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큰 운석이 되어줄 배우 (1)
갑작스러운 박혜정 작가의 방문에 매니지먼트 하람은 한바탕 소란스러워졌다.
흥행 작가들마저 한 수 접을 수밖에 없는 대배우들이 여럿 소속된 하람이지만, 박혜정 작가는 일반적인 흥행 작가가 아니었다.
게다가 오늘은 등에 멀티온이라는 거대 플랫폼을 업고 나타났지.
이에 몇 번 안면이 있던 본부장이 직접 내려와서 그녀를 맞이했지만···.
‘저 그냥 편하게 온 거예요. 본부장님도 편하게 일 보세요.’
혼자 있겠다 말하고서 미팅룸에 자리를 잡았다.
대본을 꺼내어 메인 빌런, 서귀호의 대사에 밑줄을 긋고 있는데, 미팅룸 문이 열리며 그새 더 핼쑥해진 조규필 감독이 터덜터덜 들어왔다.
자기 발로 찾아왔지만, 여길 왜 왔는지 영문을 모르는 표정이었다.
“작가님··· 저희 어제 회의했잖아요···.”
“그치?”
“대표님도 생각해보신다고 했잖아요.”
“그랬고.”
“근데 왜 여기 와 계세요······.”
조규필 감독의 탄식에 박혜정 작가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걱정 마, 너도 곧 올 거라고 말해놨어.”
“그 말이 아니잖아요!”
벌컥 목소릴 높인 뒤, 얼른 옆에 앉으며 재촉하는 조규필 감독.
“정말 백승결··· 서귀호 시키실 거예요?”
“모르지. 그걸 알아보러 온 거잖아.”
태연하게 던진 대답에 조규필 감독은 곧 기절할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그녀가 마음만 먹으면 결국 백승결이 서귀호 역할을 맡게 될 게 뻔했기 때문이다.
“휴······.”
한숨을 푹 내쉬며 주변을 둘러봤다. 아직도 어처구니가 없다. 자신이 지금 하람에 와있다는 게.
아무리 그래도 너무 경우 없이 찾아온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든 조규필 감독이었지만, 이내 그러려니 했다.
박혜정 작가라는 걸출한 작가가, 멀티온의 한국 첫 오리지날 드라마를 맡았는데, 그런 그녀가 이름값이 높지도 않은 배우를 보고 싶다며 찾아왔다?
이 정도면 없던 경우가 생긴다. 있다 못해 넘쳐서 입구부터 이 방까지 레드카펫을 깔아줘도 납득할 판이다.
“그래서. 배우는 언제 온대요?”
“한 시간 안에 올 거라던데. 지금 3, 40분 정도 됐으니까 곧 오겠지.”
“약속이라도 좀 잡으시지.”
“싫어. 그럼 3, 4시간 뒤에 오라고 했을걸? 메이크업까지 싹 해서 들어오겠지. 그럼 내가 보고 싶은 날 것 그대로가 안 느껴져.”
무슨 회도 아니고···.
그의 작은 중얼거림을 깔끔하게 무시한 박혜정 작가가 물었다.
“카메라는?”
입맛을 다신 조규필 감독이 메고 온 가방에서 작은 캠코더 하나를 꺼냈다.
이어서 삼각대까지 꺼내어 능숙하게 테이블 위에 설치한다. 그들의 맞은편 자리를 향하도록.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백승결과 그의 매니저가 도착했다.
급하게 찾아와 미안하다는 사과와 간단한 인사가 오가고, 매니저가 자리를 비켜주었다.
본격적으로 오디션이 시작된 거다.
‘카메라가 실물을 다 못 담는 거였네.’
백승결의 얼굴을 좀 더 자세히 뜯어본 박혜정 작가가 속으로 감탄했다.
잘생긴 것도 잘생긴 건데, 대원군에서나 프로필 사진에서 느꼈던 그 묘한 느낌이 더욱 진하다.
분명 부드러운 인상인데, 그 너머에 서늘한 무언가가 넘실댄달까.
그녀가 한참 동안 백승결의 얼굴만 뚫어져라 바라보자 조규필 감독이 슬쩍 불렀다.
“작가님.”
“아, 네. 하하···.”
가볍게 웃은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대본을 건넸다.
“이 작품은 주인공 임훈이 격투기 선수로 고군분투하는 내용이에요. 선한 사람이지만, 내면 아주 깊은 곳에 악한 모습도 품고 있는 주인공 임훈의 갈등. 이게 주요 테마죠. 그리고 우리가 승결 씨에게 보고 싶은 역할은 거기, 밑줄을 그어놨어요.”
그러자 백승결이 재빠르게 대본을 훑었다.
몇 장 넘기지 않아 튀어나온 이름에 그가 중얼거린다.
“서귀호···.”
“맞아요. 임훈과 같은 체급인 웰터급 세계챔피언이자, 천재 사이코패스.”
그녀의 설명에 백승결이 눈을 빛냈다.
“그게 그 서귀호란 사람이에요.”
작게 끄덕이며 대본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백승결.
그에게 짧은 시간을 줬다. 대략적인 시놉을 파악하고, 그저 대사를 읽는 것이 아닌 최소한의 감정은 잡을 수 있도록.
주어진 시간이 지나고, 백승결이 목을 가다듬으며 대본 리딩을 준비한다.
박혜정 작가는 배우만큼이나 이 상황에 몰입하기 위해 자신이 쓴 대본을 빠르게 훑었다.
[터져 나오는 환호성과 함께 서귀호가 상대 선수를 쓰러트린다. 급히 달려와 뜯어말리는 레프리에, 하는 수 없이 몇 걸음 물러난 그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그러다 조규필 감독의 침음성을 듣고 고갤 돌렸다.
그는 어느새 넋이 나간 표정으로 백승결을 보고 있었다.
의아해하며 백승결을 보았다.
백승결은 아예 대본에서 시선을 떼고,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
웃을 때가 전혀 생각나지 않는 서늘한 눈빛과, 달싹이는 입술.
대본에서 묘사된 대로 아쉬움 가득한 백승결의 얼굴을 보는 순간.
머릿속에만 있던 장면이 확 하고 튀어나왔다.
귓가에 광기 어린 함성이 밀려들고, 조명이 흩뿌려지며, 핏물이 비산하는······.
링 위에서.
백승결의 시선이 천천히 떨어졌다.
넝마가 되어 바닥에 쓰러진 상대 선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
뜨거운 한숨이 입술을 비집고 뿜어진다.
미간이 꿈틀거리고, 아쉬움 그득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주지.”
어쩐지 상대의 팬이 된 것처럼.
팬으로서 응원하는 것처럼 간절해보였다.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곧, 표정을 바꾸며.
“그럼, 죽일 수 있었을 텐데.”
싸늘한 목소리가 단두대처럼 뚝 떨어진다.
박혜정 작가가 두 손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이거였다. 이 장면은 이토록 서늘해야 했어!
마침내 백승결이 마지막 지문을 연기한다.
아주 조금, 아주 천천히 입꼬릴 들어 올린 그의 얼굴은 그가 지금까지 보여준 어떤 표정과도 달랐다.
그 순간, 선과 악의 경계선에 있다고 생각했던 배우가.
‘서귀호다. 이건 무조건 서귀호야···!’
성큼. 완전한 악의 영역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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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지먼트 하람의 본부장실.
소파에 나란히 앉은 1팀장과 홍보팀장이 한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엔 중년의 끝줄에 서 있는 듯한 남자가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이 방의 주인인 그가 희끗희끗해진 머리를 쓸어넘기며 핸드폰 너머의 상대에게 말했다.
“네, 대표님. 그러시죠. 일단 성운이 올라오면 보고 듣고 다시 연락드릴게요.”
곧이어 전화를 끊은 본부장이 소파로 돌아왔다.
기다렸다는 듯이 홍보팀장이 묻는다.
“대표님은 뭐라셔요?”
“이렇게 된 거 잘 메이드 해보자고. 그런 드라마에 한 회사에서 배우 둘이 들어가는 게 흔한 일은 아니니까.”
“대박이긴 하죠. 성사만 한다면······.”
홍보팀장이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먹음직스러운 음식임은 분명한데, 그걸 먹을 수 있을지가 문제였다.
“슬쩍 기자들한테 흘려볼까요?”
“그러다 반응 안 좋으면 오히려 손 뗄 수도 있어. 지금은 작감 마음에 드는 게 우선이야.”
“전적으로 승결 배우한테 달린 거네요.”
홍보팀장의 말에 본부장이 끄덕였다.
“이렇게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 하는데 말이지. 신인이나 마찬가지인 느낌이라 영 불안하네···.”
“그래도 전 꽤 긍정적으로 보긴 해요. 박혜정 작가가 글빨도 좋지만, 배우 보는 안목도 무시 못 하잖아요. 그런 양반이 아침부터 본부장님께 그 호들갑을 떨 정도면, 분명 백승결한테 뭔가를 봤다는 거고요.”
짧게 주억거린 본부장이 1팀장을 바라봤다.
자네 생각은 어떠냐는 듯한 뉘앙스에 축 늘어져 있던 1팀장이 허리를 세운다. 마른 입술을 적신 그가 머릴 긁적였다.
“전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고작 몇 편의 작품으로 배우를 판단하기엔 뭐랄까······.”
말끝을 흐린 그가 손날을 세워 물결을 그렸다.
“파도 같잖아요. 배우들의 기복이란 게.”
“그렇지. 심지어 전적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럼에도 기대는 해봄 직한 것 같아요. 지금까지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고, 성운이도 엄청 열심이고, 게다가······.”
얼른 이유를 내놓으라는 본부장의 눈빛에 1팀장이 덧붙였다.
“지난번에 이태관 배우가 그러더라고요. 백승결 그 친구 안에 폭탄이 들어있다고.”
“폭탄? 펑 터지는 그 폭탄?”
“네. 그만큼 포텐셜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 폭탄이 터질 때쯤, 꼭 다시 한 작품에서 호흡을 맞추고 싶은 배우라고 하더군요. 근데 이태관 배우 아시잖아요. 사람은 좋아도, 연기에 관해서 만큼은 까칠하기가 사포 같기로 유명한 거.”
“그렇지, 그렇지.”
동조한 본부장이 ‘그 정도로 높게 평가했단 말이지?’ 라고 중얼거린다.
그가 코 아래를 슥 훔치며 말했다.
“이 배우가 봤다는 그걸, 밑에 있는 작감도 봤으면 좋겠는데······.”
걱정과 기대가 뒤섞인 목소리가 방안에 울리고, 때마침 1팀장이 테이블 위에 놓여진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본부장과 홍보팀장의 눈이 그에게로 향했다.
“미팅 끝났나 봐요. 성운이 올라온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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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어땠어?”
본부장실이 이렇게 생겼구나···.
그런 구경을 하기도 전에 가죽 소파에 앉아 세 사람의 얼굴을 마주했다.
홍보팀장과 1팀장, 그리고 본부장까지.
홍보팀장을 제외하곤 오늘 처음 보는 얼굴들인데, 첫인상을 가늠하기도 전에 극적인 표정 변화가 더 눈에 띈다.
얼른 아래에서 있었던 일을 고하라고 닦달하는 듯한 얼굴이랄까.
“박혜정 작가님이···.”
세 사람의 뜨거운 시선을 받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곧 다시 보자고 하셨어요. 마커스필름에서 오늘 중으로 연락 갈 거라고.”
그러자 본부장이 들썩거렸다.
“그, 그 정도면 긍정적인 거 아닌가?”
“완전 긍정이죠. 지금 상황에서 박혜정 작가가 절대갑일텐데.”
홍보팀장의 말에 끄덕이는 세 사람.
보고가 다 끝났다는 듯 가만히 있자, 김성운이 나를 툭툭 친다.
“그것도 얘기해야지.”
“···?”
무슨 소린가 하고 갸우뚱하자 그가 대신 세 사람에게 말해버렸다.
“박혜정 작가가 승결이 리딩 보더니, 촬영장에서 이렇게만 연기해주면 업고 다니겠다 했대요.”
난 또, 뭔가 했네.
진지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이던 세 사람이 웃음을 터트렸다.
특히 가장 박장대소한 홍보팀장은 얼른 김성운에게 신신당부까지 한다.
“그거 꼭 사진으로 남겨줘요. 꼭.”
“물론이죠. 제가 영상으로 찍어올게요."
뭐야, 왜 저렇게들 진지해? 그거 장난 아니었어? 박혜정 작가 성향이 혹시 한다면 하는 사람, 뭐 그런 거야?
한결 가벼워진 분위기 속에 본부장이 정리하듯 물었다.
“어쨌든, 분위기가 좋았다?”
“더할 나위 없이요.”
김성운이 확신 어린 말투로 답하자 본부장의 눈이 잠깐 나에게 멈춰 섰다. 그러더니 뭔가를 유심히 살피다가 돌연 1팀장에게 말했다.
“작감도 봤나 봐, 그걸.”
“그러게요.”
두 사람이 웃는다.
갑자기 뭘 봤다는 거지?
그때 홍보팀장이 이걸 안 물어볼 뻔했다며 큰소리로 웃었다.
“정작 어떤 역할이지 안 물었어요, 우리. 다들 멀티온이 만드는 드라마라는 거에만 꽂혀서~.”
“그러네. 어떤 역할이었어요?”
정작 중요한 걸 안 물었다며 나를 보는 1팀장.
사실 나에게도 역할이 가장 중요했다.
소재에 끌렸고, 멀티온이라는 든든한 뒷배까지 있지만.
어쨌거나 내 요즘 관심사는 기존의 이미지를 벗어내는 데 있었으니까.
“주연이었어요.”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주연이 아니면 작감이 이렇게 급하게 직접 찾아올 리가 없지.”
“주인공은 신승찬 배우고, 그럼 백승결 배우는 어떤 역할이지? 주연이 많은가?”
그리고 아주 절묘하게.
“일단 악역인데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역할이 굴러왔다.
서귀호.
그 지독한 악역에 대해 설명하자, 듣는 이들의 표정이 점점 더 상기되어간다.
“아, 아니··· 쭉 들어보니까 그 정도면 주인공급 아닌가?”
“그러게. 굉장히 중요한 역할인 것 같은데?”
홍보팀장과 1팀장의 평가 뒤로, 잠자코 듣던 본부장이 손바닥을 비비며 흥분을 털어냈다.
그가 벽에 걸린 시계를 스윽 보더니 물었다.
“이제 마커스필름에서 연락 오면 마무리 지을 일만 남은 건가?”
그의 말에 브리핑 내내 흐뭇한 얼굴이던 김성운이 결연한 얼굴로 끄덕였다.
“그래야죠. 가장 중요한 얘기가 남았으니까.”
······그리고 몇 시간 후.
김성운이 말했던 ‘가장 중요한 얘기’가 속전속결로 매듭지어졌다.
총 8부작. 6회 출연에 회당 2천.
내가 ‘악의 링’에서 받게 될 개런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