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배우 복귀했습니다-33화 (33/167)

고작 (1)

“다음 작품은 어떻게 돼가요? ‘그림자 변호’. 거기 출연한다는 기사는 봤는데, 언제쯤 나오는데요?”

최지연이 그동안 궁금한 게 많았는지 이것저것 물어본다.

자연스레 나머지 사람들도 관심을 보였고, 대화의 주제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이미 촬영 끝났어. 사전 제작이라.”

“아아, 사전 제작이란 얘기 들었던 것 같다. 어때요? 사전 제작이면 확실히 널널해요?”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유종원 PD가 바람 빠지는 소릴 내며 고갤 내저었다.

“퍽이나. 하루를 줘도, 일주일을 줘도 똑같이 전날 숙제를 하는 게 사람이야. 퀄리티 쪽에서야 확실히 나은 점들이 분명 있겠지만, 널널? 그건 절대 아닐걸.”

그의 말에 빙그레 웃으며 동조했다.

“맞아. 널널은커녕 다들 엄청 고생하셨어. 그만큼 좋은 작품이 만들어졌지만.”

“이미 몇 화 만에 대박이라고 난리더만요. 배우들 연기력도 화제고. 박재준이랑 고하윤 케미가 미쳤던데.”

“나도 보면서 몇 번을 감탄했어. 두 배우가 작가님이 원하던 느낌을 그대로 냈더라고. 근데 사실 더 인상 깊었던 건, 촬영하면서 본 단역 배우들이었어. 매번 이렇게 연기 잘하는 사람이 있었구나, 싶더라니까. 배울 점도 많고, 에너지도 많이 받고.”

촬영 현장에서 감명받았던 순간을 떠올리며 말하자, 최지연이 쿡쿡 웃었다.

“그거 ‘종갓집 막내딸’ 촬영하면서 선배를 두고 우리가 엄청 자주 했던 말이에요. 와 이렇게 연기 잘하는 사람이 있었구나. 같이 연기하면 뭔가 에너지를 주네.”

“나야 오랜만에 복귀했으니까 에너지가 넘쳤지.”

부메랑처럼 돌아온 칭찬에 멋쩍게 웃으며 답하자 이강현이 거들었다.

“난 최지연이 그래서 부러웠잖아. 아니, 질투했잖아. 형이랑 같이 하는 씬이 많아서.”

뒤이어 부모님 역을 맡았던 중년 배우들까지 나서서 칭찬을 얹는다.

“나도 몇 씬 같이 안 해봤는데, 깜짝 놀랐지.”

“나도 그랬어. 앞에서 연기를 하는데 내가 에너지를 받더라고. 멱살 잡혀 몰입 당하는 느낌이랄까.”

집안의 기대를 한몸에 받는 장남이 이런 기분일까. 무겁다, 무거워.

부담스러우면서도 내가 그런 도움을 줬다는 게 내심 뿌듯하다는 생각을 동시에 하는데, 서은영 작가가 덧붙였다.

“배우들만 그럴까요. 방송국에 눈 좋고 촉 좋은 사람들은 이미 그걸 알아차리고 승결 씨 얘길 엄청 한다던데요.”

“정말? 그 정도면 오늘 기대해봐도 되는 거 아닌가?”

안 씨 집안의 엄마 역을 맡았던 배우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물었다.

차마 입방정이 될까 뭘 기대해도 되는지는 말 못 하는 눈치였다.

“하하, 신인상이요?”

가볍게 묻자, 그제야 그녀가 빠르게 끄덕인다.

그녀의 말처럼, 오늘 나는 신인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그게 기분 좋고 흥분되는 일인 건 분명했다. 솔직히 욕심도 조금 나고.

하지만······.

“감사한 일이죠. 근데, 기대는 안 하고 있어요.”

동시에 냉정하게 상황을 보고 있었다.

일일드라마 속 조연. 내겐 행복했던 역할이었지만, 안주연의 태생이 다른 후보들에 비해 선택받기 어려운 건 사실이니까.

“에이, 그래도 후보들 쫙~ 보면 또 모르겠던데요. 사람들도 다들 차도영이랑 형의 싸움일 거래요.”

“맞다, 차도영. 걔 귀엽더라. 초등학교 4학년이랬나? 아티스 엔터테인먼트 본부장이 끌고 다니면서 엄청 밀어준다던데.”

“그래도 승결 씨 임팩트만 할까. 무려 천만배우의 복귀작인데.”

“하긴. 그리고 연기력도 아직 선배한텐 한참 안 되죠~.”

드라마 속 안 씨 집안 가족들이 장남 띄우기에 열을 올리는 사이.

이렇게 모이니 자기가 쓰지도 않은 ‘종갓집 막내딸’ 외전을 보는 기분이라던 서은영 작가가 홱 고갤 돌려 유종원 PD에게 물었다.

“PD님은 뭐 들으신 거 없어요?”

“으응? 에이, 없어. 누가 받을진 PD도 몰라. 더 위에서 결정하는 거라.”

해명에도 꺼지지 않는 의심의 눈초리에 유종원 PD가 흠흠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한다.

난처한 것 같아 내가 슬쩍 끼어들었다.

“전 하나 들은 거 있어요.”

“엥? 정말요?”

“뭔데요, 뭔데요?”

“하람에서 뭐 들은 거 있어요?”

순식간에 대기실 안의 모두가 내게 주목했다.

유종원 PD마저도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들의 격한 반응에 씩 웃으며 최지연과 이강현을 훑었다.

잔뜩 기대한 듯, 업된 표정들.

“다들 베스트커플상은 너네일 거라던데?”

그대로 두 사람의 표정이 굴러떨어졌다.

#

“난 이제 화장실 들렀다가 슬슬 올라가 봐야겠다.”

한참을 웃고 떠들다가, 유종원 PD가 본분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때다 싶어서 그가 방을 나설 때 혼자 따라 나섰다.

“PD님.”

“어. 너도 화장실 가려고?”

“네.”

“그래 자주 가 둬. 이따가 시상식 시작하면 이 문제가 가장 골치 아프다?”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걷다가 화장실 앞에 거의 다 도착했을 때쯤.

유종원 PD에게 말했다.

“감사해요.”

“응? 뭐가?”

“‘그림자 변호’ 캐스팅에 도움 주신 거요.”

그가 가볍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냥 진태 얘기 듣고 이러이러한 상황이다 얘기해준 게 전분데, 쑥스럽게 뭘. 나머진 네가 다 했잖아. 그리고 나도 받은 게 있고.”

이번엔 내가 물었다.

“저한테요?”

“적당히, 적당히. 그게 내 모토였거든. 뭐든 중간만 가면 된다였는데, 팀원들이 전부 그러더라. 종갓집 막내딸 이후로 내가 좀 바뀌었다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맞는 말 같았어. 변했더라. 그렇게 되는데 네 영향이 제일 컸던 것 같고.”

그러면서 유종원 PD가 풀풀 웃었다. 그런 그를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입꼬릴 올렸다.

좋다.

내게 에너지를 받았다는 배우들의 말도 그렇고, 지금 유종원 PD의 이야기도 그렇고. 모든 게.

배우가 연기를 통해 할 수 있는 게, 단순히 보는 이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때 뒤쪽에서 제3자의 목소리가 목덜미를 잡아챘다.

“백승결.”

익숙한 목소리였다. 느릿느릿 고갤 돌린다.

딱히 빨리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라.

“이쪽 대기실 쓰는구나?”

곤색 정장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우경철 본부장이 어슬렁어슬렁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다 옆에서 ‘누구슈?’ 하고 지켜보는 유종원 PD를 확인하곤 반색하며 손을 뻗는다.

“어, 유종원 PD님 아니세요?”

“누구······.”

“아, 저 아티스 엔터테인먼트 우경철 입니다. 승결이랑은 예전에 해별이할 때, 제가 매니저였고요. 흐하핫!”

호탕하게 웃으며 어느새 손에 들려있는 명함을 건넨다. 마술사야 뭐야···.

“아아, 그러시구나.”

“그 예능국 상진 PD랑, 성훈 PD님 아시죠? 그분들이랑 자주 술자리 갖거든요. 안 그래도 PD님도 꼭 한번 뵙고 싶었는데, 언제 한 번 자리하시죠.”

“네. 뭐, 시간 되면···.”

유종원 PD가 명함을 받으며 주억였다. 그러다 내 쪽을 돌아보며 묻는다.

“화장실 안 가?”

“사실 아까 그 말씀 드리려고 따라 나온 거예요. 얼른 들어가세요.”

“그래? 그럼 나 먼저 들어간다? 어, 얘기 나눠.”

뭔가 묘한 낌새를 눈치챈 듯 나와 우경철을 번갈아 보던 그가 머뭇거리다 화장실 쪽으로 향했다.

유종원 PD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우경철 본부장의 시선이 다시 나에게로 돌아왔다.

“오늘 신인상 후보에 올랐던데? 내가 요즘 키우는 중인 차도영이도 거기 올랐거든.”

다만 표정은 좀 전과 확연히 달랐다.

잘 보여야 하는 사람이 없자 조금씩 속내를 드러낸다.

“아무튼, 그래서 후보 소개할 때 화면으로 얼굴 한 번 보겠다 싶었는데. 복도에서 마주칠 줄은 몰랐네?”

“저도요.”

정말 몰랐지. 감사를 전하러 나온 이 따뜻한 복도에서, 날 가장 차갑게 만드는 사람과 마주칠 줄은.

그런 내 언짢은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경철은 잘 됐다는 듯 밀린 얘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니, 최 실장이 너 못 데려와서 상심이 이만저만이 아니더라고. 그렇게 아쉬워하는 거 처음 봤어. 걔가 너 데려오고 싶다길래 내 이름 팔면 쉬울 거라고 호언장담했는데···.”

거기까지 말하고서, 유종원 PD가 사라진 화장실 쪽을 슥 한 번 확인한 우경철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시발, 쪽팔리게 말이야. 그리고 너 걔한테 이상한 소리까지 했나 보더라? 예전 일을 꼬치꼬치 캐묻더라고.”

어느새 돌처럼 딱딱해진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는 그.

“그래놓고 바로 소속사를 골랐다길래 어딘가 했더니, 하람? 야, 이거 뒤통수가 얼얼하더라고. 그런 뒷주머닐 차고 있을 줄이야. 은혜를 갚는 것까진 안 바랐어도 밑에 놈한테 쓸데없는 소리하고 나를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웃음이 났다.

참지 않고 내뱉자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갤 기울였다.

“뭐가 그렇게 즐거워?”

사납게 노려보는 우경철 본부장에게 무덤덤하게 말했다. 나조차도 놀랄 만큼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냥, 변함없으셔서요.”

오랜만에 만난 과거 은사에게 할 법한 말이었지만, 난 전혀 다른 의미였다.

웃음이 날 정도로 변함없이 양아치 같구나··· 이런 뉘앙스랄까.

다행히 제대로 알아들은 우경철 본부장의 얼굴이 점점 더 안 좋아졌다. 저기서 더 안 좋아질 얼굴이 남았다는 게 관전 포인트다.

나를 혼내려고 한 말에 마음대로 끌려다녀주질 않자 속에서 울화통이 터지는가 본데···.

“넌 많이 변했네? 내가 뭐라 한마디만 혼내도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네, 네 하던 애가.”

“그땐 어렸으니까요.”

“음, 아냐 아냐. 그땐이 아니라 지금도 어리지. 막말로 해별이란 커리어가 없었으면 이렇게 쉽게 복귀할 수도 없었을 텐데, 그런 커리어를 만들어준 은혜도 모르고, 뒤통수치고, 건방지게 말대답까지 따박따박하는 거 보면 생각이 얼마나 어린 거겠어.”

우경철 본부장이 비릿하게 웃으며 가까히 다가왔다.

목소리는 더욱 낮추고, ‘따박따박’이라 말할 땐 검지로 나를 툭툭 밀었다.

이 와중에 자꾸 뒤통수친다는 말이 어디선가 봤던 댓글과 오버랩되네. 이게 우연일까?

“그렇게 말하는 거야말로 쪽팔리지 않으세요?”

“이 봐봐. 못 본 사이 버르장머리가—.”

“팀장님이야말로 저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못 오셨어요. 해별이가 그렇게 잘되지 않았다면···.”

붉으락푸르락 해진 얼굴을 보며 나는 상관관계를 명확히 짚었다.

“본부장은 커녕 애초에 아티스에 남아있지도 못하셨을 테니까.”

이건 당신도 부정 못 하겠지.

하라는 일은 안 하고 불미스러운 일만 만들어 잘릴 위기였던 당신이, 나라는 동아줄을 주워 살아남았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니.

잠시 벙쪄있던 우경철이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렇지 않은 듯 쩌렁쩌렁.

하지만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저 사람은 영업맨 답게 정말 많은 얼굴을 갖고 있었고, 그만큼 다양한 웃음을 낼 수 있다는 걸.

지금 그가 내건 웃음의 이름은 ‘당황’이었다.

“하하핫! 그래. 기억난다, 기억나. 너 이 새끼, 기억력 하나는 끝내줬었지. 그래서 네 애비가 나한테 그렇게 자랑을···.”

·········그리고 난, 슬슬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었다.

축제를 앞두고 화장실 앞에서 이게 뭐야.

느긋하게 장단 맞추는 건 이쯤에서 그만두자.

대신 당황해 더욱 오버스러워진 우경철을 향해···.

“그러니까요.”

“뭐?”

이번엔 조금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그 좋은 기억력으로 뭘 더 기억하고 있을 줄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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