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티온 (3)
이른 아침부터 하람의 홍보팀이 분주해졌다.
평소에도 느긋함과는 거리가 먼 그들이었지만, 오늘은 유난히 더 정신없을 수밖에 없었다.
예능 촬영이 끝나자마자 또 새로운 이슈가 펑펑 터져대는 ‘악의 링’이었으니까.
멀티온이 배우와 제작진을 초대한다고 해서 기사를 쏟아낸 것도 불과 며칠 전인데.
이번엔 세계챔피언이 드라마를 언급했다.
리트윗이 순식간에 번져나가 해외에서도 점점 ‘악의 링’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있었다.
당연히 관련 뮤튜버들도 온통 ‘악의 링’에 대한 얘기였다.
—전 여기서 진짜 감탄했어요. 잡히자마자 씩 웃으면서 상대 엘보우 위치를 파악하죠? 그대로 밀어서 그립 제거. 그다음 끌어당겨 롤링암바. 이이, 자세 보세요. 그냥 교과서예요. 교과서!
—이게 연기가 맞나 싶더라니까요. 실전을 예쁘게 찍었다, 라고 하는 게 더 맞을 것 같아요. 물론 상대 선수가 너무 쉽게 당해준다는 느낌이 있지만 그건 서귀호의 완력이 인간 수준이 아니라는 설정이니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고···.
그들은 리뷰를 통해 ‘악의 링’이 얼마나 잘 만든 드라마인지 알리는데 앞장섰고.
그중에서도 백승결의 격투 실력에 대한 칭찬이 주를 이뤘다.
영상 중간중간엔 ‘반박하고 싶으면 로베노 카를렌에게 문의’라는 자막을 유행처럼 덧붙였다.
이를 본 홍보팀장이 허허 웃는다. 아련한 얼굴로.
“이럴 줄 알았으면 뿌리지 말걸······.”
직원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일명 ‘모니터 커피 샤워’ 사건이 무색하게 악플러들이 잠잠해지고 있었다.
“그나저나, 격투기 실력으로 화제인 배우라니.”
국내에선 듣도 보도 못한 경우였다.
“심지어 세계챔피언한테 인정받았죠.”
그래, 저건 더더욱.
신기해하던 홍보팀장이 태블릿을 슥슥 밀어 올린다.
이제는 딱히 기자들에게 보도자료를 뿌리지 않아도 ‘악의 링’ 관련 기사가 끝없이 밀려 나온다.
지금 홍보팀 인원으로는 다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진짜 하늘이 돕나 보네. 드라마 자체로도 난리인데, 외적으로까지 이렇게 좋은 이슈가 이어지는 작품은 흔치 않은데. 대부분 안 좋은 이슈가 터져서 문제지.”
그렇게 말하고서 순간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늘이 돕는다는 건 우연일 때나 하는 소리잖아.
지금 ‘악의 링’은 우연으로 떠오른 게 아니고.
간단했다.
잘 만들었으니 떴고, 잘 준비했으니 계속 뜬다.
특히 그중에서도 백승결의 활약이 가장 돋보이는 중이다.
신승찬도 좋은 배우이고, 충분히 잘하고 있지만.
서귀호의 강렬함이 ‘악의 링’을 견인하고 있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오죽하면 서귀호가 진짜 주인공이 아니냐는 소리까지 나올까.
‘신기한 배우야.’
잘생긴 걸 떠나 성격도 기본적으로 호감형인 배우다.
배우들도 여지없이 걸리는 흔한 연예인 병도 없고, 꾸준히 노력한다.
그건 일주일에 2팀장이 가져가는 대본의 양만 봐도 알 수 있지.
유명(有名)엔 논란이 따라붙는데, 그 배우 주변엔 매번 놀람만 가득했다.
“···해외 반응은 어때?”
“확실히 반응이 조금씩 오고 있어요. 특히 격투기 팬들 사이에서요. 덩달아 국내 팬들의 기대도 커지고 있고요.”
“어떤 기대?”
국내외 커뮤니티 사이트를 돌며 ‘악의 링’에 대한 반응을 긁어모으던 직원이 살짝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
“이러다 해외에서도 대박 나는 거 아니냐고.”
#
잔혹한 서사를 이끄는 쌍두마차, 임훈과 서귀호.
두 사람의 만남으로 기대감을 한껏 끌어올렸던 악의 링이 그 다음 주부턴 템포를 확 올렸다.
모든 이들이 경악할 정도로 성장하는 임훈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순식간에 세계랭킹 10위 안쪽으로 진입하는 결과를 빠르지만 매끄럽게 그렸다.
그리고 악동으로 소문난 4위 선수와 맞붙었을 땐 크게 흔들리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비열한 플레이에 분노가 차올랐다.
서귀호를 만난 이후로 쉴새 없이 날뛰는 살심(殺心)이 그의 정신을 뒤흔들었다.
주먹 한 번 뻗는 게 어려웠고, 피를 보는 건 더더욱 두려웠다.
그랬다간 이성의 끈이 괴물의 손에 넘어갈 것만 같아서.
문을 부수고 뛰쳐나와 자신을 삼킬 것 같아서.
임훈은 동시에 자신과도 싸워야 했다.
그럼에도 고전 끝에 취한 승리.
기쁨보단 걱정이 앞서는 그였다.
고작 이런 상대에게 흔들릴 정도라면, 자신의 마지막 싸움 상대 앞에선 정말 문이 열려버릴 것 같았다.
[두렵다.] [기대된다.]
또다시, 두 감정이 충돌하고 있었다.
한편, 임훈을 본 이후로 서귀호는 그와의 싸움을 고대했다.
언젠가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올라오리라 생각했고, 그게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란 것도 알고 있었다.
그의 예상대로 임훈은, 서귀호가 지척에 보이는 곳까지 올라왔다.
다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왜 참는 거지? 왜 분노를 상대에게 퍼붓지 않는 거지? 분명 넌 나와 같을 텐데··· 상대를 망가뜨리고 싶을 텐데···.”
놈이 계속 아닌 척을 한다는 것.
이해가 가지 않았다.
먹잇감을 앞에 두고 혹시라도 망가져 버릴까 조심조심하는 꼴이라니.
“곧··· 직접 물어봐야겠군.”
평소 표정만으로 사람을 압도하고, 좀처럼 입을 열지 않던 그가 아이처럼 재잘거렸다.
마치 사랑에라도 빠진 것처럼, 기다리고 고대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토록 기다리던 방어전이 잡혔다.
<‘악의 링’ 7화, 전쟁의 서곡을 알렸다!>
<이제 마지막 화만 남은 ‘악의 링’, 해피엔딩일까?>
<역대급 화제의 드라마 ‘악의 링’, 신승찬과 백승결이 그려나갈 결말>
기사들이 뚝 무너진 것처럼 콸콸 쏟아졌고.
—벌써 마지막 화라고? 아, 매주 감질나게 할 땐 한 번에 공개 안 해서 짜증 났는데, 막상 완결 난다니 다음 주에도 한 편 더 있었으면 좋겠네.
—누가 이기려나. 사실 흐름만 보면 임훈이 이길 것 같긴 한데···.
—사실 승패보단 임훈 어떻게 될지 그게 제일 궁금함. 해피엔딩이면 서귀호한테 물들지 않을 거고, 새드엔딩이면 제2의 서귀호 탄생이고.
—그리고 서귀호 어떻게 됐는지도 꼭 나와야 함. 완전 닫힌 결말 부탁드립니다.
시청자들의 반응도 다양했다.
완결이 아쉽다는 목소리와 내용에 대한 추측, 칭찬이 넘쳐났다.
그런 와중에 몇몇 사람들은 내심 불안함을 표출했다.
—다 필요 없고 부디 제발 마지막 화에서 이상해지지만 않았으면.
—요새 드라마들 전부 다 마지막 화에서 헛발질하고 뒤로 넘어져 버리는데, ‘악의 링’만큼은 그러지 말자, 제발!
명작이 될 거라 기대하던 드라마들이 후반부에서 폭삭 무너지는 광경을 한두 번 본 게 아니니까.
‘악의 링’의 꼬리가 뱀일지, 용일지.
그걸 확인하기까지 이제, 고작 일주일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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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공항 2층에 앉아 있다.
미국행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모든 사람들이 다 모일 때까지 1층에 있기엔 시선들이 퍽 부담되어 여기로 올라왔지.
그런데 여기에도 날 보는 시선은 있었다.
새하얀 피부의 아기가 유모차 위에 앉아 동그란 눈으로 날 빤히 바라본다.
옆에 아기 아빠는 귀 한쪽에 이어폰까지 꼽고서 핸드폰 삼매경이고.
씩 웃어주었다. 서귀호처럼 말고, 원래의 나처럼.
그러자 배시시 웃으며 고사리 같은 손을 움직이는 아기.
그렇게 제대로 심장 폭행을 당하던 중에, 맞은편에서 김성운이 왔다.
“어우, 이쁘게 생겼네.”
내 시선을 따라 아기를 본 그가 빙그레 웃으며 앉았다.
그리고 우유를 건네며 말했다.
“확실히 이쪽이 사람도 많이 없고 좋네.”
“그러게요.”
“그나저나, 저 애 아빠.”
김성운이 아기 아빠를 가리키며 목소릴 낮춘다.
“악의 링 보는 중이더라.”
“아, 그래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빠는 여전히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아기는 우리 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이번엔 김성운이 아기와 눈을 맞추고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흐아아앙.”
······그리고 울려버렸다.
“어, 어. 왜 그래, 민하야.”
서럽게 우는 아기를 뒤늦게 발견한 아빠가 아이를 안아 들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어?”
놀라는 목소리와 잠깐의 정적.
그걸 깬 건, 아기를 울려놓고 민망함에 헛기침을 하던 김성운이었다.
“가자. 밑에 다들 도착했대.”
멀티온에 함께 가는 배우와 제작진들이 모두 도착했나 보다. 어쩐지 아래가 소란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씩 웃으며 아기에게 인사를 했다. 서럽게 울던 아기가 울음을 멈춘다.
그리고 멍하니 날 바라보고 있는 아기 아빠에게 작게 인사하고서 몸을 돌렸다.
때마침 도착한 아기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뭐 하고 있어? 민하는 왜 눈이 젖었어? 울었어?”
“맞··· 맞는 거 같은데? 맞는데?”
“울었다고?”
“서귀호··· 서귀혼데.”
“뭔 소리야, 대체?”
입꼬릴 올리며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역시나. 위쪽과는 다르게 밑에는 작은 소란이 벌어졌다. 배우와 제작진들 주변으로 꽤 많은 사람들이 몰린 것.
“어? 백승결!”
“대박! 거 봐, 백승결만 안 올 리가 없다니까?”
“‘악의 링’ 팀이 미국 간다는 기사를 보긴 했는데, 그게 오늘인가?”
“몰라. 일단 사인··· 사인부터.”
결과적으로 나도 그 소란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정신없이 사인하고 사진도 찍으며 생각했다.
이런 삶을 원했고, 충분히 좋지만···.
‘그럼 너도 이참에 자유를 만끽하고 오면 되겠네.’
현태 형의 말처럼 아무도 날 알아보지 못하는 미국에선 자유를 좀 즐겨야겠다고.
그렇게 우리는 잠시나마 팬들과 함께 있다가, 공항이 더 소란스러워지기 전에 얼른 탑승 수속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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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각, LA 멀티온 본사.
한국 진출의 총책임자인 댄이 사무실에 걸린 대형 TV를 보며 고민에 빠졌다.
화면엔 ‘악의 링’의 성적이 떠올라 있었다.
누가 깎아놓은 것처럼 가파른 그래프가 그려져 있다.
“하루 만에 성장세가······.”
어느덧 500만 시간을 돌파한 그래프.
그 성과도 놀라웠지만, 지금 정말 신기한 건 시청시간의 점유율이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90%가 한국에서 시청한 시간이었는데, 새로운 그래프 하나가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중이다.
바로 USA. 멀티온의 나리이기도 한 미국이었다.
‘어제 17%를 돌파하더니 벌써 20%···.’
세계챔피언 로베노 카를렌의 트위터가 큰 홍보 효과를 가져다준 걸 감안하더라도 엄청난 성장폭이었다.
이대로라면 마지막 화가 공개되기 전까지 30%대까지도 노려볼 만했다.
“해외 컨텐츠 중에 이 정도 성장세를 보인 게 있었나?”
“‘악의 링’보다 성적이 좋은 작품은 있었어도, 이런 기울기는 솔직히 국내 드라마도 흔치 않죠.”
옆에 있던 직원이 그래프의 각도를 보며 답했다.
“······그렇지?”
주억거린 댄이 또다시 고민을 이어간다.
세계챔피언의 트위터 때문에 잠시 반짝하는 걸까? 아니면··· 기회일까?
그런 의문들 끝에서 문득 ‘악의 링’ 공개 날 동료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다른 나라들에 대한 마케팅도 좀 더 푸쉬를 해볼 걸 그랬나 싶네. 내부 시사회 반응도 좋았겠다, 한국에서 기대한 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아도 다른 곳에서 터질 수 있는 거잖아.’
어쩌면 그가 맞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지금이라도··· 지금이라도···.
작게 중얼거리던 그가 고민을 끝냈다.
곧장 임원들과의 오후 미팅을 잡았고, 움직였다.
장장 3시간 만에 돌아온 그를 직원이 맞이했다.
“오셨어요? 갑자기 무슨 회의를 그렇게 오래 하신 거예요?”
“악의 링 배우들하고 제작진 초대한 거. 그거에 대해서 의논 좀 하느라.”
“어떤 의논이요?”
“그 사람들한테 조금 미안하긴 한데······.”
갸웃거리는 직원에게 댄이 회의의 결과를 말했다.
“놀러 오라고 한 거, 취소해야겠다.”
그 말에 직원이 화들짝 놀란다.
“예?! 그걸 어떻게 취소해요. 지금 이미 비행기 타고 오는 중일 텐데.”
“아, 그건 문제없어. 어차피 오긴 와야 해. 대신 놀러 온 게 아니라 일을 해야겠지만.”
“···?”
여전히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바라보는 직원에게 댄이 덧붙였다.
“일 좀 키워보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