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배우 복귀했습니다-72화 (72/167)

72화 천재가 천재 연기를 하면 (2)

대본 리딩이 시작되었다.

배우들은 가볍게 호흡을 맞춰보고, 감독은 전체적인 흐름을 확인하는 자리.

하지만 이 자리에 모인 배우들의 연기는 결코 가볍지 않았고, 한이연 감독은 흐름을 보고 있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그저 시청자 같았다.

그녀의 입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대본을 꽉 움켜쥐었다가, 푸하! 숨을 내뱉으며 고갤 젖힌다. 저러다 뒤로 넘어가겠네.

언뜻 이제 4번째 작품인, 심지어 상업영화는 처음인 그녀를 어리숙하고 아마추어처럼 보이게 만들 수도 있는 반응들이었지만.

이게 참 묘한 기분을 이끌어낸다.

꼭 연극을 하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관객처럼 날 것 그대로의 리액션을 보여주니 덩달아 신나게 된다.

평소에 카메라 앞에선 느낄 수 없는 기분.

그래서인지 나뿐만 아니라 다른 배우들도 신이 난 게 보였다.

얼굴을 대사에 맞추느라 웃지 않았지만, 연기 자체가 신나 있었다.

그리고 잠깐의 휴식시간.

“배우분들 너무 멋지다, 진짜···.”

한이연 감독이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이태관 배우와 고하윤을 제외하고는 ‘악의 링’처럼 초호화 캐스팅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조연들 중 대부분은 그녀와 함께 독립영화를 찍던 배우들이고, 나머지도 정말 배역과 연기만 매칭시켜 캐스팅했으니까.

하지만 모두가 연기파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은 배우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얽히고설켜 만들어내는 스파크들이 대본에서 튀어나와 팍팍 터졌다.

그 속에서 같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나도 문득문득 소름이 돋을 정돈데, 창작자로서 지켜보는 한이연 감독은 어떻겠나.

그렇게 잠깐의 휴식시간이 끝나고, 우리는 다시 자리에 착석했다.

거듭 너무 행복하고 감사하다는 멘트를 덧붙인 한이연 감독이 리딩을 재개한다.

“씬 59, 정유화의 아버지가 그녀 앞에서 잔인하게 죽었다는 부분. 여기 이후부터 이어서 시작할게요.”

자연스레 우리들의 시선이 고하윤에게로 몰렸다.

그리고 그녀는 나를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정유화로서 진기원을 바라보는 거겠지.

“난 놈들이 편하게 감옥 살이하다가 쉽게 나오는 꼴 못 봐. 아버지가 자길 버린 줄 알고 원망만 하던 너와는 다르게, 난 봐버렸거든. 놈들이 우리 아빠를······ 잔인하게 죽이는 거.”

그녀의 목소리가 뚝 떨어졌다.

이윽고 시선도 함께 떨어져 내리며.

“그러니까··· 도와줘. 복수를 할 수 있게.”

낮은 목소리가 청아한 음색과 합쳐져 슬픈 음색을 낸다.

누군가 그녀에 목소리를 얼어붙은 호수가 떠오른다고 표현했었는데, 그 말이 정말 맞았다.

그림자 변호에서와는 전혀 다른 느낌.

나는 같은 배우와 마주 보고 있었지만, 동시에 다른 이를 보고 있었다.

그 사실이 나를 흥분하게 한다.

최근에 이 작품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정말 영업사원이라도 된 기분이었는데, 오늘은 밀린 임금을 받듯 배우로서의 즐거움을 모두 누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나는 진정해야 했다.

왜냐면···.

“젠장!”

성질을 내야 했거든.

진기원은 안주연처럼 순진하지도, 최우진처럼 마음이 약하지도, 서귀호처럼 미친놈도 아니다.

그저 평범한 20대 청년이었다. 감정에 잘 휘둘리고, 어리숙하며, 성질이 급한.

“······그래서. 어떻게 복수할 건데. 우리 둘이서 하는 거야?”

“아니, 피해자가 더 있어. 우리 말고도.”

“미친 새끼들······.”

피해자가 더 있다는 얘기에 욕을 내뱉고서, 정유화에게 물었다.

“그래서, 계획이 뭔데.”

“놈들을 꾀어날 미끼가 필요해. 그래서 유통업체를 만들 생각이야. 위작을 한국으로 들여와 파는 일종의 공급책.”

“우리가 그런 걸 어떻게 만드는데?”

그게 가능하냐는 듯한 말투로 묻자, 정유화가 말했다.

“이미 우리 아버지가 인사동에서 하시던 일이야. 미술품 수입.”

“그걸로 놈들의 고객이 되겠다?”

“응.”

그녀의 대답을 듣고서 진기원은 여러 행동들을 한다.

머리를 쓸어넘기고 팔짱을 끼고, 발굽으로 바닥을 탁탁 두드리고.

하지만 대본 리딩에선 그저 잠깐의 텀을 두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러고 나서 말한다.

“근데, 그래서야··· 윗대가릴 못 만날 거 아냐.”

“······.”

“비지니스는 중간책이 오겠지. 안 그래?”

“처음엔 그렇게 시작해야지. 그렇게 조금씩 가까워져야지.”

“어느 세월에.”

툭 던진 말이 정곡을 찔렀는지, 정유화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녀가 발끈하며 물었다.

“그래서 뭐, 다른 방법이라도 있어?”

“우리 걸 사가라 그래.”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무슨 소리냐는 듯 미간을 찌푸린 정유화를 바라보며.

“뭐?”

“우리가 너희들보다 더 똑같이 그릴 수 있다고.”

나에겐, 진기원에겐 재능이 있다.

도입부부터 말하고 있지 않나.

『세상 만물을 똑같이 그릴 수 있는 아들아.

사람의 얼굴이 모두 제각각이듯, 그것은 신조차 해내지 못한 것이니.

너의 재능은 이교도나 다름이 없구나.』

천재라고. 신조차도 하지 못한 걸 해낸다고.

진기원의 성격은 평범하지만, 능력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내가 그리겠다고. 놈들을 꾀어낼 미끼.”

······이로써 씬이 끝났다.

지켜보던 한이연 감독이 기어이 뒤로 넘어갔다.

#

며칠 후, 굿픽쳐스.

평소 2, 3개 정도의 영화를 꾸준히 제작 중이던 이곳에도 비시즌이 찾아왔다.

안원상 감독의 신작, ‘도그페이스’가 후반 작업까지 끝나며 ‘눈속임’ 하나만 제작 중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다른 때보다 더 전운이 맴도는 사무실.

첫 상업영화이기 때문일까, 한이연 감독의 의욕이 해일처럼 굿픽쳐스를 덮쳤다.

“팀장님.”

“안돼요. 감독님···.”

“정말 안 돼요? 진짜 안 돼요?”

제작팀장이 애써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아시잖아요. 이미 세트장에 돈 정말 많이 들어간 거.”

“알죠. 근데 꼭 필요해서였잖아요. 그림 그리는 게 주인 영화에 미장센이 허접하면 그게 앙꼬없는 찐빵이지 뭐겠어요.”

“그래서 원하시는 거 다 해드렸잖아요. 근데 Di 작업까진 그렇게 못 해요. 할리우드 작업하는 외국팀에 어떻게 맡겨요.”

“로드리게스. 그분 컬러그레이딩이 진짜 끝내주거든요.”

벌컥—.

“이봐 홍 팀장. 우리 오늘 새로 생긴 순댓국집 어때. 거기 국물이 끝내주······.”

문을 열고 들어왔던 박 대표가 상황을 보더니 다시 뒷걸음질 쳤다.

“어, 얘기마저 나눠. 다 끝나면 연락해. 다 끝나면.”

“대표님도 오세요.”

“그, 한 감독? 나 박 대표.”

“알아요. 오세요.”

본인의 사회적 지위를 내세워봤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박 대표도 제작팀장 옆에 섰다.

“난 얘가 가끔 이렇게 획가닥 할 때마다 무서워.”

작게 중얼거리는 박 대표에게 한이연 감독이 두 손을 모았다.

“제가 진짜 이렇게 빕니다. 로드리게스 팀한테 DI 작업 맡기고 싶어요.”

“아니, 근데···.”

박 대표가 슬쩍 제작팀장을 봤다. 그녀는 파르르 떨며 거부하라고 농성 중이었다.

“돈이 없다니까?”

“미장센을 돈 주고 기깔나게 했죠? 근데 색감이 거기에 안 맞는다? 그거 돈 날리는 거예요.”

“그렇긴 한데···.”

또 파르르르 떠는 제작팀장의 머리.

이를 본 박 대표가 설득을 이어간다.

“그런 식이면 끝이 없어. 경차 사러 갔다가 외제차 사는 거고, 문방구 시계가 롤렉스 되는 거야.”

“그니까요. 제 새끼 외제차 좀 태워주려고요. 롤렉스 좀 채워주려고요.”

결국, 박 대표도 머리를 짚었다.

“내가 그때 전화를 하는 게 아니었는데. 울먹여도 무시하는 거였는데.”

···그 뒤로도 갑론을박이 오갔다,

말빨은 작품에 모성애를 가진 한이연 감독이 우세한 듯 보였지만, 결과적으로 전투에선 그녀의 패배였다.

애초에 이길 수 없는 전투였다.

이기기엔 로드리게스는 너무 큰 돈이 필요했다.

패잔병의 표정으로 나오는 그녀를 손기훈이 맞이했다.

“······국내에도 잘하는 분들 많아요.”

나름의 위로를 건네보지만, 소용없었다.

“나 욕심 나나 봐.”

“늘 그러셨어요.”

“그래서 홍준 오빠가 나 싫어했나?”

“아니, 그 형은 누나뿐만 아니라 실력 좀 된다고 여기저기서 아주 진상을······ 맞다, 축하 메시지 안 보냈죠?”

“응. 아직.”

“아직이 아니라 앞으로도 보내지 마세요. 배 감독님 어쩌다 마주쳐서 축하한다고 했더니 앞에서 유세를 엄청 떨었나 보더라고요. 월드 클래스인 주백기 감독이랑 일하니까 세상이 달리 보이느니, 아티스 엔터 배우들이 대거 나오는데 독립영화 배우들하고는 차원이 다르다느니. 제작비가 300억으로 시작해서 지금은 소규모 투자까지 합치면 350억이 된다느니.”

“부럽다···.”

오만상을 찌푸리며 말하던 손기훈이 부럽다는 한마디에 벙쪘다.

“부러우라고 한 말은 아닌데? 재수없으라고 한 말인데.”

“원래 부럽다는 재수없다랑 동의어야. 제작비가 그 절반만 돼도 로드리게스 충분히 가능할텐데···.”

반면 지금까지 투자받은 ‘눈속임’의 제작비는 110억.

이것도 이름있는 세 배우들 덕에 많이 받은 거였다.

“내가 너무 만족을 모르나.”

대본이 잘 나와 욕심이 생긴다.

배우들이 연기를 잘해서 욕심이 커진다.

미장센도 끝내줄 것 같다.

여기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DI만.

그거면 되는데.

“돈이 더 필요해······.”

#

촬영장에 투자자들이 방문하는 건 마치 투자설명회 같은 느낌이다.

우리가 이런 걸 준비했으니, 좀 더 투자해달라.

아니면 입소문을 내서 같이 투자할 사람들을 만들어 주던가.

그 시기는 보통 영화 중간에 잡는 경우가 많다.

그 시점에 촬영하는 장면들이 가장 보여줄 게 많으니까.

하지만 눈속임은 첫 촬영부터 투자설명회를 개최했다.

촬영과 편집, 그리고 후반 작업이 거의 동시에 진행되는 영화 특성상, 그들에겐 시간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촬영 순서를 바꾸면서까지 첫 촬영에 힘을 줬다.

촬영장에 도착한 투자자들이 만들어진 세트를 보며 꽤나 감탄하고 있었다.

“세트장이 장난 아니네요.”

“저희 회사 돈이 다 여기로 들어갔나 본데요? 하하.”

중세 유럽의 느낌이 물씬 나는 공간에서 그들의 눈이 이곳저곳을 훑었다.

동시에 입도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근데 여기저기서 걱정하더라고. 패키지(감독, 시나리오, 배우) 중에 배우들만 보고 투자한 거 아니냐고.”

“저도 그런 얘기 들었습니다. 대본이 좋아서 진행했다고 해도 다들 안 믿어.”

“감독도 유명하질 않으니 더욱 그런 시선으로 보는 것 같아요. 전작 재밌게 봤는데.”

“전작은 독립영화였죠?”

“맞아요. 그나저나 이거 OTT 어디로 들어갈지 아직 계획 나온 거 없죠?”

그들을 안내하던 굿픽쳐스 제작팀장이 얼른 끄덕였다.

“아, 네. 아직입니다.”

“말해 뭐해요. 무조건 넷플리스지.”

“근데 백승결 배우가 출연하잖아요. 그러면 멀티온도 나쁘지 않죠. 악의 링은 곧 1위 찍을 것 같고. 그 뭐야, 해별이네. 그것도 악의 링 악역이 어렸을 때 찍은 거라고 해외에서 반응 좋다던데. 그치 않아요?”

가끔 그들이 묻는 질문에 성실히 답변하며 기다리길 20여 분.

언제 촬영이 시작되냐며 살짝 지루해하는 그들 틈에서 제작팀장은 그저 하하 웃으며 조금만 기다려달라는 말을 반복했다.

첫 촬영이다 보니 아무래도 준비가 길어질 수밖에.

그때 한이연 감독이 무전기를 들어 입에 가져갔다.

“자, 이제 촬영 들어갈게요. 배우분들 불러와 주세요.”

드디어 촬영 준비가 모두 끝났나 보다.

제작팀장이 안도하며 방긋 웃었다.

동시에, 투자자들의 시선이 화려한 세트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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