잽 (1)
“운동 이제 끝난 거야?”
광활한 거실 소파에 늘어져 있던 최영기 실장이 몸을 일으켰다.
대리석 위에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슬리퍼를 찾아 신고,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닭가슴살이 다 떨어졌더라고. 그래서 시켜놨어. 곧 올 거야.”
말없이 짧게 끄덕거린 신승찬이 소파에 앉았다.
거실만큼 넓은 소파 테이블 위엔 어제 보던 대본들이 잔뜩 쌓여있었다.
‘악의 링’ 대본들뿐만 아니라, 임훈 역에 도움이 될만한 대본, 자료들이었다.
최영기가 귀를 후비며 그중 하나를 집어 든다. 만화책이었다.
“하비 덴트······이거 그거 아닌가? 조커 나오는 영화에 같이 나왔던.”
“맞아요, 그거.”
“이게 임훈이랑 무슨 상관인데?”
“조커가 하비 덴트를 타락시키는 내용이라, 우리 드라마랑 구도가 비슷해요. 참고할 만하죠.”
“오호, 그래? 나도 그 영화 봤는데 왜 하나도 기억이 안 나냐. 졸았나.”
킬킬거리는 최영기에게서 시선을 뗀 신승찬이 ‘악의 링’ 대본을 집어 들었다.
이미 10년은 묵은 종이마냥 너덜거리는 대본을 또다시 넘긴다.
대화상대가 없어진 최영기 실장이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그 자식들을 어떻게 엿 먹이지?
단번에 ‘그 자식’이 누군지 눈치챈 신승찬이 시선은 대본에 둔 채로 툭 말했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마요. 홍보팀 꼴 날라.”
“야, 그건······ 하아. 누가 홍보팀장이 갑자기 올 줄 알았나? 안 보이는데선 나라님도 욕하는 건데. 그 덕에 내가 진짜 매일 가서 빌었잖냐. 쪽팔리게. 아, 생각하니 또 열 뻗치네.”
쯧, 하고 혀를 찬 그가 하람에 와서 되는 일이 없다며 불평을 늘어놓는다.
“오늘도 회의 없어요?”
“어? 어, 어. 없어. 김성운 그 새끼, 백승결 쫓아다니느라 바빠. 보나 마나 ‘악의 링’ 캐스팅도 김성운이 발품 팔았겠지. 1팀장이나 본부장이 도와줬을 수도 있고. 안 그럼 백승결 같은 놈이 박혜정 작가 눈에 들었을 리가 있겠어? 옘병.”
그가 혼자만의 망상으로 섀도복싱을 하거나 말거나, 신승찬은 본인이 하려던 말만 이어갔다.
“회의는 빼먹지 말아요.”
“안 빼먹는다니까? 너 나 못 믿냐?”
“실장님, 지금 2팀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잖아요.”
“······.”
“그러면 우리만 바보 되는 거예요.”
그 말에 잠시 쭈글거렸던 최영기가 반색하며 말했다.
“너도 슬슬 백승결이 거슬리기 시작하는구나? 그치? 그래, 그 재수 없는 자식. 해별이때부터 내가 알아봤다고. 딱 네가 싫어할 거 같아서 내가 견제한 거거든!”
대답은 없었다.
신승찬이 말없이 대본만 훑는다.
민망해진 최영기가 헛기침을 하는데, 마침 벨이 울렸다.
“어, 왔나 보다. 하아··· 전원주택은 이게 문제야. 택배를 모시러 가야 돼.”
벌떡 일어난 최영기가 문을 열고 나가버리고.
다음 장을 넘기던 신승찬의 시선이 대본에서 떨어졌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그가 꼬고 있던 다리를 풀었다.
그리고 목을 풀었다.
“흠흠. 그나마···.”
고개를 적당히 들어 올리고 앞을 보며.
낮고, 서늘하게.
“그나마 볼만할 테니까.”
툭 던지듯 내뱉었다.
“······.”
잠시 멍하니 멈춰있다가, 미간을 찡그리며 갸웃거렸다.
“쓰읍······이 느낌 아니었는데.”
#
텅! 텅!
샌드백이 흔들리며 쇠사슬이 요란을 떨었다.
내 몸도 다를 게 없었다.
아침부터 개인 PT 샵에서 온몸을 혹사시켜 근육들이 비명을 지른다.
하지만 정신은 어느 때보다 또렷하다.
‘서귀호라면 이럴 때 어떤 생각을 할까?’
그에겐 저 출렁거리는 샌드백이나, 인간이나 다를 게 없을까?
아니지, 그러면 왜 그토록 인간을 죽여보고 싶어 할까?
어쩌면 그 이유가 ‘가능해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샌드백과는 다르게 인간은, 죽이는 게··· 가능해서.
——!
공이 울렸다.
이제 쉬어도 된다는 신호.
샌드백을 힘껏 두드리려던 주먹과 발을 툭툭 털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머릿속에 들어찬 서귀호를 밀어내고 시선을 돌리는데, 매트 바닥에 앉아 나를 올려다보는 두 사람이 보였다.
“우와, 눈빛 뭐야······.”
초반에 나를 봐줬던 코치와.
“저 눈빛이었어요, 저 눈빛. 저거 보고 저도 모르게 힘을 줘서······.”
지난번 나와 스파링을 했었던 아마추어 선수였다.
서귀호와 샌드백에만 집중하느라 구경하는 것도 눈치 못 챘네.
“미안해, 승결아.”
눈이 마주치자 선수가 사과를 했다. 몇 번짼지 모르겠다. 눈만 마주치면 사과한다.
매번 괜찮다고 말했지만, 선수는 과한 스파링을 한 것에 대해 계속 미안해하는 중이다.
상처도 다 나았는데 말이지.
옆에서 코치가 콧잔등을 긁적였다.
“눈빛 보고 쫄아서 순간 자기도 모르게 세게 때렸다길래 뭔 개소린가 싶었는데······ 확 이해 가네.”
“그쵸?”
“근데 그것뿐만이 아니던데? 방금 전 자세가······.”
“완벽하죠? 펀치력도 상당해요. 완전 초보였으면 그 눈빛에 쫄지도 않았을 텐데, 애초에 초보라고 부르기 뭐할 정도로 잘하니까······. 한번 알려준 건 까먹질 않아요. 심지어 링 위 실전에서조차도요.”
“근데 왜 배우를 해? 이거 시켜야지.”
“그러니 관장님이 저러고 계시죠.”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나도 덩달아 그들 시선이 향하는 곳을 보았다.
그곳엔 체육관 관장이 날 보며 주문을 외듯 중얼거리고 있었다.
“탐난다, 탐나···.”
그 모습을 본 코치가 콧방귀를 뀐다.
“근데 생각해 보니 나 같아도 안 하겠다. 배우가 훨씬 잘 벌 텐데. 게다가 몸도 혹사 안 하고. 개꿀······.”
“일 거 같아요, 진짜?”
선수의 물음에 코치가 나를 본다.
그가 바람 빠지는 소릴 내며 덧붙였다.
“은 아닐지도······.”
내 몰골이 그렇게 심각해?
거울을 보니 그럴 만도 했다. 살이 더 빠져서 광대가 도드라져 보인다. 그 아래로 그늘이져 사람이 좀··· 피폐해 보인다. 마음에 쏙 들게.
‘좋아, 점점 더 서귀호에 가까워지고 있어.’
마침 공이 울렸다. 그만 쉬라고.
한숨을 내쉬면서도 다시 샌드백 앞에 섰다.
마치 촬영에서 컷과 컷 사이에 ‘연결’을 잡는 것처럼, 아까와 최대한 비슷한 자세를 만든다.
그리고 어디까지 했더라?
그래. 죽이는 게······.
텅——!
가능해서.
#
공이 치자마자 곧바로 주먹을 내지르는 백승결을 보며, 코치와 아마추어 선수는 헛웃음을 삼켰다.
진짜 지치지도 않나?
운동 밥을 먹는 그들로서도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벌써 6라운드째 지치지도 않고 샌드백을 두드리고 있잖나.
무슨 선수냐고. 지독하다, 지독해······.
“야, 근데······.”
“네.”
멍하니 백승결을 지켜보던 코치가 고갤 돌렸다. 내심 놀랐다. 얘가 이렇게 오징어였나 싶어서.
당분간 거울은 안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오징어에게 물었다.
“선수는 너 아니냐? 연습 안 해?”
“저 오늘 운동 끝났는데요?”
“···넌 저걸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냐? 너보다 재능 있는 친구가 노력까지 배는 하는데 심지어 그게 시합 때문이 아니라 연기 때문이잖아. 넌 뭐 막 느끼는 게 없어?”
“있죠. 느끼는 거 있죠.”
끄덕거린 선수가 주섬주섬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이건 소장각이란 거. 지난주에 같이 찍은 사진이 좋아요 5천개가 넘었거든요. 팔로워도 백 명이나 늘고.”
“······.”
“허락도 받았어요. 오히려 매니저님이 영상 찍어오라고 미션까지 줬다던데요.”
“······.”
“이것만 찍고 저도 좀 더 연습을···.”
“야야, 집중해. 수평이 안 맞잖아. 어, 그래. 그 구도 좋다. 그거 나도 올리게 에어드랍 좀.”
“저 갤랙신데요.”
핸드폰 앞에 머리통을 모은 두 사람.
뒤에서 관장의 한숨 소리가 땅이 꺼질 듯 울려 퍼진다.
그런 관장의 한탄 따위 안중에도 없는 두 사람이 촬영감독마냥 예술혼을 불태웠다.
화면을 통해 보는 백승결의 모습에 코치가 또다시 감탄한다.
“그나저나 지린다, 진짜. 드라마 언제 방영이라고?”
#
한편, 매니지먼트 하람의 홍보팀.
이곳도 ‘악의 링’과 백승결에 대한 이야기로 시끄럽긴 매한가지였다.
다만 좋은 소식보다 그렇지 않은 소식이 많다는 게 문제였다.
“엄마, 깜짝이야!”
“왜? 또 왜?”
소리가 난 쪽으로 직원들이 몰려들었다.
비명의 출처인 직원이 모니터 화면을 본 채로 굳어있었다.
[한국인이 세계챔피언이고, 주인공이 세계 2위 도전자? 복싱도 아니고 종합격투기로? 아무리 드라마라지만 적당히 양념을 쳐야지. 이게 말이 되나. 코미디다, 코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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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명의 원인이었다.
이를 본 또 다른 직원이 질겁하며 들고 있던 커피잔을 다른 손으로 붙들었다.
“어우, 모니터에 커피 뿌릴 뻔.”
“팀장님이었으면 뿌렸다.”
옆 직원이 중얼거린다.
뒤늦게 다가온 직원은 이 글에 대한 반응이 궁금한 눈치였다.
“댓글 한번 볼까요?”
“굳이? 좋싫비로 따져봤을 때, 이거 보면 진짜 얘 커피 뿌릴 거 같은데.”
“······방수 아닐까요?”
“방수겠냐.”
“아니어도 팀장님이었으면 뿌렸다.”
바퀴벌레처럼 기어 나오는 악플과 비난에 직원들이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백승결이 메인 빌런을 맡았다는 소식까지 전해지며 사람들의 반응은 더욱 냉담해졌다.
—난 꽤 기대되는데. 격투기 소재가 한국에서 시도하기엔 좀 어색한 건 인정. 하지만 연기력으로 커버 가능하지 않을까? 신승찬에 백승결이면···.
—백승결은 좀 약한 듯. 심지어 악역? 맨날 불쌍한 척만 하던 애가 악역이라니. 상상도 안 간다. 희대의 미스 캐스팅이 될 것 같은데.
—애초에 연기력으로 커버 가능한 문제도 아님. 비리비리한 애들끼리 싸우는 게 박진감 넘칠 리가ㅋㅋㅋㅋ
—격투기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존나 기대 1도 안 됨. 자세 어색한 거, 대역 쓴 거 전부 티 날 텐데. 벌써 안구 테러다.
—그래도 박혜정 작가면 믿어볼 만하지 않나?
—이렇게 존나게 욕해도 결국 다 볼 거면서.
······대략 이런 상황.
그래도 명색이 하람의 홍보팀 아닌가.
그들에겐 다 계획이 있었다.
“이 타이밍인 것 같다.”
홍보팀장이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김 팀장님이 준 승결 배우 샌드백 치는 영상. 그거 이제 뿌리자.”
“자, 드가자!”
“바퀴벌레를 멸하러!”
“우린 세수코오오오!”
각자의 자리에서 키보드를 부실 듯 두드리는 직원들을 보며 홍보팀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우리 팀은 참 또라이가 많아”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그녀가 텅 빈 책상에 앉았다.
위에 올라가 있었던 모니터는 바닥에 버려져 있었다.
“그, 민정 씨?”
“네, 팀장님.”
“이거 회사에 말해서 실수로 커피 엎질렀다고 하자. 악플 때문에 커피 뿌렸다곤 못 말하겠어. 너무 또라이 같잖아.”
그녀는 또라이들의 대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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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이 올라갔다.
콧방귀를 뀌는 댓글들이 베스트를 선점하는 것도 잠시.
반응이 점점 바뀌기 시작했다.
격투 전문 채널 뮤튜버들이 해당 영상을 두고 리뷰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와··· 이 정도면 수준급인데요?
—저 방금 소름 돋았어요. 이게 2달 배운 거라고요? 말도 안 돼, 진짜. 장난치지 마.
—이 정도면 당장 아마추어 대회 나가도 안 꿀려요. 자세만 봐도 알죠, 저흰.
—2달은 당연히 거짓말일 텐데, 그거랑 별개로 자세가 너무 완벽하네요. 이건 단순히 오래 배운다고 되는 게 아닌데. 이 남자··· 그라운딩에선 어떨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적에 가까웠던 그들이 핸들을 돌렸다.
—저, 솔직히 드라마 나온다고 했을 때 존나 쪽팔린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저 이거 볼 것 같아요. 봅니다. 보고 나서 욕을 하든 빨든 하려고.
—저희도 1화 나오면 바로 리뷰 들어갑니다.
—백승결 배우가 맡은 캐릭터, 엄청 기대되네요.
뜻밖의 지원군들이 합류하며 못 미더운 시선이 대부분이었던 ‘악의 링’에 대한 반응은 순식간에 팽팽해졌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입장 시간이 다가오며 사람들을 미친 듯이 끌어들이는 효과를 만들어냈다.
누군가는 화려한 배를 구경하기 위해.
누군가는 좌초할 배를 조롱하기 위해.
모두가 멀티온으로 밀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