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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배우 복귀했습니다-63화 (63/167)

63화 천재 (2)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서점 근처에 위치한 작은 카페.

미간을 꼬깃꼬깃 접은 현태 형이 운을 뗐다.

하지만 이내 말문이 막혔는지, 내가 테이블에 올린 책을 내려다본 채로 굳어버렸다.

“이, 이걸로 독학해서 인터뷰를 해보겠다고?”

스스로 물어놓고서도 기가 차는지 헛웃음을 터트린다.

그리고 홱홱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나랑 있으면 은근 티 내고 자랑하기 바쁘던 양반이 지금은··· 부끄러워하네?

“모자 썼어. 걱정 마.”

“내가 안 썼잖아.”

“아···?”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입을 벌리고 웃었다.

“웃네, 웃어. 그래 지금까지 다 농담한 거지?”

“그렇게 이상한가?”

“하하, 얘 진심인가 봐··· 내가 널 꽤 안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아닌가 보다.”

“거봐, 전에 내가 그랬잖아. 형 나한테 속은 거라고.”

현태 형이 황당한 얼굴로 커피를 들이켠다. 얼음까지 아그작 아그작 씹고서 몸을 앞쪽으로 기대어 호소한다.

“아니 임마. 그냥 좀 이상한 앤 줄 알았는데, 심각하게 상상 이상으로 이상한 애였다고. 칭찬이 아니라니까?”

그러더니 손을 뻗어 책을 집어 들었다.

“아니, 책 좀 봐보자. 뭔데? 이게 무슨 절세비급이라도 되는 거야?”

페이지를 주르륵 넘기는 현태 형의 눈이 바빠졌다. 미간에 또다시 골이 파이고, 콧구멍이 벌렁거렸다.

그리고 턱 하고 내려놓으며 눈을 끔뻑거린다.

“뭐냐, 이 무식한 책은.”

“묵직하지?”

“아니, 무식하다니까? 무슨 단어장마냥 문장만 빽빽하게 쓰여있잖아.”

“그래서 그 책이 나한테 가장 잘 맞겠더라고. 단순해서. 외국인이 직접 녹음한 음성파일도 준대.”

“그건 요즘 다 주는 거고!”

“아, 그래?”

공부를 해봤어야 알지.

멋쩍게 웃자 현태 형이 더 환장해버리겠다는 얼굴로 말했다.

“아니, 기본적으로 영어 공부를 한다 하면 목적에 따라 뭐가 효율적인지 검색도 좀 해보고, 여기저기 물어도 보고···.”

그래서 댁한테 말한 건데요? 라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현태 형이 고갤 젓는다.

“아니다, 그거 검색하고 물어본다고 해서 일주일 만에 원어민이랑 드라마와 연기에 대해 심층적인 인터뷰를 하는 방법 같은 건 나올 리가 없지. 알려줄 사람도 없고.”

“나 대본 잘 외워.”

“알지. 아는데······.”

말끝을 늘이는 현태 형.

그 위로 내가 다시 한번 말했다.

“형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잘 외워.”

내 톤이 조금 진지해지자 그도 흥분했던 목소릴 누그러트렸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덮었던 책을 다시 펼친다.

“그래, 알겠어. 네 기억력이 그 정도면 이 중에 뭐라도 기억하겠지. 자, 큐!”

피디스럽게 테스트를 시작하는 현태 형.

내가 입꼬릴 올리며 입을 열었다.

“다니엘 태멋이라는 영국의 천재는 일주일 만에 외국어를 마스터했다. 그가 서번트 증후군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모두가 놀란 것은 언어적 능력이 자폐에 드러나는 경우는 매우 드물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필자가 일주일 만에 영어를 통달할 방법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그가 외국어를 공부했던 방법을 통해 전략만 잘 세우면······.”

“······.”

“더 말해?”

“너 뭔소릴······.”

당황한 얼굴로 페이지를 앞으로 넘긴 현태 형이 흠칫 놀라며 날 올려다본다.

“말머릴······ 외웠네?”

“일주일 만에 했다는 게 끌리더라고.”

벙찐 현태 형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나도 2주밖에 시간이 없거든.”

#

집에 도착하자마자 답답한 모자와 마스크를 벗었다.

사실 중간에 마스크 정돈 벗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래도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다음부턴 입에 뭐 들어갈 때 빼곤 계속 끼고 있었지.

오래전이긴 하지만 해별이 때도 그렇고, 연기를 그만두고서 택배 일을 하면서도 그렇고.

심지어 다시 복귀한 이후로도 사람들이 많이 알아보는 것에 놀랐는데, 지금은 차원이 다르다.

악의 링을 기점으로 평소보다 서너 배는 더 많은 사람이 알아보는 것 같다.

‘자고 일어나니 세상이 바뀐다는 게 이런 느낌이려나.’

작년에 걷던 거리가 변한 거 없이 낯설다.

이래서 악의 링 선배 배우님들이 그렇게 자유, 자유를 부르짖었구나 싶다.

물론 부르짖으며 도착한 곳에서도 자유는 없었지만.

“그래도 여긴 그대로지.”

중얼거리며 짐을 풀었다.

현태 형이 늦으면 읽으려고 했던 대본과 오늘 서점에서 산 영어책을 테이블에 올렸다.

고민도 없이 대본부터 집어 들었다. 그렇게 한 시간가량 탐독을 하고서 그제야 영어책을 펼친다.

“······.”

현태 형 말처럼, 누군가 보기엔 굉장히 무식한 책일 거다.

각종 상황에서 쓰는 문장들을 인심 좋은 집 공깃밥마냥 꽉꽉 눌러 담은, 두꺼운 단어사전하고 별반 다를 게 없는 책이니까.

뭐 이렇게 만든 나름의 이유가 저자에겐 있겠지만, 사실 나는 원리에 대해선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이쪽이 더 궁금해진다.

‘그래서. 나는 얼마나 걸릴까?’

나조차 내 능력의 한계를 모르겠는 걸···! 뭐 이런 중2병 같은 소린 아니고.

정말 모르겠다. ‘USA 투데이’ 인터뷰가 있을 2주 후까지 얼마나 해낼 수 있을지 감이 안 온다. 공부를 해봤어야 알지.

애초에 이런 시도를 하는 것 자체가 중2병스럽다고 하면 할 말이 없다만.

‘솔직히 내가 가진 능력, 그러니까 할 수 있는 것들을 정리해 보자면······.’

나는 집중해서 한 번 읽은 대본을 통째로 외울 수 있다.

그리고 한 번 본 사람의 얼굴을 웬만하면 다 기억한다.

이건 자세나, 동작에도 적용되어 어떤 자세를 완벽히 기억하고, 똑같이 따라 할 수 있다.

‘······굉장하긴 하지.’

지금까지 스스로 이런 능력을 뽐내며 살진 않았다.

아주 어렸을 땐 자랑도 했었지만, 가족이 망가지면서부턴 나는 나에 대해 드러내지 않았지.

더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택배일을 하며 송장이나 길을 찾고.

다시 배우로 복귀해 대본을 외울 때처럼.

자연스레 내 기억력을 활용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내가······.

‘언어라고 다를까?’

전부 다 외울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아, 이 책 전부는 말고. 그건 너무 쉽잖아.

영어 말하는 거다.

‘다 외울 수 있다고.’

김성운이 눈 상한다며 선물한 스탠드를 켰다.

공부라는 걸 오랜만에 해서 그런가, 조금 설레는 기분이다.

연기는 내게 공부가 아니었으니까.

사락—.

첫 장을 펼쳤다.

전략은 따로 없었다.

그냥 듣는다. 그리고 따라 한다.

······그게 전부였다.

#

그날 이후로.

대본을 읽고, 영어 공부를 하는 것만으로 하루가 빠듯했다.

하지만 그렇게 온전히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스케줄이 줄줄이 이어진다.

‘악의 링’이 흥행한 만큼 나도 덩달아 바쁠 수밖에 없었다.

구조가 그렇지.

오늘은 멀티온 한국 론칭 1주년을 기념으로 행사가 열렸다.

멀티온 본사에서 만들어졌던 부스가 국내에도 상륙했다.

그리고 나는 그걸 돕기 위해 지금 코엑스에 와 있다.

이걸 슈퍼 주인 할머니가 보셔야 하는데. 나 안 논다는 걸.

그때 옆에서 함께 대기하던 박혜정 작가가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솔직하게 슈퍼 주인 할머니 얘길 했더니 그녀가 웃음을 터트린다.

“할머니 팬 좋으시겠네. 배우가 이렇게 수시로 생각해주고.”

“그러게 말이에요. 그걸 아셔야 하는데. 우유 사러 갈 때마다 논다고 혼나기만 하고.”

“그러게. 배우들 사이에선 안 쉬는 배우로 유명한데 말이지.”

미국 호텔에서 했던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내가 옅게 웃었다.

그때 박혜정 작가가 옆을 돌아보며 말했다.

“어, 승찬이 왔어?”

방금 도착한 신승찬이 박혜정 작가에게 인사를 한다. 그리고 날 봤다.

서로 간단하게 눈인사를 했다.

그게 끝. 여전히 시크하고 신비로운 배우다.

근데, 뭔가 조금 친해진 느낌이 확실히 있는 것 같단 말이지.

가벼운 마음으로 시간을 보냈다.

조규필 감독까지 도착하며 작감과 가장 비중이 큰 주연 두 명이 모두 모였다.

“이제, 이동하시겠습니다.”

안내요원의 신호에 따라 대기실을 나섰다.

마치 대원군 무대인사 때 그랬던 것처럼, 물 건너온 부스로 향한다.

복도를 지나 홀로 나오자, 부스에 들어가기 위해 길게 선 줄이 떡하니 보였다.

이쪽도 경호원에 안내요원들까지.

눈에 띄긴 마찬가지라, 그쪽에서도 우릴 알아봤다.

동시에 사람들의 환호가 터져 나왔다.

이어서 화려하게 꾸며진 피켓들이 솟았고, 카메라들이 우릴 향했다.

부스에서 ‘악의 링’ 굿즈를 사 들고 나오던 사람들도 우릴 보고 소란스러워졌다.

넓은 홀이 순식간에 경기장인양 들썩였고.

우릴 본 사람들의 행복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래서 참 묘하고, 더 멋진 광경이었다.

#

“휴··· 오늘 진짜 맛있는 거 사라?”

친구 손에 붙들려 못내 끌려가던 여자가 투덜거렸다.

그러자 어기영차 자신을 끌어대던 친구가 눈을 흘긴다.

“아오, 알겠다니까. 유빈이랑 왔음 좋았을 텐데. 걘 왜 하필 면접을 봐서······.”

아쉬운 목소릴 내던 친구가 이상하다는 듯 묻는다.

“아니, 근데 너도 악의 링 열심히 봤잖아? 너무 재밌다고.”

“그랬지.”

“백승결도 잘생기고 연기 잘해서 좋다며.”

“그랬고.”

“근데 왜 싫어해?”

그러자 어깨를 으쓱거리는 여자.

“뭘 싫어해. 싫어하는 건 아냐.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지. 연기 잘해서.”

그녀의 대답에 친구의 표정은 더욱 미궁에 빠졌다.

“근데 왜 여기 오는 걸 이렇게 귀찮아하냐고.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기횐데!”

“보면 신기하기야 하겠지. 근데 그게 큰 의미가 있나 싶은 거야. 연기 잘하고 심지어 잘생긴 배우. 정말 멋지지만 그래봤자 우리랑 다른 세계 사람들 아니야.”

“어우, 너 이제부터 이름 남소연이 아니라 냉소연으로 바꿔. 춥다, 추워.”

“난 덕질 이해 못 한다고 했잖아. 아무리 팬들이 지하철에 거금 들여서 생일 축하하고 그러면 뭐해. 어차피 길거리에서 만나면 누가 팬인지 구분도 못할 텐데. 괜히 덕질하다가 상처만 받지.”

이마를 짚고서 고개를 내젓던 친구가 말했다.

“근데 백승결은 다르다니까? 그때 카페에서 유빈이 알아봤어.”

“매번 피켓 들고 오니까 어쩌다 기억에 남았나 보지.”

“나도 다음에 만나면 기억해준다고 했는데······.”

절로 콧방귀가 뀌어졌다.

진짜로 그걸 믿은 건가?

피켓까지 만든 유빈인 그렇다 쳐도, 카페에서 잠깐 마주친 게 전부인 팬을 기억한다는 건 말이 안 됐다.

백번 천번 양보해, 설령 기억한다고 해도 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알아볼 리도 없을뿐더러, 아는 체도 안 할 거다.

그럴 정신이 어딨겠어.

“야, 만약에 백승결이 너 못 알아보더라도······.”

실망하지 말라고 말하려는데, 갑자기 저쪽 끝에서부터 환호성이 쩌렁쩌렁 울렸다.

“어우 시끄러워.”

‘악의 링’ 배우들이 왔나 보다. 순식간에 홀 전체가 난리였다.

이윽고, 붉은 줄로 연결된 전시봉이 깔린 길로 신승찬이 먼저 빠르게 지나갔다.

저 봐, 도망치듯 들어가는 거.

여기저기서 가지 말라는 아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뒤로 백승결이 지나간다.

그래도 그는 신승찬과는 달리 여기저기 해맑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이미지 메이킹 잘하네.

그렇게 삐딱하게 생각하는데, 고갤 돌리던 백승결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자신을 여기로 끌고 온 친구에게.

그리고 다음 순간 백승결이 걸음을 멈췄다.

“어? 피켓 친구는 어디 가고 오늘은 혼자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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