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천재 (6)
한이연 감독이 무심결에 손을 뻗었다.
플라스틱 컵이 잡혔다. 너무 가벼운데?
역시나, 얼음마저 모두 녹아 텅 비어있었다.
“······.”
고갤 돌려 빈 컵을 바라보던 그녀가 생각했다.
잠깐··· 쉴까?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곧장 겉옷을 챙겨 원룸을 벗어났다.
이 빌라의 유일한 장점은 1층에 카페가 있다는 거였다.
“나 왔어.”
“응, 왔니. 올 때 됐는데 안 오길래 오늘은 글이 좀 잘 써지나~ 했네.”
“나름 집중은 잘 됐어. 막바지라 신경 써야 할 게 많긴 한데···.”
한이연 감독을 반기는 카페 사장.
친한 언니가 하는 카페였다. 아니, 하루에 서너 번씩도 오는 카페라 친해진 언니다.
그녀가 자연스럽게 한이연 감독의 커피를 내리며 말했다.
“끝나가는구나. 네 작업도, 가을도.”
“그러게. 갑자기 추워지네.”
한이연 감독이 겉옷을 움츠렸다.
작년 봄에 시작했던 각본 작업이 이제야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물론 이제 시작이었다.
시나리오가 마무리되면 각본이, 각본이 마무리되면 콘티가, 콘티가 마무리되면 캐스팅이, 그것마저 마무리되면 촬영이······.
“어우, 죽겠다.”
몸서리를 치며 고갤 흔들자, 커피를 카운터 위에 올린 카페 사장이 덧붙였다.
“죽지 말고 살아. 죽긴 왜 죽어.”
황급히 커피부터 한 입 수혈하는 한이연 감독.
“이제 좀 살겠네.”
“내가 살려준 거다? 잊지마?”
“커피가 살렸지.”
“그걸 내가 탔잖아.”
그녀와 말씨름을 하던 카페 사장이 카운터에 기대며 물었다.
“이번에 하는 건 상업영화라며. 그거 잘 되면 이 원룸촌도 벗어날 수 있는 거 아냐?”
“혹은 여기서마저 쫓겨나거나.”
“그럼 뭐 본가 들어가면 되지.”
“자존심이 있지. 꿈 좇아 떠난 딸내미가 마흔이 다되어서 실직했다고 기어들어 오면 얼마나 억장이 무너지시겠어.”
“자식 키우는 게 원래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랬어. 근데 자식 생각하는 마음은 끝이 없어서 여러 번 무너져도 또 다음 마음이 있는 거고.”
“그렇게 생각하니 좀 든든해진다.”
씩 웃는 한이연 감독에게 카페 사장이 뭔가를 깨달은 듯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그나저나, 잘 돼도, 못 돼도 난 오래된 단골을 잃는 거네?”
“종종 놀러 올게.”
“에라이. 이왕 떠날 거면 잘 돼서 선물 사와.”
꼭 그러겠다 답하고서 카페를 나왔다.
커피도 낭낭하게 챙겼겠다, 이제 올라가서 카페인의 가호를 받아 열심히 집필하면 되겠지만······.
“······.”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연락 올 곳은 없지만, 해야 할 곳은 있었다.
‘다들 바쁜 것 같던데.’
이제 슬슬 팀원들에게 연락을 해야 할 때였다.
유명 감독들이야 자신만의 팀이 있지만, 독립영화 감독에게 팀은 매번이 구인구직이다.
지난 작업을 함께 했던 카메라 감독, 오디오 감독, 스크립터들에게 모두 전화를 돌려 시간 되는 사람을 구하고, 조율하고, 읍소하기도 하고······.
말이 감독이지, 갑을 관계에서 병이나 정쯤에 위치해 있는 게 현실.
“쩝.”
막막해지는 기분을 떨쳐내려 다시 책상 앞으로 향한다.
글을 쓰는 것도 고통의 연속이지만, 그 틈에서 삐져나오는 즐거움이 나머지 전체를 다 삼키고도 남는다.
그러니 못 먹어도 고.
노트북 자판에 손을 올렸다.
[진기원은······.]
머릿속에 자연스레 떠오르는 얼굴.
어쩔 수 없다. 일단 쓰고 생각하자.
그때 지이잉 하는 진동음이 방안에 울렸다.
“어, 핸드폰이······.”
그녀는 자신의 주머니와 책상 위를 훑었다. 이내 의자 위에 걸쳐둔 겉옷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서, 겉옷 주머니에 손을 넣어 핸드폰을 꺼냈다.
마치 포장지가 벗겨지듯 주머니 속에서 나온 핸드폰 화면에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떠올라 있었다.
[백승결 배우님]
‘악의 링’ 마지막화를 본 날, 이 번호를 받기 위해서 얼마나 기회를 엿봤는가.
고민이 무색하게, 쉽게 따긴 했지만.
카페인이 깨운 정신이 다시 멍해진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것도 잠시.
전화가 끊어질까 봐 얼른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여, 여보세요?”
#
다음날, 나는 스케줄이 빈틈을 타 한이연 감독이 사는 곳으로 향했다.
그녀가 나 편한 곳으로 오겠다길래, 내가 가는 게 편하다고 억지를 부렸지.
솔직히 그녀를 위해서는 아니고, 그 시간에 대본을 얼른 완성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전부였다.
그 사실을 모르는 한이연 감독은 감사하다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냥 대본 빨리 써주면 되는데···.
그렇게 도착한 좁은 골목.
마스크를 벗고서 그녀가 정한 카페로 들어섰다.
그러자 한이연 감독이 벌떡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여기요, 여기.”
때마침 미리 주문한 음료가 나왔다.
냉큼 달려오려는 한이연 감독을 앉히고, 커피와 차가 담긴 트레이를 받아들었다.
“쟨 이 조막만 한 카페에서 뭘 그렇게 불러. 들어오자마자 바로 보였을 텐데. 그죠?”
카페 사장이 넉살 좋게 웃으며 말한다. 그러다 고개가 기울었고, 눈매가 치켜 올라갔다.
“근데······ 어디서 많이 본······.”
나를 살피던 눈에서 스파크가 튄 건 조금 더 지난 후였다.
“어, 어머!”
참 이럴 때가 난감하다. ‘그래요, 접니다. 하하’ 이렇게 먼저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사람 잘못 보셨어요’라고 하는 것도 웃기고.
먼저 제대로 알아보기 전까진 하하 하고 웃는 게 가장 쉬운 선택이었다.
“무슨 영화 미팅한다길래··· 아니, 너무 잘생겼길래 배우인가 했는데···!”
“언니!”
“어어, 미안. 에고, 미안해요. 내가 너무 놀라서···.”
얼른 달려온 한이연 감독은 카페 사장과 꽤 친한 것 같았다.
그녀를 진정시키고 나를 자리로 끌고 온 한이연 감독이 낭패라는 듯 말했다.
“다른 카페 갈 걸 그랬나요. 이쪽이 사람도 많이 안 지나다니고 그래서 여기로 정한 건데.”
“아녜요, 유쾌하셔서 좋은데요.”
빙그레 웃으며 차를 마셨다.
그럼에도 미안하다며 어쩔 줄을 모르는 한이연 감독.
잔을 내려놓자마자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래야 작품 이야기가 시작될 것 같아서.
“대본 작업은 얼마나 진행됐어요?”
“거의 다 끝나가요. 마무리 작업 중이긴 한데, 그래서 더 품이 많이 드는 것도 사실이네요.”
“그렇군요.”
끄덕거리며 아쉬워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건, 오늘 대본을 받아갈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그때 한이연 감독이 바닥에 기대어놓았던 가방을 들어 올린다.
“그래서 나온 것만이라도 가져왔는데···.”
“감사합니다.”
허연 종이뭉치가 나오자마자 뺏어들 듯 받았다.
차를 마신 게 방금 전인데, 그새 입이 바짝 마른다.
무슨 상사병 걸린 사람처럼 몇 주를 참았잖아.
그만큼 설레하며 대본을 확인했다.
여전히 제목은 없었다.
다음 장을 넘기며 슬쩍 물었다.
“완성은 언제쯤 될까요?”
“일주일 안쪽으로 끝날 것 같아요.”
“그럼 그때 한 번 더 올게요.”
“아, 아뇨! 그땐 제가 갈게요!”
그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는 듯 무조건 자신이 오겠다는 한이연 감독.
커피를 들이켜더니 잔을 타닥타닥 손톱으로 두드린다.
그것도 잠시, 그녀가 깊게 심호흡을 하며 물었다.
“근데, 배우님. 제가 진짜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그런데, 그냥 솔직하게 물어볼게요.”
“네, 말씀하세요.”
“제 대본은 왜 필요한 거예요? 아, 뭔가 말이 이상하네. 그러니까, 제 대본이 필요한 이유가 혹시······.”
“마음에 들어서요.”
“···!”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
그럴 만도 했다.
나도 내가 이렇게 적극적일 수 있다는 것에 놀라는 중이니.
“출연하고 싶어요. 진기원으로.”
#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택시에 올라타 한이연 감독이 준 미완성 대본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허겁지겁, 오랫동안 기다린 택배 상자를 열듯이.
그다지 좋지 못한 승차감에 살짝 어지러운 것도 아주 잠깐.
사락—.
장막이 걷히듯 페이지가 넘어가고 이야기가 펼쳐진다.
시놉시스에서 이미 보았던, 진기원이 회상하는 자신의 어렸을 적 이야기를 시작으로.
위작을 하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시간이 흘러 그의 시신이 발견되며, 평범한 비극이 특별한 활극으로 전환되어 버린다.
그 흐름을 정신없이 쫓다 보니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
집에 올라와서도 옷을 갈아입는 것도 잊은 채 계속 페이지를 넘겼다.
글이 나를 잡아당겼다. 계속 읽을 수밖에 없도록, 끊임없이 상상하도록.
‘이게 한이연 감독의 힘이구나.’
그녀에 대한 호기심에 전작들을 찾아봤을 때도 비슷한 느낌이 있었다.
낯설기만 한 세계에 들어온 것 같은 체험.
특히 바로 이전 작인 ‘정적’은 부검의가 된 한 여자의 이야기로, 보는 내내 내가 국립과학수사연구소를 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그게 이번 작품에선 더욱 만개한 듯하다.
그토록 생생한 글이었다.
순식간에 그 세계에 빨려드는.
주인공의 시선으로 위작(僞作)의 세계 속을 탐험하고, 경험하는.
그렇게 얼마나 그 속을 들여다보았을까.
읽다 보니, 이미 나는 진기원이었다.
#
아직 해가 너무 기울기 전인 여유로운 오후.
호텔 라운지에 앉아 독한 버번위스키 한 잔 시켜놓고 업무 중인 데이먼이었다.
어젯밤 미국으로 돌아간 마크가 벌써 기사 를 보내왔다. 아직 초고(草稿)인 걸 감안해도 꽤 빠른 작업이었다.
심지어 곧바로 카메라에 담긴 인터뷰 영상을 편집팀과 함께 다듬는 중이라고 한다.
신문에 인터뷰 내용을 실으면서 동시에 사이트엔 영상을 올리고 싶다면서.
‘신이 났군.’
이미 미국으로 돌아갈 때부터 마크는 그런 상태였다. 간지러워하고 있었다.
흔히 기자의 영감이라 하는 것이 떠오른 거다.
번뜩이고, 쓰고 싶어지는 것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마크가 보내온 초고를 띄웠다.
푸른 눈동자가 한동안 화면 위를 뛰어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주억거리며 몸을 뒤로 기댔다.
“좋네.”
짧은 평가와 함께.
첫 기사인 만큼 서툰 부분이 없진 않았지만, 적어도 어떤 얘길 하고 싶은지는 확실히 보였다.
그리고 데이먼은 기사에서 가장 중요한 게 바로 그것이라 생각했다.
이 기사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감탄이었다.
‘악의 링’을 만든 주역들에 대한 감탄.
그중에서도 백승결에 대한 찬사는 감격에 가까웠다.
아마 그의 서슬 퍼런 연기를 코앞에서 목격했기 때문이리라.
“괜히 나까지 간질거리는군.”
피식 웃으며 부족한 부분들에 대한 피드백을 적어 내려갔다.
너무 많은 부분을 자신의 식대로 바꾸진 않았다. 마크의 개성을 최대한 살리며 기사로서 반드시 필요한 부분들만 언급했다.
그렇게 스크롤이 내려가듯, 위스키잔의 높이가 바닥에 닿았을 때.
테이블로 다가오는 인기척에 데이먼이 고개를 들었다.
누구일지 짐작이 가기에 입꼬리가 올라간다.
“데이먼.”
중후한 목소리를 지닌 중년 남자.
백발을 거칠게 넘기고, 부드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한국 최고의 배우, 천광윤이 그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