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탄 (2)
“아~그렇구나! 어, 그럼 아티스랑 다시 함께하실 수도 있겠네요?”
호기심 많은 FD가 계약 쪽으로 관심을 가진다.
그게 꽤나 좋은 기회인 것처럼 생각하는 말투.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아티스 엔터테인먼트의 배우 라인업이 좋다고 했으니.
그렇다는 건 회사의 영업력이 좋다는 거고, 그만큼 좋은 작품을 잘 물어온다는 것이기도 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좋은 작품이 내 마음에 드는 작품은 아닐 수 있겠지만···.
“글쎄요.”
여러 말들이 입안에 맴돌았지만 미적지근하게 말을 줄였다.
이 동네 소문이란 게 얼마나 빠르고 무서운지 아니까.
뒷말은 하지도, 만들지도 않는 게 편하지.
[아티스 엔터테인먼트 우경철 본부장]
여전히 명함에 시선을 둔 채로 나는 생각했다.
십수 년 만에 만났는데도 특유의 분위기는 여전하다고.
서글서글 웃는 상에 유쾌하게 톤이 올라간 목소리.
저 사람은 그런 것들을 무기로 아버지와 급속도로 친해졌고, 술자리를 풀코스로 접대하며 은근히 헛바람을 넣었다.
‘아버님! 승결이는 천잽니다. 천재. 이대로만 가면 국민배우 타이틀 다는 거야 문제도 아니에요. 앞으로 아버님은 좋은 차 끌면서 그럴싸한 사업도 하시고 골프도 치시면서 인생 즐기면 되는 거라니까?’
그렇기에 나는 저 사람을 이렇게 기억한다.
우리 가족의 비극에 기름을 부은 놈.
명함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서, 멀뚱멀뚱 날 기다리는 FD에게 말했다.
“얼른 가죠.”
“네? 아, 넵.”
FD가 양손에 들린 커피가 흘릴세라 조심조심 걸음을 움직인다.
나도 그 뒤를 따랐다.
커피가 들린 손보다, 어쩐지 주머니 속이 더 무겁다는 느낌을 받으며.
‘언젠가 마주칠 줄은 알았지.’
우경철 뿐만이 아니다.
과거 나와 여러 가지로 얽혔던 사람들이 여전히 이 바닥에 남아 있다.
그리고 나는 내가 그들을 다시 마주치더라도 초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이곳에 돌아올 때도 오로지 안주연처럼 ‘연기가 너무 하고 싶어서’, 그거 하나만 가지고 엑셀을 밟았다.
그런데 막상 마주하니 생각이 달라진다.
천광윤 배우가 내 과거의 영광스러운 조각이었다면, 우경철 본부장은 뭐랄까.
내 과거의······울분?
그러니 나는 궁금해진다.
그저 지금처럼, 순수하게 연기를 즐기며 나의 욕심을 채우는 것도 좋겠지만.
그러면 나의 울분은 무엇으로 털어낼 수 있을까.
#
“다시 해보겠습니다.”
모니터링을 하고서 유종원 PD에게 말했다.
오늘따라 유독 이 말을 많이 하는 것 같지.
유종원 PD가 필드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고 날 보며 말한다.
“왜? 방금 괜찮았는데? 뭔가 울분에 찬 것 같은 게······.”
“그래서요. 그 감정을 빼보려고요.”
예상했던 반응이라 얼른 답했다.
이쯤 되니 유종원 PD도 주억이며 한발 양보한다.
“뭐, 승결 씨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생각이 있겠지. 오케이, 다시 한번 가보자.”
감사하다 인사하고 다시 세트장으로 향하려는데, 어떤 생각이 빼꼼 고개를 들어 살짝 웃었다.
“좋네요.”
“뭐가?”
“다시 해보겠다는 얘기를 마음껏 할 수 있어서요.”
“NG도 좀처럼 안 내는데 이 정돈 해줘야지. 왜. 주인공이 아니라서 그렇게 못할 줄 알았어? 아니면 일일연속극이라서? 더 잘할 거란 기대감만 있다면야 언제든 나도 오케이야.”
자길 그렇게 빡빡하게 봤냐는 듯, 살짝 억울해 보이는 표정을 보며 고갤 저었다.
“아뇨, 예전엔 비중이랑 상관없이 다시 한번 해보겠다는 소리가 부담이었잖아요. 필름이 다 돈이라서. 그것도 비싼 돈.”
필름 날릴세라 한 테이크, 한 테이크 신중하게 찍었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내 말에 웃음을 터트리는 유종원 PD.
“맞아, 그랬지. 그거 많이 쓴 날엔 촬영장 분위기 아주 곱창 났었지. 그땐 조연출이라 PD 눈치 보랴 배우들 혼나면 기분 상한 거 달래랴 아주 곤욕이었는데.”
“저도 눈치 엄청 봤었어요. 배우분들 컨디션 안 좋은 날엔 정말 살얼음판이었죠.”
“맞아. 돈이 중요하긴 한데, 또 배우들이 무슨 로봇도 아니고 매번 연기를 잘 뽑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하하, 그나저나 내가 20대 배우랑 라떼는이 가능할 줄이야.”
옛날얘기에 조금 신이 난 듯한 그였다.
짧게 과거를 공유하고서 세트장에 올라섰다.
마음을 다잡는다.
안주연이란 캐릭터에 내 감정이 너무 많이 끼어드는 것을 경계하며.
‘이번엔 제대로 하자.’
다음 순간 큐 사인과 컷.
그리고.
“오케이!”
안주연이 되었다 돌아온 나는, 비로소 만족스러웠다.
모니터링을 안 해도 괜찮을 만큼.
유종원 PD도 이를 느꼈는지 실소를 흘리며 반긴다.
“확실히··· 확실히 담백하네. 이걸 원했구나?”
“안주연이 안 그래도 짠한 캐릭터인데 계속 감정을 과하게 싣는 게 걸려서요. 시청자들이 피곤해할 것 같아요.”
유종원 PD가 끄덕인다.
그는 이 촬영장에서 드라마를 가장 거시적으로 보는 사람이었다.
한마디로 숲을 보는 사람.
멀리서 보다 보니 나무의 디테일에 대해선 놓칠 때도, 알면서 넘어가야만 할 때도 있었다.
그렇기에 그건 배우가 지켜야 할 몫이지.
“그러네. 그렇겠네.”
콘티를 손가락으로 톡톡 짚으며 읊조리던 그가 날 올려다본다.
“계속 놀라게 되네. 안주연이란 캐릭터에 딱 맞는 완성형 배우가 굴러들어왔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성장형 배우일 줄이야.”
“PD님과 작가님의 안목이죠.”
빙그레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자 피식 웃으며 답하는 유종원 PD.
“이번엔 정말 잘될 거 같아.”
“이미 잘 됐잖아요. 드라마.”
“아니, 승결 씨 말이야. 우리 드라마 상승기류를 타고 높이 날 수 있을 것 같다고.”
#
오늘은 촬영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향하지 않았다.
나뿐만 아니라 마지막까지 촬영을한 배우, 제작진 모두.
CP가 슬쩍 건네고 간 법인 카드 때문이었다.
법인 카드야 유종원 PD도 있지만, CP가 준 카드는 뭔가 다르단다.
그 뭔가가 ‘한도’라는 건 회식 장소를 정하다 알았지. 실제적인 한도는 아니고, 심적 한도.
우리는 근처 이베리코 고깃집에 셔터를 내리고 모여 앉았다.
술잔이 부딪쳤다. 술을 안마시는 나는 현태 형과 그랬던 것처럼 물잔을 들어 올렸다.
오늘 수고했다는 이야기로 시작된 건배사가 시청률 25% 돌파라는 과업을 부르짖는 것으로 넘어갔을 때쯤.
최지연이 건너편에 앉아 잔을 가져다 댔다.
“오늘 연기도 너무 좋았어요. 역시 선배님.”
“그거 안 해주시면 안 돼요?”
“뭐요?”
“선배님 소리.”
“왜요 틀린 말도 아닌데.”
그치. 분명 틀린 말은 아닌데. 왜 난 틀린 것처럼 부담스럽냐고.
본전도 못 찾고 입맛을 다시자 그 모습이 재밌어 보였는지 이강현도 잔을 들고 끼어들었다.
“저도 선배님이라고 부를까요?”
“안돼. 형이라 불러.”
“넵.”
단호하게 처리하자 지켜보던 제작진이 웃음을 터트린다.
술 냄새가 물씬 나는 분위기. 그 분위기에도 알콜이 섞여 있는지 어느새 나도 조금 취한 듯 기분이 좋아졌다.
그때 다른 테이블에서 짠을 수십 번쯤 하며 수많은 전사자를 만든 조연출이 위풍당당하게 우리 테이블로 착석했다.
“아 참, 이거 확정은 아닌데 PPL 하나 더 들어왔어요.”
그는 날 보며 말했지만,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서은영 작가였다.
PPL은 그녀에게 가장 예민한 문제였으니까.
“뭔데요?”
“캠핑용품이요.”
“······아 씨, 가본 적도 없는 캠핑을 어떻게 써.”
술기운이 올라 얼굴이 벌게진 그녀가 푹 한숨을 내쉬며 앞접시에 올려진 고기를 젓가락으로 쿡쿡 찌른다. 조금 섬뜩하다.
그 모습에 눈치를 보던 조연출이 다시 날 보며 말을 이었다.
“근데 그쪽에서 뭐라는 줄 알아요?”
“자연스럽게 넣어달래요? 텐트, 의자, 랜턴, 접이식 테이블 뭐 그런 거? 확 접어버릴라······.”
이번에도 서은영 작가였다.
움찔한 조연출이 얼른 덧붙인다.
“백승결 배우가 쓰는 모습이 나왔으면 좋겠답니다.”
“오오오~.”
분위기가 반전됐다. 제작진이 날 보며 손뼉을 친다. 민망하긴 한데··· 에라 모르겠다. 즐기자.
물잔을 들어 한입에 털어 넣었다.
“이야, 백 배우 술 쎈데!”
조연출이 호탕하게 웃으며 달려든다. 다른 테이블에만 있어서 물잔이란 걸 모르나 보다.
한편, 유종원 PD는 뭔가 떠올랐는지 서은영 작가와 작품에 대한 이야기 중이었다.
“그러면 캠핑 온 감독이랑 만나서 연결되는 건 어때? 안주연 어떻게 배우 데뷔 시킬지 그거 고민 중이었잖아. 실제로 그 내 동기, 최 감독이 그렇게 배우 캐스팅한 적 있는데.”
“······그래요? 흐음. 나쁘진 않은 것 같은데.”
그가 서은영 작가를 조금 달래고서 날 돌아보며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정말 훨훨 날겠는데? 이젠 PPL 사에서 콕 집어 지목도 되고. 이 정도면 슬슬 소속사들도 움직일 것 같은데, 어디서 연락 안 왔어요?”
“아직은 없네요.”
“그래요? 의외네.”
말은 저렇게 하지만 아마 의외는 아닐 것이다.
이번 드라마에서 좋은 성적으로 복귀를 알리긴 했지만, 조심성 많은 소속사들에겐 아직 난 검증되지 않은 배우일 테니.
“아까 아티스 인터테인먼트 본부장 만나셨잖아요. 그분이 명함도 주셨고.”
FD의 말에 유종원 PD가 팔짱을 끼며 벽에 등을 기댔다.
“그래? 아티스라··· 거기도 괜찮지. 배우진이 짱짱하니까. 근데 사실 소속사는 천천히 정해도 돼. 특히 포텐셜이 높은 친구들은 좀 더 몸집을 키워서 계약하는 것도 괜찮은 선택이지.”
“고민 많이 해보겠습니다.”
대답하기 무섭게 서은영 작가가 잔을 내려놓으며 손을 번쩍 들었다.
“나 궁금한 거! 배역! 배역도 많이 들어올 거 같은데, 얼마나 들어왔어요?”
“연락이 온 건 서··· 너 개정도요.”
“그럴 줄 알았어! 내가 다음 라인업이 정해져 있었으면 바로 러브콜 보냈을 텐데, 아쉽네!”
“소속사랑은 다르게 작품은 빨리 들어가는 게 좋지. 이렇게 분위기 좋을 때. 물론 좋은 작품이어야겠지만.”
유종원 PD의 덧붙임에 고갤 끄덕였다.
나도 알고 있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거니와,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란 말도 괜히 있는 게 아니란 걸.
항상 내가 원하는 작품, 역할만 맡는다는 건 꿈같은 일이고, 지금으로선 더더욱 어려운 상황이지.
제법 큰 화제성으로 복귀했지만, 이것만으론 한참 부족하니까.
그러니 빨리 커리어를 쌓아야하는 거다. 유종원 PD의 말처럼 좋은 작품으로.
다행히도, 소속사가 없을 때의 장점은 이런 상황에서도 선택권이 있다는 거다.
작은 작품들이긴 하지만, 그중에서 내가 하고픈 걸 고를 수 있지.
‘내가 지금까지 받은 시놉이······.’
대략적인 시놉시스까지 들은 작품은 총 세 개.
변호사가 주인공인 법정 스릴러 드라마,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 영화, 그리고 운동선수들이 주인공인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였다.
그렇게 내가 제안받은 작품들을 떠올리는데, 서은영 작가가 불쑥 물어왔다.
“그래서, 그중에 끌리는 건 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