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하나의 재능이 모든 걸 관통하는 (2)
“···될 것 같다고요?”
담당 직원이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당연히 안 된다는 말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예상외의 대답이 튀어나오니 당황한 거다.
옆에서 이 팀장도 벙찐 얼굴로 핸드폰을 응시했다.
—하하, 이게 저도 참 전문가로서 이렇게 답하는 게 이상하다는 건 알지만··· 이렇게 말씀드릴 수밖에 없네요. 백승결 그 친구랑은 ‘악의 링’과 ‘도그페이스’에서 맞춰봤는데, 그 친구······ 흔히 말하는 천재과거든요.
무술감독의 웃음소리와 이어지는 진지한 설명이 회의실에 울렸다.
핸드폰을 바라보는 모든 직원들의 표정이 황당함으로 물들어간다.
“백승결 배우, 운동 신경이 그렇게 좋나요?”
—운동 신경이 좋은 것도 좋은 거지만, 그것만으로는 이렇게 말 못 하죠. 운동 신경 좋은 배우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러면 왜······.”
—근데 백승결 그 친구는 뭐랄까··· 좀 남다릅니다. 이걸 뭐라고 해야 돼. 아, 그래. 카피. 동작을 카피하는 게 정말 말도 안 될 정도로 빠르거든요. 한 번 본 건 까먹질 않아요. 그리고 며칠이면 아주 똑같이 따라 하고.
순간 ‘무슨 만화도 아니고’라고 중얼거릴 뻔한 이 팀장이었다.
그가 그런 속마음을 삼키는 사이, 무술감독이 하하 웃으며 말했다.
—콘티 보고 나서 어떡하려고 이렇게 짰나 싶었는데, 믿는 구석이 있으셨구나. 배우 선택 잘하셨네.
애당초 전화를 한 의도와는 전혀 다른 쪽으로 굴러가는 이야기.
담당 직원이 눈알을 굴려 이 팀장을 보았다.
마른 입술을 적신 이 팀장이 문득 김성운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제가 가지고 있던 ‘재능’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뒤바꿔준 친구거든요’
이 사람들이······ 짰나?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헛웃음으로 몰아냈다.
그건 말이 안 된다. 촬영하면 바로 들통날 거짓말을 무술감독이 뭐 하려 하겠나. 그게 밥그릇인 사람인데.
······무술감독과의 전화를 끊고서 회의실엔 침묵이 흘렀다.
직원들은 내심 ‘백승결이 그렇게 대단해?’라는 생각을 하며 신기해했지만, 계획이 망가진 이 팀장이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 눈치만 보았다.
이윽고, 이 팀장이 손바닥에 파묻었던 얼굴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연다.
“이러면 광고주의 선택으로 보나 콘티에 맞는 얼굴로 보나 액션으로 보나······ 전부 백승결이 최선이자 최고라는 건데.”
이렇게 되면 백승결을 선택하지 않았을 경우에 오히려 리스크가 커져 버린다.
광고주가 원하고, 하람도 협상의 의지가 있고, 무술감독이 가능하다고 했는데도 위드모어가 억지를 부린 게 되니까.
이러한 이해득실을 꼼꼼히 체크한 이 팀장이 직원들에게 물었다.
“백승결, 얼마가 적당할 거 같아?”
비로소 회의가 시작되었다.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다른 배우를 모색하는 회의가 아닌.
백승결이라는 배우에게 어느 정도의 가치를 매겨야 하는가에 대한 회의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긴 회의 끝에 이 팀장이 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이제 해야 할 건 하나뿐이었다.
“게임사에 연락해서 담판을 지어야겠다. 원하는 세 가지 다 맞추려면 돈 더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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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위드모어의 직원과 전화를 끊은 무술감독도 잠시 고민하더니, 액션스쿨 소속 스턴트 배우들을 불러모았다.
위드모어 측의 질문에 자신의 생각을 말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확인이 필요할 것 같아서였다.
“무슨 일이에요?”
우르르 몰려오는 건장한 남성들.
“다들 이거 봐봐.”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몇 장의 콘티였다.
무술감독이 건넨 콘티를 쭉 돌려보는 배우들.
잠자코 기다리던 무술감독이 물었다.
“어때?”
정확히 뭐가 궁금한 건지 알 수 없는 단순한 질문었지만.
이 업계에서 적어도 7, 8 년 이상 일한 베테랑들은 대충 눈치를 채고 거침없이 의견을 쏟아냈다.
“흐음, 이거 빡센데요?”
“이거 콘티 누가 짰어요? 영화나 드라마라기엔 애당초 무술감독이 안 붙은 것 같은데.”
“붙었으면 이런 그림 안 나오지. 말도 안 되는 그림이 많네.”
“그렇다는 건, 이 콘티가 광고 쪽이란 건데···.”
“이런 광고면 게임일 거고.”
정답에 가까운 추측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결국 배우들의 관심이 모아진 건 가장 마지막 장면이었다.
무술감독이 위드모어 측에 가장 어려울 거라 말했던 바로 그 장면.
“근데 다른 컷들은 그렇다 쳐도 여기 롱테이크는 누가 해요?”
무술감독이 피식 웃으며 배우들을 안심시켰다.
“걱정 마 너희가 안 해.”
“그건 그거대로 문젠데. 대역을 안 쓰면 그게 더 빡셀텐데?”
“이 정도 장면 뽑으려면 어떤 배우를 써야 되나···.”
자연스레 이 장면이 가능한 배우들을 떠올린다.
사실 몇 되지 않았다. 게임 CF에 나올 정도로 인지도가 높으면서 동시에 이런 액션이 소화 가능한 배우가.
이에 무술감독이 툭 던지듯 덧붙였다.
“백승결.”
그러자 아까 전 통화할 때의 분위기가 다시 한번 연출되었다.
멈칫하던 배우들이 이내 끄덕거린다.
“아?”
“백승결···.”
“그 친구가 하는구나···.”
그 모습을 보며 무술감독이 픽 하고 웃었다.
“어때 될 것 같냐?”
가장 중요한 질문이 던져졌다.
배우들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솔직히······될 것 같은데.”
“저도요. 이게 원래 되는 게 진짜 말이 안 되는 거긴 한데, 제가 도그페이스 때 칼 휘두르는 거 잠깐 가르쳐봤잖아요. 그때 걔가 그걸 한 번에 성공한 게 더 말이 안 되는 거라, 저도 된다고 봅니다.”
“저도요. 균형도 꽤 잘 잡으니까 와이어도 문제없을 거고, 검술이야 며칠 가르치면 웬만해선 다 따라 할 것 같고, 안 될 이유가 없는······근데 이게 원래 안 돼야 정상인데.”
말하면서 인지부조화가 온 배우가 허허 웃는다.
질문한 무술감독도 똑같이 웃음을 흘렸다.
“다들 나랑 생각이 똑같네.”
“백승결이랑 호흡 몇 번 맞춰봤으면 다들 이렇게 생각할걸요.”
“진짜 말도 안 되긴 하지만, 그 말도 안 되는 게 또 가능한 친구라···.”
동조하는 목소리들.
확신에 확신을 얹은 무술감독이 콘티를 개운한 얼굴로 콘티를 집어 들었다.
“그럼 이거 진행한다?”
#
[해전2]
약속대로 콘티가 배달되었다.
종이 뭉치를 받아들고서 훑어보았다.
컷이 많지는 않아서 짧은 만화책을 읽는 느낌으로 한장 한장 넘겼다.
그렇게 후루룩 다 읽고서 그림 구경에 여념이 없던 김성운에게 물었다.
“미팅은 어땠어요?”
“배짱을 좀 부리긴 했는데, 그쪽에서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네.”
그건 좀 의외였다.
이 광고를 꼭 성사시키고 싶었던 게 아닌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김성운이 털썩 앉으며 말했다.
“아니, 위드모어 팀장이 콘티가 어려워서 네가 소화 가능할지 모르겠단 얘길 은근하게 계속 하더라고.”
자연스레 콘티로 다시 시선이 갔다.
그렇게 어려운 건가. 이게?
“뭐, 그쪽 입장에선 당연한 행동이지. 네 가치를 깎아내려서 출연료에 대한 조정을 원천차단해야 할 테니까. 근데 그건 그 사람 입장이고 난 내 입장이 있잖아.”
“팀장님 입장이요?”
“내 배우 가치를 몰라주는 곳하고는 일 못 한다.”
잠시 멍한 표정으로 김성운을 보다가 옅게 웃었다.
김성운도 따라 웃으며 덧붙여 말한다.
“아마 그쪽 팀장은 내가 돈 더 받아내려고 그러는 줄 알 것 같긴 한데,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네 가치를 깎으려 하니까 나도 아쉬워하지 않기로 한 거지.”
입꼬릴 올린 채로 콘티를 내려다보았다.
그런 날 보며 김성운이 덧붙여 묻는다.
“왜. 콘티가 너무 마음에 들어? 나 괜히 뻗댔어?”
“아뇨. 잘하셨어요. 도전해보고 싶단 생각을 막 들게 하는 콘티긴 한데, 이번 계약만큼은 제 입장이 곧 팀장님 입장이라.”
“‘눈속임’ 할 수 있게 해줬다고 은혜갚기라도 하는 거야? 그럴 필요 없어. 배우가 천만 영화를 물어와서 억지로 메이드 시켰으면 회사가 절을 해도 모자랄 판에 무슨.”
“그래도, 믿어주신 게 감사해서요.”
“우리가 믿은 게 아니라 네가 믿게 만들었지. 이태관 선배님까지 끌어들여서. 당돌한 녀석.”
풀풀 웃은 김성운이 따로 가져온 기획서도 꺼내 들었다.
“어쨌든, 엎어질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그것도 확정은 아니니까. 내용 좀 전달해줄게.”
김성운이 해전2 CF를 맡은 위드모어와의 미팅 내용을 쭉 읊었다.
그중엔 이 게임의 히스토리도 있었다.
전작인 해전1이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꽤 큰 성공을 거뒀고.
그래서 5년 만에 해전2가 나왔으며, 전작과 가장 다른 점인 백병전을 중점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이런 내용의 콘티가 만들어졌다는 것.
“아까 콘티 보면서 신기하긴 했어요. 게임 이름은 해전인데 배 위에서 칼로 싸우는 장면뿐이라서. 그런데 배경 설명을 듣고 보니······.”
이미 머릿속에 사진처럼 저장된 콘티들이 만화책처럼 차라락 넘어간다.
장면 장면을 쭉 따라가며 콘티에 대해 평가했다.
“굉장히 세련된 방법이란 생각이 드네요.”
“나도 그 생각했어. 이런 기능이 추가되었다는 걸 대놓고 설명하는 것보단 이런 방식이 훨씬 좋겠더라고.”
물론 이 콘티가 완성본은 아니라고 한다.
무술감독이 붙으면 수정되는 부분이 꽤 있을 거라고.
그래서 더 흥미가 생긴다.
누군가는 광고를 연기의 영역으로 봐주지 않기도 하지만.
심지어 이런 액션이 주인 광고에선 더더욱 그런 경향이 있지만.
‘악의 링’, ‘도그페이스’, ‘눈속임’을 거치며 몸을 쓰는 것도 대사를 읊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연기라는 걸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걸 제대로 해낼 수 있다는 건······ 자신을 완벽히 통제할 수 있다는 거니까.’
과거 천광윤 배우가 모 인터뷰에서 말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이런 도전도 재밌을 거 같네.’
그런 생각을 하며 위드모어의 연락을 기다렸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김성운이 그들의 연락을 받았다.
그렇게 잡힌 두 번째 미팅.
이번엔 나도 김성운과 함께 위드모어 사무실을 방문했다.
“안녕하십니까. 어서 오세요, 어서 오세요. 자, 여기 앉으시죠. 그 팀장님은 커피 드시고, 배우님은···.”
“전 그냥 물이면 될 것 같습니다.”
“아, 예. 커피 두 잔이랑 물 좀 부탁해요, 김 대리.”
작은 회의실로 안내받은 우리는 가벼운 인사와 이야기들로 미팅을 시작했다.
프로젝트 전반적인 이야기들을 쭉 훑어주는 위드모어 이 팀장.
이어서 며칠 사이 수정된 콘티도 한 장면, 한 장면 뜯어보며 설명을 이어간다.
콘티에 관련해선 나도 궁금한 게 많았던 터라 꽤 긴 시간 이야기가 오갔다.
“액션스쿨 측에서도 이게 굉장히 어려운 장면들인데, 백승결 배우면 가능할 것 같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좋게 봐주셨다니, 감사하네요.”
그렇게 콘티에 대한 설명도 다 끝났을 때쯤.
비로소 미팅이 비지니스의 영역으로 들어섰다.
“게임사에선 이 광고를 지상파 뿐만 아니라 해외 쪽으로도 사용할 계획을 세우고 있더라고요. 배우님이 가진 해외 인지도가 또 상당하니까요. 하핫.”
첫 미팅엔 내가 없었기에 잘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오늘은 상대가 굉장히 적극적인 것처럼 보였다.
한편, 옆에 앉은 김성운의 표정은 덤덤했다.
여전히 이 계약에 관심이 없는 듯 보였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아마 빠르게 계산 중일 거다.
이런 상황이라면 출연료를 얼마나 더 올려야 할지.
하지만 김성운에 대해 잘 모르는 이 팀장의 시선은 불안할 수밖에.
만족스러운 금액을 부르지 않으면 ‘없던 일로 하죠’라고 말할 것 같은 분위기로 보일 테니 말이다.
나와 김성운을 번갈아 보던 그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런 점들을 고려해서 출연료를 제안 드리려고 합니다.”
위드모어에서 처음 제안했던 금액이 3억이었지.
돈에 관해선 크게 관심을 두지 않던 나조차도 그가 과연 얼마를 부르려나 내심 궁금해하는데, 마침내 그가 입을 뗐다.
“6억.”
그렇게 말한 이 팀장이 눈알을 굴려 우리 표정을 살피며 덧붙인다.
“저희가 진짜 이 이상은 안 됩니다.”
······내가 뭘 들은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