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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배우 복귀했습니다-11화 (11/167)

그래, 저거였어. 저거 (3)

요란한 알람에 눈이 번쩍 뜨였다.

곧장 방에서 나와 냉장고를 열어젖혔는데 우유가 없다. 하나 사서, 마시면서 가야겠네.

얼른 준비를 끝내고 집을 나섰다.

오늘 내가 잡아타야 할 버스를 검색하고, 정류장 근처에 있는 슈퍼에 들러 우유 한 팩을 집어 든다.

“으이그, 저 나쁜 놈. 저거저거 천벌 받을 놈.”

계산대로 향하자 아침 드라마를 보면서 덕담(?)을 날리던 주인 할머니가 우유 팩을 받아들었다.

“950원. 저 저, 썩을 놈.”

“여기요. 감사합니다.”

“예~. 어휴, 미친놈.”

밖으로 나서는데 기분이 묘했다.

괜히 내가 욕을 먹은 것 같아서···는 당연히 아니고.

앞으로 10시간 후면 저 화면에 내가 담긴다는 생각에.

그리고 화면 밖 저 할머니 같은 시청자들이 어떤 반응일지 궁금해서.

그런 생각들을 두서없이 떠올리며 방송국으로 향했다.

버스로 1시간 남짓 거리. 실내 세트장엔 이미 사람들로 붐볐다.

이 분위기가 이젠 꽤 익숙하다.

“FD님.”

“어, 오셨어요!”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세트장에 들어가면 늘 가장 먼저 마주치는 FD가 나를 반긴다.

많이 지쳐 보였지만, 그럼에도 눈에는 평소와 다른 기대감이 선했다.

“오늘 대망의 첫 방···아, 조연출님이 대망이라고 하지 말라셨지.”

“왜요?”

“대망 어감이 마음에 안 드신대요. 크게 망할 것 같다고.”

그 말에 실소를 터트렸다.

뭐 저런 거로 예민해하나 싶지만, 그게 드라마 방영 직전 제작진의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극도로 예민해지고, 미신이나 징크스 따위에 기대게 되지.

오래 준비한 만큼 간절하니까.

오늘도 잘해보자는 얘길 짧게 나누고서 유종원 PD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승결씨, 오늘은 컨디션 어때?”

“좋습니다.”

“좋네. 좋아. 후, 사실 내가 안 좋아. 과민성 대장염이 도졌나···.”

배를 매만지며 앓는 소릴 하는 유종원 PD.

옆에서 콘티를 훑어 내려가던 서은영 작가가 궁금한 얼굴로 끼어든다.

“우리 드라마 출연하는 거, 이제 지인들도 알죠?”

서은영 작가가 구태여 ‘지인’이라고 하는 건, 내게 더는 가족이 없다는 걸 아는 그녀의 배려였다.

아무래도 가족 드라마다 보니 그런 이야기를 많이 나눴었지.

내가 멀뚱한 표정으로 물었다.

“전에 말씀드린 친한 형 말고는 아직···. 얘기하면 안 되는 거 아니었나요?”

“오, 미끼를 안무네.”

눈을 가늘게 뜨는 서은영 작가를 보며 살짝 입꼬릴 들어 올렸다.

“근데 뭐, 이젠 말해도 상관없죠. 이제 정말 몇 시간 안 남았으니까. 그나저나, 떨리진 않아요? 배우 복귀의 순간이 다가오는데.”

“떨리죠. 무지.”

“그런 것치곤 표정이 너무 밝은데.”

어떻게, 초조한 연기라도 해야 하나.

농담조에 그냥 웃어넘겼지만 진심이었다. 정말 떨린다.

다만 그 떨림조차도 지금의 내겐 즐거울 뿐.

“자, 테스트 촬영할게요!”

제작진의 목소리가 돌림노래처럼 울려댄다.

익숙해진 세트장, 나의 일터를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대기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오늘도 안주연으로 변할 준비를 마쳤다.

#

백승결.

아니, 안주연이 연기를 해야 할 위치에 정확히 선다. 그 위로 조명이 쨍하니 비춘다. 그리고 그 앞에는······.

“이걸 내가 왜···.”

바짝 긴장한 얼굴의 FD가 한숨 섞인 혼잣말을 내뱉고 있었다.

바로 다음에 이어질 촬영 때문이었다.

안주연 모(母)가 전화 통화하는 것을 안주연이 우연히 듣게 되는 장면.

엄마역을 맡은 배우는 어제 이 장면을 이미 촬영한 상태라 안주연 모의 대사를 대신 쳐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촬영 10분 전, 민주적으로 사다리 타기를 통해 뽑힌 게 바로 그였다.

“막내야, 데뷔 잘하자.”

“보고 읽기만 하면 되는데, 설마 그걸 못 할까.”

조연출과 카메라 감독의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에 FD는 울상을 지었다.

이윽고 카메라가 돌아간다.

FD가 국어책을 읽듯, 또박또박 대사를 쳤다.

“아영이가 공무원 됐다고? 잘됐다, 정말. 걘 진짜 어려서부터 똑똑해서 걱정 없었지. 누구? 아, 우리 주연이? 주연이······.”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말을 잇는다.

“회, 회사 다녀. 편의점 회사있잖아. 응 거기도 큰 회사지. 회사···회사···.”

대사를 절반쯤 쳤을 때, FD는 아무 생각 없이 고갤 들어 백승결을 슬쩍 보았다.

그리고 그의 표정을 보는 순간 말이 꼬여버렸다.

서글프게 굳어가는 얼굴. 마치 자신이 비수를 꽂는 것만 같아서.

촬영이고 대본일 뿐이지만 그걸 잊을 만큼 서러운 눈빛이라.

“컷!”

유종원 PD가 촬영을 중단했다.

백승결의 표정만 따기 위해 찍는 촬영이라 말을 저는 건 상관없지만, 오디오가 이렇게 오래 비는 건 문제라.

“다시 한번 가자. 막내야, 백 배우 얼굴 보지 말고 그냥 대본만 읽어.”

“넵, 죄송합니다.”

얼른 허리를 접는 FD를 보며 조연출이 풀풀 웃었다.

“저런 연기를 코앞에서 보면 나 같아도 머리가 백지장이 될 거 같네.”

곧바로 다시 시작된 촬영.

어설픈 FD의 대사는 귓가에서 멀어지고, 엄마의 거짓말에 표정을 굳히는 백승결의 연기만이 가까워졌다.

얼굴에서 서운함과 이해, 그리고 자조가 천천히 번져 물감처럼 뒤섞이고 있었다.

······기가 막히는데?

“컷!”

유종원 PD가 소리쳤다. 뒤이어 오케이까지 외친 그가 비로소 의자에 등을 기대며 미소를 지었다.

첫방날이라 머릿속이 아주 난잡했는데, 저 연기를 보니 불순물들이 싹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내면에 안정이 찾아온달까.

주연 배우들은 물론이고, 백승결까지도 히든 캐릭터로서의 역할을 저렇게 기가 막히게 해내는데 뭐가 걱정이겠어.

원래는 방송국에서 대본 집필을 마저 하려다가, 첫 방이 신경 쓰여서 안 되겠다며 촬영장으로 달려 나온 서은영 작가도 눈을 빛낸다.

“표정 바뀌기 전에 눈빛부터 조금씩 변하는 거 봤어요? 내가 쓴 캐릭터지만 진짜 짠해···.”

유종원 PD가 끄덕거리면서도 세트장 속 백승결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하루에 찍는 씬이 많다 보니 촬영과 촬영 사이에 보통 대본을 보는데, 자연스럽게 다음 촬영에서 찍을 동선을 연습하고 있다.

확인해보진 않았지만, 여전히 대본을 통째로 외우고 있는 것 같지.

다음 촬영 준비를 하다가 돌아온 조연출이 혀를 내둘렀다.

“와 막내 발연기를 들으면서 어떻게 저렇게 표정 연기를 하지? 몰입이 되나?”

그 말에 유종원 PD가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의 첫 배우 데뷔(?)를 마치고 터덜터덜 걸어오던 막내가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걸 발견한 조연출이 웃음을 참으며 얼른 수습한다.

“농담이야 농담. 그리고 네가 배우냐. 뭘 발연기란 소리에 상처받고 있어. 얼른 와, 잘했어.”

그리고는 콘티를 넘겨주고서 다시 자신의 할 일을 이어나갔다.

“자, 바로 다음 씬 준비합시다~.”

촬영은 순조롭게 이어졌다.

물론 날이 날이다 보니 살짝 어수선한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깔려있긴 했다.

정신없이 촬영하다 보니 어느덧 시계가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서은영 작가가 급격히 불안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드라마, 곧 방영 시작하겠네요.”

그 말에 잠시나마 잠잠해졌던 유종원 PD의 내면도 다시 출렁이기 시작한다.

“···벌써 그럴 시간이구나?”

#

pm 7:00.

시간을 본 임현태가 기지개를 켜며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직원들을 향해 말했다.

“난 오늘 저녁 따로 먹을게.”

“왜요?”

“아니, 뭐 그냥······.”

“저희 드라마 보면서 먹으려고 치킨 시켰는데.”

머릴 굴리던 임현태가 멍한 표정으로 직원들을 바라보았다.

“드라마?”

“네. 승결씨가 출연한다는 드라마요. 종갓집 막내딸. 촬영만 아니었어도 승결씨 불러서 다 같이 보면서 먹는 건데.”

“너희가 그걸 어떻게 알아?”

“저희가 바본 줄 아세요? KNS 드라마국에서 전화 왔었고, 나름 주연 중 한 명이라고 했는데 아무리 뒤져봐도 백승결이라는 이름은 없고. 근데 마침 종갓집 막내딸이란 드라마가 배우를 숨긴다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유추가 가능하겠지만, 결정적으로!”

“결정적으로?”

“PD님이 허구한 날 그 드라마 기사를 찾아보시는데 어떻게 몰라요.”

“어······.”

“저녁 따로 드시려는 것도 혼자 드라마 보려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치사하게.”

정곡을 찔린 임현태가 뻐끔거렸다.

“아니 뭐. 친한 동생 출연한다고 너희도 무조건 봐. 이럴 순 없으니까. 조용히 혼자 보려고 했지.”

“PD님한테만 친한 동생인가? 저희가 승결씨 오디션 응원하는 거 다 보셨으면서.”

눈을 흘기는 직원 뒤에서 다른 직원도 끼어들었다.

“맞아요. 그리고 우리 채널이 오작교 역할도 톡톡히 했잖아요. 그러니 첫 회 정도는 다 같이 봐야 하지 않겠어요? 그 모습을 영상으로 찍어서 채널에 올려도 반응 좋을 것 같구요.”

“그게 목적이구나?”

“에이, 겸사겸사죠. 저희가 승결씨 얼마나 응원하는지 아시면서.”

임현태가 황당한 웃음을 짓는데, 때마침 치킨이 도착했다.

회의 테이블에 치킨을 깔고 카메라까지 세팅을 하고서 자리에 앉자 광고도 막바지였다.

주인공인 안보라와 남자주인공의 캐리어가 공항에서 뒤바뀌는 장면으로 드라마가 시작되었다.

호텔방에 도착해 아무 생각 없이 열어젖힌 캐리어에서 여자 속옷이 나와버리자 당황하는 남자주인공.

바뀐 캐리어의 주인이 회사의 직원인 줄도 모른 채, 지갑이나 명함을 찾아보지만 캐리어엔 신상을 알 수 있는 정보가 단 하나도 없었다.

다만 포트폴리오 하나를 발견한다. 심지어 패션 디자인.

남자주인공은 그 안에 있는 스케치들을 훑어보며 깊은 인상을 받는다.

그런 남녀주인공의 이야기로 30분쯤 지났을까.

“나왔다, 나왔다.”

처음으로 백승결이 화면에 잡혔다.

멀끔한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서서.

임현태가 치킨 씹는 것을 멈추고 화면에 집중한다.

뒤이어 옆집 아줌마가 실수로 그에게 커피를 쏟아 옷을 다 버리는 장면이 이어진다.

당혹스러운 표정이 클로즈업된다.

그리고 미안한 기색 없이 뻔뻔하게 구는 아줌마.

시간을 확인하고 어쩔 수 없이 더러워진 옷차림으로 어디론가 향하는 안주연을 끝으로 장면이 넘어갔다.

이어지는 안보라의 이야기를 보며 임현태가 다시 치킨을 우물거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옅은 한숨을 토해내는 직원들에게 물었다.

“연기 괜찮지 않았어? 그치?”

“와, 아줌마 너무한데. 비싼 옷이냐고? 아니면 뭐 괜찮다는 거야?”

“아니, 연기 괜찮지 않았냐고.”

“당연히 괜찮았죠. 그러니까 이렇게 열 받죠. 지금 딱 봐도 면접같이 중요한 곳 가려는 거 같은데 어떡하냐······.”

과몰입하는 직원에게서 시선을 뗀 임현태.

그때 다른 직원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지금 반응 엄청 뜨거운데요? 실시간 반응 계속 올라와요. 기사도 방금 하나 올라왔어요. 빠르다 빨라.”

“뭐, 뭐라는데?”

“흠흠. 제가 낭독해드릴게요. 드라마 ‘종갓집 막내딸’에 백승결이 출연했다. 제작진이 꽁꽁 숨기고 있었던 히든 캐릭터가 바로 그였던 거다. 분명 의외의 인물이긴 하다. 하지만 과거 심각한 발연기와 연달아 작품을 실패하며 마이너스의 연기력이라고 불린 그가 정말 히든 캐릭터의 역할을 할 수 있을진······미친놈인가. 나 이거 왜 읽고 있니.”

얼른 입을 닫은 직원이 임현태의 눈치를 본다.

옆에서 여전히 과몰입 중이던 직원이 분개했다.

“아니, 언제적 연기력 논란을 갖다 대는 거야. 아주 나중엔 전생에 저지른 실수도 끌어다 쓰겠어.”

“그러게요. 잘은 몰라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게, 연기 잘하는 거 같던데. 솔직히 이강현보다 낫지 않아요?”

“어, 또 나온다.”

시선들이 동시에 화면으로 향했다.

저녁에 본가에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안주연. 물론 아까처럼 짧게 등장할 뿐, 대체 어딜 다녀온 건지, 뭘 하고 온 건진 아리송하기만 했다.

그렇게 의문점만 남긴 채 드라마가 끝났다.

예고편마저 주인공들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을 뿐, 안주연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뒤이어 광고가 나오자, 아까 과몰입했던 직원이 툭 던지듯 말했다.

“근데 이거··· 재밌어요.”

“그러게요. 솔직히 일일드라마는 저희 또래 취향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괜찮은데요?”

“다행이네.”

안도하며 끄덕거리는 임현태를 향해 취향 얘길 했던 직원이 말을 덧붙인다.

“그나저나, 승결씨 있잖아요. 분명 생각보다 많이 나오진 않은 거 같은데······.”

그리고 그건 모두가 공감하는 내용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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