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저거였어. 저거 (2)
쉴 새 없이 몰아쳤던 촬영이 끝나고, 나는 세트장에서 내려왔다.
모든 게 끝났다. 그것도 꽤나 잘 마친 것 같지.
만족스러움과 아쉬움 사이에서 나는 찌꺼기처럼 남아있던 불안을 전부 씻어냈다.
역시, 돌아오길 잘했어!
입가에 미소를 띤 채로 유종원 PD에게 다가갔다.
그는 핸드폰을 붙잡고 통화 중이었다.
“집필 끝났으면 좀 쉬는 게 낫지 않겠어? 뭐······ 정 그렇다면야, 알겠어. 그러면 뒷정리 맡기고 나는 바로 방송국으로 갈 테니까 촬영분 보면서 얘길 하자고.”
다음 순간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날 발견한 유종원 PD.
그가 날 반갑게 맞이하며 통화 내용에 대해 오픈했다.
“서 작가가 엄청 궁금해하네. 오늘 촬영분 보고 싶다고 방송국에서 기다리겠대.”
“보고 만족하셨으면 좋겠네요.”
“만족뿐이겠어? 아마 방송국 떠내려가라 환호를 할걸. 아 그리고, 이거.”
유종원 PD가 내 대본을 건넨다. 자연스레 시선이 내려갔다.
“승결씨 대본을 좀 봤어.”
“제 대본이요?”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대체 어떻게 준비를 해왔길래 저렇게 연기를 할 수 있는 건지, 하하.”
천천히 집어 들자 유종원 PD가 덧붙여 말했다.
“근데 보니까, 대본을 통째로 외운 것 같던데···.”
“아, 네. 그래야 연기에 집중하기 편해서요.”
“그치. 연기하기엔 당연히 좋겠지. 보는 입장에서도 좋았고. 근데 계속 그러진 마. 한 회분 정도야 독하게 그럴 수 있다지만, 우리 드리마가 70부작이잖아. 당장 승결씨가 가져간 3회분만 하려고 해도 버거울걸?”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3회분을 다 외워버렸단 얘긴 삼키고서.
“참고하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최 배우, 아직도 안 갔니?”
말을 덧붙이려던 유종원 PD가 홱 고갤 돌려 다가오는 여성에게 묻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개의치 않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긴 생머리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누군지 안다. 내 직전에 옆 세트장에서 촬영을 마쳤다던 최지연 배우였다.
워낙 동안이라 나보다 고작 한 살 어린데 한참 어린 동생역을 소화하고 있는.
“연기 미쳤···아니, 진짜 잘하시던데요? 원래 한 씬만 보고 가려고 했는데, 와 넋을 놓고 다 봤네.”
“감사합니다.”
훅 들어오는 칭찬에 멋쩍게 인사하자, 그녀가 붙임성 좋게 말을 이어간다.
“드디어 친오빠를 찾았는데, 너무 마음에 드네. PD님이 왜 그렇게 꽁꽁 숨기셨는지도 이해 가고요. 근데 신인이세요?”
어··· 신인이냐고?
신인은 신인이지. 근데 13년 정도 안 쓰다가 우연히 발견된 중고 신인이랄까.
당황해서 멍하니 보다가 옆에 있는 유종원 PD에게 고갤 돌렸다. 도와달라고.
그런 나의 눈빛을 본 유종원 PD가 쩝, 하고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린다.
“족보 정리를 하긴 해야겠네······.”
#
강행군이 이어진다.
주인공인 최지연은 물론이고 다른 배우들과도 조금씩 한 씬에 담기는 일이 생겼다.
그들과 호흡을 맞추는 순간순간이 나에겐 꿈만 같다.
물론 최지연과는 살짝 어색해졌다.
내가 해별이라는 걸 알고, 그녀가 날 선배라 부르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나는 그냥 신인처럼 대해달라고 했지만 그녀는 그러면 더 애매해진다며 딱 잘라 말했지.
“···그래서 대화 나누는 게 부담스러워. 말끝마다 선배 소리를 붙여서.”
따뜻한 우유를 휘적거리며 현태 형을 보았다.
검붉은 아이스 커피를 단숨에 비워 카페인을 충전한 그가 끄덕인다. 입꼬리가 말아 올려져 있다. 그렇게 흐뭇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내가 또 말이 많아졌구나.
“흠흠. 형은 요즘 어때?”
“내가 어떤 게 뭐가 중요하겠니. 네가 이렇게 변해가는데.”
“징그러운 소리 말고.”
정색을 하자 현태 형이 얼음을 아그작 씹으며 말했다.
“이번엔 믹스 커피만 먹는 할아버지 근황이야. 아직도 믹스 커피만 드시고 계실지 확인해보자. 뭐 이런 거지.”
“나도 그 할아버지 알아. 재밌겠는데? 확실히 사람들이 관심 가지겠어.”
“아무리 그래도 너보다 더 좋은 소재 찾기가 너~무 힘들다. 아, 조회수 벌써 200만 넘은 거 알지?”
“드라마 보조 작가님한테 들었어. 한동안 확인 못 했거든.”
“그쪽에서도 계속 체크하는구나? 하긴, 그게 네 화제성의 지표니까. 암튼. 업로드한지 꽤 됐는데도 꾸준히 반응이 좋아. 중간 중간에 배우로 다시 보고 싶다는 댓글도 있어.”
싱글벙글 이야기하던 현태 형이 좌우로 두리번거리더니 볼륨을 확 낮춰 소곤거렸다.
“아마 너 이번에 드라마 복귀하는 거 알면 난리 날 거다.”
난리가···나겠지. 아니, 나야지.
불현듯 첫 씬 촬영이 끝나고 나를 바라보던 제작진의 얼굴들이 떠오른다.
그들에게 서린 놀람과 기대를 생각하면 아직도 목덜미에 소름이 돋는 듯하다. 기분 좋게.
씩 웃자 카페 테이블을 탁하고 치는 현태 형.
“이봐, 이봐. 웃는 거부터가 다르다니까.”
“그런가?”
“아주 혈색이 돌아. 난 네가 원래 피부가 하얀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게 하얗게 질린 거였네.”
또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저 양반이 계속 웃는 거로 호들갑을 떨겠구나 싶어서.
그러면서도 그의 말에 딱히 부정은 할 수 없었다. 혈색은 잘 모르겠다만, 이런 건 있지.
지금껏 내가 체한 줄도 몰랐는데, 연기를 시작하니 체기가 훅 내려앉는 느낌이 든달까.
“예전엔 그냥 딱딱 주어진 일만 하면서, 하루하루 그냥 스쳐 지나가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즐거워. 시간은 더 빠르게 가는데, 훨씬 기억에 남아. 그것도 즐거운 기억으로.”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섭외할걸.”
“그땐 내가 안 나갔겠지.”
툭 튀어 나간 대답에 현태 형이 끔뻑거리다가 어느 순간 아, 하고 이해한다.
내가 연기를 못하는 척했었다는 건 현태 형조차도 전혀 모르는 사실이지만,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그도 잘 알고 있으니까.
방송에 얼굴을 비추는 순간 아버지가 찾아왔으리란 건 충분히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순간 박스에 묻어놨던 얼굴이 떠올라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말을 잘못 꺼냈다고 생각했는지 헛기침을 한 현태 형이 얼른 화제를 전환했다.
“아, 암튼. 기대된다. 드라마 잘될 거 같아.”
“잘될 거야.”
그의 말에 내가 답했다.
그리고 처음 대본을 읽었을 때 받았던 느낌을 되새기며 미소를 그렸다.
“재밌었거든.”
#
저녁을 먹고 커피 한 잔씩 손에 든 배우들이 필드 모니터 앞으로 모여들었다.
재벌 3세, 남자주인공 역을 맡은 이강현이 배를 두드리며 말꼬릴 올린다.
“이거 첫 방영이 언제였지?”
“그걸 아직도 못 외웠냐. 7월 12일.”
그와는 동갑인 데다가 같은 드라마에서 호흡을 맞춘 것도 여러 번인 최지연이 혀를 찼다.
머쓱해진 이강현이 주제를 돌린다.
“그나저나 대체 안주연 누구예요? 한번을 마주치는 씬이 없네.”
옆에서 서은영 작가와 캐릭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년 배우가 농담을 던졌다.
“얼른 안보라랑 결혼해. 그러면 보겠지. 처남이니까.”
“그럼 드라마 완결이잖아요.”
투덜거리는 이강현을 지켜보던 최지연이 장난기 어린 얼굴로 서은영 작가를 부른다.
“작가님, 그냥 최지연은 남자 없이도 잘 살았다, 이렇게 가면 안 돼요? 나 얘 별로야.”
“내가 뭐 어때서. 일일드라마에선 내가 이민호고 신승찬인 거 몰라?”
현재 드라마 판에서 가장 이름값 높은 배우들의 이름이 거론되자 서은영 작가도 끼어들었다.
“이야, 내가 그런 분을 캐스팅했네. 이거 황송해서 어떡하지? 부담스러워서 같이 작업 못 하겠다. 지연아 얘 어떻게, 뺄까?”
“죽는 거 어때요? 연쇄살인마한테.”
멍청한 표정을 짓던 이강현이 얼른 반박했다.
“미쳤나. 갑자기? 이거 가족 드라마야.”
“가족 스릴러 드라마로 가죠. 제가 이번에 비슷한 영화 촬영했었는데, 나쁘지 않던데요.”
“그래?”
“작가님? 작가님? 저 진짜 열심히 하고 있는데······.”
모두가 타격감 좋은 이강현을 놀리기에 동참한다.
그때 이강현을 보좌하는 비서역으로 안주연과 마주칠 일이 없긴 마찬가지인 중년 배우가 말했다.
“그나저나 나도 얼른 보고 싶네. 그 친구 연기가 미쳤다면서. 예전 흑역사가 아예 안 떠오른다던데.”
“흑역사? 뭐야, 선배님도 누군지 아세요?”
“당연히 알지.”
“당연? 몰라야 정상 아녜요? PD님, 여기 내부에 첩자가 계신데요?
“나 PD님이 얘기해주셨어.”
“···!”
이강현이 억울한 표정으로 유종원 PD를 돌아보았다.
모니터링을 하던 유종원 PD가 콧잔등을 긁으며 변명한다.
“아니, 넌 어차피 부딪히는 씬이 아직 없으니까.”
“그건 선배도 마찬가지잖아요.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래서 누군데요?”
뚝 하고 침묵이 내려앉았다.
유종원 PD는 다시 필드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시켰고, 서은영 작가는 커피를 입에 가져가서 내려놓질 않았다.
다른 배우들도 웃음을 참으며 각자의 대본을 훑는다.
“와, 뭐야 이 반응. 나 뭐 입 싼 캐릭터로 찍힌 거야? 이 정도였어?”
“그런가 보네~.”
히죽 웃는 최지연을 보며 울화를 터트리는 이강현.
낄낄거리던 유종원 PD가 손목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자자, 강현이는 첫 방송으로 안주연이 누군지 확인하면 되고. 이제 다시 촬영 시작합시다. 날 밝기 전에는 퇴근하자고.”
그의 말에 스태프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순식간에 다음 씬을 찍을 준비를 마치고, 이번엔 배우들이 나섰다.
웃음기를 싹 지우고 가면을 쓴다.
아까까지만 해도 아이처럼 징징거리던 이강현도 일일드라마의 황태자 다운 미모를 자랑하며 연기를 이어간다.
그 모습을 눈에 담은 유종원 PD가 불쑥 입 끝을 올렸다.
‘마주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네.’
이강현은 해별이네를 엄청 재밌게 봤다고 했다. 그것도 수차례나.
심지어, 해별이를 보며 처음으로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지.
그러니 백승결이 이렇게까지 숨겼던 히든 캐릭터라는 걸 알게 되면 얼마나 놀라겠나.
‘그리고 그건 시청자들도 마찬가지겠지.’
유종원 PD의 기대감이 잔뜩 부푼다.
가뜩이나 긴 호흡의 일일연속극.
괜히 벌써부터 뚜껑을 열어 김빠진 사이다를 만들지 않기 위해 백승결의 존재를 완전히 숨겼다.
단순히 화제성을 위한 어그로용으로 사용하는 게 아니라, 제대로 첫 방송에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싶어서.
물론 드라마를 그런 기믹만으로 승부 볼 순 없는 법.
주인공인 최지연과 이강현의 케미를 최대한 살리고, 장르에 맞게 단순하면서도 의미 전달이 확실한 연출을 고심하며 한 장면, 한 장면 완성해 나간다.
그렇게 촬영은 매일 같이 이뤄졌다.
동시에 편집팀도 당일 촬영분을 모두 소화해 내야만 했다.
70회나 되는 장편 드라마를 무사히 완주하려면 그 방법밖엔 없었다.
드라마국 홍보팀도 밤낮없이 열심히 일을 했다.
드라마 촬영 현장도 공개하고, 배우들의 퇴근길 사진도 기자들에게 뿌리고.
그러나 한계는 분명했다.
일일연속극은 그냥 그 시간대라서 보는 시청자들이 대부분이기에.
방영 일주일 전까지도 드라마 자체에 기대하거나 관심을 가지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이것을 제작진도 모르진 않았다. 그럼에도 그저 최선을 다할 뿐.
그렇게 기대보다 노력이 짙은, ‘종갓집 막내딸’의 첫 방영일이 소리소문없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