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악의 링 (2)
‘악의 링’ 마지막 화가 시작되었다.
대기실에 앉아 자신이 호명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서귀호.
“······.”
한이연 감독이 그 장면을 보며 나직하게 감탄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오늘 서귀호의 분위기가 그동안 봐왔던 그와 또 다르기 때문이었다.
‘악의 링’에서 서귀호는 매번 이렇게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공사판에서 죽음을 목격하기 전과 이후가 달랐고.
임훈이란 존재를 인식하기 전과 후가 달랐으며.
그와의 결전을 앞둔 지금이 또 달랐다.
그저 표정만 바뀌는 게 아니다. 사람이 풍기는 분위기 자체가 바뀌어 있다.
마치 도박사 같았다.
다가올 순간이 자신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사람처럼.
그는 긴장감과 쾌감을 적절히 배합한 탕에 몸을 담그고 있는 듯했다.
“어후, 소름이···.”
팔뚝을 쓸어내린 한이연 감독이 자연스레 백승결을 힐끔거렸다.
옆에서 캔 음료를 든 채로 마시는 것을 까먹은 듯한 배기우 감독도.
궁금해 미쳐 하던 마커스필름 대표도.
심지어는 이미 그를 카메라에 담은 적 있는 안원상 감독까지도 눈알을 굴렸다.
저 서귀호가 눈앞의 백승결일진대, 전혀 다른 사람 같았으니까.
어떻게 저런 딱 구분되지 않는 묘한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수많은 배우들의 얼굴을 가까이서 찍어본 그들로서도 그것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얼굴을 몇 등분 내서 각각의 표정을 지을 수 있고, 농도도 소스 만들듯 비율을 조절할 수 있는.
그런 말도 안 되는 배우가 여기 있다는 것에.
그렇게 그들이 감탄하는 사이, 서귀호가 마침내 임훈과 함께 링 위에 섰다.
그리고 시작되는 경기.
즐거움에 몸서리치던 서귀호의 표정이 발을 잘못 디딘 사람처럼 확 일그러졌다.
⌜뭐 하는 거야···.⌟
그는 임훈에게 분노를 터트렸다.
⌜제대로 안 해? 너도 나와 같잖아. 지금 당장이라도 이, 이··· 속 안에 있는 분노를 다 쏟아내고 싶어 죽겠잖아.⌟
분노로 얼룩진 얼굴.
임훈을 찢어 죽일 듯 노려보던 그의 눈빛이 일순 누그러든다.
빠짝 서 있던 핏대들이 가라앉으며, 그의 표정이 변덕스레 편안해졌다.
⌜그래, 그래. 알겠어. 네가 계속 그렇게 평범한 척을 한다면······.⌟
⌜······.⌟
⌜내가 끄집어내 줄게.⌟
서귀호는 방법을 바꿨다.
놈이 본 보습을 드러낼 때까지.
자신과 같은 동류라는 걸 밝힐 때까지.
아주 끈덕지게 링 위에서 임훈을 괴롭히기로.
그렇게 존재만으로 임훈을 뒤흔들던 서귀호가 더욱 그의 정신을 붙잡고 늘어졌다.
⌜거봐, 우린 같다니까?⌟
점점 달라지는 임훈을 지켜보며 환희에 물드는 서귀호.
그는 임훈에게 펀치를 허용하면서도 괴물처럼 달려들고 또 달려들었다.
살이 찢기고 피가 튀면서도 계속 웃었다.
그의 광기에 삼켜진 관객들이 환호한다.
그 소리가 임훈을 더욱 괴롭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승기가 완전히 임훈에게로 넘어갔을 때.
⌜그렇게 해서 죽겠어?⌟
서귀호가 핏물을 내뱉으며 히죽 웃었다.
⌜난 망가질 준비가 됐어. 그동안 약했던 다른 놈들처럼 도망치지 않아. 그러니 죽여. 죽이라고!⌟
그의 목소리가 임훈을 무수히 두드렸다.
심장박동 소리가 미친 듯이 울려댔다.
마침내 임훈이 광기 어린 눈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그의 눈은 어느새 서귀호처럼 변해 있었고, 가까스로 막고 있던 문이 열린 것처럼.
섬뜩한 얼굴로 서귀호를 부수려 했다.
그리고 비로소 완성된 임훈을 바라보며 서귀호가 더 없이 웃었다.
하지만.
⌜······.⌟
마지막 순간, 임훈을 정신을 차렸다. 상대를 부수려던 공격에서 힘을 뺐다.
그대로 넘어간 서귀호는 더는 일어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원하는 대로 죽지도 않았다.
의식을 잃은 서귀호를 임훈이 내려다보았다.
그때 환호하며 무대 위로 올라오는 그의 사람들.
⌜훈아! 됐어, 됐다고!⌟
⌜이제 네가 세계챔피언이야! 끝났다고!⌟
불쑥 놈이 일어날까, 주먹을 움켜쥔 채로 숨을 고르던 임훈이 답했다.
⌜······난 이제 시작인 것 같아.⌟
⌜응?⌟
⌜여기도 도피처는 아니었어. 결국, 이런 식으로 도망치는 건 의미가 없어.⌟
그날 경기가 끝나고서.
끼이이익——!
임훈은 문을 열어젖혔다.
괴물이 나오려고 몸부림치던 그 거대한 문을.
놈과 끝장을 보기 위해서.
놈을 죽이고서, 이 악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
그러기 위해선 괴물을 마주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편, 서귀호는······.
⌜이봐, 귀호! 귀호!⌟
매니저가 서귀호의 집 문을 두드린다.
그러나 서귀호는 집 안에 있으면서도 그 문을 열지 않았다.
임훈과의 경기 전과는 또 다른 얼굴로.
실망감에 젖어든 얼굴로, 되뇌고 있었다.
⌜다들 약한 것들뿐이야··· 다들 나약해··· 다들··· 다들···.⌟
한참 동안 중얼거리던 서귀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으로 몇 발자국.
⌜나를 죽일 수 있는 건··· 결국 나밖에 없구나.⌟
그리고, 덜컹—!
그가 임훈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악의 고리를 끊으며, 화면이 암전되었다.
······악의 링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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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한 기분이었다.
경기를 보는 내내 서귀호의 감정이 울컥울컥 올라왔다.
그렇다고 사이코패스인 그를 이해하는 건 아니고.
수많은 빈칸을 채우며 그저 하나의 역할이 아닌 인격체가 된 그에게 치열하게 몰입했던 만큼.
그가 느꼈던 감정만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아쉬워하면 안 되는 역할인 것조차 씁쓸하네.’
연기자에게조차 툭툭 털어내야 하는 역할이라니.
끝까지 외로운 놈 같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직 올라가고 있는 크레딧을 말없이 바라보는 네 사람.
그리고 잠시 뒤, 그들이 마치 짠 것처럼 거의 동시에 나에게로 고갤 돌렸다.
가장 먼저 입을 뗀 건 박 대표였다.
“이거 이제, 전세계에 홍보될 예정이라고 했지?”
“네.”
“이건 진짜······ 세계 시장까지 기대해봐도 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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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가시지 않는 여운을 안고 뒤풀이를 위해 술집으로 향했다.
안주가 깔리고, 술잔이 놓였다.
나는 잔이 부딪칠 때의 맑은소리를 위해 투명한 유리컵에 물을 따랐다.
그리고 시작된 2차전.
‘악의 링’을 보고 느낀 감상들이 코앞에서 튀어나오고 있다.
심지어 영화 감독들의 코멘트.
칭찬이 폭탄주처럼 섞이고 또 섞였다. 이것만으로 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박혜정 작가 입장에선 정말 업어 다니고 싶을 수밖에 없지. 아무리 좋은 각본을 완성했어도 이게 화면에서 구현되느냐는 결국 배우들의 몫인데. 이건 뭐, 그 정도가 아니라 막 살아 숨 쉬니까······.”
요즘 영화 촬영 때문에 피곤해서 그런지 일찍 취기가 돈 안원상 감독이었다.
그는 열정적으로 부러움을 표출했다.
자연스레 자신이 현재 촬영 중인 작품 얘기가 이어졌고, 현장에서의 답답함을 토로한다.
“대원군 때랑 너무 다르단 말이지. 이게 이태관 선배 같은 구심점이 없어서인 것 같아. 그리고 승결이처럼 강력한 카드도 없고.”
“얌마, 그게 대표인 내 앞에서 할 말이냐? 불안하게시리.”
박 대표가 쌍심지를 켜고 말을 막았다.
그리고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듯, 화제를 나머지 두 감독에게로 돌렸다.
“아무튼, 배 감독은 이제 막 영화제까지 끝냈으니 좀 쉬는 건가?”
“네, 이번엔 진짜 진짜 쉬려고요.”
“맨날 말로만 그러지 말고 이번엔 진짜 쉬어. 나중에 상업판으로 오면 더 못 쉬니까. 얘 봐봐. 안 감독.”
박 대표가 옆에 앉은 안원상 감독을 가리켰다.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온 채로, 취기를 몰아내려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있는 그를 보며 배기우 감독이 ‘쉴 거예요, 진짜’라며 끄덕거렸다.
문득 살아있는 좀비라 불리는 ‘악의 링’ 조규필 감독이 예전엔 꽤나 활발한 사람이었다는 얘기가 기억난다.
그가 안원상 감독의 미래인 건가.
“한 감독은? ‘정적’ 찍고 시간이 꽤 되지 않았나?”
“뭐예요. 전 쉬라고 안 해주세요?”
“넌 너무 쉬잖아.”
한이연 감독이 억울해하며 배기우 감독을 보았다.
“와, 배 감독아. 네가 보기에도 나 많이 쉬어?”
“그··· 구상을 많이 하시죠. 구상을.”
마지못해 답하는 티가 역력한 배기우 감독.
얼른 박 대표가 끼어들었다.
“구상만 하면 그게 쉬는 거지.”
“그건 대표님 말이 맞지.”
안원상 감독도 한마디 거들었다.
여기저기서 공격당한 그녀가 날 본다. 왜 날봐. 난 감독 아니라 몰라.
“대표님만 만나면 아주 무서워죽겠어. 잔소리할 거면 투자를 해주시던가.”
“입봉할만한 각본을 들고 오세요, 감독님. 그럼 나도 적극 알아본다니까? 너 잘 찍는 거 나도 안다고.”
그러자 그녀가 자작하게 남은 잔을 홱 비우며 호기롭게 말했다.
“안 그래도 준비하고 있어요.”
“오, 드디어? 어떤 건데?”
박 대표뿐만 아니라 모두 관심을 보였다.
그녀를 오늘 처음 안 나조차도 호기심이 동한다.
“일단 주인공이······ 천재예요.”
그렇게 말하며 날 보는 한이연 감독.
“오, 흥미롭네. 천재 좋지. 승결이가 이번에 맡았던 서귀호도 사이코패스이기 이전에 천재잖아.”
박 대표의 호응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주제는 미술이에요.”
그러자 박 대표의 얼굴이 뚝 굳었다.
그가 안원상 감독부터 배기우 감독, 그리고 한이연 감독을 쭉 훑더니 이마를 짚었다.
“아이고야··· 독립영화 감독들아. 제발 잘 가다가 그러지 좀 마라. 꼭 그렇게 마이너한 감성을 넣어야겠냐? 상업 뜻 몰라? 상업! 근데 뭐? 미술? 그게 투자가 되겠냐고······.”
한참 동안 혀를 차던 그가 그래도 궁금한지 덧붙여 물었다.
“그래서. 제목은?”
“아직 안 정했어요.”
“···어떤 내용인데?”
질문은 박 대표가 하는데, 한이연 감독은 여전히 날 보며 말했다.
“생계를 위해 위작을 하던 아버지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고, 그 죽음을 쫓기 위해 주인공이 위작의 세계로 들어가는 스토리예요.”
“그래도··· 내용은 생각보다 대중적이네? 복수물 좋지. 미술인 게 좀 걸리긴 하지만······. 그래서 얼마나 진행됐는데?”
“시놉 작업은 끝났어요. 각본 작업은 절반 정도 진행됐고요.”
“그래? 근데 너 아까부터 어딜 보고 얘기하니?”
날 보고 있다.
그리고 난 그 사실을 잠시 잊을 정도로 그녀의 설명에 집중했고.
‘들은 거라곤 이제 고작 소재뿐인데······.’
흥미가 생긴다. 그다음이 듣고 싶고, 대본이 보고 싶다.
마치 김성운이 말해준 소재만으로 ‘악의 링’이 머릿속에 척 달라붙었던 것처럼.
그녀가 준비 중인 저 작품이 궁금해진다.
“시놉 가져왔는데 한 번 보여드릴까요?”
“네.”
나를 보며 묻는 그녀에게 벌컥 대답해버렸다.
그녀가 가방에서 시놉시스를 꺼내 든다. 그리고 나에게 건넸다.
모두의 시선이 내 앞으로 몰려들었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새하얀 표지.
아직 제목은 안 정해졌다고 그랬지?
사락—.
첫 장을 넘겼다.
그러나 다음 페이지에도 시놉시스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 소개글이라고 해야 할까?
마치 소설의 앞부분. 프롤로그와도 같은 몇 줄의 문장이 중앙에 새겨져 있다.
······나는 천천히 그것을 읽었다.
『세상 만물을 똑같이 그릴 수 있는 아들아.
사람의 얼굴이 모두 제각각이듯, 그것은 신조차 해내지 못한 것이니.
너의 재능은 이교도나 다름이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