그다음엔 어떻게 하실지 아시죠?”

“네? 네. 아, 알아요.”

“그럼 한번 해볼까요?”

간단하게 맞춰본다. 카메라 촬영이 처음이라 극도로 긴장을 했지만, 역시나 연기력은 흠잡을 데 없었다.

안주연에 몰입한 나로서는 정말 얄밉기 그지없을 정도로.

나 빨리 오디션 가야 하는데, 옷이 이게 뭐야!

마침내 컷, 오케이. 두 단어로 씬이 종료되고, 맡은 바 역할을 충실히 해낸 그녀가 내게 말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난감해하던 눈빛을 완전히 지웠다. 그리고 몰입에서 벗어나며 빙그레 웃었다.

“잘해주셔서 제가 더 감사하죠.”

#

오늘 유종원 PD는 촬영 준비를 단단히 했다.

일일연속극은 말 그대로 연속극이니까.

극한 촬영의 연속.

2시간짜리 영화는 하루에 서너 씬을 찍고. 일주일에 두 번 방영하는 드라마는 하루에 열 씬 이상을 찍는다. 그럼 일일연속극은 얼마나 많이 찍어야겠나.

어떤 상황에도 당황하지 않고 촬영을 이어가야만 분량을 맞출 수 있었다.

그런데 그가 당황하고 말았다.

백승결의 연기력이 그새 더 뛰어나 졌다는 것 때문이 아니다.

그건 충분히 예상 가능한 부분이었다.

이미 백승결의 연기력이 탄탄하다는 건 수차례 미팅으로 알고 있었으니까.

대본까지 손에 쥔 그가 더 잘하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물론 그마저도 예상보다 더 잘하고 있긴 한데······.’

문제는 지속성이었다.

한 씬, 한 씬이 쌓일수록 배우가 느끼는 피로감은 엄청나니까.

흔히 연기파 배우라고 불리는 이들이 드라마 촬영을 꺼리는 가장 큰 이유였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촬영 속에서 밑천이 드러나는 건 막을 방법이 없는 거다.

그래서 일일연속극이 배우들 사이에서 연기력 잡아먹는 드라마라고 불리는 거고.

분명히 그런데······.

‘안 잡아먹히네. 전혀.’

백승결의 연기는 씬을 거듭해도 변함없었다.

거침없었고, 정확했다.

여기선 이렇게, 저기선 저렇게.

안주연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잡혀 있었고, 그 기준을 조금도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미팅할 때마다 그렇게 놀랐는데, 여기서까지 감탄하게 될 줄이야.’

그런 생각을 하며 필드 모니터 너머, 백승결의 모습을 보는데. 그가 단역 배우에게 말 거는 모습이 보인다.

뒤이어 한쪽 귀만 덮은 헤드셋에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그 내용을 가만히 듣고 있던 유종원 PD가 헛웃음을 흘린다.

단역 배우와 호흡을 맞춰보는 척하면서 대사를 알려주고 있었다.

저 센스는 그렇다 치고······ 상대역 대사까지 다 외워온 거야?

문득 유종원 PD의 시선이 아까 두고 간 대본으로 향했다.

표지만 봐도 알 수 있다. 저걸 얼마나 괴롭혔는지.

궁금함을 참을 수 없어 손을 뻗었다.

종이가 촤르륵, 넘어가며 눈에 들어오는 엄청난 정보량.

이건······ 대본 위에 대본 하나를 더 썼다고 해도 믿겠다.

심지어 자신이 아닌 다른 배역까지도 분석해놨네.

유종원 PD가 팔뚝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대본을 덮으려는데, 그새 옆으로 다가온 최지연이 감탄 섞인 목소릴 냈다.

“와, 이게 다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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