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조건 (1)
‘악의 링’ 1화가 공개된 날로부터 며칠.
우리나라의 모든 포털 사이트와 커뮤니티가 ‘악의 링’에게 함락당했다는 기사가 날 정도로 사람들의 관심은 여전히 뜨거웠다.
SNS는 과장 조금 보태서 ‘악의 링’ 짤이 도배된 사진첩이 되었고.
뮤튜브엔 리뷰와 분석이 화수분처럼 넘쳐났다.
—이번 리뷰는 멀티온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지 않았으며, 그게 속상해 어떻게든 까보려고 했지만 실패해서 결국 찬양만 하다가 끝날 리뷰이니, ‘악의 링’을 싫어하시는 분들께서는 얼른 영상을 나가시길······.
—이 부분에서 임훈의 방을 보시면 사실 그가 지닌 괴물, 즉 사이코패스적인 성향은 예전부터 꾸준히 문을 두드렸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방에 걸린 액자 속······.
—이 시점에서 이미 극 중 주인공이 서귀호가 맞붙게 될 확률 58000%······.
그럼에도 모든 영상이 큰 조회수를 끌어모을 정도로 관심이 뜨거웠다. 댓글도 끝없이 늘어났다.
하지만 인터넷상에서 떠드는 것만으론 성에 안 차는지, 사람들은 결국 오프라인에서도 임훈과 서귀호에 대한 이야기들로 불을 지폈다.
이제 한 회가 공개되었을 뿐인데, 안과 밖 할 것 없이 온통 ‘악의 링’으로 난리였다.
“스토리도 미쳤는데, 연출도 미쳤어. 근데 CG도 괜찮더라?”
“그냥 영화더만, 영화.”
“그러니까. 누가 그걸 드라마라고 생각해. 매주 개봉하는 영화지.”
“특히 첫 장면하고 마지막 장면은 진짜······.”
‘악의 링’과 관련된 수많은 것들이 화제였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화제가 된 건 극의 오프닝과 엔딩이었다.
처음으로 자신이 괴물이란 걸 깨닫는 서귀호와.
자신 안에 괴물이 뛰쳐나오려 한다는 걸 눈치챈 임훈.
같으면서도 다른 두 사람의 서사가 앞으로의 이야기를 더욱 흥미진진하게 끌어올렸다.
그러니 시청자 모두 열띤 이야기 끝에 같은 결말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아, 일주일이 이렇게 길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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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서귀호는······.”
홍보팀 고참 직원이 참담한 얼굴이 좌중을 훑었다.
“2주간 드라마에 나오지 않습니다.”
동시에 직원들이 경기를 일으킨다.
탄식이 탄산처럼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으아잇, 안 돼!”
“오우, 쉣!”
“선배님, 깜빡이 좀···.”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그 말을 다시 듣는 게 곤욕스럽다는 듯 격한 반응을 보이는 그들.
이에 고참 직원이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니 우리도 당분간 서귀호에 대한 기사를 대폭 줄입니다. 할 말이 없는데 계속 떠드는 건 오히려 독이니까.”
“그러면······ 그러면 우리에겐 무엇이 남습니까?”
가장 고참 직원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표정으로 물었고.
옆에서 팔짱을 끼고서 지켜보던 홍보팀장이 대신 답했다.
“예능.”
그녀의 얼굴은 쓸데없이 비장했다.
“우리에겐 아직 승결 배우의 예능이 남아 있어.”
옆에서 ‘신에게는 아직···!’ 라던가, ‘아직 한 발 남았···.’ 라는 명대사들이 튀어나왔다.
그 혼잡한 와중에 홍보팀 이민정 대리가 물었다.
“이번에 들어온 ‘룸6’ 말이죠?”
“그래, 그거. 민정이 너, 그거 챙겨봤었댔지? 여기 어떤 프로인지 브리핑해 봐. 우리 소속 배우가 이런류의 예능 나가는 게 오랜만이라 정보가 별로 없네.”
대부분의 배우가 톱스타거나 연기파인 하람에서 예능은 가뭄에 콩 나듯 나오는 존재였다.
가끔 인터뷰 형식의 예능이야 종종 나가지만, 특히 이런 작정하고 본격적인 예능은 더더욱.
“룸6는 기본적으로 방탈출 게임을 모티브로 하고 있어요. 6개의 방을 탈출하는 게 목적이죠. 예능이긴 하지만 웃기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기보단 ‘천재들의 전쟁’이나 ‘미션 스타벨’처럼 문제를 해결하고 그 과정을 보여주는 관찰 카메라 느낌이에요. 작년에 시즌1을 좋은 성적으로 마무리 짓고, 올해는 더 큰 스케일로 시즌2를 한다고 얘기가 돌아서 팬들이 엄청 환호했는데··· 그 첫 방송에 승결 씨가 섭외된 거죠.”
“프로그램 기획을 보니 이미지가 망가질 리스크는 크게 없을 것 같고. 탈출 방법은?”
“그때그때 달라요. 그림을 조합해서 힌트를 얻기도 하고, 숫자를 조합해서 문제를 풀기도 하고, 가끔 단순한 게임을 하기도 하고요.”
“쉽지 않겠네. 예능 초보인 승결 배우의 탈옥을 우리가 도와야겠어.”
“탈옥이 아니라 탈출이요.”
“그게 그거지.”
대충 넘긴 홍보팀장이 스케줄 보드로 다가가 물었다.
“이번에 촬영하면, 방영이 언제라고?”
“제작진들도 아직 확답은 못 해주는데, 아마 악의 링이 끝난 이후일 것 같아요. 그게 좀 아쉽긴 하죠···.”
“상관없어. OTT는 영상이 항상 올라가 있으니 본방사수가 큰 의미 없잖아. 시청시간이 중요하지. 그러니 예능이 늦게 나오면 그건 그거대로 드라마에 도움이 될 거야. 예능이 극의 몰입을 방해하지도 않고, 뒤늦게 한 번에 정주행하는 사람들도 생길 테니까. 일석이조인 거지. 아주 좋네.”
단숨에 계산이 끝난 그녀가 직원들을 움직였다.
“자자, 그럼 다들 기출문제 뽑아보자. 다들 프리즌브레이크 알지?”
“몸에 교도소 지도 그리는 그거요?”
“그래, 맞아. 그것처럼 우리가 승결 배우한테 기출문제를······.”
“몸에 새기는 거군요!”
“······.”
그거 아냐. 하지 마.
잠시나마 정상적으로 보였던 그들의 회의를 지켜보다가 얼빠진 얼굴로 김성운을 쳐다봤다. 이거 맞냐고.
“승결아.”
“···네.”
“이해하려 하지 말자.”
“네.”
“가자. 미팅 시간 거의 다 됐다. 저희 가볼게요?”
머릿속에 새기는 거니 안심하라는 홍보팀장의 말을 들으며 홍보팀을 나왔다.
잠시 2팀 사무실을 들러 대본 박스를 옮겼다.
그동안 쌓인 대본이 얼마나 많은지, 나와 김성운, 그리고 정민우에게까지 손을 빌렸는데도 모자라다.
“남은 건 다음 주에 내가 집으로 가져갈게.”
“네, 감사해요.”
“별말씀을.”
밴 트렁크에 들고 온 대본 박스를 밀어 넣었다. 누가 보면 세무조사 나온 세무원인 줄 알겠다. 그만큼 많이 쌓였다.
아무리 빨리 읽는다지만, 이 정도면 슬슬 감당이 안 되겠는데···?
고생이야 좀 하겠지만 즐거운 일이었다.
그만큼 내가 고를 수 있는 작품이 많아진다는 거니까.
내가 작품 보는 눈이 있다는 것에 한 번 더 확신을 갖게 된 지금.
이제부턴 아무리 작은 영화라도 모두 내가 직접 읽고 싶어졌다.
그렇게 대본을 잔뜩 싣고 TZN 방송국으로 향했다.
대본을 다 읽는 것도 문제지만, 그보다 큰 문제가 눈앞에 있었다.
이번에 섭외가 들어온 ‘룸6’ 작가와의 미팅.
사실상 출연이 확정된 상황이다. 마커스필름도, 하람도(—특히 홍보팀과 김성운) 잔뜩 기대하니 어쩔 수 없었다.
작품에 도움이 된다는데, 해야지.
“이번에 저희가 시즌2 첫 방으로 악역 특집을 기획했거든요. 그런데 승결 씨가 ‘악의 링’에서 딱! 타이밍 기가 막혔죠. 운명이에요, 운명.”
TZN 예능국.
이것저것 물어보던 ‘룸6’ 김지회 작가가 운명론을 펼치며 촬영 날을 기약했다.
“크게 준비하실 건 없으시구요. 뭐, 연예인분들 차에 다 챙겨 다니시는 거 알지만 그래도 여벌의 옷 대여섯 벌 정도 부탁드릴게요.”
“대여섯 벌이나요?”
“제한시간 안에 방을 탈출하지 못하실 때마다 벌칙이 좀 다양해서요.”
싱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리는 그녀.
불쑥 걱정이 들어 물었다.
“근데 저 게임 같은 걸 해본 적이 없는데.”
“아, 그냥 간단해요. 간단한데 어려워서 문제지.”
“많이 어렵나요?”
“음··· 혹시 방탈출 해보신 적··· 당연히 없겠죠? 보드 게임도?”
끄덕거리자 그녀가 어떻게 쉽게 얘기할지 고민하다가 입을 뗐다.
“각 방마다 문제나 게임이 달라서 난이도야 그때그때 다르겠지만, 크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리고 그녀가 가볍게 말했다.
“대부분 암기력 테스트 같은 느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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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셨어요?”
김지회 작가가 회의를 마치고 피곤한 얼굴로 내려온 나주영 PD를 맞이했다.
회의 끝나고 돌아온 곳이 또 회의실이라니.
눈을 비비며 인사를 나눈 나주영 PD가 비척비척 걸음을 옮겨 커피부터 찾았다.
얼음 동동 띄운 아메리카노를 물처럼 들이킨 그가 살 것 같다며 의자에 몸을 기댄다.
그러다 벌떡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어, 맞다. 오늘 백승결은 잘 만났어?”
“그럼요. 방금 갔어요.”
“그래? 어땠어?”
“좋았어요···.”
뭔가에 홀린 듯, 툭 튀어나온 대답.
나주영 PD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데이트 했냐? 사람이 어떠냐고, 사람이. 왜 배우들은 이미지 소비가 너무 안 되어 있어서 예상외인 경우가 많잖아. 좋은 쪽으로 나쁜 쪽으로 둘 다.”
그의 말대로였다.
최근에 그 기조가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예전부터 ‘신비주의’가 기본일 정도로 이미지 소비를 극도로 꺼리는 이들이 바로 배우였다.
그러다 보니 팬들의 상상으로 그 이미지를 씌우는 경우가 많았는데, 당연히 오답투성이였다.
예능 PD로서는 다루기 가장 어려운 컨텐츠일 수밖에.
재미를 보장하기도 어려운 데다가 어떤 폭탄이 껴 있을지 모르니 말이다.
그나마 ‘룸6’는 토크쇼처럼 말로 이끌어가는 프로그램이 아니니 다행이지만.
“음···뭐랄까···.”
톡. 톡. 회의 테이블을 손톱으로 두드리며 잠시 고민하던 김지회 작가가 답했다.
“첫인상은 보이는 그대로.”
“좀 진지하구나?”
“네, 근데 좀 얘길 나눠보니 또 말이 아예 없진 않아요.”
“사회성은 있고.”
“그리고······ 묘하게 웃겨요.”
하나씩 체크하던 나주영 PD가 의외라는 듯 놀랐다.
“그래? 가장 어려운 걸 해?”
“본인은 웃기려고 던지는 말이 아니고, 딱히 대사만 보면 웃긴 말도 아닌데, 그냥 웃길 때 있잖아요. 그런 느낌이 언뜻언뜻 보여요.”
그러자 눈을 게슴츠레 뜨는 나주영 PD.
그가 의심했다.
“그냥 잘생겨서 아니고?”
“그런가? 요즘 시즌2 준비하느라 잘생긴 사람 만날 일이 통 없었으니, 오랜만에 흐뭇해져서 그럴지도.”
확신 없는 김지회 작가의 말투에 그가 쯧 하고 등받이에 기댄다.
뭐, 상관없었다. 웃기는 건 애초에 바라지 않았다.
배우는 개그맨이 아니니까.
하지만 그들에겐 유머보다 더 값진 게 있었다.
바로 컨텐츠.
그들은 존재 자체가 컨텐츠인 사람들이다.
뭘 해도 신기하고, 뭘 해도 궁금한.
그런 사람들이 한데 모여, 평소 자신들이 즐기는 방탈출을 한다? 그것도 벌칙까지 걸고서?
‘궁금하겠지. 보고 싶겠지.’
슬슬 백승결의 소속사에서도 움직이나 보다. 기사가 올라온다. 아직 기사는 몇 개 안 되지만, 조회수는 급상승 중이다.
역시. 현시점 가장 핫한 악역이라 화제성 끝내주네···.
“급하게 섭외한 보람이 있어.”
흡족한 미소와 함께 중얼거리는 나주영 PD.
그가 테이블 위에 올려진 자료 중, 게임 관련 자료들을 본인 앞으로 끌어당겼다.
무려 시즌2 첫 방송이 될 촬영인 만큼 스케일 크게 준비했다.
내용을 스윽 훑어보던 그가 물었다.
“그래서, 게임은 잘한대?”
“해본 적 없다던데요. 아시잖아요. 배우들이 이런 거 잘 못 하는 거. 근데 아역 출신에 고졸이다? 말 다 했죠. 방탈출은 커녕 보드게임도 제대로 해본 적 없을 테니까.”
“오히려 좋아.”
“그게 배우들 쓰는 묘미죠.”
끄덕거린 나주영 PD가 자료를 덮었다.
가장 맨 앞에 타이핑된, 이번 기획의 대주제가 눈에 들어왔다.
<악역 특집 : 악역의 조건>
배우들 중에서도 악역으로 유명한 이들을 섭외했다.
이들이 얼마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또 망가질까?
시청자들만큼이나 기대가 되는 그였다.
물론 그들에게도 손해는 아닐 거다.
솔직한 모습이 더 큰 인기를 불러오는 세상이니.
뭐, 너무 머리 나쁜 모습을 보이면 이미지가 좀 깰 수도 있겠지만······.
새로 짜여진 판이 아주 마음에 드는 듯, 나주영 PD가 씩 웃었다.
“예능에선 누가 악역인지 보여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