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눈속임 (4)
잠시 멍한 표정을 짓는 주백기 감독이었다.
나한테까지 한 방 맞을 줄은 몰랐다는 듯, 눈을 깜빡거리다가 눈알을 데구르르 굴린다.
이걸 화를 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런 고민과는 달리 안면은 정직했다.
얼굴이 나 화났소, 하고 붉어지고 있었다.
그때 적절히 끼어 들어주는 이태관 배우.
대원군에서도, 눈속임에서도 대립각을 세웠는데.
영화를 처음 수면 위로 끌어올릴 때도 그렇고, 현실에선 이렇게 든든한 아군이 없다.
“아무튼, 우린 슬슬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임계점에 다다를 것 같던 시선이 이태관 배우에게 향하며 조금 가라앉았다.
크게 심호흡한 그가 한쪽 입꼬리면 비스듬히 끌어올리며 애써 괜찮은 척을 한다.
“어쨌든······ 이 선배님은 뵙고 가는 게 도리일 것 같아서 기다렸는데, 경쟁작이라 그런지 다들 날이 서 있네요. 하핫. 정말 경쟁이 된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끝까지 자존심을 세우고서, 몸을 돌린다.
눈 한 번 안 깜빡이고 고하윤을 노려보던 주예린도 흥 하고 돌아선다.
여배우들이 굴욕 사진을 피하기 위해 플래시 터지는 거에 눈 안 감는 걸 연습한다던데, 그 성과를 여기서 보여주고 가네.
어쨌든,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동시에 뒤쪽에서 분통을 삼키던 고하윤 매니저가 이번엔 화통을 삶아 먹은 목소리로 말한다.
“아니, 대체 누가 먼저 날을 세웠는데? 먼저 와서 숫돌처럼 벅벅 갈아놓고서!”
그 옆에서 주백기 감독과는 한마디도 나누지 못한 한이연 감독이 씁쓸하게 웃는다.
자신의 대본은 대단한데, 자신이 부족하다 말하던, 딱 시사회 때 그 표정이다.
오늘 일도 자신 때문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감독님 때문 아녜요.”
툭 말하자 그녀가 싱긋 웃으며 끄덕거린다.
내가 이렇게 말한들, 확 괜찮아질 그녀가 아니었다.
···조금 답답해져 김성운을 돌아보았다.
“유치하네요.”
“괜찮아. 너도 못지않았어.”
“칭찬이죠?”
“연기 잘했다는 말만큼이나. 벙찐 표정 보니까 속이 다 시원하더라. 네가 그렇게 받아칠 줄은 몰랐는데.”
“그러게요. 제가 그런 거 진짜 못하는데. 아직 진기원한테서 몰입을 못 빠져나왔나 봐요.”
히죽 웃으며 뻔뻔한 척을 이어갔다.
이에 한이연 감독과 매니저들이 웃는다.
이태관 배우는 물론이고, 고하윤마저도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작게 웃었다.
분위기가 풀어졌다.
“이상한 사람들도 퇴치했으니, 이제 가볼까요?”
주백기 감독과의 가볍고도 불쾌한 만남이 길어진 덕분에, 곧바로 이동했다.
마침 상영이 끝났는지 직원들도 분주해졌다.
이윽고 스크린을 배경 삼아 관객들 앞에 선 우리들.
뜨거운 환호가 비탈길 위로 쏟아지는 비처럼 밀려 내려왔다.
가장 먼저 마이크를 잡게 된 건 당연히 ‘눈속임’을 탄생시킨 한이연 감독.
그녀가 마이크를 두 손으로 잡고서 입술을 적셨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점점 기우는 고개. 이내 머릴 푹 숙인 그녀가 어깨를 들썩였다.
‘확실히 요즘 영화가 잘되는 만큼, 힘들어했지.’
아무리 잘 만든 영화라 해도 악플이 없을 수 없고, 아까처럼 현실 악플러가 시비를 걸기도 하니까.
우리는 모두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고, 옆에 있던 내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그러자 그녀가 웅얼거린다. 마이크가 가까워 그 목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왔다.
—끝났으니까 우는 거야. 끝났으니까···.
그녀가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이 알아듣지 못했지만.
이거 하나는 모두가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이 자리에 오기까지, 얼마나 간절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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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 오랜만에 뚜껑 열리네!”
굿픽쳐스 박 대표의 언성이 높아졌다.
안 그래도 무대 인사를 겹치게 잡은 것도 거슬려 하던 그였는데, 복도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까지 들으니 발을 동동 구른다.
저 발로 ‘연고’ 제작사까지 쳐들어갈 기세였다.
“아니, 요즘 왜 제작사들이 하나 같이 다 싸가지를 밥 말아 먹었지? 지난번에 ‘도그페이스’ 때도 그러더만. 내 이놈들을 진짜.”
그가 펄쩍 뛰는 걸 직원들이 말렸다.
이윽고 진정하는가 싶더니 우릴 보고서 다시 성이 난다.
“내가 정말 화가 나는 건 뭔 줄 알아? 다들 거기서 주백기가 살살 비꼬는 거 듣고만 있었던 건 아닐 거 아냐. 다들 착해빠져가지고!”
이에 가만히 박카스 병을 홀짝이던 손기훈이 멈칫했다.
그가 우리 쪽을 훑으며 슬쩍 말했다.
“꼭 그렇진 않았어요. 우선 이태관 선배님께서······.”
한이연 감독을 무시하자 선을 그어버렸던 이태관 배우.
그 얘기에 박 대표의 얼굴이 살짝 펴졌다.
“그래? 하긴, 이 배우도 한 성격 하지. 지가 스타 감독이면 감독이지, 어디서 위아래도 없이.”
“그다음엔 백승결 배우가······.”
“음?”
이번엔 의외였는지 표정이 붕 뜬다.
손기훈의 이야길 듣는 사이, 멍해졌던 표정 위로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이내 마지막에 내가 중얼거렸던 말까지 전하자, 그가 박장대소한다.
주백기 감독만 들으라고 한 말이었는데, 다 들렸구나?
“백 배우도 안 참는구나?”
“많이 참았는데요?”
그러자 더욱 크게 웃는 박 대표.
덩달아 웃으면서도 기분은 썩 좋지 못했다.
이 모든 상황이 만약에 누군가의 의도가 담겼다면.
한이연 감독은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게 나 때문이라면······.
그런 가정이 떠올라서. 그리고 영 좋지 못한 얼굴이 떠올라서.
그냥 내 피해의식이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내가 대원군 미팅 때 말 잘하는 것부터 알아봤어. 안 그래도 종갓집 막내딸에서 팬이었다가 딸내미가 너무 좋아해서 좀 미워졌었는데, 이제 다시 팬 될 거 같아.”
“너무 쉽게 바뀌시는 거 아녜요?”
직원의 물음에 그가 허허 웃으며 덧붙였다.
“아무튼 욕봤네. 아주 두고 보라지. 어떻게서든 이 격차 안 벌리고 따라가서 혼쭐을 내주자.”
그리고 며칠 뒤.
그의 말처럼 격차는 벌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좁혀졌다.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90만, 80만··· 가까워지던 스코어가 기어이 500만에서 동점이 되었고.
다음날엔 14만 정도를 앞서며 1, 2위가 바뀌었다.
<개봉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주목받지 못하던 눈속임, 우리 모두를 속이고 연고를 꺾으며 박스오피스 1위!>
—별로 놀랍진 않네요. 둘 다 봤는데 연고가 못 만들었다기보단 눈속임이 너무 잘 만들었음.
—너무 신선했고, 재미도 확실. 특히 배우들 연기는 영화 끝나고 나서 뒤늦게 감탄이 밀려옴. 그제야 ‘아 배우였지? 진짜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런 생각이 들더라.
—영화는 체험이라는 평론가들의 말이 확 와닿는 영화. 최고였습니다!
곧바로 기사와 반응들이 쏟아졌고, 이는 돈 안 들이고도 홍보 효과를 톡톡히 만들어냈다.
“대박! 1위 공기가 좋긴 좋네요. 관객들 증가폭이 차원이 달라요.”
심지어 이 정도 기세라면 천만을 넘을 수도 있겠다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는 터라, 굿픽쳐스는 정신이 없었다.
이제 이 1위를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꿈의 숫자인 천만에 다다르기 위해 홍보에 전력투구를 해야 할 때였다.
그런 와중에 갑자기 책상을 탕 하고 내려치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박 대표.
관객들에게 감사 인사를 녹화하기 위해 모인 우리는 무슨 일인가 싶어 바라보았다.
그가 비장한 목소리로 말한다.
“나 말리지 마.”
모두가 ‘뭘요?’라는 표정을 띄우자, 그가 생각만 해도 즐거운 듯 씩 웃으며 덧붙였다.
“무대 인사 겹쳐서 잡을 거야. 이번엔 너희가 가서 기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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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하지만, 그래서 헛웃음이 났지만.
그럼에도 반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굿픽쳐스 직원들은 독려했고, 김성운을 비롯한 매니저들은 침묵했다.
소속사 입장에서 분란을 대놓고 권장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렇게 복수극이 짜여졌다.
상황도 우릴 도와줬다.
며칠 사이 격차는 더욱 벌어져, 우리는 기어이 600만을 돌파하다 못해 훌쩍 넘어섰다.
그러니, 저 썩은 표정이 십분 이해가 가지.
“안녕하세요.”
기다렸어요.
“······.”
주백기 감독의 안면이 파르르 떨렸다.
상황이 달라지니 지난번처럼 무시하진 못했다. 아니, 싫었겠지.
우세할 때 무시하는 건 정말 무시지만, 지금처럼 뒤처지고 있을 땐 그게 무시가 아니라 도망처럼 보일 테니.
게다가 오늘은 스케줄 때문에 이태관 배우도 없으니 별수 있나.
“어, 한 감독. 축하해요. 굳이 이러는 걸 보니 자랑하고 싶었나 봐요?”
“지난번에 굳이 그러셨던 게, 그런 마음이셨어요?”
한이연 감독이 용기내어 되묻자, 그가 꿀먹은 벙어리마냥 입을 벌린 채로 굳었다.
“어쨌든, 축하 감사합니다. 감독님.”
뒤이어 고하윤 매니저가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어, 이번에 주예린 배우는 안 왔나 봐요?”
“아아, 주예린 배우가 몸이 좀 안 좋아서 먼저 갔어요.”
다른 ‘연고’ 측 배우의 말에 고하윤이 갸우뚱한다.
“대기실에 있는 것 같던데.”
“응?”
“사진 올라왔어요.”
그러면서 핸드폰을 내미는 고하윤.
SNS 화면 속엔 커피에 딸기를 곁들여 우아하게 티타임 중인 주예린이 있었다.
그 사이 주백기 감독의 표정은 썩다 못해 아예 문드러지고 있었다.
졸지에 주연 배우가 도망친 꼴이 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내가 김성운에게 말했다.
조금 크게.
“먼저 앞질렀잖아요.”
“응?”
“왜 앞에서 너무 세월아 네월아 가니까. 뒤에 있던 영화··· 아니, 차가 확 앞질러버렸잖아요.”
대뜸 꺼낸 말에 당황스러워하던 김성운이 이내 눈치를 챘는지 입꼬릴 올렸다.
“아휴, 그러게 말이야. 얼른 가랄 때 갔어야지. 그렇게 빌빌거리면 당연히 추월하고 싶지. 것도 1위··· 아니, 1차선에서 그러고 있냐.”
“근데 그 영화··· 아니, 차가. 애초에 빠르게 달릴 수 있는 차가 아니더만요.”
“하긴, 연식도 너무 오래됐더라. 덜덜덜 거리더라고.”
“그러니까··· 응? 왜요?”
그렇게 떠들다가 따끔거리는 시선에 고갤 돌렸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날 바라보는 주백기 감독.
이에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정말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저희 한문철 티비 얘기 중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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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튀어나온 이야기에 당황스러웠던 건 한이연 감독이나 고하윤, 그리고 매니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웬 뮤튜브 핑계를 대는 시점에서 모두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웃음이 터질까 봐서.
평소 감정 표현이 많지 않은 고하윤조차도 입을 앙 다물고 들썩이는 중이었다.
이에 고하윤 매니저가 소릴 죽이고 쿡쿡거리다가 한이연 감독에게 속삭였다.
“백승결 배우··· 저런 성격이었어요?”
입을 가리고 있던 한이연 감독이 터지려는 웃음을 꾹 참으며 답했다.
“그보다 김성운 팀장님이 장단 맞추는 게 더 웃기지 않아요?”
“팀장님은 원래 저런 성격이셨대요. 업계에서 유명하더라구요. 요즘 많이 점잖아지신 거지.”
“아, 그래요? 신기하다. 전혀 그런 이미지 아니었는데.”
“그니까요. 백승결 배우도요.”
그렇게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던 그들이 다시 주백기 감독을 보았다.
얼굴이 시뻘게진 그가 백승결과 김성운의 만담에 씩씩거리다가, 결국 어쩌지 못하고 떠나버렸다.
그제야 마음 놓고 웃을 수 있었다.
“푸핫! 얼굴 벌게지는 게 왜 이렇게 웃기지.”
“약이 바짝 올랐네.”
“우리가 진짜 천만 넘으면 아주 쓰러지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요.”
“승결 배우, 천만 공약 할 때 주백기 감독도 초대하는 거 어때요?”
복도가 통쾌한 복수극에 떠들썩해지는 와중에, 손기훈의 말을 들은 고하윤 매니저가 눈이 동그래져 물었다.
“천만 공약, 어떤 거 걸었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