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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배우 복귀했습니다-23화 (23/167)

욕심 (1)

“본부장님이 승결 씨에게 명함을 드렸는데, 연락이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연락처 남겨달라고 하셨다던데.”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커피를 마시는 남자.

갑자기 날 만나고 싶다며 연락해온 아티스 엔터테인먼트의 최기석 실장이었다.

본인 입으로 스카웃 담당자라 했으니 그 이유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었다.

“네, 그러셨죠.”

작게 끄덕이며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가 멋쩍게 웃으며 덧붙였다.

“압니다. 많이 바쁘셨죠? 일일드라마에, 영화에. 스케줄 관리할 사람도 없으니 고생 많으셨겠어요. 그래서 오늘은 제가 이렇게 승결 씨 계신 곳으로 찾아왔습니다. 하하.”

붙임성 좋은 말투에 나도 빙그레 웃었다.

“솔직히 실장님께서 연락 주셨을 때, 좀 놀랐습니다.”

“왜요?”

“저는 이제 드라마 하나 찍은 신인이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 집 앞까지 찾아오신다는 게 결코 흔한 일은 아닐 테니까요.”

“에이, 너무 겸손하시네요. 승결 씨는 신인급이실 수가 없죠.”

손을 휘저은 그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한다.

“해별이. 오래되긴 했지만, 아직도 사람들 머리에 각인된 이름이 있으시잖아요.”

“그런가요.”

“당연하죠. 그래서 말씀드리는 건데···.”

그는 이야기를 질질 끄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급하지 않게, 용건을 부드럽게 꺼내 든다.

“그때의 좋은 기억을 아티스와 함께 만드셨던 것처럼, 다시 한번 저희와 함께 해보시는 거 어떨까요?”

나는 그런 최기석 실장을 바라보았다.

확신에 찬 눈빛이 보였다. 상기된 얼굴에 열정이 묻어있고, 나에 대한 호감까지도 엿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한테 걸리는 딱 하나.

“좋은 기억···.”

그 말이 귓가에 거슬렸다.

“본부장님이 그러셨나요?”

“예? 아, 예. 본부장님이 평소에도 그때 얘길 자주 하셨거든요. 승결 씨를 정말 예뻐했다고. 가족분들과도 가깝게 지냈다고 그러시더라고요. 조금 전에도 전화하셔서, 꼭 모셔오라고 성화셨어요.”

그가 나를 회유하기 위해 던진 말이었겠지만, 그 말이 오히려 과거의 기억을 들춘다.

‘승결이 어머니. 광고로 들어간 돈이 얼만지 알아요? 근데 쟤 연기하는 꼴 좀 봐요. 저흰 뭐 밑져서 장사합니까? 됐고, 저 발연기 좀 어떻게 해보세요. 가르치든 때리든 고쳐오시라고요! 명심하세요. 아역들 이 바닥에서 묻히는 거 한순간입니다? 승결이 아버지가 사업도 이래저래 많이 벌여놓으셨던데 감당 가능하시겠어요?’

나는 담담하게 최기석 실장을 불렀다.

“최 실장님.”

“예, 말씀하세요.”

“죄송하지만 저는 아티스와 계약할 생각이 없습니다.”

“아직 소속사에 들어갈 계획이 없으신 건가요?”

“아뇨. 아티스 엔터테인먼트와는 계약할 생각이 없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어··· 혹시 어떤 이유로 그러시는지···?”

예상치 못했는지 말끝을 늘리는 최기석 실장에게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제가 기억력이 좀 좋은 편이라서요.”

“네?”

그의 표정이 더욱 미궁으로 빠졌지만, 여기서 내 과거를 떠들 생각은 없다.

내가 이 자리에 나온 건, 최기석 실장의 계속된 연락에 한 번쯤 명확한 거절이 필요하다 생각해서였으니까.

“그럼에도 이 자리에 나온 건 실장님 때문이었습니다. 시사회까지 보시며 여러 번 연락 주신 게 감사해서요.”

“어······.”

잠시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던 그가 이내 다시 침착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가 작게 끄덕이며 말했다.

“아무래도, 제가 본부장님께 듣지 못한 얘기들이 있나 보네요. 아직 계약금이나 수익 배분에 관한 얘긴 해보지도 못했는데······ 그럼에도 같은 결정이시겠죠?”

“좋게 봐주신 건 감사합니다.”

그걸로 얘기는 끝났다.

그는 체념한 얼굴로 영화가 잘 되길 바란다는 덕담을 해주었고, 나는 가볍게 고갯짓으로 인사하고 카페를 나왔다.

“후···.”

그때의 좋은 기억? 다시 한번 함께?

멋모르고 들으면 설렐 법한 멘트들이 나한텐 헛웃음을 나게 한다.

우리 가족의 비극이 그 사람에겐 그저 무용담 따위로 포장되는 게.

그리고 여전히 그에게 나는 언제든 손에 쥘 수 있을 것 같은, 그때 그 해별이라는 게······.

“별론데.”

솔직히 요즘 나는 내 삶이 만족스러웠다.

다시 연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즐겁고 행복했다.

오랜 시간 동안 그걸 아쉬워하고 원해왔으니까.

그냥 이렇게 내가 하고픈 작품을 찍으며 살면 그만일 것 같았다.

그러니, 더는 욕심부리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오늘 목표가 하나 생겨버렸다.

“해별이.”

이젠, 그 이름을 넘어서고 싶다.

#

‘종갓집 막내딸’의 마지막 촬영이 끝난 후로, 나는 커다란 티비 앞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사놓고 드라마 촬영하느라 제대로 써보지도 못했던 내 75인치 티비!

이번에 그 한을 제대로 풀었다.

중간중간 인터뷰 요청이 오기도 했다. 대체 내 번호가 어디서 새어나가고 있는 걸까. 현태 형은 아니라는데.

물론 전부 고사했다.

과거에 대한 질문이 꺼려져서도 있지만, 결정적으론 굿픽쳐스에서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했지. 나에 대해서 최대한 숨기는 쪽으로 전략을 잡은 듯 싶었다.

하긴, 내 촬영 장면이 곧 엔딩이니 그럴 만도······.

개봉은 긴 기다림 없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다른 배우들에겐 아닐지 몰라도, 개봉 2달 전에 추가촬영에 투입된 나에겐 눈 깜짝할 새였다.

8월 둘째 주 토요일.

며칠 남지 않은 개봉 날을 확인하며 기대감을 끌어올린다.

‘어른들의 밤’이 개봉 첫날 30만 관객을 동원했냐느니, ‘Suddenly’ 아이맥스관이 예약 오픈 당일 전부 매진되었다느니.

경쟁작 소식들이 밀려왔지만, 개의치 않았다.

누구의 대진운이 안 좋은 건진 두고 봐야 하지 않겠어?

“후욱. 후욱.”

이른 아침. 거칠게 숨을 내뱉으며 공원을 빠져나왔다.

곧바로 아침마다 들르는 슈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어어, 왔어?”

주인 할머니에게 인사를 하고서 언제나처럼 우유갑을 꺼내왔다.

“왜 오늘은 뉴스 보세요?”

“‘종갓집 딸내미’, 그거 끝나니까 볼 게 없어.”

“‘종갓집 막내딸’이요, 할머니.”

“막내딸이나 딸내미나 그게 그거지. 암튼, 드라마 더 안 찍어?”

“하하, 저도 좀 쉬어야죠.”

“젊은데 뭘 쉬어. 나 봐. 지금 일흔이 넘었는데 이러고 있는 거.”

할머니의 가불기에 반성하겠다고 말하자 얼른 가서 일하라며 내쫓겨났다.

손에는 한사코 돈을 받지 않은 우유갑이 들려 있었다.

후드 주머니에 집어넣고 다시 달리기 시작한 지 1분이 채 되기도 전에 나는 걸음을 늦췄다.

우유갑과 함께 덜그럭거리던 핸드폰이 울려대고 있었다.

—어 백 배우. 오랜만.

박 대표가 밝은 목소리로 인사한다.

직원이 아닌 그가 직접 내게 전화한 건 처음이라 살짝 긴장했는데, 개봉을 앞두고 심각한 일이 생긴 건 아닌 듯 싶었다.

“대표님. 잘 지내시죠?”

—아니, 못 지네. 재밌게 보던 드라마가 끝나서 삶에 낙이 없달까.

그 드라마가 ‘종갓집 막내딸’이란 걸 알기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방금 만난 분하고 비슷한 상황이시네요. 그분도 저한테 얼른 드라마 더 찍으라고 그러시던데.”

—어떤 분이 나처럼 드라마 취향이 고급스러우실까.

과거, 슈퍼 주인 할머니가 아침 드라마를 보며 죽일 놈 썩을 놈 하던 장면이 떠올라 쿡쿡 거렸다.

—그건 그렇고 백 배우. 내 딸내미랑 친구들이 사인을 좀 받고 싶다 그러는데, 혹시 해줄 수 있을까? 안 그래도 드라마 보면서 팬 됐는데, 이번에 시사회 보고 푹 빠졌대.

“물론이죠. 제가 조만간 굿픽쳐스로 가겠습니다.”

내가 대답하기 무섭게 핸드폰 너머에서 다른 이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아니, 대표님! 지금 그 얘기 하시려고 본인이 전화하시겠다 한 거예요?

—사인해달란 소릴 따로 전화해서 부탁하긴 좀 그렇잖아. 이제 본론 얘기할 거였어. 그, 저기 백 배우 듣고 있지?

“네, 말씀하세요.”

별생각 없이 현관 번호키를 누르다가, 이어지는 박 대표의 말에 손가락을 멈췄다.

—8월 10일부터 무대 인사가 쭉 잡혔는데, 백 배우도 같이 도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얘기가 나와서 말이야. 어때?

#

무대 인사 날이 밝았다.

이날 아침에 내가 이렇게 분주할 줄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혀 몰랐다.

굿픽쳐스에서 예약해준 강남 샵에 들러 머리와 얼굴을 만지고, 일일 매니저를 자처한 직원 차를 얻어 타고 왕십리로 향했다.

영화를 찍을 땐 괜찮았는데, 오히려 그 이후의 스케줄에서 새삼 매니지먼트의 필요성이 느껴졌다.

어쨌든 영화관에 도착해 대기실로 안내를 받았다.

그곳엔 촬영 날 호프집에서 만났던 김상억과 이준혁, 두 사람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원톱 주연의 영화다 보니 저들이 이곳에 있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난 단역이지. 심지어 한 씬 짜리.

이게 맞나···.

어색하게 들어서며 인사하자 꽤나 격한 반응들이 튀어나왔다.

“승결 씨. 내부 시사회에서 그대 장면을 봤는데 기가 막히더만.”

술자리에서 박 대표의 천적(?)이었던 김상억에게 악수를 당했다. 손을 덥석 잡아서 휙휙. 몸이 종잇장처럼 흔들렸다.

“진짜 소름. 저는 이태관 선배님 앞에서 연기하면 막 주눅부터 들던데 어떻게 그렇게···. 칼만 안 들었다뿐이지 연기로 싸우셨잖아요, 두 분.”

“그렇지. 승결 씨 뽑은 게 감독님의 신의 한 수라고 봐, 난.”

“어, 그 말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언젠 제가 신의 한 수라고 하셨으면서.”

“그랬나? 그럼 신이 두수 뒀나 보지, 뭐.”

“쳇. 그런 걸로 할게요. 오늘은 꿈만 같은 날이니까~.”

“그치. 독립영화제도 아니고 진짜 극장에서 무대 인사라니! 드디어 단역 인생에서 벗어나는 건가!”

상기된 표정의 두 배우가 덩실거리며 말했다.

듣는 단역 섭하게.

신이 난 두 사람의 만담을 보며 얼마나 있었을까.

영화의 주인공인 이태관 배우와 안원상 감독도 대기실에 합류했다.

한바탕 인사 시간이 돌고서, 이태관 배우가 빈자리에 앉으며 물어왔다.

“요즘 뭐 하고 있어?”

“티비 보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티비?”

“네, 75인치 티비요.”

자랑스럽게 말하자 이태관 배우가 황당한 눈빛으로 날 쳐다본다. 뭔가 앞뒤가 안 맞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집이 그렇게 크지 않다고 들은 것 같은데.”

“그래서 한쪽 벽이 꽉 찹니다.”

실소를 터트린 그가 끄덕이며 말했다.

“영화관 같고 좋겠네.”

그 말에 티비가 내 자식이라도 되는 것마냥 기분이 좋았다. 어떻게 스펙 한 번 읊어드려?

그런 실 없는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복도에서 영화관 측과 소통하던 안원상 감독이 들어와 우릴 불렀다.

“슬슬 영화 끝나간답니다. 가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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