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배우 복귀했습니다-65화 (65/167)

65화 천재 (4)

“직장인의 덕목이란 퇴근과 동시에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돌아보지 않는 건데···.”

맥주가 옅어질 때까지 콸콸 소주를 따른 홍보팀장이 잔을 입에 가져갔다.

한 번에 털어놓고서 뒷말을 잇는다.

“안 돌아볼 수가 없네. 믿기지가 않아서.”

그냥 적당히 놀라운 일이었으면 축배를 들었을 거다.

근데 도무지 믿기지 않는 광경을 보고 온 터라 분위기가 묘했다.

불과 몇 주 전에 미국에서 영어를 못 해 불편했다는 사람이, 갑자기 유창해졌다. 어휘는 물론 발음마저 완벽했다.

무슨 카이저 소제도 아니고······.

“이거 뭐 어디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프로에 제보해야 하는 거 아녜요?”

“홍보팀이, 배우를?”

옆에서 고참 직원이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제보를 운운한 직원이 마른안주를 집어먹으며 말했다.

“아니 그렇잖아요. 공부를 한다고 그게··· 아, 나 이거 하고 싶네? 그럼 공부해야지~ 와, 다 됐다! 뭐 이렇게 될 수 있는 거였냐구요.”

술은 입에도 안 덴 직원이 얼굴이 벌게지도록 열변을 토했다.

모두가 끄덕거렸다. 부러움과 허탈함, 그리고 신기함이 마른안주 위를 떠다녔다.

“제가 제일 현타와요. 엄마가 나 영어만이라도 잘하게 만들겠다고 유학에 들인 돈이······.”

커뮤니케이션 담당 직원이 금액을 산정하다가 더욱 우울해졌다.

그냥 잔을 들어 올린다.

“아니, 정말 이런 거 불가능하지? 미친 거지?”

동료의 말에 잔을 홱 털어 넣었다. 쓰다, 써.

“가능하면 나 취업 못 했지. 다들 그렇게 1, 2주 만에 영어가 되면 날 뽑을 이유가 있겠어?”

“아냐, 아냐. 우리 대리님 멘탈 지켯! 백 배우가 특이한 거예요. 그잖아요.”

“맞아. 어쩐지 기억력이 비상하더라니.”

······1차와 마찬가지로, 2차에서도 온통 백승결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 정도면 우리가 팬클럽 아니냐는 홍보팀장의 말에 다들 킬킬거리며 웃었다.

“근데 솔직히 얘기할 수밖에 없게 만들잖아요.”

“맞아요. 지금 하람 들어와서 백 배우가 만든 이슈가 대체 몇 개야.”

“전 아침에 일어나면 배우님 이름부터 검색해요. 오늘은 또 어떤 일이 생겼으려나, 하면서.”

그렇게 너도나도 간증하는 시간을 거쳐, 대화가 사뭇 진지한 방향으로 흘렀다.

“문제는 승결 배우의 그 말도 안 되는 머리를 어떻게 대할 거냐야. 대중에게 알릴 것인가, 말 것인가.”

홍보팀장이 낸 안건에 모두가 공감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하고 자랑을 하기엔 대중들의 마음이 너무 갈대 같지.

때론 너무 잘나서 문제가 되기도 한다.

잠시 고민하던 직원들이 하나둘 의견을 냈다.

“저도 사실 그게 좀 고민되더라고요. 왜 사람들은 너무 뛰어난 사람을 보면 좀··· 벽을 두잖아요.”

“맞아요. 최근에 악역으로 강렬하게 눈도장을 찍긴 했지만, 그래도 응원하고 싶고, 친근한 이미지가 배우님의 가장 큰 장점인데,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드는 걸지도 몰라요.”

잠자코 듣고 있던 홍보팀장이 결정을 내렸다.

“그래, 우리가 먼저 기억력이 대단하고, 어쩌고저쩌고 나서진 말자. 어차피 바지 속 송곳은 언젠가 튀어나오게 되어있고, 앞으로 자연스럽게 뛰어난 면들이 보여지는 게 이미지에도 더 도움이 될 것 같으니.”

그녀의 말에 직원들이 그게 맞는 것 같다며 동조하는 사이, 담배를 피러 나갔던 직원이 들어왔다. 핸드폰을 들고 어정쩡한 자세로.

그가 곧장 자신의 자리가 아닌 홍보팀장에게로 다가가 핸드폰을 내밀었다.

“팀장님 이것 좀 보세요.”

“이게 뭔데?”

얼떨결에 핸드폰을 건네받은 홍보팀장.

화면엔 영상 하나가 떠올라 있었다. 뭔가하고 재생을 누르자 카메라 앵글이 누군가를 쫓듯 거칠게 흔들린다. 하지만 결국 놓쳤는지 ‘에휴, 갔어···’라는 아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축 떨군 고개처럼 바닥을 비추던 화면이 갑자기 누군가를 잡았다.

“누구······.”

[어? 피켓 친구는 어디 가고 오늘은 혼자왔어요?]

중저음의 매력적인 목소리를 들은 홍보팀장이 콧잔등을 긁적였다.

“왠지 영어를 열흘 만에 정복했을 것 같은 목소리네. 근데 이거 무슨 영상인데?”

“제목 봐보세요.”

<우리가 백승결에 입덕해야하는 이유>

제목만 봐도 나쁜 영상은 아니다.

그녀가 영상을 빠르게 확인했다. 다른 직원들은 궁금한 얼굴로 그런 그녀를 기다렸다.

대략적인 내용을 확인한 그녀가 크게 웃음을 터트린다.

“이거 봐, 이거 봐. 그새 어디서 또 튀어나왔나 보네. 송곳이.”

백승결 배우라면 어차피 자연스레 뛰어난 면이 보여질 거라고 말한 게 방금 전인데.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또 이런 이슈를 몰고 왔다.

—저 팬이 백승결이랑 딱 한 번 마주쳤었다고 함. 근데 백승결이 얼굴 기억해서 저렇게 감동 먹은 거.

—한 번 만에? 어디서 마주쳤대요? 나도 당장 가서 기다립니다.

—이러면 진짜 덕질할 맛 나겠다. 경험상, 일방통행인 팬심은 진짜 얼마 못 감.

—와씨··· 백승결 웃는 거 봐. 빠져든다, 빠져들어.

해당 영상의 뜨거운 반응을 보며 그녀가 고갤 흔들었다.

“어쩌면 얜, 홍보팀이 필요 없을지도 몰라.”

#

김성운이 책을 보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그동안 공부한 영어책을.

몇 장을 더 넘기던 그가 잠시 고갤 들어 날 본다. 그리고 다시 책으로 시선을 내렸다가, 튀어 오르듯 나를 또 본다.

“이거로··· 영어 공부를 했다고?”

“네.”

“그것도 10일 만에?”

“생각보다 빨리 끝나서 다행이에요. 2주라 빠듯할까 봐 걱정했는데. 하하.”

가볍게 웃자 더욱 황당한 얼굴로 날 바라보는 김성운이었다.

팔짱을 낀 그가 ‘음···.’하며 침음성을 삼키다가 결국 픽 하고 웃었다.

“내가 대본 읽는 속도 하며, 외우는 속도, 거기에 운동까지 잘하는 거 보면서 ‘와 진짜 대단하구나’, ‘재능이란 게 저런 거구나’ 싶었는데······ 이 정도면 그냥 천재 아니냐? 아이큐 검사 해봤어? 한 번 해볼래?”

과학자였으면 ‘어디 머리 뚜껑 좀 열어보자’라고 할 법한 눈빛이었다.

옅게 웃으며 물컵을 잡았다. 잔 속에 담긴 우유가 찰랑거린다.

김성운이 눈을 가늘게 좁히며 내 우유를 바라봤다.

“혹시 그거 마시면 지능이 상승하고 그러는 건······.”

“그냥 뼈만 튼튼해지지 않을까요?”

“그러겠지. 무슨 포션도 아니고.”

한 번 마셔볼까, 하는 눈빛이던 그가 이내 포기하고서 가져온 커피를 쭉 들이켰다.

목을 축인 그가 가져온 대본을 정리한다. 그리고 일 얘길 덧붙였다.

“내가 굿픽쳐스하고 통화해봤는데, 특별출연 말이야.”

“네.”

“그거 촬영 날짜가 나왔는데, 이게 USA 투데이 인터뷰랑 하루가 겹치더라고.”

“어, 그래요?”

난감한 상황이었다.

특별출연 일정을 움직이자니 영화 쪽에 피해를 주게 되고, 인터뷰 시간을 바꾸자니 그건 그거대로 USA 투데이 측이 꼬이게 되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김성운을 바라봤다.

그런데 정작 그의 표정은 평온한 걸 보니, 이미 어느 쪽으로든 결정이 났나 보다.

“그래서 어느 한쪽을 조정할까 싶어서 USA 투데이 측에 연락해봤는데······ 오히려 쌍수를 들고 환영하더라.”

응? 일정이 꼬였는데, 환영까지?

“왜요?”

“구경하고 싶다고.”

“촬영장을요?”

“아니, 네 연기.”

#

며칠 후, 마크는 데이먼과 함께 한국에 도착했다.

그들은 호텔을 짐을 풀고서 반나절 짜리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악의 링’의 작가와 감독, 배우들을 만나기 위해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정신없이 이틀이 지나고.

그들은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촬영장으로 향했다.

데이먼이 조금은 편해진 마크가 아침에 산 한국 과자를 건네며 물었다.

“그런데 편집장님. 인터뷰 다 끝나면 만나기로 했다던 그 친구분은 어떤 분이세요?”

그의 질문에 작게 웃는 데이먼.

“천광윤. 한국의 최고의 영화배우.”

그렇게 답한 그가 누군지 모르겠다는 듯 갸웃거리는 마크에게 소개를 이어갔다.

“내가 배우였을 적에 만났던 친구라네.”

“그때 한국에 오셨었나요?”

“아니. 그 친구가 할리우드에 있었지. 그땐 나도, 그리고 그 친구도 할리우드 진출을 꿈꾸는 젊은 배우였어. 그러다 같은 영화에 출연하게 되었지. 돈은 없는데 촬영장은 멀어서 둘이서 몇 달 동안 동고동락하며 형제처럼 지냈지.”

그때를 회상하는 데이먼의 눈빛이 깊어졌다.

“영화가 흥행에서 참패하면서 이름을 알리진 못했지만, 그 친구는 한국으로 돌아와 대단한 배우가 되었어. 난 어쩌다 보니 이렇게 펜대를 잡았고.”

이야길 들은 마크가 꼭 영화 같다며 감탄한다.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은 촬영장 근처에 도착했다.

커다란 컨테이너와 촬영 장비들을 싣고 온 트럭들이 즐비한 넓은 공터.

그곳을 가로지르며 마크가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그리고 찍은 사진들을 확인하며 아쉽다는 듯 중얼거린다.

“한국 촬영장도 크게 다를 건 없네요.”

“애초에 영화 시스템 자체가 미국에서 아시아로 넘어간 거니까 그럴 수밖에 없지.”

“그래도 내심 기대되긴 해요. 악의 링에서 가장 좋아한 캐릭터가 서귀호였거든요.”

데이먼이 고갤 끄덕거리며 동의했다.

“누구라도 ‘악의 링’에서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를 꼽으라고 한다면 그였겠지. 그렇게 불완전한 캐릭터를 완전하게 연기하는 건 정말 쉽지 않으니까.”

“불완전···완전···.”

데이먼의 말에 감명을 받았는지 메모할 기세인 마크.

그때 세트장 앞에서 서성이던 남녀가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백승결 배우 매니저입니다.”

남자는 그가 소개한 대로 백승결 배우의 매니저.

그리고 여자는 통역사였다.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마크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럼 백승결 배우는······.”

“승결인 지금 메이크업 중입니다. 안에서 촬영 구경하고 계시면, 끝나자마자 바로 기자님들께 올 겁니다.”

두 사람을 세트장 안쪽으로 안내한 백승결 매니저가 몇 명의 현장 스태프를 소개시켜준 후, 통역사를 남겨놓고 떠났다.

마크가 카메라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개받은 현장 스태프에게 어디를 찍어도 되는지, 어딜 찍으면 안 되는지 내용을 듣고서 사진을 찍으러 돌아다녔다.

그 사이, 데이먼도 세트장을 구경했다.

불과 1, 20년 사이에 엄청나게 발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이 나라의 엔터 산업 자체가 그렇게 발전하고 있는 것 같았다.

미국 젊은 사람들이 한국 노래를 흥얼거리고 팬이 되는 건, 과거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으니까.

특히 이번 ‘악의 링’이란 작품이 제대로 물꼬를 터줬다.

정말 놀랐지. 한국 영화가 괜찮다는 건 천광윤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글로벌한 상업성에선 큰 기대를 하기 어려워 보였는데.

이제는 전세계에서 먹힐만한 상업성까지 겸비하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 한 작품일 뿐.’

앞으로가 더 중요하겠지만···.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현장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마크가 돌아와 옆으로 다가섰다.

“곧,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런 것 같군. 우린 방해하지 말고 이쪽에 있지.”

“네.”

그리고 얼마 뒤.

완벽하게 세팅된 조명 아래로 한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를 완전히 넘기고, 무테안경을 낀 회색 정장 차림의 남자.

“설마··· 백승결?”

마크가 뒤늦게 중얼거렸다. 그제야 알아본 건 데이먼도 마찬가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그의 얼굴엔 서귀호라는 이름 석 자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사실에 황당해하면서도 감탄하는 두 사람.

이윽고, 감독의 사인이 떨어지며 카메라가 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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