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배우 복귀했습니다-34화 (34/167)

고작 (2)

“이 새끼가 뭔 소릴··· 뭐, 뭘 기억하는데.”

내가 던진 장작은 불안을 지피기에 충분했고, 그것을 외면하기엔 스스로 찔리는 게 한두 개가 아니었을 터.

“어디서 낚시질을······아님, 네 애비가 뭘 말했구나? 그 양반 입이 촉새 같았지.”

분명 패드립인데 타격감이 없다.

내 태연한 모습에 우경철은 내가 정말 뭔가를 알고 있다고 확신하게 된 듯했다.

변검마냥 실시간으로 우경철의 얼굴이 바뀐다.

당황에서 불안으로, 불안에서 의심과 두려움으로.

두려움은···.

“말하라니까. 뭘 웃고만 서 있어. 하아, 이 개자식이 지금 날 가지고 놀려고···!”

필요 이상의 격한 반응으로.

저러다 못 참고 세게 밀치거나 주먹이라도 날리면 한 대 맞아줄까도 싶다. 일 커지게.

근데 못 하겠지. 내가 알고 있는 게 뭔지 모르는 상태로 일이 커지면 안 될 테니까.

그가 자존심과 불안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데,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를 안고 누군가 우리 사이로 끼어들었다.

“어후, 이런 날 화장지 여분을 안 가져다 놨냐.”

유종원 PD가 고개를 내저으며 나왔다. 그리곤 우리 두 사람의 대치 상태를 보더니 딱 견적이 나온다는 듯 머릴 긁적였다.

“어쩐지 이상하더라니. 내가 과거 매니저랑 연예인의 해후가 해피엔딩인 경우를 거의 못 봤거든.”

“······.”

할 말이 산더미 같아 보이던 우경철의 입이 굳게 닫혔다.

잔뜩 화가 나 보였지만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자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답이라는 판단이 선 거다.

“승결아 너 화장지 있냐?”

“대기실에 있어요.”

“그래? 좀 빌리자.”

유종원 PD가 내 어깰 감싸며 말했다.

분명하게 편을 가르는 행동에 우경철이 결국 꼬리를 말고 상황을 수습한다.

“승결이랑 오해가 좀 있었네요. 일단, 저도 배우가 기다리니 가봐야겠습니다.”

나를 보며. 뚫어져라 노려보며.

그리고는 인사하고 다가올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유종원 PD가 팔을 내리며 피식 웃었다. 나는 몸에 힘을 풀고 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그가 날 보며 웃는다.

“야, 근데 너 장난 아니더라.”

“네?”

“들으려고 들은 건 아니고. 네 표정이 싸하더라고. 그래서 찝찝해서 다시 나와봤지. 근데 딱 그 시점에 네가, ‘내가 뭘 알고 있을 줄 알고.’ 크으. 느와르가 따로 없던데.”

“······그전에 빨리 나와주시지 그랬어요. 그런 흑역사 만들기 전에.”

“흑역사는 무슨. 멋있었다니까? 그 대사 나한테 팔아라. 나중에 연출 부족할 때 써먹어야겠어. 기자가 물어보면 출처는 꼭 밝히마.”

흑역사를 아예 박제하시려 하네.

쩝 하고 입을 다시자, 그가 낄낄 웃다가 물었다.

“그나저나 무슨 일인데?”

“좀··· 과거가 있어서요. 저분이랑.”

“그래. 과거 없는 사람이 어딨겠냐. 나만 해도 아까 저 양반이 술 먹자던 두 PD, 내가 존나 싫어해. 옛날부터 자꾸 신인 배우들 술자리에 불러대서. 저 양반 오늘 나한테 찍혔어.”

팔짱을 낀 유종원 PD가 눈을 게슴츠레 뜨며 덧붙였다.

“딱 느낌이 싸하더라고. 클리셰도 이런 클리셰가 없지. 요즘엔 드라마도 이렇게 플롯 짜면 식상하다고 악플달리는 판에······쯧. 저 양반, 서 작가한테 웰메이드 강의 좀 들어야겠네.”

“그거 전 재밌었는데.”

업계 포상을 왜 주나.

“······.”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유종원 PD를 보며 어깰 으쓱거렸다.

그러자 그가 허허 웃으며 고갤 흔들었다.

“그래, 너라면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어. 아무튼, 괜찮아 보여 다행이다.”

“맞아요. 괜찮네요.”

정말 그랬다. 방금 전까지 그렇게 험악한 분위기였는데도, 오히려 후련할 지경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예전엔 정말 무섭고, 큰 사람이었는데······.”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지금 보니 참 겁 많고, 작아요.”

그만큼 사소했다.

첫 만남에 들끓었던 내 울분이 허무해질 만큼.

고작 이거였나 싶을 정도로.

가만히 듣고 있던 유종원 PD가 ‘멋지네.’라고 짧게 추켜세워준 뒤, 그래도 조심하라며 당부한다.

“겁 많고 작은놈들이 이 바닥에 똘똘 뭉쳐서 어깨놀이를 하거든. 마음에 안 드는 놈 끌어내리려고 별 지랄을 다 해.”

안다. 악플만 쓰는 댓글부대부터 악의적인 합성까지···.

최근 들어 기사도 많이 터지고 있잖나.

공감하며 끄덕거리다가 문득, 유종원 PD의 평화로운 안색에 의아해져 물었다.

“근데, PD님. 화장지 필요하시다고 하지 않았어요?”

“얼른 너 빼내려고 한 말이지. 화장지가 없는데, 지금까지 내가 화장실 안에 왜 있었겠냐.”

그렇긴 하네······ 라고 생각하다가 갸우뚱했다.

“······.”

“뭔 생각해.”

“진짜 없었던 건······.”

그러자 유종원 PD가 펄쩍 뛰었다.

“아냐, 인마! 봐봐 양말도 신었다!? 뭐, 다른 것도 보여줘?!”

#

감사 인사를 위해 나왔는데, 어쩌다 보니 위협, 협박, 그리고 박장대소로 끝난 여정이었다.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거라고, 화장실 휴지의 존재 유무로 크게 웃었으니 이만하면 성공적인 외출이지 않나.

혼자 대기실로 돌아온 나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김성운이 사 온 음료를 배우들과 함께 마셨다.

그러다 시간 맞춰 또 다른 대기실로 향했다.

방송국 뒤쪽에 길게 늘어선 밴 차량들.

모두가 레드카펫 행사를 위해 대기하는 제2의 대기실이었다.

“곧 네 차례야.”

일일 스타일리스트에게 얼굴부터 옷매무새까지 체크받는 사이, 김성운이 말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의외라는 듯 묻는다.

“촬영장에선 전혀 안 떨던 애가 그래도 이건 좀 떨리나 보다?”

“당연하죠. 분야가 다른데.”

“아, 연기가 가장 쉬웠어요. 이런 느낌인가?”

미소를 머금고 창밖을 보았다.

어두운 밤에 찐한 선팅까지. 뭐가 잘 안 보이긴 한다.

이따금 들려오는 환호성의 크기가 이 코너를 돌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있겠구나, 짐작만 하게 했다.

“밖에 네 팬들도 기다리고 있을 거야.”

툭 던지듯 말하는 김성운.

그 말에 헙, 하면서도 침착하게 답했다.

“들뜨지 않으려고요.”

“왜?”

“혹시 없을 수도 있잖아요.”

“너도 그런 걱정을 하는구나? 오늘 여러번 신선한데?”

‘그림자 변호’의 담당 형사 대사를 따라 하며 그가 웃었다.

이 양반, 대체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그런 의문을 굴리며 여전히 새까만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확 밝아지는 불빛들, 웅성거리는 소리.

그리고.

“도착이야. 이따 보자.”

김성운의 말과 함께 드르륵 열리는 차 문.

——!

가로등이 한 번에 켜진 것처럼 시야가 밝아졌다.

레드카펫 주변으로 잔뜩 몰린 인파가 보인다.

그중 나의 팬이 누군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격한 반응들이 몰려왔다.

천천히, 다리부터 뻗어 레드카펫을 디뎠다.

이 시점에서 날 알아본 관객들이 여러 이름으로 나를 불렀다.

해별이, 백승결, 안주연.

호명을 들으며 걸음을 옮긴다.

찰칵! 찰칵! 찰칵!

플래시가 터지고, 날 응원하는 피켓이 쪼르르 솟아 있다.

그 양이 대단히 많진 않았지만, 적어도 나는 대단히 놀라는 중이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아서.

무대 인사도 그랬는데, 이건 더 하다.

고작 몇 걸음. 레드카펫을 밟을 때마다, 펌프인 양 사람들의 목소리가 치솟았다.

“잘생겼어요!”

“얼른 연기 보고 싶어요!”

“오늘 신인상 응원할게요!”

환호를 보내오는 이들의 에너지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아드레날린이 팽팽 돌고, 발걸음은 가볍다 못해 붕 떠서 구름 위를 걷는 것 같다.

미치겠다.

‘들뜨지 않으려고 했는데······.’

차 문이 열린 순간부터, 이미 실패였다.

#

정신없이 걷다가 사진 찍고, 또 걷다가 사진.

그러다 보니 어느새 화려하게 꾸며진 원형 테이블에 앉아 있다.

여전히 얼떨떨한 기분으로 생수병을 따서 흡입했다.

한숨 돌리니, 자연스레 ‘종갓집 막내딸’의 주역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너머로 다른 배우들도 보였다.

‘마이트리의 조중현, 바흐처럼의 서현미···.’

이런 주연들부터.

‘더 프레임의 서기석, 카페 사장으로 살아남기의 유희주···.’

조연들까지.

모든 이들이 아는 얼굴이었다. 내 독특한 기억력 덕분이지.

그리고 그중에서도 특히 익숙한 배우들이 툭툭 걸린다.

어린 내가 촬영장에서 만났던, 과거의 인연들.

정확히는 해별이네를 촬영할 때 보았던 얼굴들이었다.

트랙터를 몰던 윤 씨 아저씨가 두 번째 테이블에서 멋들어진 턱시도를 입고서 물병을 따는 중이다.

집을 빼앗으러 온 천광윤 배우의 앞길을 막았던, 수많은 마을 사람들 중 한 명이었던 이름 모를 여배우가 등 파인 붉은 드레스를 입고 미소를 짓는다.

주연부터 단역까지. 잘되지 않은 이를 찾는 게 더 어렵다는 ‘해별이네’ 답게.

익숙한 얼굴들이 낯선 모습으로 군데군데 앉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문득 의아해져 다시 한번 배우들을 훑었다.

없었다. 내가 못 찾은 것도, 내 기억이 흐릿해진 것도 아니다.

해별이네 이후로 찍었던 3편의 영화.

거기서 만났던 주연부터 단역까지, 모든 배우들이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우연이겠지.’

KNS 연기대상이 모든 연기자들이 모이는 축제는 아니니까.

하지만 괜히 입맛의 끝이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게 배우 구경을 하는 사이, KNS 연기대상이 시작되었다.

머릿속에 들어있던 여러 생각을 잠시 미뤄두고, 나는 한 명의 시청자처럼 연기대상을 즐겼다.

축하공연에 감탄하고, MC들의 만담에 웃음을 터트리고. 하나둘 정해지는 수상자들에 같이 축하하고.

그러다 마침내.

—올해 베스트커플상! 수상자는—!

아나운서로 유명했던 MC의 딴딴한 목소리가 두 사람의 이름을 호명했다.

—이강현, 최지연!

“으앗!”

“역시!”

“푸하하핫!”

우리 테이블이 들썩였다.

아이쿠야! 하는 표정을 지으며 뒤로 넘어가는 이강현과 그마저도 창피해하는 최지연. 그 모습에 빵 터져서 웃는 다른 배우들.

나는 가장 먼저 기립해서 박수를 보냈다. 그게 야속하다는 듯이 두 사람이 날 흘겨보며 무대 위로 올라선다.

—아, 정말··· 종갓집 막내딸 배우들 중에서 이 상을 승결이 형이 가장 바랐거든요. 저기 보세요, 신나하는 거. 제가 정말 좋아하는 형이라, 그래. 형이 저렇게 좋아하면 됐다 싶네요. 형, 사랑합니다.

—아니, 지금 상 이름이 베스트 커플상인데 올라와서 다른 사람한테 고백하는 게 무슨······.

—아, 물론 저랑 같이 호흡을 맞춰준 최지연 배우한테도 굉장히 고마운 마음입니다. 딱 거기까지. 사랑은 아녜요.

—저도 사랑은 아닙니다. 제 옆에 분을 제외한 모든 종갓집 막내딸 배우, 스태프, 모든 분들을 사랑합니다.

티격태격하는 모습에 MC들이 워스트커플상을 줘야 하는 게 아니냐며 끼어들었고, 시상식에 가벼운 웃음들이 끊임없이 흘렀다.

나도 그 중 한 명으로, 마치 관객처럼 연기대상을 직관했다.

적어도, 이 순서가 되기 전까진 그랬다.

“이제, 선배 차례네요.”

최지연이 싱긋 웃으며 나를 본다.

그녀뿐만 아니라 우리 드라마의 모든 배우들이 나를 보며 제각각의 표정으로 응원한다.

이강현은 제 차례인 양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그들과 눈을 맞추다, 무덤덤하게 시선을 돌렸다.

화려한 무대 위, 커다란 화면.

[신인상]

금빛 세글자가 떠오르며, 본격적인 수상의 막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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