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변호 (1)
“나 혼자 가도 된다니까.”
조수석에 앉아 툴툴거리자 현태 형이 핸들을 탁 치며 단호하게 말했다.
“야, 나도 한번 뵙고 싶어서 그래. 예전에 얼마나 맛있는 거 많이 해주셨냐.”
“언제적 얘길 하는 거야.”
고갤 흔들며 창밖을 돌아보았다. 홱홱 지나가는 풍경들. 저 도로 밖 풍경이 나에게도 꽤나 낯설었다.
그만큼 나도 엄마를 보러 가는 게 오랜만이라는 거지. 불효자 같으니라고.
“근데 꽤 멀긴 멀다. 왜 굳이 여기야? 이쪽이 어머니 고향인가? 뭐 나야 풍경도 예쁘고, 오랜만에 여행 가는 것 같아 기분 좋긴 한데···.”
“혹시라도 아버지가 못 찾았으면 해서.”
“아···.”
주변을 둘러보며 풍경에 감탄하던 현태 형이 얼른 입을 닫았다.
슬쩍 눈치를 보길래 웃었다. 뒤이어 형도 따라 웃는다.
“야이씨, 무서워서 뭔 말을 못 하겠네.”
“편하게 해. 난 이제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더욱 활짝 웃으며 구불진 길에 몸을 맡긴다.
그렇게 한 시간여를 더 달려 도착한 납골당.
가장 발이 번거로운 곳에 엄마의 자리가 있었다.
“야, 기억나냐? 예전에 내가 너네 집 처음 갔을 때. 그때 얼마나 집 돌아가기 싫었는 줄 아냐. 여긴 맛있는 음식도 있지, 쥬스도 있지, 게임기도 있지······.”
우린 그 앞에 서서 자연스레 옛날 얘길 주고받았다. 한참을 그렇게 떠들다가 현태 형이 전화 받는 척 자리를 비운다.
연기를 너무 못해. 티가 다 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툭 내려놓았다.
“흣짜.”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서, 가방을 뒤적여 트로피를 꺼냈다.
‘이거 보여?’
가장 낮은 자리. 엄마의 사진에 대고 무슨 뷰티 뮤튜버처럼 트로피를 이리저리 돌렸다.
그러다 살짝 민망해져 다시 가방에 넣었다.
옅게 웃으며 사진 속 엄마에게 눈을 맞췄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이미 위에서 봤겠지만, 나 결국 다시 시작했어. 연기.’
당연히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입가에 미소를 띈 엄마의 얼굴이.
—승결이, 재밌어?
그렇게 묻는 것만 같아서.
과거, 연기가 싫다 울부짖었던 나는 마침내 끄덕였다.
‘재밌어.’
여전히.
#
신인상을 받은 이후로 인터뷰가 줄줄이 이어졌다.
그때마다 가장 화두가 수상소감이라 곤욕스러웠다.
해별이를 넘어서겠다는 건 어떤 의미냐는 둥, 천만 영화를 찍겠다는 포부냐는 둥.
그냥 감사 인사만 하다가 끝낼 걸 그랬지.
나의 솔직함. 이대로 괜찮은가···.
그래도 마냥 정신없고, 곤욕스럽기만한 시간은 아니었다.
이따금 김성운이 쌓인 대본을 들고 오면 정신이 번쩍 들었고, 매주 주말이 되면 ‘그림자 변호’를 시청할 생각에 아침부터 즐거웠다.
그렇게 두 달.
들쭉날쭉하던 추위가 한풀 꺾이고 봄이 다가올 무렵, 대망의 12회가 방영되었다.
촉법소년이 주제였던 이번 에피소드의 마무리.
누군가는 분노하고, 누군가는 안타까워했으며, 누군가는 조용히 속을 끓였던 묵직한 에피소드가 깔끔하게 종결되었다.
찝찝함 따위 남지 않았지만, 생각은 또 많아지는 결말이었다.
‘이번 에피소드도 정말 좋았다.’
만족스레 웃으며 PD와 작가에게 잘 봤다고 연락하려는데, 스틸컷 몇 개가 지나고 예고편이 이어진다.
장훈이 과거 자신에게 누명을 씌우려 했던 검사와 만나는 장면과 임수영이 취조실에서 누군가를 싸늘하게 바라보는 장면.
긴박한 음악과 함께 여러 장면들이 교차되고.
하얀 타일 위에 눈이 덕지덕지 붙은 슬리퍼가 턱 하고 내디디며 화면이 암전되었다.
그리고.
⌜제가··· 제가 죽였어요.⌟
내 목소리가 흘러나오며 예고편이 끝났다.
이건 뭐랄까······. 갑자기 메인 빌런이라도 된 기분이다. 나조차도 혹시 내가 드라마의 흑막이었나? 싶을 정도.
연락하려던 윤지수 작가에게 먼저 연락이 왔다.
살짝 들뜬 목소리였다.
—뭐 하고 있었어?
“당연히 본방 보고 있었죠.”
하하 웃으며 말하자, 그녀가 물었다.
—그럼 예고편 봤겠네?
“네. 봤어요.”
—어땠어? 끝내주지? 안 그래도 이진태 PD가 마지막 에피소드 분류 초반에선 승결이 너한테 힘을 확 실어보겠다고 했었는데. 나 방금 보고 너무 만족스러워서 얼른 너한테 먼저 연락한 거야.
“하하, 제가 너무 중요한 인물처럼 나왔던데요.”
—중요한 인물 맞지. 작가인 내가 인정했으니 오피셜이야.
그렇게 못 박은 그녀가 가볍게 웃으며 통화를 마무리 지었다.
—아무튼, 얼른 이 PD한테도 연락 돌리고 오늘은 시청자 반응 좀 봐야겠어. 내용을 알고 있던 나도 예고편 보고 흥분할 정돈데, 아마 지금쯤 난리일걸?
전화를 끊고서,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설렘에 입꼬릴 올렸다.
지금까진 시청자 모드로 즐겼었는데, 이제부턴 출연자였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느낌이 완전 달랐다.
‘기대되네.’
내일이면, 최우진이 사람들에게 공개된다.
#
—그래서 다음 사건 대체 뭔가요?
—예고편을 엄청 짜집기 해놔서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더라. 이럴 거면 예고편 왜 보여줌?
—왜겠어ㅋㅋ 이렇게 난리 나라고겠지. 성능 확실하네.
—그나저나 마지막에 나온 목소리, 백승결 맞죠?
—네, 맞아요. 뮤튜버들이 바로 분석 영상 올렸더라고요. 중간에 발만 나온 장면도 백승결일 거래요.
—와, 지금까지 얼굴이랑 연기 보느라 몰랐는데, 백승결 목소리도 좋네요. 사기네.
—목소리 좋단 얘기 꾸준히 있었어요. 지금까지 배역마다 조금씩 톤을 바꿔서 그 진가가 잘 안 드러났었는데, 이번 목소리는 가장 본캐에 가까운 목소리라 너무 좋음.
—마지막 장면이라 그런가, 엄청 강렬하네. 이번엔 살인자 역할인가?
—이번에도 페이크일듯. 알고 보니 억울하게 몰린 거라던가.
—예측이 어렵네요. 윤지수 작가 특징이 이리저리 꼬는 거라······.
—다 필요 없고 오늘 방영이라 너무 좋네. 일주일 기다리라 했으면 어후, 아찔하다. 연기대상으로 회차 밀린 게 다행일 줄이야.
“확실히 반응 좋네.”
시청자 반응을 확인하던 양진호 CP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기대감을 한껏 머금은 그가 덧붙였다.
“오늘 어쩌면······.”
“CP님, 스탑. 스탑!”
이진태 PD가 얼른 그를 말렸다.
“그 될 것도 안되는 마법의 주문, 금지에요.”
“알았어, 알았어. 네 작품에 초 안 치니까 걱정하지 마.”
양진호 CP가 손을 휘적이며 이진태 PD를 안심시켰다.
그가 이토록 예민해진 건 20%를 뚫을 듯 말듯 정체되어 있는 시청률 때문이었다.
이미 역대급 시청률임에는 틀림없지만 20%는 이진태 PD 뿐만 아니라 KNS 드라마국 전체에 상징적인 숫자였다.
그도 그럴 게, 벌써 3년째 그 시청률을 뛰어넘는 주말드라마가 단 한 편도 없었다.
가뭄도 이런 가뭄이 없지.
“아무튼, 앞으로가 중요하다. 국장님까지 주시하고 계셔.”
양진호 CP가 부담 팍팍 뿌리자, 이진태 PD가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사뭇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오늘 기대해볼 만해요. 예고편도 제대로 먹혔고, 뉴페이스들도 대거 출연하는 에피소드니까.”
“그중에서도 백승결에 기대를 거는 거 아니고?”
이진태 PD가 씩 웃었다. 긍정의 의미였다.
그때, 옆에서 잠자코 지켜보던 유종원 PD도 대화에 끼어들었다.
“마침 신인상까지 받으면서 여러모로 잘 됐지. 승결이가 가진 이름값과 화제성을 합치면 오늘 정말······.”
유종원 PD가 마법의 주문을 외려 하자, 이진태 PD가 펄쩍 뛰었다.
두 사람을 보며 낄낄거리던 양진호 CP가 돌연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다.
“그나저나, 유종원이. 넌 왜 왔냐?”
“필요할 땐 그렇게 얼른 올라오라고 부르시더니. 역시 드라마 차별주의자.”
“······.”
황당한 표정으로 말문이 막힌 양진호 CP에게 이진태 PD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지금 밑에서 서은영 작가가 집필 중이래요. 그래서 이따 잠깐 회의하기로 했는데 시간이 좀 남아서 왔대요.”
“그러니까. 왜 굳이 이 방을 왔냐고.
···전혀 설명이 안 됐다.
“이 밤에 무슨 사랑방마냥······.”
“어차피 오늘 내로 퇴근 그른 사람들끼리 드라마나 보죠.”
유종원 PD가 능청맞게 웃으며 가져온 비닐봉투에서 맥주를 꺼내어 테이블 위에 진열했다.
“무슨 회사에서 술을.”
“저 뒤에 있는 건 위스키 아녜요?”
“······마실 수도 있지. 업무 시간도 아닌데.”
세 사람 모두 소파에 앉아 한 캔씩 나눠 들고서, 티비를 틀었다.
광고를 보면서 저 배우는 마스크가 어떻고, 저 배우는 카메라빨이 어떻고.
전, 현직 연출가들답게 직업병처럼 토론하는 사이, ‘그림자 변호’의 13화가 시작되었다.
다짜고짜, 유리문이 열리며 부산한 경찰서 안으로 한 남자가 들어선다.
백승결이 분한 최우진.
그 등장만으로 양진호 CP가 작게 감탄했다.
“허, 흡입력 좋고.”
이진태 PD가 입꼬릴 올렸다.
자신은 촬영장과 편집실, 그리고 여기서까지, 정말 수없이 봐온 장면이지만.
볼 때마다 감탄하게 되는 장면 중 하나였다.
작가의 필력과 PD의 연출, 그리고 배우의 연기의 삼박자가 제대로 맞아떨어졌달까.
뒤이어 최우진이 형사에게 다가가 자백하는 장면까지.
그 짧은 시간 동안 양진호 CP와 유종원 PD가 서너 번은 더 감탄했다.
그리고 ‘그림자 변호’라는 타이틀이 떠오르며 본격적으로 드라마가 시작되었다.
초장부터 확 조여졌던 극의 분위기가 풀어진다.
가벼운 성격의 장훈과 냉소적인 임수영의 케미가 주를 이뤘다.
박장대소하게 하는 포인트부터 실소를 자아내는 티키타카들까지, 위트있는 이야기들이 이어지다가.
⌜최우진 씨를 담당하신 장 변호사님은 개인적인 일이 있으셔서 오늘은 같이 안 왔어요. 저는 장 변호사님과 함께 일하는 임수영이라고합니다.⌟
임수영이 최우진과 만나면서 극의 분위기가 다시 가라앉았다.
두 사람의 씬을 지켜보던 양진호 CP가 말꼬릴 올렸다.
“둘 다 연기가 아주 물이 올랐는데?”
마치 제 자식이 칭찬받은 듯, 뿌듯한 얼굴이 된 이진태가 끄덕이며 말했다.
“현장에서도 다들 그 얘기였어요. 그래서 이 장면이 드라마 전체 통틀어서 스태프들이 꼽은 탑3가 됐죠.”
“요즘도 그런 거 하는구나? 우리 땐 탑5였는데.”
양진호 CP가 다섯 손가락을 펴 보이자 유종원 PD가 말했다.
“요즘 4, 5등을 누가 알아줍니까.”
“각박하다, 각박해. 아무튼, 나머지 탑1, 2는 뭔데?”
“앞으로 나와요. 이번 화는 아니고, 다음 화에서요.”
“그 장면들도 기대가 되는데? 탑2는 누구 씬이야?”
양진호 CP가 흥미로운 얼굴로 묻자, 이진태 PD가 답했다.
“박재준이랑 백승결이요.”
그 말에 유종원 PD가 재밌다는 듯 정리했다.
“가만, 탑3는 고하윤이랑 백승결. 탑2는 박재준이랑 백승결··· 전부 다 백승결이 들어가있네?”
그렇다며 재차 끄덕이는 이진태 PD.
양진호 CP가 티비에 눈을 붙인 채로 물었다.
“그럼 탑1은?”
“그 씬은······.”
마침 임수영이 떠나고 복잡한 표정이된 최우진의 모습이 화면에 잡혔다.
이진태 PD가 씩 웃으며 그를 가리켰다.
“백승결 단독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