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가능하다고? (4)
미팅을 마친 이진태 PD의 다음 행선지는 KNS 방송국이었다.
평소였다면 촬영장으로 향했겠지만, 편집이 많이 밀려 하는 수 없이 현장은 B팀에 맡겼다.
그렇게 드라마국에 도착한 그가 편집실에 가기 전, 양진호 CP를 찾았다.
그가 좋아하는 약과 한 팩 사 들고서.
“그래서 어떻게 됐다고?”
소파에 앉아 약과를 두 개째 오물거리던 그가 물었다.
맛있다 소리만 듣다가 일 얘기가 나오자 이진태 PD가 반색하며 답했다.
“하기로 했어요.”
“한 번에?”
“네, 애초에 저야 확정이나 마찬가지였고, 선택은 윤지수 작가님 몫이었으니까요.”
“윤 작가가 순순히 오케이 하디?”
“순순히··· 는 아니고.”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을 짓는 양진호 CP.
이진태 PD가 웃으며 정정했다.
“순식간에.”
“그나저나 이거 진짜 맛있··· 음?”
반쯤 먹은 약과를 이리저리 살피며 감탄하던 양진호 CP가 의아한 목소릴 냈다.
“제가 미팅을 좀 늦었는데, 아니. 백승결 배우가 빨랐던 거지. 암튼, 제가 늦게 갔는데······.”
“뭐라는 거야. 네가 늦은 거야, 걔가 빠른 거야?”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요. 제가 가는 사이에 윤지수 작가님이 백승결 배우랑 작품 얘기를 꽤나 딥하게 했다는 게 중요해요.”
“처음 미팅 온 애가 작가랑 작품 얘기를 해? 그것도 깊게?”
그의 의아한 목소리도 한층 깊어졌다.
“네. 윤 작가님이 그 친구한테 눈치 주고 있을까 봐 급하게 갔더니 웬걸. 분위기가 부드럽다 못해 푸딩 같더라니까요. 무슨 동료 작가랑 얘기하는 것 마냥······.”
손을 탁탁 털던 양진호 CP가 ‘허, 참.’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유종원이가 했던 말대로네?”
“그쵸. 선배 말대로였죠.”
“세상 보수적인 녀석이 하도 극찬을 해서 그거 믿고 윤 작가를 설득하긴 했지만, 내심 의아했는데. 다 이유가 있었네. 역시 짬바 무시 못 해?”
이진태 PD가 낮게 웃으며 끄덕였다.
“여하튼 백승결 그 친구. CP들 사이에서도 이름이 자주 오르내리길래 궁금하긴 했는데······다음 작품도 우리랑 하게 해야 하나.”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나요. 이번 작품도 성공하면 몸값은 배로 치솟을 텐데.”
짬바를 무시 못 하는 건 종원 선배만이 아니다.
미팅을 통해 알게 된 백승결, 그 친구의 짬바도 장난이 아니었다. 사람을 끌어당긴다는 말을 정확히 알게 됐지.
거기다 매니지먼트 하람이라는 명문(名門)과 수완 좋은 매니저까지 붙었으니······.
“지금이 가장 쌀 때다?”
“매니저 수완도 장난 아니더라고요.”
“야속하다, 야속해. 배우들은 점점 비싸지고, 케이블이랑 OTT는 거기에 더 웃돈까지 주면서 섭외하고.”
“어쩌겠어요. 시장이 그런데.”
“쩝, 아무튼 그래서. 백승결 캐릭터는 유종원이가 말한 대로였고······ 연기는 어땠어? 네가 상상했던 그대로야? 아님, 그 이상?”
질문을 던진 양진호 CP가 이진태 PD의 표정을 살폈다.
입꼬리가 들썩인다. 눈에는 기대가 걸려있다.
말 안 해도 알겠다는 듯 웃으며 약과 하나를 더 집어 들었다.
“이거 진짜 기가 막히네.”
#
어제는 퍽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원하고 계획했던 것들을 모두 얻어낸 완벽한 하루였지.
늦은 밤까지 대본을 읽으며 마무리까지 완벽했고.
그리고 오늘은······.
<백승결의 겸손한 고백, 모 잡지사 인터뷰에서 밝힌 과거>
괴상한 하루가 시작되었다.
아침 조깅이 끝나자마자 나에 대한 기사 하나가 꽤나 시끌시끌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제 윤지수 작가와 이진태 PD를 만난 게 벌써 알려졌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며칠 전 진행한 잡지사 인터뷰가 인터넷에 먼저 공개되었고, 그걸 곧바로 기자들이 물어 기사화한 것이다.
‘근데 웬 겸손······.’
헤드라인이 이상했다. 불안하게시리.
본문을 조금 읽어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어렸을 때 부담감으로 인해 연기 생활에 어려움을 겪지 않았냐는 기자의 아쉬운 물음에, 백승결 배우는 그저 자신이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답했다. 에디터는 과거의 아픔을 남에게 돌리지 않고 스스로의 책임이라 말하는 백승결 배우의 대답에 큰 감명을 받았다며, 사람을 평가하는 직업을 가진 이들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
소설이다. 소설을 써놨다. 그것도 휴먼 드라마.
당혹스러운 마음을 안고 계속 스크롤을 내렸다.
저 말을 그대로 믿는 사람은 없······.
—부담감은 핑계일 뿐, 스스로 부족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네요.
—지난번에 대원군 무대인사에서 스태프들을 대신해 나왔다는 말도 그렇고, 말하는 게 호감인 배우인 건 확실한 듯.
—어릴 적엔 최선을 다하지 않았고, 이번엔 제대로 해보겠다는 각오를 보여준 것 같기도 함. 대원군 하도 난리길래 며칠 전에 봤는데,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배우네.
“······.”
많네. 그런 뜻으로 한 말 아닌데.
꿈보다 해몽이 용솟음치는 현장이었다.
그걸 보며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하 웃는 게 전부.
이걸로 해명을 하는 것도 웃기고, 더군다나 나한테 좋은 이미지가 생긴 거니까 좋은 게 좋은 거··· 맞잖아?
기사가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댓글이 꽤 많았다.
계속 내려보니 역시나. 마냥 좋은 얘기만 있는 건 아니었다.
—요즘 언플 엄청 하길래 소속사를 봤더니 하람이네. 소속사 힘이 좋긴 좋아. 망해서 잊혀질뻔한 배우도 멱살 잡아 끌어올리고.
—친구가 업계 사람이라 들었는데, 해별이 때 백승결 키워준 매니저가 다시 손 내밀었는데, 배신하고 하람으로 간 거라던데. 박쥐처럼.
고민 섞이지 않은 말들이 굴러와 고민이 되고.
다듬어지지 않은 낱말들이 날아와 생채기를 낸다.
하지만 그 틈에서도.
—이상한 소문 신경 쓰지 말고 어렸을 때 못했던 것만큼, 얼른 작품활동 해줘요!
응원 한 줄이 내 머릿속에 콱 박힌다.
언제 그랬냐는 듯 고민이 사라지고, 생채기는 아문다.
‘이게 어떻게 부담이었겠어.’
뒤이어 엄지를 밀어 올릴 때마다 눈에 툭툭 걸리는 사람들의 응원.
그 응원들이 조수석에 던져놓던 송장처럼 차곡차곡 쌓여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명확히 알려준다.
‘실은 ‘해별이네’가 아내와 첫 데이트 때 본 영화였거든.’
‘종갓집 딸내미, 그거 끝나니까 볼 게 없어. 드라마 더 안 찍어?’
‘지금이라도 돌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얼른 대본을 집어 들었다.
사람들에게 보여줄 연기를, 한가득 싣기 위해서.
#
KNS의 하반기 기대작, ‘그림자 변호’에 백승결이 합류하게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대원군의 흥행이 이어지며 꾸준히 여기저기서 언급되었고, 직전에 잡지사 인터뷰가 기사화되며 한 번 더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기에 그 소식은 빠르게 관심 위로 떠올랐다.
하물며, 촬영장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아까 스크립터 얘기 들어보니까 다음씬에 백승결 나온다던데요?”
“그래? 아, 오늘은 고하윤이랑 한 씬에 담겨보나 했더니.”
한 보조 출연자의 아쉬운 목소리에 다른 이들도 내심 고개를 주억였다.
‘그림자 변호’의 여주인공인 고하윤.
외모가 뛰어난 여배우들이 흔히 그렇듯 연기력이 부각되지 않다가, 최근 들어 대중의 인정을 받아 폭발적으로 인기를 얻은 배우였다.
“내가 연출자면 너랑은 한 씬에 안 넣을 거 같은데. 원근감이 무너지잖아.”
“얼굴이 진짜 주먹만 하다곤 하더라.”
“한 씬에 담기는 건 안 바라니, 실물 영접이나 하고 싶네. 그림자 변호 촬영을 몇 번 했는데 한 번을 못 보냐.”
“백승결은 앞으로 고하윤이랑도 자주 보겠죠? 단역이긴 해도 기사 보니까 비중이 꽤 클 거라 하던데.”
“그뿐이겠냐. 회식도 같이 가고, 번호도 교환할지도 몰라.”
“에이, 고하윤 촬영장에서 한마디도 안 한대요. 그래서 친한 배우 친구도 몇 없대요.”
“넌 그 말을 믿냐? 딱 봐도 소속사에서 짜준 각본인데.”
실없는 대화들이 이어졌다. 그들이 까먹고 있는 과자 부스러기처럼 자잘하게.
그렇게 한참을 떠들던 중에, 고하윤과 한 씬에 담기고 싶다 말하던 보조 출연자가 입맛을 다신다.
“에효, 누구는 아역 때 얼굴 좀 곱상하다고 데뷔했다가 10년을 놀다 돌아와도 사람들이 써주고. 누구는 몇 년을 연극판에서 전전해도 대사 한 줄 받기 어려운 보조 출연자 신세고.”
“그렇게 들으니까 졸라 서럽긴 하네요. 대학은 어디 나왔대요?”
“대학은 무슨. 고졸이야. 독립영화는커녕 극단에 발붙여본 적도 없을걸?”
“인생 쉽네. 쉬워.”
투덜거리며 과자를 아그작 씹는다. 부스러기들이 흩날리는가 싶더니 본인 몸에 덕지덕지 붙었다.
에이씨······. 미간을 찌푸리며 툭툭 털어내는데, 한쪽 구석에서 누군가 웃음을 터트렸다.
“와, 내가 드디어 타임머신을 탔나 보네.”
돌아보니 한 장짜리 대본을 손에 든 인상파(?) 중년 남자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왜, 왜요. 선배님.”
“지금 여기 꼴을 보니 내가 신라 시대에 왔잖아. 진골 성골 따지는.”
말에 가시가 있었다.
푹 찔린 보조 출연자는 속으로 발끈했지만 대놓고 따질 수는 없었다.
건달들도 형님 할 것 같은 저 얼굴도 얼굴이지만, 그전에 먼저 익히 알던 얼굴이었기에.
같은 극단 출신의 하늘 같은 선배.
연극판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배우였다.
드라마에서도 조연, 보조를 가리지 않고 왕성하게 활동해서 알아보는 이가 꽤 많다지.
사람들이 알아보는데 저 강렬한 얼굴도 한몫했겠지만······.
“근데 불공정한 건 사실이잖아요.”
그가 나름의 용기를 내서 반박했다.
나름 경력 좀 있다고 이 안에서 젠체를 그렇게 해댔으니 이렇게라도 자존심을 세운 것이다.
“불공정? 너 무슨 판사냐? 너 해별이네 봤어?”
“아, 아뇨.”
“그럼 해별이가 왜 지금까지 기억되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소릴 한 거야?”
중년 남자가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그 영화 출연한 조연에 단역까지도 싹 다 지금은 유명한 배우들이 됐어. 그만큼 포텐 가득한 배우들이 많았던 거지. 그런데 그 틈에서 연기력으로 어른들 다 누르고 영화 멱살 잡고 이끈 게 해별이다. 적어도 걘 지 실력으로 지금까지 기억되는 거야.”
‘그다음 작품부턴 개망했다던데요.’ 라는 말을 삼키며 시선을 내리까는 보조 출연자.
“그러니 남 질투할 시간에 우리 할 거 열심히 하자. 우리 연기.”
상황을 정리한 중년 남자가 다시 대본에 집중했다.
이윽고, 가라앉은 분위기를 뚫고서 스태프가 달려와 그들을 불러모았다.
당장이라도 피곤에 찌든 경찰들과 목청 좋은 범죄자들이 뒤엉킬 것 같은 삭막한 경찰서.
세트장에 들어선 보조 출연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촬영이 시작되길 기다린다.
중년 남자도 유리문이 정면으로 보이는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오늘 그의 역할은 형사였다.
그것도 드라마의 마지막 에피소드를 담당하게 될 사건의 담당 형사.
몇 줄 안 되는 대본을 고이 접어 주머니에 넣는데, 확성기를 타고 이진태 PD의 목소리가 세트장에 울렸다.
—자, 촬영 들어가 볼게요. 보조 출연자분들 동선 유의하시고······.
얼른 자세를 잡았다.
피곤에 찌든 눈을 하고서 노트북 화면에 떠올라 있는 자료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 순간.
—스텐바이, 큐!
시작을 알리는 음성과 함께.
끼이이익!
경첩이 비명을 질렀다.
시선을 들어 올렸다.
노트북 너머, 복도 끝에 반쯤 열린 유리문.
한 청년이 천천히 경찰서 안으로 들어왔다.
색바랜 청남방, 무릎이 늘어난 츄리닝 바지.
후줄근한 차림의······.
‘백승결?’
사실 놀랄 건 없었다.
이 순간 백승결이 들어온다는 건 대본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그가 놀란 건, 저 청년이 언뜻 보아선 백승결을 전혀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추레했기 때문이었다.
찰박···.
슬리퍼. 질퍽거리는 눈 위를 밟고 온 슬리퍼에선 구정물이 뚝뚝 떨어졌다.
발은 빨갛다 못해 퍼렇게 변하고 있었고, 그가 움직일 때마다 바닥에 자국이 남았다.
찰박, 찰박···.
중년 남자는 숨을 참았다.
한숨이 터져 나올까, 살짝 입술을 열어 구멍 뚫린 튜브처럼 숨을 내쉬었다.
대본을 읊조리며 머릿속에 그렸던 백승결의 얼굴이 완전히 날아갔다.
그저 최우진.
그 이름을 한 청년이 보조 출연자들 사이를 걸어오고 있었다.
그 모습이, 그가 남기는 족적만큼이나 찐득한 사연이 붙어 있는 것 같아서······.
중년 남자는 마른침을 삼켰다.
어느새 백승결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대사 하나 없이 이 공간의 분위기를 휘어잡으며.
‘미쳤다.’
낮게 감탄하며 손에 든 볼펜을 부러져라 움켜잡았다.
‘이거 정신 바짝 차려야겠는데.’
저 눈빛을 보고 있자니······.
정말 까딱하면 NG가 날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