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탄 (3)
“끌리는 작품이요?”
되물어 놓고 생각을 이어간다.
이윽고 한 작품이 머릿속에서 부상했다.
“대본을 읽어봐야겠지만 시놉시스가 끌리는 작품이 있긴 해요.”
“시놉시스, 중요하지.”
유종원 PD가 끄덕였다.
그리고 가득 채워놓은 소주잔을 만지작거리며 덧붙인다.
“근데 시놉시스의 함정에 빠지면 안 돼. 작품의 중요한 얼굴이니까 무지 공들인다고. 그리고 공들여서 별로인 시놉은 없지. 뚜껑 열어보면 별로인 경우는 허다하고.”
“그래서 PD님이 저랑 맨 처음 작업하실 때 시놉 말고 대본 가져오라고 하셨었죠. 그때 살 떨려 죽는 줄 알았는데.”
고개를 빠르게 흔드는 서은영 작가와 픽 하고 웃는 유종원 PD.
두 사람의 얘길 듣고서 내 상황을 답했다.
“저도 그래서 대본을 보내 달라고 했어요.”
그러자 유종원 PD가 고갤 갸우뚱했다.
“제안받은 역할들이 전부 단역이라고 하지 않았어?”
“네.”
“근데 순순히 보내줘? 냉큼 튀어오라고 하지 않고?”
“드라마 촬영으로 바쁘단 핑계를 댔죠. 그래야 대본 전체를 느긋하게 볼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내 말에 옆에서 듣던 조연출이 허,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릴 낸다.
반면 유종원 PD의 눈은 가늘어졌다.
“그것뿐이야? 앞으로 우리 드라마에서 승결 씨 비중이 더 늘어난다는 걸 슬쩍 흘린 건 아니고?”
물잔을 들어 올려 입에 가져갔다.
그걸로 미소를 가렸지만, 유종원 PD는 이미 확신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의 확신은 정확했다.
나름의 자기 PR이었지.
시청률 20%를 돌파한 드라마에서 작정하고 비중을 키우고 있는 배우.
조금은 군침이 돌지 않을까 해서.
“참 욕심 없어 보였는데 말이야. 가만 보면 또 욕심이 엄청나단 말이지.”
유종원 PD가 눈을 좁힌다.
이에 잔으로 가렸던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그게 저와 안주연의 다른 점이죠.”
#
술은 마시지 않았지만, 아침이 힘겹긴 매한가지였다.
맨정신이다 보니 술자리의 끝까지 남았고, 덕분에 밤이 늦어진 탓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오전 촬영이 없다는 거.
손을 더듬더듬 움직여 핸드폰을 찾는다.
예상대로 문자가 하나 도착해 있었다.
[안녕하세요, 제작사 굿픽쳐스입니다. 대본 퀵으로 보내드릴까 하는데, 지금 댁에 계시나요?]
침대에서 스프링처럼 튕겨 일어났다.
집이니 얼른 보내 달라고 답장했다.
퀵을 보냈다는 답신을 받고서 30여 분쯤 지났을까.
초인종 소리가 들려와 현관문을 벌컥 열어졌혔다.
배달 기사에겐 무슨 월드컵 때 치킨을 가지러 튀어나오는 사람처럼 보였을 것 같지.
받은 봉투가 묵직하다.
내가 연기할 부분만 쪽대본으로 보내주면 어떡하나 했는데, 다행히 전체를 다 보내준 것 같았다.
‘한번 볼까.’
식탁 대용으로 쓰는 작은 접이식 테이블 앞에 앉았다.
올려져 있던 다른 대본들을 치웠다.
하나는 ‘종갓집 막내딸’의 22화 대본이었고, 다른 하나는 어제 아침에 받은 법정 스릴러 드라마의 대본이었다.
운동선수들의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에선 대본을 달라고 한 이후로 연락이 없었고.
사실 도토리 키재기이긴 하지만, 세 작품 중에선 오늘 받은 이 조선 시대 사극 영화가 분량이 가장 작은 단역이었다.
그럼에도 서은영 작가의 물음에 이게 가장 먼저 떠올랐다.
유종원 PD의 말대로 내가 시놉의 함정에 빠진 걸까? 아니면 대본도 시놉처럼 마음에 들까?
바스락거리며 봉투에서 두툼한 대본을 꺼냈다.
이번에도 역시 선물 포장지를 뜯는 기분이다.
‘종갓집 막내딸’ 때보다 어떤 면에선 더 기분이 좋다.
누군가 앞에서 지켜보고 있는 게 아니라, 첫 장부터 정독할 수 있으니.
‘물론 오후 촬영이 있긴 한데······.’
빠르게 읽으면 충분하리라.
테이블 위에 대본을 턱 내려놓았다.
자연스레 표지부터 확인한다.
감독, 각본을 맡은 사람의 이름과 영화의 제목이 쓰여 있는 게 일반적이지. 이것도 그렇네.
조금 특이한 건 감독과 각본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
안원상 감독.
시놉시스를 받았을 때 그에 대해 조금 찾아봤었다.
오랫동안 독립 영화를 만들다가, 상업 영화로 넘어온 케이스.
첫 상업 영화에서 손익분기점을 간신히 넘기는, 입봉작치곤 꽤 괜찮은 데뷔를 하고서.
두 번째 영화에선 저예산임에도 300만 관객을 끌어 모았다.
그리고 앞선 두 영화도 전부 작감독을 본인이 했다고.
‘문무를 겸비한 타입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시선을 내렸다.
바로 그 아래,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는 세글자가 한문 표기와 함께 박혀있었다.
[대원군(大院君)]
나에게 제안된 역할은, 그의 아들이었다.
#
“신승찬은 뭐래?”
“글쎄요. 아직 연락 없네요.”
굿픽처스 박 대표의 물음에 그의 책장을 구경하던 안원상 감독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박 대표의 촉촉한 눈가를 보며 안원상 감독이 덧붙인다.
“아마 한 씬이라는 얘기 듣고 흥미가 떨어진 것 같긴 한데.”
그럴 만도 했다.
드라마 여러 편을 연속으로 성공시키며 드라마계의 블루칩이라 불리는 신승찬.
그런 그의 첫 영화가 단역인 건 그렇다 쳐도, 얼굴 한번 비추고 끝인 카메오 수준이라니.
“그럼 차라리 씬을 늘리는 건······.”
“그건 안 돼요. 저희가 씬을 딱 하나만 넣은 건 엔딩에서의 임팩트를 위해서인 거 아시잖아요.”
“알지. 아는데······.”
사실 모르겠다. 그게 뭐가 중한지. 감독이 그렇다니 그런가 보다 할 뿐.
그저 자신의 원픽이 묵묵부답인 것에 아쉬워하던 박 대표가 슬쩍 물었다.
“안 감독은 백승결이 마음에 든다고 했지? 연락해 봤어?”
“네.”
“뭐라는데?”
“대본을 보내 달라고 하더라고요.”
“미팅을 하는 게 아니라 대본을?”
“바쁘대요.”
툭툭 던지는 말에 얼굴을 맞기라도 한 것처럼 박 대표의 표정이 움찔거린다.
자연스레 기가 찬 표정을 짓게 된 박 대표가 들썩였다.
“나 참. 일일드라마 시청률에 너무 어깨가 올라간 거 아냐?”
“그렇다고 예의가 없진 않았어요. 죄송하다면서 정중히 부탁하던데요. 뭐, KNS에 아는 사람 있어서 슬쩍 물어보니 정말 바쁘긴 한가 보더라고요. 담당 CP가 비중 늘리라고 성화인가 봐요.”
“···그래?”
박 대표가 살짝 누그러진 표정으로 팔짱을 낀다.
“그래서 대본은 보냈고?”
“네. 그런데 이쪽도 아직 연락은 없네요.”
“언제 보냈는데?”
“오전에요.”
“도착했다고 연락은?”
“그것도 아직.”
시간을 확인한 박 대표가 고개를 내저었다.
“거기도 글렀나 보네. 잘됐지 뭐. 연기가 좋다는 기사만 몇 개 봐서 잘은 모르지만, 영 찜찜한 구석이 있어서.”
“왜요?”
“걔, 해별이때 연기 얼마나 잘했냐. 근데 그 이후로 어떻게 됐어.”
“그땐 완전 요만한 어린 애였잖아요.”
“알지. 누가 몰라? 근데 찜찜함은 어쩔 수 없단 말이야. 아역 때 빵 떴다 가라앉은 애가 다시 뜨는 거 본 적 있어? 징크스, 미신, 이런 것들이 아무리 우스워도 우리한텐 예민한 문제라고. 이번에도 작품 잡아먹는 배우로 흑화하면 어떡해.”
안원상 감독이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할 말이 없긴 했다. 자신은 징크스를 믿지 않지만, 박 대표나 투자자들은 돌다리도 두들기고 씹고 뜯고 맛보기까지 해야 하는 사람들이니.
“아니면 내가 아는 배우들한테 특별출연 부탁해볼까?”
“대표님이 아는 배우분들이면 연령대가 꽤 높지 않아요?”
“잘 분장하면 되지 않을까?”
CG를 발라도 어려울 텐데?
안원상 감독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는다.
턱도 없음을 깨달은 박 대표가 이번엔 원론적인 질문을 꺼내 들었다.
“근데 그 씬, 꼭 추가해야 해?”
영화 ‘대원군’에서 고종은 아역으로만 등장했다.
흥선대원군의 어린 시절부터 다루는 영화이니 그럴 수밖에.
원래의 각본대로라면 청년 고종이 나오는 장면은 없었다.
하지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안원상 감독이 엔딩 장면을 추가했지.
“난 솔직히 그 씬도 찜찜해.”
박 대표의 걱정은 누가 청년 고종역을 맡느냐만이 아니었다.
그 장면이 너무 절망적이라는 게 사실 더 큰 문제였다.
“해피엔딩이야 불가능하겠지만, 그래도 주인공이 흥선대원군인데 마지막 장면에서 너무 힘없는 모습만 보여주고 끝나는 게 아닌가 싶은데.”
“힘없을 만하죠. 미래가 뻔히 보이잖아요. 어차피 그 뒤에 일을 모르는 사람도 없고요. 역사가 스폰데.”
“그래도 아들한테까지 당신 탓이란 소리 들으면서 끝나는 건 우리나라 정서상 좀 불편하잖아.”
“그게 포인트예요. 아들조차 저럴진대, 후대는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 나의 잘못인가, 시대의 불운인가.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야망가의 고뇌인 거죠.”
자신의 의도를 설명하며 점점 상기되는 안원상 감독과는 달리 머리가 아픈 듯 관자놀이를 짚는 박 대표였다.
독립 영화 찍던 버릇 빼는데 세 작품은 간다지만, 그 마지막 작품에서 아예 독립 영화를 찍고 있을 줄이야.
“거참 우울한 영화네. 그··· 조금만 바꾸자고 하면 싫다 할거지?”
“당연하죠. 전작이 목표치 넘기면 다음 작은 예산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약속 자꾸 잊으시는 것 같은데요.”
“그땐 내가 너무 불안해서······ 어휴, 입이 방정이지. 그래 어차피 지난번 반도 안 되는 예산, 이젠 나도 모르겠다.”
자포자기하는 박 대표를 위로한답시고 안원상 감독이 덧붙였다.
“그래도 고종 역은 신승찬이면 안 되겠냐고 하셔서 그쪽에 우선적으로 대본 넣었잖아요.”
“퍽이나 위로가 된다.”
박 대표가 고백했는데 차인 기분이라며 투덜거리는데, 직원이 노크를 하고 대표실로 들어왔다.
“감독님. 고종 역할 회신 왔어요.”
그 말에 대표가 홱 고갤 들었다. 답답한 터널 속에서 빛 한줄기를 발견한 사람처럼.
그가 그 빛줄기를 꽉 붙들며 환하게 물었다.
“신승찬한테!?”
“네? 아뇨, 백승결한테 왔는데요.”
직원의 대답에 안원상 감독이 승리의 미소를 짓는다.
잔뜩 실망한 얼굴의 박 대표는 그의 미소를 보며 이마를 벅벅 문댔다.
“꼭 그렇게 다 가져가야만 속이 후련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