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변호 (4)
[저거지? 저게 스태프들이 꼽았다는 그 두 장면이지?!]
양진호 CP가 보내온 문자에 이진태 PD가 미소를 머금었다.
업계에서 닳고 닳은 베테랑, 양진호 CP.
그가 지금 자신의 드라마에 얼마나 흥분했는지 훤히 그려졌다.
곧바로 그렇다 답장을 하고서 뿌듯한 얼굴로 고갤 든 이진태 PD.
그가 테이블 위에 올려진 초밥을 집으며 주변을 돌아봤다.
‘이쪽도 반응 장난 아니네···.’
윤지수 작가와 그녀의 보조 작가들이 나란히 앉아 다양한 표정을 갈아끼고 있었다.
최종 편집본을 보지 못한 보조 작가들 뿐만 아니라, 이미 이 회차를 여러 번(본인 말로는 열 번이 넘는다고) 본 윤지수 작가까지도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을 짓는다.
‘하긴, 나도 새로울 정돈데.’
비로소 시청자의 입장이라서 그런가.
가장 이 장면들과 오랫동안 씨름한 자신조차도 계속 새로운 면들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백승결의 연기에서 사소한 디테일들이 하나둘 보일 때마다 ‘이 부분을 이런 식으로 살렸었구나!’ 하는 감탄이 뒤를 이었다.
그가 촬영하면서 얼마나 많은 생각들을 하고 있는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괴물 같은 녀석···.
한편, 이진태 PD가 포장해온 초밥을 먹다가 어느 순간부터 젓가락질을 잊은 보조 작가들이 탄식했다.
“지금까지 무슨 감정 없는 로봇처럼 굴어서 그런가. 감정적으로 오픈되는 장면이 훨씬 크게 와닿는데요?”
“너무 처절해. 손 떨리는 거 봤어? 디테일이······.”
“표정은 또 어떻고. 어후, 왜 나도 눈물이 나냐···.”
이에 일찌감치 수저를 내려놓고 찻잔만 기울이던 윤지수 작가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더 놀라운 거 얘기해 줄까?”
“뭔데요?”
“방금 백승결 단독 씬. 그게 최대한 자제한 연기래.”
“자제요? 아까 혼자서 떠는 그 장면이요······?”
보조 작가 중 한 명이 황당한 표정으로 되묻자, 윤지수 작가가 이진태 PD를 보았다.
시선을 따라 보조 작가들의 이목이 줄줄이 집중되었다.
놀라운 얘기의 출처였던 이진태 PD가 자세를 고쳐앉으며 말했다.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저 장면을 촬영하는데 연기를 너무 잘하는 거야. 스태프들이 전부 다 감탄하고 있는데, 갑자기 한 번 더 하겠다고 하대? 그래서 왜 그러냐 물었더니, 너무 격했던 거 같대.”
그때를 떠올리며 헛웃음을 짓는 이진태 PD.
“난 그게 좋았다고 말하니까 자기 생각을 말하더라고.”
“뭐라고요?”
“이게 마지막 화도 아니고, 자기가 주인공인 건 더더욱 아닌데, 여기서 너무 강한 감정선은 오히려 독이 될 것 같다고.”
순간 작업실에 있던 모두가 작게 끄덕였다. 그 말에 납득한 거다.
“나도 이런 반응이었어. 거기다 대고 뭐라 해. PD도, 작가도, 주연도 아닌 단역이 극의 흐름을 내다보며 걱정하는데. 바로 납득했지. 그리고 확실히··· 독이 되고도 남을 만큼 엄청난 연기였거든.”
그때를 떠올리며 헛웃음을 짓는 이진태 PD였다.
뒤이어 보조 작가들이 낮게 감탄했다.
저것보다 더 격렬한 감정선의 최우진? 도무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그 촬영본은······.”
“그거? 백승결 매니저가 달라던데. 나중에 풀고 싶다고.”
“왜 우리가 안 풀고요?”
“애매하더라고. 우리가 지금 풀면 ‘이게 더 나은데, 왜 이거 안 썼지?’ 그런 소리 들을 게 뻔하니까.”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보조 작가들이 아쉬워하자 이진태 PD가 테이블에 올려둔 핸드폰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 그 영상 내 핸드폰에 있는데. 드라마 끝나면 한 번 볼래?”
“오, 좋아요!”
기대 어린 눈으로 들썩이는 보조 작가들.
때마침 중간 광고가 끝났다.
백승결의 연기에 대한 궁금증은 잠시 미뤄두고, 모두가 다시 드라마에 집중했다.
이전 장면의 강렬함을 지우려는 듯, 가벼운 이야기들로 완급조절을 하던 극의 내용이 다시금 내달리기 시작한다.
#
······최우진이 동생, 최선진과 만나 이야길 나누는 장면이 이어졌다.
자신의 죗값은 자신이 받겠다는 동생의 각오에 최우진은 생각을 바꿨다.
하지만 위증으로 수사 혼란을 야기시킨 최우진도 법적 문제를 피해가기 어려운 상황.
장훈은 그가 증거인멸을 할 수 있었음에도 하지 않았던 점과 재판 직전 인과관계를 바로 잡아 실체진실을 훼손하지 않았다는 점을 파고들었다.
이 시점에서 기자들이 이 사건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둘째 형을 죽여야만 했던 막냇동생과 그 동생을 지켜야 했던 맏형의 사연이 알려지며, 사람들의 관심이 확 몰렸고···.
결과적으로 최선진은 징역 4년, 최우진은 집행유예로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씁쓸한 승리였다.]
임수영의 낮으면서도 청아한 목소리가 담담하게 이어졌다.
[제2의 최선진, 제2의 최우진이 만들어져선 안 된다는 이야기들이 대중의 화두로 떠올랐지만, 뒤이어 터진 여러 사건들에 그저 잠깐의 가십으로 가라앉았다. 나는 그것이 그저 확 끓어오르고 식어버리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한계라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목소리를 배경으로.
[장훈 변호사는 이런 감정들이 차곡차곡 쌓여 언젠가 이 나라를 바꿀 거라고 믿는 듯했다. 여전히 이상한 사람이었다.]
장훈이 조수석에 쌓인 서류들을 정리했다.
빈 캐리어들을 치우고, 빈 화병엔 꽃을, 빈 어항엔 물을 채웠다.
그렇게 나레이션이 끝나고, 장훈의 시점으로 전개가 이어졌다.
그는 비로소 마지막 싸움을 준비한다.
과거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 했던 비리 검사.
지금까지 더 많은 죄를 저지른 그의 실체를 밝히기 위한 싸움이었다.
······평소와 다르게 무거운 표정을 짓는 장훈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며 드라마가 끝났다.
아쉬움 가득한 표정들을 보며 이진태 PD가 물었다.
“다들 어땠어?”
“이제 정말 최종장 답네요.”
“14화까지 와서 또 연기에 놀랄 줄은 몰랐어요. 배우분들 연기가 아주···. 특히 최우진 캐릭터는 진짜 공부 많이 되네요. 작가님 대본을 보면서 이걸 대체 누가 어떻게 살릴까 궁금했거든요.”
“맞아요. 근데 백승결 배우가 작가님이 의도하신 걸 완벽하게 살린 것 같아요.”
줄줄이 이어지는 보조 작가들의 평가에 윤지수 작가가 딱 잘라 말했다.
“거짓말. 내 대본 속 최우진과 백승결의 최우진은 좀 다르지 않아? 백승결만의 최우진이 만들어졌잖아.”
어미 닭 바라보는 병아리처럼 눈을 깜빡이며 윤지수 작가를 보는 보조 작가들.
그녀들이 차마 말하지 못했던 것을 들춘 윤지수 작가가 서늘하게 웃었다.
“이 말이 하고 싶었지?”
“······.”
“너네가 그걸 모를 리 없지. 그거 못 보는 까막눈들을 내가 제자로 데리고 있을 리가 없잖아?”
“하하, 그거 이 친구들 칭찬하는 거 맞죠?”
이진태 PD가 슬쩍 끼어들자 윤지수 작가가 픽 하고 웃는다.
그리고 보조 작가들을 훑으며 말했다.
“근데 웃긴 건, 나조차도 원래의 최우진보다 백승결의 최우진이 더 마음에 든다는 거야. 안 들 수가 없지. 내 작품을 빛나게 해주는데.”
그녀까지 백승결의 최우진이 더 났다고 평가하자, 보조 작가들도 하나둘 속마음을 풀어냈다.
“솔직히··· 신기해요. 저흰 알잖아요. 작가님이 어떤 의도를 갖고 최우진을 만들었는지. 근데 백승결 배우님은 본인 식으로 최우진을 해석하면서도 그 의도를 결코 벗어나지 않았어요.”
“맞아요. 분명 작가님이 만든 최우진과는 뭔가 다른데. 그 미묘한 다름이 캐릭터를 더 단단하게 만든다고 해야 하나.
“아는 거지. 내 의도도. 그리고 그걸 더 잘 살릴 방법도. 아까 흐름을 읽는 것 봐도.”
제자들의 대답에 만족한 스승이 끄덕인다.
“그래서 내가 누누이 말하는 거야.”
그리고 찻잔을 들어 올리며 백승결을 떠올렸다.
“훌륭한 배우는 이미 작가나 다름없다고.”
#
14화의 시청률이 26%를 돌파했다.
전 방송사 통틀어서 현재 방영 중인 드라마 중 가장 높은 시청률이었다.
자연스레 높은 시청률만큼 파급력도 훌쩍 커졌다.
커뮤니티나 뮤튜브, SNS에 짤들이 올라오는 건 물론이고, 격한 반응은 현실까지 튀어나와 어딜가나 ‘그림자 변호’ 얘기가 빠지지 않았다.
그리고 차례대로 방영된 15, 16화.
최우진과 최선진 형제의 씁쓸한 해피엔딩 이후로, 장훈과 비리 검사의 치열한 공방이 시작되었다.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며 다다른 클라이맥스.
모든 것이 까발려진 비리 검사의 실형으로 장훈의 싸움이 마무리되었다.
[휴, 또 한 사건 끝났구만~.]
과거의 자신과 피해자들···.
그리고 미래에 만들어졌을 수많은 피해자를 구해낸 장훈은, 그제야 이전처럼 실없이 웃었다.
장면이 전환되었다.
꽤나 시간이 흐른 듯한 연출이 지나가고, 예전과는 달리 멀끔해진 ‘장훈 변호사 사무실’에는 새 식구들이 들어왔다.
금붕어 세 마리.
녀석들을 구경하던 임수영이 허리를 폈다.
“새로 뽑은 지원자는 면접 언제 온대요?”
“글쎄.”
“···?”
허무한 대답에 임수영이 빤히 바라보자, 장훈이 말했다.
“편할 때 오라고 했거든.”
“무슨 면접을······ 어떤 사람인데요? 경력은 있어요?”
“없지. 경력 있는 변호사가 여길 왜 오나.”
“······.”
말문이 막혔다. 인정이었다.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린다.
자연스레 두 사람의 시선이 돌아갔다.
끼이이익!
언젠가 다른 장소에서 울려 퍼졌던 것 같은 날카로운 소리 뒤로.
턱—.
눈 붙은 슬리퍼 대신, 광택 있는 구두가 사무실을 가로질렀다.
한참 동안 구두를 비추던 화면이 천천히 올라가 남자의 얼굴을 잡았다.
“면접 보러 왔습니다.”
최우진이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그 순간.
—으아아아···! 미친, 소름!
—우진아! 이럴 줄 알았어! 한 에피소드로 소모되기엔 너무 아까웠다구!!
—뭐야 이미지 완전 달라졌어. 최우진 존잘이네.
—경찰서 들어가던 장면이랑 똑같이 신발 클로즈업 되는 연출 미쳤다······.
실시간 반응란이 뒤집어졌다.
—이제 장훈, 임수영, 최우진 이렇게 세 명이서 변호하는 거죠? 이거 시즌2 떡밥 맞죠?
—맞다고 해요, 얼른. 방송국 찾아가기 전에.
—이건 진짜 시즌2 나와야 된다. 진심!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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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난리야. 이렇게 엔딩까지 반응 좋은 드라마가 몇이나 있었나 싶을 정도로.”
김성운의 말을 들으며 맛동산을 아그작 씹었다.
깜짝 놀랐다. 저 말을 들어서 그런가? 평소보다 몇 배는 맛있네.
“어제 1팀장님이랑 카페 갔는데, 한 시간동안 ‘그림자 변호’ 얘기가 몇 번이었더라······.”
그러면서 핸드폰을 뒤적이는 김성운.
기록이 습관인 그였다. 이 일을 하면서 갖게 된 직업병이라고.
종종 홍보팀에 털리는 게 문제지만···.
“정확히 일곱 번. 그중에서도 네 얘기가 5할이 훌쩍 넘어. 주식도 그 정도면 회사를 통째로 사들일 수 있는데, 이 정도면 네 드라마라 해도 이상할 게 없겠어.”
“그렇지 않아도 그냥 제 드라마 하래요.”
“누가?”
“박재준 선배님이요.”
크게 웃음을 터트린 김성운이 ‘괜찮은 기삿거린데···.’라며 메모한다.
이제 보니 홍보팀과 한패네. 털린 게 아니라 갖다 바친 거였어.
“아, 그리고 다음 주쯤에 프로필 사진 좀 추가로 찍자.”
“프로필 사진이요?”
“응.”
대본에서 시선을 떼고 끄덕거리는 김성운을 보았다.
세상 뿌듯한 얼굴이었다.
“이제 네 프로필 달라는 데가 넘쳐날 것 같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