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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배우 복귀했습니다-18화 (18/167)

지금 딱 좋은 거 같은데 (1)

오디션이 끝나고 어떻게 집에 왔는지도 희미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집이었달까.

다만 흔히 술 마시고 필름이 끊겼다고 하는 것과는 달랐다.

오는 길은 안개처럼 흐릿해도 무슨 생각을 하며 왔는진 선명하니까.

돌아오는 내내 오디션에서의 연기를 떠올리고 또 되뇌었지.

정확히는 내 연기에 대한 피드백이 아닌, 이태관 배우의 연기를 곱씹었다.

그만큼 오늘 본 그의 연기는 내게 꽤나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어떤 분장도 소품도 없이 그는 흥선대원군을 연기했다.

스테인리스 다리가 반짝이는 책상과 고급스러운 스탠드, 책과 DVD 등이 책장에 꽂혀있는.

사극이란 장르에 몰입하기엔 너무 현대적인 대표실이었지만, 그의 눈을 마주치는 순간 그런 것들은 심도에서 아득히 멀어졌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100여 년 전의 노인이 내 앞에 앉아 있었고.

형형한 눈에 담긴 자그마한 흔들림은 대본으로만 느꼈던 막연한 질문을 더욱 선명하게 써 내려갔다.

‘마지막 순간에 그는 후회했을까.’

나는 마냥 감탄만 하고 있을 수 없었다.

그가 허리를 곧게 펼수록 나의 시선은 낮아졌고, 뿜어내는 육중한 연기의 무게에 몸이 움찔댔다.

그렇게 나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고종의 눈을 할 수 있었다.

평생 아버질 두려워하던 이의 눈 말이다.

상대의 연기만으로 내 역할에 몰입된다는 게 이런 거구나!

대본 하나 달랑 들어있는 가방을 내려놓고 바닥에 털썩 앉았다.

가방에서 ‘대원군’ 대본을 꺼내 들어 침대에 등을 기댄 채로 넘기기 시작한다.

솔직히 늘 자신해왔다.

맘 편히 연기할 기회만 주어진다면, 누구보다 잘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나는 연기를 못하는 척을 했을 뿐이니까.

더 잘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태관이라는 배우를 보고서 다시 한번 깨닫는다.

갈 길만 먼 게 아니라···.

그 먼 길을 제대로 달릴, 단단한 두 다리가 필요하다는 걸.

#

수많은 제작진이 촬영을 하며 수없이 확인하고 또 확인하지만, 그럼에도 아무 문제 없이 끝나는 촬영은 드물다.

완벽한 스토리 보드도, 완벽한 사람도 없을뿐더러, 정교한 기계조차도 갑자기 오작동일 때가 부지기수니까.

그래서 촬영 현장에선 연출자의 경험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길을 뚫는 게 촬영의 키를 잡은 그가 해야 할 일.

서은영 작가와 통화를 마친 유종원 PD가 필드 모니터 앞으로 돌아왔다.

조연출부터 카메라 감독, FD까지 모두가 그만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를 쓸어넘긴 그가 고심 끝에 결정했다.

“서 작가랑 얘길 해봤는데, 이번 장면이랑 다음 장면 싹 들어내고, 아예 씬 45. 이걸 앞으로 끌어오자.”

조연출이 얼른 콘티를 펼쳤다. 눈알이 그 위를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씬 45면······ 이거, 안주연 나오는 씬인데요? 승결 씨 이미 아까 전에 촬영하고 갔잖아요?”

“그랬지. 그러니까 일단 백 배우한테 연락해서 정말 미안하다고, 이따 저녁에라도 다시 와서 다음 씬 촬영해줄 수 있냐고 말해보자고.”

유종원 PD의 말에 조연출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반문한다.

“그 친구 모레부터 영화 촬영 있어서 우리 쪽 촬영은 아예 다음 주로 넘기기로 했는데, 갑자기 대본 암기나 그런 게 준비될지 모르겠네요. 뭐 언제부터 일일드라마에 준비란 게 있었느냐 만은.”

“아마 됐을 거야, 준비.”

확신에 찬 말투로 즉답하는 유종원 PD.

조연출이 멈칫하더니 이내 주억거린다. 주변에서 둘의 이야기를 듣던 제작진도 작게 끄덕인다.

정말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지금까지 촬영장에서 지켜본 백승결이라면, 이미 다음 회차 촬영분까지 만반의 준비되어 있을 것 같았다.

그때였다. 옆에서 머뭇거리던 FD가 조심스레 말문을 연 건.

“저, 백승결 배우 아직 안 갔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유종원 PD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그, 그래? 대기실에 있어?”

“지금도 계신진 모르겠지만, 아까 저한테 집이 좀 답답하다고 대기실 비어있는 거면 계속 있어도 되냐고 물어보셨어요.”

“그래서 있어도 된다고 했고? 얼마나 됐는데?”

“한, 3, 40분 정도···.”

“쓰읍, 좀 됐네. 얼른 가서 확인해봐. 대기실에 있으면 지금 촬영 하나 더 할 수 있냐고 물어보고. 혹시 그사이에 가버릴지도 모르니까 넌 당장 전화하고.”

그의 말에 조연출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고, FD는 빠르게 대기실 쪽으로 뛰어갔다.

다행히 대기실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는 백승결을 찾을 수 있었다.

마침 복도에 나와 서성이고 있는 백승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를 향해 걸어가는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어느 정도 가까워졌을 때쯤, FD는 걸음을 늦췄다.

‘말 걸면 안 됨’이라고 쓰여있는 듯한 표정 때문이었다.

‘···연습 중이신 건가?’

그도 그럴 게, 그는 지금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은 텅 빈 복도일 뿐, 아무것도 없다.

배우라는 직업을 떼놓고 보았다면, 무슨 귀신 들린 사람처럼 보일 지경.

“······.”

곧게 서서 침묵하는 백승결을 보며 FD는 어느새 걸음을 멈췄다.

복도 끝 누군가와 대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백승결의 모습에 발이 늪에 빠진 것처럼 무겁다.

‘안주연은 아닌 것 같은데···.’

걸음걸이도, 자세도, 눈빛까지도.

세트장에서 보던 안주연과는 거리가 멀다.

따로 촬영 예정인 영화에서의 캐릭터인가?

꿀꺽. 침 삼키는 소리조차 크게 느껴지는 고요한 적막이 이어지던 그때.

무전기를 타고 유종원 PD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막내야, 백 배우 전화 안 받는다. 거기 있어?

“흡!”

숨죽여 바라보고 있다가 깜짝 놀라 딸꾹질을 터트렸다.

인기척을 느낀 백승결이 시선을 돌렸다.

방금까지 뭔가에 씐 사람처럼 이글거리던 눈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평소의 부드러운 눈으로 그가 묻는다.

“어, FD님. 무슨 일이세요?”

#

대기실에서 연습을 하다가 예정에도 없던 촬영을 하게 되었다.

딱히 문제가 될 건 없었다.

이미 받은 25화까지의 대본을 모두 숙지한 상태였으니.

오히려 잘된 것 같기도 하다.

하루에 예정보다 많은 씬을 소화하며 3일 정도의 텀을 만들었지만, 영화 촬영이란 게 워낙 변수가 많다 보니 불안한 것도 사실이었지.

날씨나 빛의 문제로 한 씬을 몇 날 며칠 찍게 되는 경우도 더러 있으니까.

‘하루 정도 더 벌었네.’

촬영을 마치고 대기실로 돌아왔을 땐 이미 늦은 저녁.

허기가 졌지만, 그보다 중요한 게 있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종갓집 막내딸’ 대본을 펼쳐 아쉬웠던 점들을 적어 내려간다.

돌아서서 아쉬워할 게 아니라, 지난번처럼 재촬영을 하면 될 일 아닌가 싶겠지만.

촬영장 상황이 지난번처럼 여유롭지도 않을뿐더러, 다시 해서 되는 게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기에 잘 판단해야 했다.

예를 들어 지금 장면에서 ‘내가 더 말랐으면 좋겠는데’ 라고 생각해도 지금 당장 살을 뺄 수는 없잖아.

‘이건 이렇게 정리하고. 그다음엔······.’

‘종갓집 막내딸’ 대본을 가방에 꽂아 넣으며 ‘대원군’의 대본을 슬쩍 확인했다.

아직 촬영은 시작도 안 했지만, 아쉬운 점은 이쪽에도 있었다.

절대적인 시간의 부족함.

고종의 서사를 처음부터 내가 쭉 연기해온 게 아니기에 생기는 공백.

갑자기 타임슬립을 하듯 점프해서 청년이 된 고종을 연기를 해야 한다는 구조에서 오는 답답함이 있었다.

‘이걸 해결할 방법은······.’

잠시 고민하다가 가방을 어깨에 메며 핸드폰을 두드렸다.

굿픽쳐스로 걸리는 전화.

이윽고 담당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가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 그가 이어서 묻는다.

—컨디션 관리는 잘하고 계세요?

“네. 마침 내일은 촬영이 없는 날이라 푹 쉬고 촬영장으로 가려고요.”

—다행이네요. 그런데 무슨 일로···?

“제가 필요한 게 생겼는데, 가능한지 여쭤보고 싶어서요.”

어떤 게 필요하냐는 직원의 물음에 내가 곧바로 답했다.

“혹시 어린 고종이 나오는 촬영분들을 받아볼 수 있을까요. 지금요.”

#

—종갓집 막내딸, 어제 또 최고 시청률 갱신했더라! 이제 25%야. 이러다 정말 30% 돌파하는 거 아냐?

박 대표의 들뜬 목소리가 안원상 감독의 차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일일 연속극이잖아요. 예전엔 40%도 거뜬히 넘고 그랬던.”

—언제적 얘기하냐. 요즘은 일일연속극도 10%도 못 넘고 죽 쓰는 경우가 태반이라더라. 마지막으로 30% 넘은 게 뭐였다더라······.

삑. 차에서 내린 안원상 감독이 차 키를 누르며 피식거렸다.

“일일연속극은 불량식품 같다고 절대 안 보겠다더니. 누가 보면 그쪽 제작사 대표님인 줄 알겠어요.”

—백승결이 우리 영화에 나오는 이상, 종갓집 막내딸도 우리 팀이나 마찬가지야. 윈윈 몰라, 윈윈?

“하핫. 뭐, 그렇긴 하죠. 그나저나, 오늘 온다고 하셨다면서요?”

—어, 가야지 가야지. 마지막 촬영인데 직접 눈으로 봐야 하지 않겠어? 언제쯤 가면 되려나.

“배우들 두 시간 뒤에 도착하기로 했고, 분장이 또 두 세 시간은 잡아야 하니까 4시간 뒤에 오세요. 괜히 일찍 오시면 다들 눈치 봐요.”

—알겠어. 그럼 이따 보자고, 안 감독.

안원상 감독이 전화를 끊고, 자신의 키를 간신히 넘기는 담장을 가로질렀다.

평일 이른 아침의 민속촌은 사람이 없어, 정말 조선 시대를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간혹 보이는 현대식 가판대가 좀 깨긴 하지만 그마저도 촬영장에 가까워질수록 보이지 않는다.

혹여 촬영하다가 앵글에 걸릴까 봐 전부 치워버렸다.

‘우리 조상님들의 놀라운 기술력’ 같은 짤로 조롱받는 건 연출자로서 생각만 해도 끔찍하니까.

마침 근처에서 담배를 피우고 들어오던 조감독이 그를 보고 가볍게 달려왔다.

“오셨어요? 세팅 다 끝냈습니다.”

“어, 아까 사진으로 확인했어. 생각보다 일찍 끝냈더라? 촬영 끝난 줄 알고 2주 동안 쉬어서 좀 걸릴 줄 알았더니.”

“에이, 저희가 촬영 원투데이 하는 것도 아니고.”

능글맞게 웃으며 뒤따르던 조감독이 갑자기 손가락을 튕기며 덧붙인다.

“아 참, 지금 백승결 배우 도착해 있어요.”

“벌써?”

“심지어 온 지가, 보자··· 한 시간이 넘었네요.”

“뭐 그렇게 빨리 왔대. 지금 뭐하는데? 동선 체크 중?”

“그건 아까 하던데.”

“그럼 지금은 뭐 하고 있어. 분장···은 아직 분장 팀이 도착을 안 했을 거고.”

거침없이 걸음을 옮기는 안원상 감독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조감독도 비슷한 얼굴로 머릴 긁적이며 말했다.

“그게, 확인할 게 있다고 주변 좀 돌아보고 오겠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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