잽 (2)
‘멀티온’의 로고와 ‘악의 링’의 타이틀이 격자무늬에 촘촘히 박혀 있다.
그걸 배경으로 나란히 선 우리들은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인사했다.
박혜정 작가와 조규필 감독이 중앙에 앉고 양쪽으로 나와 신승찬이, 그리고 다른 주조연 배우들이 줄줄이 앉았다.
그렇게 시작된 ‘악의 링’의 제작발표회.
먼저 진행자가 우릴 쭉 훑으며 감탄했다.
“과연 박혜정 작가님의 작품답네요. 이런 대단한 배우분들이 한 작품에 모이는 게 정말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그죠?”
이에 박혜정 작가가 입꼬릴 올리며 솔직하게 받아쳤다.
“제 작품이라서 보단 멀티온이 더 크지 않았을까요?”
곳곳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반응을 살핀 박혜정 작가가 덧붙인다.
“이봐, 아무도 아니라고 안 해주잖아.”
“아닙니다. 멀티온 보단 작가님 때문이죠.”
“조 감독님이야말로 멀티온이 결정적이지 않으셨나?”
웃으며 조규필 감독을 흘겨본 박혜정 작가가 다시 진행자 쪽을 돌아봤다.
“아무튼, 이번 촬영을 하면서 배우분들이 왜 대단한지 새삼 다시 한번 실감하는 시간이었어요.”
“어떤 점에서요?”
“신승찬 배우와 백승결 배우, 그리고 이 선배님과 정다운 배우까지. 제가 원하고 그렸던 그대로 캐스팅을 이뤄냈거든요. 너무 기대됐죠. 그러다 처음으로 촬영본을 딱 받아서 봤는데······ 집에서 혼자 비명을 질렀어요.”
“왜요? 생각한 것과 똑같아서요?”
“아뇨, 너무 달라서요.”
고개를 저은 박혜정 작가가 다시 생각해도 놀랍다는 듯 말을 이었다.
“나름 인기 작가라고 불리는 제 상상력이 얼마나 비루했는지 깨달았죠. 영상 속 캐릭터들이 제 대본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훨씬 더 생동감 있게 움직이고 있는 거예요 뭐랄까. 어렴풋이 알고 있던 세계가 절 직접 찾아온 것 같았어요.”
그녀의 말을 경청하던 진행자가 팔뚝을 쓸었다.
“와···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순간 소름 돋았어요. 그 세계가 어떨지 점점 더 궁금해지는데요. 빨리 드라마가 공개되었으면 좋겠어요.”
“기대하셔도 돼요. 특히 주인공인 임훈과 서귀호의 케미는··· 굉장했죠.”
“임훈과 서귀호면, 각각 신승찬 배우님과 백승결 배우님이 맡으셨죠? 두 분이 한 화면에 담기는 것만으로도 이미 케미가 안 생길 수 없겠는데요? 지금도 잘생김이 화학 작용 중이잖아요. 팍, 팍!”
흐뭇하게 웃으며 분위기를 띄운 진행자가 이번엔 신승찬을 가리켰다.
“그럼 이번엔 신승찬 배우님께 질문을 드릴게요. 방금 작가님께서 두 분 역할의 케미가 대단했다고 하셨는데, 실제 현장에서의 케미는 어땠나요?”
마이크를 잡은 신승찬이 한결같이 시니컬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 승결 씨와는 한 씬에 담길 일이 의외로 그렇게 많지 않았어요. 게다가 드라마 속에서 전 승결 씨가 연기하는 서귀호를 끊임없이 경계해야 했거든요. 그러다 보니 현장에서도 너무 붙어있지 않으려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와, 그 정도로 역할에 몰입하신 거군요?”
“그러고 싶었던 것 같아요.”
“역시, 드라마계의 블루칩이라는 별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니네요. 자, 그러면···.”
진행자가 나와 눈을 맞췄다.
“이번엔 백승결 배우한테 질문드리고 싶은데요.”
드디어 내 차례인가.
지난 몇 달간 작품에 빠져 지냈고, 애정이 쌓인 만큼 이에 대해 말할 기회가 내심 기뻤다.
어떤 질문일까. 스토리? 캐릭터? 현장?
그런데 진행자가 큐카드를 확인하더니 갑자기 질문 대신 웃음을 터트렸다.
“어머, 이게 뭐람. 이거 진짜인가요?”
“···?”
“촬영장에서 박혜정 작가님께 업힐 뻔했다고···.”
온갖 생각을 하던 뇌가 멈췄다.
“···왜, 왜 저만 그런 질문이죠?”
내 멍청한 표정을 보고 무대 위, 아래 할 것 없이 모두가 빵 터졌다.
난 진지해, 이 사람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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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기 섞인 농담으로 시작된 제작발표회였지만, 끝날 때쯤엔 모두가 집중해서 우리 얘길 들었다.
덕분에 작품에 대한 얘길 실컷 했지.
라이브 방송도 송출했는데 처음엔 ‘ㅋㅋㅋ’으로 도배되던 채팅창도 막바지엔 얼른 드라마를 내놓으란 반응으로 뒤덮였다고.
그렇게 제작발표회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무대에서 내려온 조규필 감독이 기 빨린 얼굴로 비틀거렸다.
촬영이 전부 끝나고 꽤 건강해진 게 저 정도다.
현장에선 그야말로 좀비였지.
아무튼, 그는 피곤함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로 마커스필름 대표부터 찾았다.
“대표님, 어떻게 됐대요?”
“그러게요. 멀티온 내부 시사회 끝났죠?”
뒤이어 내려오던 박혜정 작가도 관심을 보였다.
그럴 만도 했다. 무려 임원들에게 시사회를 했으니까.
사실상 외부인들에게 받는 첫 평가. 심지어 그 외부인들이 투자자이니 신경이 안 쓰일 수 없겠지.
마커스필름 대표가 끄덕인다.
그러자 조규필 감독이 불안 반 기대 반인 얼굴로 물었다.
“반응 어떻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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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에 위치한 멀티온 본사.
드라마 ‘악의 링’의 공개일이 가까워질수록 프로젝트를 맡은 댄과 동료들보다 오히려 다른 팀들이 야단법석이었다.
지난주에 있었던 2차 내부 시사회 때문.
1차 내부 시사회가 몇몇 임원과 직원들만 모여 감상하는 것과는 다르게, 2차 내부 시사회는 마치 영화제처럼 멀티온 직원이라면 누구나 예약해서 볼 수 있는 시사회였다.
물론 분량은 3화까지였지만.
“4화부터가 진짜일 것 같던데, 궁금해 미치겠네.”
“그러게. 크리스토퍼가 그러더라고, 4화부터가 진짜라고. 걘 1차로 전부 봤으니까.”
“얼른 방영됐으면 좋겠는걸. 주인공 캐릭터도 너무 매력 있어. 선과 악에서 고민하는 사이코패스라니.”
“엄밀히 말하면 주인공은 사이코패스까진 아니지 않아? 살짝 성향이 섞인 느낌이지.”
“맞아, 절대악은 그 챔피언이고.”
“드라마 첫 회 오프닝에서 나온 그 남자 말이지? 그 장면 진짜 대단했는데. 연기와 연출이 엄청났어······.”
전체 극의 절반도 안 되는 분량이었지만, 그 결과 멀티온 본사를 돌아다니면 ‘악의 링’ 얘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한창 떠들던 직원들이 입꼬릴 올리며 휴게실을 나가려던 댄을 붙잡았다.
“이봐, 댄!”
“응?”
“시사회 잘 봤어! 느낌 좋더라!”
“고마워, 덱스.”
싱긋 웃자 옆에 직원들도 한마디씩 얹었다.
“이러다 첫 번째로 ‘전당’에 오르는 거 아냐?”
“이번 작품이 아무리 재밌어도 그건 힘들지. 괜히 댄한테 헛바람 넣지 말라고.”
“그래. 그건 재미랑 별개니까. 전 세계에서 대박이 나야 한다고.”
전 세계에서 대박이라······.
인사를 마무리하고 복도를 걸었다.
그 사이 커피잔을 버리고 뒤따라온 직원이 멈췄던 보고를 이어간다.
“홍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한국에서의 검색량이 확실히 늘었어요.”
직원의 보고를 받으며 로비로 들어선 댄.
“베티, 검색량이 중요한 게 아니야. 결국 OTT는 앱 사용량으로 결과가 갈리게 되어있어. 홍보 시작한 이후로 앱 다운로드가 얼마나 증가했는지 자료 좀 가져다줘. 효과가 미미하면 하루빨리 방식을 바꿔야지.”
“네, 알겠어요.”
끄덕거리는 직원에게 댄이 물었다.
“배고프지? 불고기 케밥 어때?”
“좋아요. 그거 꽤 맛있던데요? 달콤하면서도 짭짤하니.”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로 내려온 두 사람.
성큼성큼 걸어가던 댄이 돌연 걸음을 늦췄다.
양옆에 마치 영화관의 입구처럼 걸려있는 커다란 액자들에 시선을 빼앗겼다.
휴게실에서 직원들이 말하던, 바로 그 ‘전당’.
그중 상당수가 텅 비어 있었다.
멀티온의 오리지널 컨텐츠가 아직 많지 않아서였다.
심지어 흥행작이라고 할만한 건 여타 대형 플랫폼에 비해 한참 부족하지.
‘미국을 포함한 10개국 이상 1위, 누적 시청 1억 시간.’
이 금빛 액자에 포스터를 걸 수 있는 자격을 곱씹으며 댄이 입맛을 다셨다.
솔직히 욕심이 나는 건 사실이다. 지금 내부 반응들을 보니 더더욱.
‘하지만 현실적으론 어려운 게 사실.’
그는 ‘악의 링’이란 작품 자체를 좋아한다.
제작이 시작되기 전부터 시놉만으로 마음에 들었고, 결과물을 받아보고 나선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콩깍지도 가리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초점이 너무 한국에만 맞춰져 있다는 것.’
애초에 ‘악의 링’은 넷플리스와 한국 내의 OTT플랫폼들을 견제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적어도 회사의 의도는 그랬다.
인구대비 OTT 시청률이 최상위권에 속하는 한국은 컨텐츠를 팔기에 아주 좋은 시장이었으니까.
‘잘 못 생각한 거야.’
지난 몇 달 동안, 그들의 제작 능력을 보며 생각했다.
한국을 시장이 아닌, 생산지로 봐야 한다고.
분명 부족한 점들이 많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환경일 뿐.
제대로 만들 수 있는 환경만 조성해준다면 그 어디서도 보지 못한 것들이 튀어나올 게 분명했다.
‘넷플리스는 이미 그걸 눈치채고 시동을 거는 중이고.’
아직 멀티온은 그러지 못한다는 게 아쉬웠다. 하지만 희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번 ‘악의 링’이 한국 내에서 제대로 성공해준다면.
그리고 해외에서 어느 정도의 호평만 받을 수 있다면···.
‘회사가 한국을 바라보는 눈도 조금은 바뀔 테니까.’
#
“안녕하세요!”
굿픽쳐스 박윤석 대표의 집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녀의 딸, 박혜진이 친구들을 불렀다.
매주 주말 오후면 밖에 나가 놀기 바쁘던(—종종 시사회를 가거나) 그녀들이 거실에 모인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백승결. 그가 출연하는 ‘악의 링’이 곧 공개되기 때문.
“그나저나, 아버진? 퇴근 안 하셨어?”
“맞아. 매번 시사회 티켓 받았던 거 직접 감사하다고 말씀드려야 하는데?”
“아빤 늦어. 그러니까 불렀지. 아는 감독님들이랑 ‘악의 링’ 첫 화는 같이 보기로 하셨대.”
“그분들도 그렇게 같이 보시는구나? 신기하네.”
“감독? 감독 누구? 봉한철? 아님, 주백기?”
한국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아니 여러 번 들어봤을, 이른바 스타 감독들이었다.
“안원상 감독님이랑 독립 영화 감독님들.”
“안원상 감독님? 그분이··· 누구셔?”
친구들의 반응에 박혜진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야, 그분을 모르면 어떡하냐. 대원군 감독님!”
“아아···!”
“우리가 백승결한테 제대로 입덕하게 된 기념비적인 작품을 만들어 주신 분인데 모르면 안 되지 않겠니?”
“그러네··· 반성해야겠다.”
“덕질에도 노력이 필요한 거라구. 분발하자, 우리.”
따끔하게 기강을 잡은 박혜진이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그녀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인터넷 반응 난리 났네.”
“왜?”
“오지게 싸워, 오지게. 아주 댓글창이 난창판이야. 여기가 악의 링이라니까?”
“푸핫! 얘 말하는 거 봐. 댓글창이 악의 링이래.”
“오, 근데 좀 맞는 말인 듯.”
“너도 싸웠지?”
“당연하지. 어딜 감히 승결 오빠를 건드려.”
“아, 개 웃겨.”
친구들이 끅끅거리고 웃는데, 마침 박혜진의 어머니가 쟁반에 이것저것 먹을 것들을 담아 가져왔다.
“다들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밝아서 보기 좋네. 이것도 좀 먹으면서 봐.”
“어머니, 뭐 이런 걸 다~!”
“별거 없어. 더 맛있는 걸 해줘야 하는데···.”
“이미 충분한데요, 뭘. 감사합니다~.”
맛있게 먹으라며 빈 쟁반을 챙기는 어머니.
그때 한 친구가 물었다.
“아 참, 어머니도 백승결 좋아하시지 않아요?”
“맞아. 해별이때부터 좋아하셨다고 들었는데? 저희랑 같이 봐요.”
“그래, 엄마. 같이 보자.”
“아휴, 근데 저거 막 피 튀고 그런 거라며. 나 무서워서 그런 거 못 봐.”
“걱정 마세요. 저희가 있잖아요.”
“맞아요. 같이 보면 안 무서워요!”
“그럼 나도 조금만 볼까? 보다가 무서우면 얼른 들어갈 거야, 난?”
그녀가 못 이기는 척 자리에 앉으며 거실에 모든 사람이 모였다.
이윽고, 박혜진의 핸드폰에서 알람이 울렸다.
‘악의 링’ 공개가 예정된 5시였다.
곧바로 화면에 떠오르는 1화 썸네일.
리모컨을 손에 쥔 박혜진이 들썩거렸다.
“이제, 튼다? 나 틀어?”
“어 얼른 틀어. 빨리.”
“틀었어!”
“으~너무 기대돼. 이번엔 주연이니까 많이 나오겠지?”
“막 대원군 때처럼 마지막에 잠깐 나오고 그런 거 아냐?”
그녀들의 우려와는 달리···.
터벅—!
발자국 소리와 함께 시작부터 백승결의 얼굴이 등장했다.
생각보다 음산한 분위기와 큰소리에 자신만만하던 박혜진과 친구들이 움찔거렸다.
이후엔 백승결의 얼굴에 더욱 놀랐다.
“살을 대체 얼마나 뺀 거야······?”
가죽만 간신히 붙어있는 것 같았다.
인상이 완전히 달라 보인다.
거친 피부는 사막 같았고, 도드라진 광대와 눈두덩인 음영을 만들어, 그를 사나운 들개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백승결은 그런 얼굴로 공사판을 가로질렀다.
그는 커다란 자재들이 쌓여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남들보다 두 배는 되는 양을 짊어지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그때였다. 콘크리트 가루가 바사삭 떨어지며 누군가 위에서 뚝 떨어졌다. 발을 헛디딘 것이다.
찰나의 실수는 최악의 결과를 낳았다.
아주 찰나의 비명과 쿵! 하고 들려오는 둔탁한 소리.
그리고 뒤늦게 경악하는 사람들······.
묵묵히 또 한 계단을 오르던 백승결의 시선도 자연스레 아래로 향했다.
“흐아아악! 정 씨!”
“구, 구급차 불러 구급차!”
그곳엔 실 끊긴 인형처럼 이리저리 꺾인 사람이 있었다.
검붉은 핏물이 마치 한지 위에 적힌 먹처럼 흙바닥 위로 번져나간다.
“······.”
백승결은 그 광경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피식··· 웃어버렸다.
“뭐야, 저게.”
메마른 입술이 천천히 벌어지며 나온 그의 목소리는 철판을 긁는 듯했고.
“저렇게 쉽게 망가져?”
초승달처럼 휜 그의 눈은 검은자만 보여 더욱 괴기했다.
“하하, 하하하···.”
웃음소리가 메아리처럼 이어진다.
백승결은 끔찍한 장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름다운 명화를 바라보듯 매료되었다.
마치 그의 시선인 것처럼, 물끄러미 사건 현장을 내려다보는 앵글.
시간이 흐르며 경찰이 도착하고, 구급차가 와서 자리를 정리한다.
경찰들이 그 주변에 노란 테이프로 바리케이드를 쳤다.
그리고 바리케이드의 모습이 서서히 8각형 링으로 바뀌며······.
[악의 링]
마침내, 타이틀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