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천재가 천재 연기를 하면 (3)
대기실에 앉아 대본을 내려다보았다.
깔끔하게 인쇄된 글씨들 옆에 삐뚤빼뚤 이어지는 자필.
주석처럼 주렁주렁 달린 그 속에 내가 만든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감독의 ‘눈속임’과 세계관을 공유하지만, 오로지 진기원만 조명하는 이야기.
딱히 한글자 한글자 읽는 건 아니었다.
감독의 이야기도, 나의 이야기도 모두 머릿속에 있으니까.
그저 촬영 직전이기에 대본 자체를 보는 중이었다.
이걸 처음 읽고 연필을 꾹꾹 눌러 또다른 이야기를 덧붙이던, 그때의 기분을 되살리기 위해서.
향기를 맡으면 과거의 추억이 떠오르듯, 이러면 좀 더 빠르게 역할에 몰입할 수 있으니까.
그때 날 방해하지 않으려 슬쩍 자리를 비웠던 김성운이 대기실로 들어왔다.
“승결아, 촬영 준비 끝났대.”
“네.”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를 걸으며 다음부턴 통화하는 척 하면서 안 나가도 된다고 김성운에게 덧붙였다.
그러자 그가 허허 하고 웃는다.
“티나?”
“나가셨는데 목소리가 안들리잖아요.”
“난 배우하긴 글렀나보다. 역시 매니저가 천직이야.”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길 하면서 촬영장으로 향한다.
곧이어 한이연 감독이 그렇게 열변을 토하던, 그녀 머릿속에만 있었던 ‘눈속임’의 세계가 펼쳐졌다.
벽지 패턴부터 소품 하나까지 엄청 신경을 썼다지.
고풍스러운 벽난로와 카페트 위에 의자, 샹들리에.
확실히 엄청 화려하긴 하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 더욱 압도적인 건, 공간 곳곳에 벨벳으로 덮여있는 거대한 캔버스들이었다.
불규칙적으로 세워져 있는 그것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꼭 그림들의 무덤같네.’
잠시 그런 생각을 하며 세트장을 구경하는 사이, 짧은 기다림이 끝났다.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사인.
손기훈 스크립터의 신호에 따라 고개를 돌렸다.
어두컴컴한 아치형 복도가 있는 곳으로.
그곳을 바라보자마자 한이연 감독이 소리쳤다.
액션—!
그리고 내려앉은 정적.
뒤이어, 조명 하나 없이 하수구처럼 음산한 그곳에서 누군가 걸어나온다.
점차 빛이 얼굴에 닿으면서 윤곽이 드러난다.
마침내 이태관 배우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대원군 때와는 또 다른 모습으로.
······이제 시작이었다.
아시아 전역에 퍼져있는 점조직의 수장이라 하기엔 너무나 후레한 옷차림의 중년 남자.
진륭, 세르반, 알렉산드로···.
수많은 이름을 가진 그는, 굽은 등으로 날 바라보았다.
고작 내 가슴께 정도밖에 오지 않을 키.
하지만 겉모습과는 별개로 그에겐 엄청난 위압감이 있었다.
“자네인가?”
나는 불쑥 고개를 든 두려움을 억누르며 입꼬릴 한껏 치켜올렸다.
“에? 한국인이세요? 이야, 이거 신기하네. 중국에 본거지를 둔 조직의 보스가 코리안이라니. 이거 막 국뽕이 차는데요?”
그러자 놈의 입끝도 서서히 올라간다.
아주 옅게 웃었지만, 살면서 본 어떤 웃음보다 강렬했다.
“자네냐고. 이 그림을 그린 게.”
동시에 천이 스르륵 내려간다.
가로 390, 세로 445 크기의 캔버스.
그 안엔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가 그려져 있었다.
나는 짐짓 여유로운척하며 끄덕였다.
“네, 제가 그렸죠.”
보다 경박하게, 날티나는 표정과 제스쳐로 놈을 상대한다.
“어때요. 뭐가 진품인지도 모를 정도로 감쪽같죠?”
그러자 진륭, 세르반, 알렉산드로······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를 놈이 품에 손을 넣었다.
번뜩이는 빛. 칼이었다. 놈이 칼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 칼만큼이나 날카로운 눈으로 날 본다.
순간 움찔했지만 최대한 두려워한다는 걸 숨겼다.
한가질 들키는 순간, 모든 걸 들키게 될 것만 같은 눈이었다.
“흐음, 우선 물감엔 꽤 신경을 쓴 듯 하지만······.”
다음 순간, 놈이 칼을 손아귀에서 휘휘 돌리며 그림을 훑는다.
그리고.
좌아아악—!
칼로 가차없이 캔버스를 찢어발겼다.
“종이의 질감은 생각하지 못했나보군.”
“······.”
심장이 미친듯이 두근거렸다.
갑자기 달려와 나를 저렇게 만들 것만 같은 두려움이 솟구친다.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뒷걸음질 쳤다.
놈의 칼이 어디로 향하는지, 그것에 바짝 긴장하며.
놈은 허공에 대고 칼을 부드럽게 휘둘렀다. 이렇게 보이는 게 나도 미친 놈 같지만, 마치 붓질을 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내 지척까지 온 그가 씩 웃으며 말한다.
“그럼에도 붓질만큼은 내가 본 최고의 솜씨였어.”
그가 칼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악수를 권하듯 손을 내밀었다.
휴, 시발.
#
‘첫 촬영부터 이 장면을 진행하는 게 내심 불안불안했었는데, 이렇게 완벽한 장면이 그려질 줄이야!’
한이연 감독의 표정에 그야말로 환희가 쏟아져내렸다.
자신이 수백 번 그리며 타자를 쳤던 장면이 조금의 아쉬움도 없이 완벽하게 찍히고 있다는 것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상업영화라 그런걸까? 돈의 힘이 이렇게나 대단한 걸까?
결코 그것만은 아니었다.
배우들의 연기가 가장 대단했다.
이태관 배우와 백승결. 두 사람의 연기가 만들어내는 그림이 미장센과 어우러져 정말 그럴듯한 세계를 만들어냈다.
이런 상황이니 뒤에 와있는 투자자나 배급사 직원은 그녀의 안중에서 점점 더 멀어졌다.
“내 머릿속을 저 둘이 위작해버리네···.”
끝없이 감탄하며 이어지는 장면들을 확인한다.
악수를 마친 이태관 배우가 말했다.
⌜나는 이 사업을 더 키워볼 생각이야.⌟
이태관 배우의 역할은 언론에 공개된 대로 악역.
극중 주인공인 진기원과 정유화의 아버지를 죽인 장본인이자, 전세계로 뻗어져있는 위작 집단의 수장이었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특별한 그였만, 더욱 놀라운 건 가진 바 능력이었다.
‘신의 눈’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로 엄청난 시력을 가진 그는, 레코드판에 새겨진 얇은 홈을 보고서도 음악을 맞출 수 있을 정도였다.
그 능력 덕분에 그는 어릴적부터 쉽게 알아차렸다.
수많은 박물관에 걸려 있는 그림 중 상당수가 위작이라는 걸.
물론 미술품의 보호를 위해 일부러 모조품을 내세운 경우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이 더욱 많다는 걸.
그리고 그걸 알게된 순간 깨달았다.
이게 돈이 되겠구나.
그가 진기원을 자리에 앉혔다. 자신이 앉은 의자가 ‘고흐의 방’ 속 의자와 똑같이 생겼음을 안 진기원이 흠칫 놀란다.
하지만 그럴 새가 없기에 이내 정신을 차리고 묻는다.
⌜···얼마나 더 말입니까.⌟
⌜저어어기, 끝까지.⌟
마주 앉은 그가 손을 번쩍들어 동쪽을 가리킨다.
그리고 낮게 으르렁거렸다.
⌜유럽.⌟
그림이 르네상스를 꽃피웠던 대륙.
가장 고가의 그림들이 즐비한, 그림들의 성지.
그곳에까지 뻗어나가겠다 선포한 그가 섬뜩하게 웃는다.
⌜훗날, 저승에서 고흐가 내 귀를 자르고,미켈란젤로가 내 팔을 부러트리더라도.⌟
⌜······.⌟
⌜카라바조가 내 목을 치고, 다빈치가 사지를 찢더라도.⌟
⌜······.⌟
⌜나는 기꺼이 그들의 그림을 능욕할거야.⌟
욕망. 지독한 욕망.
그 속에 몸을 담군 그는 시선을 들어 진기원을 보았다.
⌜자네 생각은 어때? 내 눈과 자네의 그림이 합쳐지면, 오히려 그들의 그림을 위작으로 몰아갈 수도 있지 않겠나?⌟
그러자 진기원이 재빠르게 표정관리를 하며 웃었다.
⌜귀 정도는 제가 대신 찢겨드리죠.⌟
⌜든든한 조력자가 생겨서 기쁘군.⌟
크게 웃은 그가 자리를 떠났다. 곧 연락이 갈테니 기다리라며.
⌜휴우······.⌟
남겨진 진기원이 한숨을 내뱉었다. 진이 빠진 얼굴로 몸을 비틀다가 그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툭 내뱉었다.
⌜지랄.⌟
그가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이를 악 문다.
⌜아버지도 그 조력자 중 하나였겠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거고.⌟
정유화를 비롯한 복수를 위해 뭉친 이들을 생각하며 그가 이를 갈았다.
⌜두고보자.⌟
덜덜 떨리던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 손은 이렇게 떠는 것 말고 해야할 일이 있었다.
그것을 떠올리며 진기원이 덧붙여 말했다.
⌜네 그 잘난 두눈이 너를 무너트릴거야.⌟
그리고 장면이 끝났다.
······미치겠다.
그 소릴 속으로 수십번은 되뇌인 한이연 감독이었다.
아 참,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컷! 오케이!”
얼른 무전기를 들어 장면을 끊고서, 감독 의자에 파묻히듯 기댔다.
이태관 배우의 압도적인 연기와 백승결의 어설픈 연기가 어우러져 완벽한 장면을 만들어냈다.
특히 백승결의 연기는 기가막혔다.
허세를 부리며 연기하는 진기원. 그걸 연기해내는 백승결.
진륭을 상대하는 진기원의 과한 허세가 딱 그녀가 원하는만큼 화면을 뚫고 나왔다.
“너무 잘담겼어··· 근데 이걸 그냥 아무데나 맡기라고?”
색빠진 필드모니터를 보며 한이연 감독이 탄식했다.
그리고 몸을 스윽 돌려 투자자들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저곳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아니, 여기서 끊는다고? 허, 더 보고 싶은데?”
“이야, 이거 대박인데요? 두 사람 연기가 진짜···.”
“대본으로 봤을 땐 이 장면이 어떤 느낌일지 감이 안 왔었는데, 너무 좋습니다. 상상이상으로···.”
다행이 그들의 표정과 대화가 말해주고 있었다.
기대 이상이라고.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좋은 영화가 될 것 같다고.
쉽사리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건 그들도 마찬가지.
다음 씬을 준비하는 동안, 그들의 들뜬 목소리가 계속 들려온다.
이에 한이연 감독은 기대했다.
부디, 저 사람들이 이곳에서 본 것들을 널리널리 퍼트려주길.
#
며칠 뒤.
촬영장에 나온 한이연 감독의 분위기가 평소와 달랐다.
들뜨다못해 날아다니는 것 같다.
괜히 발을 보게 된다. 유령처럼 떠 있는 거 아닌가.
‘그건 아니네.’
중력을 거스르는 듯한 걸음걸이를 보며 신기해한 것도 잠시.
이유를 들어보니 저럴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김성운의 속된 표현을 빌리자면 투자가 알을 깠다.
약속했던 투자 금액이 늘어나고, 입소문을 듣고 찾아와 새로운 투자를 논의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그렇게 불과 며칠 사이, 110억이었던 제작비가 130억으로 껑충 뛰었다고.
덕분에 그녀가 노래를 부르던 DI 작업도 원하는 곳에 맡길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건 결과적으로 우리 배우들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우리의 출연료가 올라가는 건 아니지만, 영화의 퀄리티는 분명 올라갈 테니까.
게다가 나머지 투자금은 홍보에 쓰이게 될테니 영화의 흥행에도 엄청난 도움이 될 터.
‘눈속임’의 손익분기점은 150만.
적다면 적고, 많다면 많은 숫자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했다.
“영화 진짜 잘 나올 거야.”
아직 촬영이 시작된지도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래?”
집 앞 카페.
잔뜩 기대어린 표정의 현태 형이 되물었다.
그리고 커피를 홀짝이며 자연스럽게 말꼬릴 올린다.
“그러면 이번인가?”
“응?”
“아닌가. 저예산 영화라 그 정도는 힘든가?”
“뭐가 힘들어?”
혼자서 이러쿵저러쿵 고민하던 현태 형이 날 보았다.
“네가 시상식 때 말했던 거.”
뒤이어 그가 커피잔을 달그락 내려놓으며 말했다.
“해별이를 뛰어넘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