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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배우 복귀했습니다-66화 (66/167)

66화 천재 (5)

데이먼의 시선이 백승결에게로 향했다.

그의 연기를 본다는 게 어쩐지 감회가 새로웠다.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지만, 10여 년 전 천광윤에게 수없이 들었던 배우니까.

그땐 꼬마 배우라고 부를 정도로 어린 아역배우였는데, 지금 저렇게 큰 걸 보니 시간이 참 빠르구나 싶기도 했다.

자연스레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천광윤이 촬영장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며 연락을 해왔지.

그것도 10살짜리 아역 배우에게.

—대단한 애였어. 어떻게 그러지? 내가 그 아이 나이일 땐 뭘 하고 있었지?

솔직히 처음엔 별 관심이 없었다.

아역 배우라는 게 조금만 잘해도 천재 소리 듣고, 대단해 보이기 쉽잖나.

그런데 이야기가 거듭될수록···.

—오늘은 어찌나 서럽게 울던지. 내가 나쁜 놈이 된 것 같았어. 아, 나쁜 놈 역할이 맞긴 하지만.

조금씩 궁금해졌다. 흥미가 동했다. 대체 어떻길래······.

이성적인 천광윤의 성격을 알기에 더욱 그랬다.

—연기를 보니까 내가 다 기죽더라니까? 대단한 애야. 이런 애들이 많아야 된다는 생각을 하게 돼. 나는 비록 할리우드 진출에 고배를 마셨지만 언젠가 이런 애들이 전 세계가 열광하는 배우가 될지도 몰라. 디카프리오처럼.

그때는 솔직히 콧방귀를 꼈지.

천광윤이란 걸출한 배우조차 하지 못했다는 건, 시스템적으로 동양인은 결코 할리우드에서 감초 이상의 역할을 해낼 수 없다는 것과 같았으니까.

그러다 그가 찍은 영화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입이 마르지 않도록 칭찬한 꼬마 배우도.

충격적이었다. 10살짜리 아이의 연기가 감정선에서 자유로웠다. 그 위에서 뛰어놀고 있었다.

천재. 그 아이는 그렇게 부를 수밖에 없었다.

‘디카프리오나 열광까진 모르겠지만··· 전 세계 사람들이 알아볼 만한 배우가 되어가고 있긴 하네.’

세트장 사이에 조명을 받으며 서 있는 청년, 백승결.

전 세계적으로 입소문이 퍼지고 있는 드라마 악의 링’에서 서귀호라는 강렬한 연기를 선보였던 그가, 또 다른 연기를 보여주려 하고 있었다.

쨍그랑——!

유리 파편이 튀어 올랐다. 가장 큰 조각 하나를 집어 든 백승결이 바닥에 납작 엎드려 떨고 있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가 쭈그려 앉아 남자를 내려다본다.

“—, ——. ————.”

당연히 대사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만···.

“허···!”

데이먼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순간 자신이 뭔가를 알아듣지 않았나? 하는 착각이 들었다.

그 정도로 그의 눈빛과 표정이······.

입으로 내는 것과는 또 다른 대사를 쏟아내고 있었다.

#

“사실 오면서도 편집장님과 얘기했었지만, 서귀호라는 캐릭터가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악의 링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캐릭터인데. 그런 연기를 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들이 있었는지가 궁금합니다.”

영화 촬영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인터뷰가 시작됐다.

“어, 제 생각엔 노력도 분명히 많이 들어갔지만, 서귀호가 사람들 기억에 강렬하게 남을 수 있었던 진짜 이유는 다른 배우들의 도움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어째서죠?”

“예를 들어 어둠이 있어야 빛이 더욱 쨍하듯이, 서귀호라는 역할이 강렬할 수 있도록 다른 배우분들이 순간 순간 어둠의 역할을 해준 거죠.”

“오, 확실히 그럴 수 있겠네요. 다른 배우들의 연기가 평범할수록 서귀호가 더욱 비정상적으로 보일 테니까요.”

“그리고 덧붙이자면, 그런 평범해 보이는 연기가 가장 어렵죠. 다른 말로 자연스러운 연기니까요.”

“정말 그렇겠네요. 아니, 그나저나······ 영어를 엄청 잘하시네요? 사실 이 인터뷰 전에 약간의 혼선이 있었거든요. 처음엔 백승결 배우님이 영어를 잘 못 한다는 얘길 전해 받았었어요. 그런데 그런 정보가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왔나 싶을 정도로 영어 실력이 출중하시네요. 로컬이셨던 건가요?”

“아닙니다. 그냥······.”

말끝을 늘리며 옅게 웃었다. 이 부분에 대해선 너무 솔직하게 ‘10일 만에 마스터 해버렸답니다’라고 하지 않기로 했다.

나도 그렇게 하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그걸 밝히면 자칫 배우로서의 이미지보다 더 강한 이미지가 만들어질지도 모르니까. 예를 들면 언어 천재라던가, 기억력 천재라던가······.

“독학했어요. 한국에서.”

“와, 그건 놀라운데요? 배우들 중에서 언어적으로 뛰어난 분들이 많긴 하지만 독학으로 원어민 저리 가라 할 수준이라니.”

확실히 사실대로 말하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고작 독학했다고만 말했을 뿐인데, 마크라는 기자는 순순히 믿지 않는 눈치였다. 회사의 도움을 받았을 거라 생각하려나.

어쨌든, 독학했다는 게 이 정도인데, 10일 만에 뗐다고 하면 정말 미친놈 보듯 했을 거 같네.

“앞으로 영어를 사용하는 드라마에서도 배우님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아 참, 그리고 제가 노력에 대해서 질문을 드렸잖아요? 이게 사실 어제 인터뷰를 했던 신승찬 배우에게 들은 내용이 있어서였거든요.”

“···?”

“백승결 배우의 대본을 보고 충격받았다는 얘길 하더라고요.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대본을 보여줄 수 있나요?”

“어, 제가 악의 링 대본은 지금 없어서···.”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자가 설치한 카메라 뒤편에서 팔짱 끼고 구경 중이던 안원상 감독이 툭 던지듯 말했다.

“우리 대본 써도 돼. 카메라에만 안 잡히게 해줘.”

저러고 있으니 동네에서 무슨 촬영 있으면 꼭 나와서 구경하고 이런저런 오지랖도 부리는 아저씨 같네.

피식 웃으며 김성운이 그새 가져온 대본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기자에게 넘겨줬다.

“그럼 이거라도.”

“카메라에 조금이라도 담기지 않게 이렇게 돌아서 보고, 제가 느낀 점만 얘기를 해볼게요. 음······.”

그의 시선이 천천히 내려간다. 그러다 방지턱에 걸린 것처럼 덜컹거렸다.

뭔가 이상하다는 듯 미간이 꿈틀대더니 외국인 특유의 큼직한 제스처와 함께 그가 날 봤다.

“잠깐, 잠깐만요. 그런데, 이 작품······ 특별출연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맞습니다.”

그러자 그가 대본을 다시 쭈욱 훑으며 헛웃음을 흘렸다.

“근데, 어··· 하핫. 특별출연이 아니라 그냥 주인공이라 해도 믿겠는데요? 대본에 빈공간이 없어요.”

#

“아까 대본 보셨어요?”

촬영장을 벗어나며 마크가 물었다.

뒤이어 데이먼이 고갤 끄덕이자, 마크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그건 진짜 놀랐어요. 그래봤자 몇 씬 안 되는 역할인데 대본을 통째로 분석하고, 캐릭터에 스스로 서사를 부여하고······. 읽을 순 없어서 설명으로만 들었지만, 그 열정이 느껴지더라고요.”

살짝 흥분한 얼굴이었다.

그것을 데이먼은 이해했다. 저럴 때가 있다. 치열하게 살고 있는 배우들을 보며 일종의 영감을 받는 순간.

‘저 때의 기분이 날 기자로 이끌었지.’

아주 좋은 인터뷰가 나오겠다고 생각하며, 데이먼이 끄덕였다.

“그러니 그런 연기가 나오는 거겠지.”

특별출연이라기에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촬영장을 왔다.

그런데 백승결이 이곳에서 보여준 건, 오히려 노력이 아쉬워 보일 정도의 대단한 연기였다.

대사 하나 알아듣지 못하는데도, 그가 촬영한 모든 장면이 그렇게 느껴졌다.

‘악의 링’ 서귀호와 비교하니 더욱 그랬다.

악의 링이 뜨겁게 나쁜 놈이라면 오늘 그의 모습은 차갑게 나쁜 놈이랄까.

이성적이고 차가운 연기에서 나오는 또 다른 서늘함이 있었다.

저런 연기 실력에 유창한 영어까지······.

‘이제는 정말 가능할지도 모르겠군.’

과거 천광윤이 얘기했던, 전 세계 사람들이 열광하는 배우 말이다.

‘가서 얘기해줘야겠군.’

오늘 자신이 무엇을 보았는지.

그리고 무엇을 기대하게 되었는지.

데이먼이 씩 웃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

예정된 촬영이 모두 끝났다.

영화도, 인터뷰도.

물론 영화는 아직 몇 번의 촬영이 더 남아 있었다. 까메오가 아닌 특별출연이다 보니 분량이 꽤 된다.

“어땠어?”

짐을 챙겨 나온 나에게 안원상 감독이 물었다. 확실히 한시름 놓은 사람의 표정이었다.

근데, 내가 물어야 하는 거 아닌가? 연기 어땠냐고?

“재밌었어요. 영화 스토리야 말할 것도 없고, 제 역할을 연기하는 것도요. 이렇게 표정 변화도 적고 감정표현도 없는 캐릭터는 처음인데······절제하면서 연기하는 걸 배우는 것 같아 좋네요.”

짧은 감상 뒤로 안원상 감독의 인사가 뒤따랐다.

“고맙다. 사실 이 역할이 가장 고민이었거든. 정말 중요한 역할인데,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어서. 고종 때처럼 훌륭한 배우가 필요했는데, 고종을 맡아주었던 배우는 이미 너무 대단해졌으니 예산이 안 맞고.”

“고종 덕분에 악의 링도 만났는데,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웃으며 대답하고서 다음 씬을 준비 중인 촬영장을 훑었다.

“그나저나, 아까 인터뷰도 잘한 것 같더라. 두 사람 다 네 연기 보면서도 넋을 놓더니 인터뷰까지 끝나니까 아주 혼이 빠져서 나가는 것 같던데? 그리고 원래 그렇게 영어를 잘했어? 깜짝 놀랐네.”

이어지는 질문들에 홍보팀 매뉴얼대로(?) 대충 얼버무리고서.

촬영장을 나가려다가 슬쩍 물었다.

“감독님.”

“응?”

“혹시 악의 링 마지막화 본 날 이후로 한이연 감독님 만나신 적 있으세요?”

“한 감독? 없지. 근데 통화는 몇 번 했어. 각본 작업에 대해서 의견을 구하길래 얘길 좀 했었지. 근데 왜?”

질문하면서도 그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다.

내가 왜 물었는지 이미 눈치를 챈 거다.

마주 보며 웃자 그가 확신한 듯 말했다.

“그래, 네가 관심 보일 것 같더라. 그날 네 눈이 아주 초롱초롱하더라고.”

“각본은 얼마나 진행됐어요?”

“어느 정도 막바지인 것 같아. 슬슬 박 대표님하고도 만나본다는 것 같던데.”

“······그래요?”

마른 침을 삼키며 되묻자, 이번엔 그가 물었다.

“근데 하람이랑은 얘기가 된 거야?”

“대본 먼저 받아서 팀장님하고 얘길 해보려고요.”

“흐음, 그래?”

안원상 감독이 팔짱을 끼며 주억였다.

고심하는 표정이 ‘그거 쉽지 않을 텐데······’ 라고 말하는 듯했다.

어쨌든 알고 싶었던 것들을 모두 들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고민은 애저녁에 다 했다.

영어를 공부하면서도, 각종 행사를 다니면서도, 그리고 촬영을 하면서도. 계속 생각했지.

‘하고 싶은가?’

내 대답은 백이면 백 ‘그렇다’ 였다.

듣고 온 첫날부터 머릿속에 부유하는 시놉이 대체 어떤 대본으로 바뀌었을지.

주인공은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떻게 복수를 성공시킬지.

그런 궁금증들이 끝도 없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러니 더 이상의 고민은 필요 없었다.

곧바로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고.

뚜루루루, 신호가 울리며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여, 여보세요?

남의 집 문 열어보듯 조심스러운 목소리.

“안녕하세요, 감독님. 저 백승결이에요.”

—아, 알아요! 완전 알아요. 등록되어 있었어요!

나라는 게 확실해지자, 말까지 더듬으며 허겁지겁 답하는 한이연 감독.

그녀가 정신없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번호 잘못 누른 거 아니죠? 진짜 저한테 전화한 거 맞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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