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공약 (2)
슥슥—.
연필을 쉴 새 없이 움직인다.
동시에 두 번째 팀인 세 명의 팬과 얘길 나눴다.
집 앞 카페에서 만났던 두 사람과 ‘악의 링’ 행사에서 만났을 때 옆에 함께 왔었다는 친구까지.
익숙한 얼굴들이었기에 대화를 나누는데 어색함은 없었다.
“난 직원분들이 정리해준 사진으로 정한 거라, 너희인지도 몰랐네.”
이번 팀은 세 명이다 보니 꽤나 시간이 걸렸다. 그만큼 캔버스 크기를 줄이지 않았더라면 반나절은 걸렸을 것 같지.
그래도 한 시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이런저런 이야길 해서 그런가, 어느새 말도 편하게 하고 농담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알았으면 두 사람은 굳이 안 왔어도 될 뻔했어. 얼굴 다 기억하니까. 안 보고 그릴 수 있는데 말이지.”
“앗. 그럼 얼굴 기억해주시는 게 오히려 안 좋은 거 같은데요?”
키득거리는 팬들 사이에서 비교적 최근 내 팬이 되었다는 여학생이 웃었다.
“그럼 저만 올 걸 그랬어요. 다음부턴 저만 올게요.”
“엄머, 얘 봐라? 너 지난번에 행사장에서 뭐 이런 델 오냐며. 연예인 좋아하는 사람 이해 안 간···읍읍!”
소박한 몸싸움이 눈앞에서 벌어졌다.
말하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
그리고.
“흐즈므르······.”
세 사람 중 마지막으로 내 그림의 모델이 된 학생은 행여 그림에 방해가 될세라, 미동도 없이 복화술을 쓴다.
그 광경을 보며 피식 웃었다.
“네 얼굴도 다 기억해서 이제 소용없어.”
사실대로 말하자 상황이 일단락되었고.
질문이 뒤를 이었다.
“아니, 근데 룸6에서도 그렇고, 진짜 그렇게 잘 기억해요?”
“기억력이 원래 좀 좋았어.”
“진짜 신기하다. 그래서 천재 배역이 그렇게 잘 어울리는구나. 찐이라서.”
“그러니까. 너무 부럽다··· 아 참, 저희 다 팬클럽 들었어요. 거기서 활동도 엄청 열심히 해요.”
“알아. 피켓 사진 올릴 때부터 알아봤어.”
변화무쌍한 주제에 맞춰 답하자, 피켓의 주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본다.
“어? 팬카페 보고 있어요?”
“자주는 아니고, 종종. 매니저님이 계속 알려주셔서. 스케줄 좀 줄면 자주 들어가서 봐야지.”
그러자 그녀가 그러지 말라며 고개를 흔든다. 의외의 반응이었다.
“아, 찐 팬으로서 그거 용납 못 합니다. 스케줄이 준다? 안되지 안돼. 많이 일하고 많이 버세요.”
“그럼 이왕이면 ‘적게 일하고’가 낫지 않을까?”
“그것도 안 되죠. 적게 일하면 그만큼 우리가 오빠를 못 보잖아요.”
“아, 그렇네.”
단번에 납득 되어버렸다.
다음 순간 주억거리며 계속 움직이던 손을 내려놓는다. 연필을 옆에 꽂아놓고서, 아까 완성한 캔버스까지 총 세 개를 여학생들에게 건넸다.
“자, 다 됐다.”
그리고 이어지는 놀란 표정들.
이게 다 입체파니 큐비즘이니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블러핑을 친 덕이었다.
열심히 연습해서 만족스러울 만큼 퀄리티를 끌어올리기도 했고.
“와······.”
“대박이다, 진짜.”
“이래서 앞에 언니가 그렇게 말했구나.”
나는 감탄하는 팬들을 보며 만족스레 웃었다.
#
【sd20f】
⌜사진(백승결의 그림)⌟
[진기원한테 속았다. 못 그리는 척 하더니, 엄청 잘 그리잖아!]
—뭐야? 그림 원래 잘 그렸었나?
—아니 운동부터 영어에 그림도 잘 그린다고? 거기다 잘생기기까지. 못 하는 게 뭐야.
—근데 웃긴 건, 미화 좀 해달라고 부탁했더니 그건 안 된대.
—왜?
—자기가 미적 감각이 떨어져서ㅋㅋㅋ
—ㅋㅋㅋㅋ 미적 감각을 외모에 몰빵했나 보네
막간의 쉬는 시간.
김성운이 건넨 핸드폰 화면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 게시물을 발견하고 보여준 김성운도 따라 웃는다.
“다들 아주 난리네. 이거 봐. 외국인들도 댓글을 다는데?”
“그러게요. 미국에서도 해달라는 댓글인데요?”
“그것도 괜찮겠네.”
고갤 주억거리는 그를 보며 현태 형이 컨텐츠 어쩌구 했던 말들이 생각나 소름이 돋았다.
역시 두 사람이 만나는 일은 없게 해야겠어.
그러는 사이, 김성운이 뭔가 떠올랐는지 팔짱을 풀며 내게 말했다.
“아 참, 네가 오늘 따로 초대한 분들 말이야.”
오늘 내가 만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얼굴도 모르고 뽑았지만, 마지막 한 팀만큼은 내가 직접 뽑았다.
아니, 불렀지. 애초에 티켓으로 응모하지도 않았으니까.
그래서 김성운이 초대라고 하는 거고.
“아, 네.”
끄덕이며 답하자 그가 물었다.
“예정대로 6시쯤 도착하시는 거지?”
“좀 전에 확인해봤는데. 그때 도착하신대요.”
“오케이. 진행요원들한테 그렇게 전달해 놓을게.”
곧이어 다음 팀이 도착했다는 소식과 함께 다시 그림과 대화의 시간이 이어졌다.
한 팀 한 팀 만날수록 점점 더 즐거웠다.
나를 향한 호감이 기본적으로 전제되어 그런지 각양각색의 사람들과 만나 이야길 하는 게 생각보다 어렵지도 않았다.
다만 아쉬운 건, 이미 SNS로 내 그림들이 퍼져나가고 있어 더는 블러핑이 먹히지 않는다는 것.
‘그래도 그림을 다 그려서 줬을 땐 모두 놀라줘서 다행이지.’
그렇게 공약으로 선정된 모든 팀들이 끝나고.
나는 마지막 손님을 기다렸다.
잠시 후, 두 사람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통화는 얼마 전에 했지만, 정말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오셨어요?”
“어, 승결아.”
인쇄소 공장장 아저씨가 아내와 함께 쭈뼛거리며 들어와 빈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은 어색한 듯 계속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니, 뭐 이런 데에······.”
“예전에 집에 사진이 별로 없다고 하셨던 얘길 들은 기억이 나더라고요.”
그렇게 말하고서 간략한 설명도 덧붙였다.
오늘 하루 종일 여기서 내가 뭘 했는지.
그리고 당신들에게 뭘 할지.
“······그래서 사진만은 못하겠지만, 제가 한번 그려드리고 싶어서요.”
그러자 아저씨가 멋쩍은 표정으로 뒷머릴 쓸어내렸다.
“꼬박꼬박 티켓 보내주는 것도 그렇고, 우리가 뭘 해줬다고 그런 것까지······.”
그 말에 내가 빙그레 웃었다.
‘실은 ‘해별이네’가 아내와 첫 데이트 때 본 영화였거든.’
그리고 그가 과거 내게 사인을 부탁했을 때.
그때 했던 말을 떠올리며 답했다.
“아주 좋은 기억으로 기억하고 계신 거. 그것만으로 저한테 꽤 큰 위로가 되어서요.”
해별이를 넘어서겠다고 말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병철이나 최영기, 주백기처럼 나를 여전히 해별이로 대하며 깔보는 사람들 때문.
이렇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사람들에겐 쭉 그렇게 이어지길 바라고 있다.
비록 나에겐 불행의 시작이었던 순간일지라도,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뜻깊은 기억으로 남아있다는 게.
돌이켜보니 꽤나 큰 위안이 되더라고.
그런 마음을 갖고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자, 그럼 이제 제가 열심히 그려드릴게요. 너무 정자세로 굳어 계시면 오히려 힘들어요. 힘 빼고 자연스럽게 저랑 대화도 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초반엔 조금 어색해하던 두 사람도 계속 말을 걸었더니 어느새 편안한 표정으로 대화를 이어간다.
옅은 미소가 끊이지 않는 그들의 얼굴을 캔버스에 옮겨 담고서, 그림 밑에 사인을 그려 넣었다.
그러다 문득 사인 부탁을 받았을 때가 다시 떠올랐다.
‘행복하세요··· 같은 건 안 붙여도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수첩을 돌려줬었던 기억.
내려놓으려던 연필을 다시 고쳐잡았다. 자연스레 입꼬리가 올라간다.
이번엔 사인에서 그치지 않았다.
좀 더 연필을 움직여 문장을 적어넣는다.
[행복하세요]
진심으로 그러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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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나절이 넘는 시간동안 그림만 그렸다.
이 정도면 이게 업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겠다.
물론 즐거운 시간이긴 했지만······.
집에 도착하니 몸은 녹초나 다름없었다.
비척거리며 곧장 방으로 향해 들고 온 봉투부터 툭 내려놓고, 얼른 씻었다.
그리고 내 방으로 돌아와 봉투를 열어젖혔다.
안에는 하루 종일 내가 사용하고 남은 빈 캔버스가 들어 있었다.
‘이거, 남은 건가요?’
‘아, 예.’
‘그럼 제가 좀 가져가도 될까요?’
······그렇게 가져오긴 했는데, 막상 꺼내려니 멍해진다.
가져온 이유가 분명히 있었지만, 선뜻 행동하기가 어려웠다.
잠시 그렇게 멍하니 있다가 캔버스를 꺼냈다.
‘눈속임’ 때 연기 연습을 위해 사다 놓은 이젤 위에 캔버스를 올려놓고서, 연필을 쥐었다.
오늘 공약의 진짜 마지막 손님을 그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다시 멈칫.
선 하나를 그리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무엇을 그릴지 명확하지 않아서도, 대상이 눈앞에 없어서도 아니었다.
오히려 머릿속에 떠오르는 얼굴이, 어제도 만난 듯 선명해서.
뛰어난 기억력이, 아픔을 잊는 것조차 허락해주지 않아서.
그래서.
더욱 그립고 사무쳐서.
첫선을 그리는 게 너무나 오래 걸렸다.
스윽—.
마침내 연필이 캔버스 위에서 미끄러졌다.
얼굴 형태부터 잡지 않고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부터 그린다.
양 끝이 살짝 올라간 부드러운 곡선.
이 와중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엄마의 미소였다.
#
모바일 게임, ‘해전(海戰)2’의 프로모션을 맡고 있는 위드모어.
광고 회사의 특성상 하루에도 두세 번의 회의가 잡히곤 하는데, 오늘은 딱 한 번의 회의만 진행되었다.
행운은 아니었다. 대신 그 회의가 세 번을 합친 것보다도 더 길었으니까.
벌써 다섯 시간동안 콘티를 빼고, 붙이고, 고치는 작업이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확정된 콘티.
그만한 공이 들어갈 만큼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콘티였다.
문제는······.
“이거 가능할까요?”
콘티의 난이도였다.
전작인 해전1은 말 그대로 해상전투가 주였기 때문에 CG의 구현이 가장 중요했다. 심지어 풀 3d. 주인공 캐릭터 마저도 폴리곤 덩더리였기에 어떻게 리깅을 하느냐에 따라 자유로운 전투 묘사가 가능했었지.
하지만 이번 해전2는 달랐다.
광고주의 요구사항은 크게 세 가지였다.
1. 이번엔 3d 캐릭터가 아닌 실제 배우를 모델로 사용할 것.
2. 사장님이 백승결의 팬이니 섭외 1순위로 그를 넣어줄 것 .
2. 해전2는 백병전(白兵戰)이 가능해졌다는 게 전작과 다른 점이니 이 점을 적극 홍보하고 싶다는 것.
이렇다 보니 가장 중요한 건 백병전을 화려하기 치르는 배우의 액션이었다.
“확실히 화려하긴 한데······.”
홀로 적 배에 뛰어들어 롱테이크로 수십의 적을 썰어 넘기는 장수는 마치 무협판 올드보이를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껏 게임 광고를 주로 맡았던 이들이기에 간과한 점이 있었다.
배우는 게임 캐릭터처럼 움직일 수 없다는 것.
최대한 인간답게(?) 콘티를 짰지만 이게 와이어로 해결되는 문젠지, CG가 필요한지는 정확히 판단할 수 없었다.
“얼른 무술 감독부터 섭외하자. 그쪽에 바로 물어보는 게 가장 빠르겠지.”
“네. 연락해볼게요.”
“아, 그리고 백승결은?”
회의를 주도하던 팀장의 고개가 돌아갔다.
캐스팅을 담당하던 직원이 홀가분한 얼굴로 끄덕인다.
“연락 왔습니다. 미팅 날짜 잡자고 하던데요.”
“오케이. 좋아.”
세 가지 요구 중 1, 2번은 일단 해결했다는 생각에 팀장의 얼굴이 밝아졌다.
이윽고 팀장의 시선이 다시 콘티로 향했다.
“내가 봐도 백승결 얼굴이 착 붙긴 하는데······.”
컷에서 가장 역동적인 동선을 만들어내는 캐릭터를 바라보며.
그가 내심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대역 없이 이걸 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