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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배우 복귀했습니다-90화 (90/167)

90화 차기작의 행선지 (1)

작은 빌라 3층에 있는 9평짜리 방 하나 딸린 집.

그게 내가 스무 살부터 줄곧 생활했던 보금자리였다.

엄마가 세상을 떠나고, 다시 서울로 돌아와 처음으로 정착한 곳이기도 했다.

뭐 대단한 의미부여를 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만큼 정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주인 아주머니도 좋고, 근처에 한적한 카페도 있고, 좀 더 걸어가면 뛰기 좋은 공원과 인심 좋은··· 건 몰라도 날 응원해주시는 슈퍼 주인 할머니도 있다.

‘그렇기에 수입이 어느 정도 커지고 나서도 딱히 집을 옮겨야겠다는 생각이 없었지.’

하지만 ‘악의 링’ 이후 스케줄이 급격히 많아지고, 회사에 갈 일도 늘어나면서 나조차도 피곤한 경우가 생겼다.

이를 눈치챈 김성운이 조심스레 이사를 제안했고, 행동반경이 넓어지며 어느 정도 좋은 교통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터라 그 제안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기로 했었다.

“흐음······.”

CF 촬영으로 잠시 잊고 있었던 고민을 이어가자, 김성운이 물어왔다.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지.”

“네.”

“너 누구 복수할 사람 있니?”

“네?”

황당한 물음이 튀어 나갔다.

그러는 와중에 우경철의 얼굴이 떠오르긴 하는데, 그렇다고 복수를 다짐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지금은 더욱 초연해졌지. 내 생각보다 더 별거 아닌 사람이란 걸 깨달아버려서.

“아뇨, 왜요?”

“무슨 와신상담이라도 하나 싶어서.”

“부차는 장작더미 위에 누웠는데···우리 집이 그 정돈 아니지 않나요?”

짐짓 섭섭한 눈으로 바라보자 김성운이 당황하며 펄쩍 뛰었다.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자꾸 연기력 그런 데다 쓸래? 배우들이 보통 예민한 경우가 많잖냐. 그래서 돈 벌면 환경부터 바꾼단 말이지. 근데 넌 그런 욕심이 전혀 없는 것 같아서 한 말이야.”

억울한 표정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이에 김성운이 쩝 하고 입맛을 다신다.

“요즘 아주 능글맞아졌단 말이지.”

그 이후로도 고민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며칠 뒤, 김성운에게 말했다.

“이사, 갈게요.”

#

“그, 조심 조심!”

새로운 집 안으로 들어오는 티비를 보며 애간장을 태웠다.

그러자 뒤에서 헛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스턴트 배우들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위험한 동작도 하던 애가 티비에는 아주 애지중지네.”

그것도 둘이나.

“말도 마세요. 제가 만지려고 하면 지문 묻는다고 싫어한다니까요?”

절대 만나게 하지 않으려 했던 두 사람이 만나버렸다.

김성운과 임현태.

서로 나한테 하도 얘길 들어서 내적 친밀감 쌓였다며 인사를 나눈 그들은 역시나 내가 생각했던 대로 삐그덕거렸다.

“이건 이쪽에 두는 게 낫지 않나?”

“음, 근데 제 생각엔 좀 안 어울리지 않아요?”

“그래도 쓰기 편한 곳에 두는 게 맞지.”

“나중에 나 혼자 산다 같은 거 찍으려면 좀···.”

안 맞아, 안 맞아.

둘 다 안 부르면 서운해할 기세길래 부르긴 했는데, 막상 손이 늘었는데도 오히려 일이 진행이 안 되네.

“그나저나, 한강이······ 안 보인다?”

현태 형이 베란다를 내다보며 말했다.

“뒷산 올라가면 보여.”

“그냥 보이면 더 좋지 않니?”

되물은 그가 아쉽다는 듯 덧붙였다.

“아니, 평수도 얼마 안 커졌는데··· 그럼 한강은 보여야지. 강변북로 쪽으로 더 붙었으면 보였을 것 같은데, 여긴 너무 산 쪽이잖아.”

“산이 좋아. 그렇게 높지도 않아서 뛰기도 좋고.”

잠자코 듣고 있던 김성운이 툭 던지듯 말했다.

“그, 현태 씨가 오해할까 봐서 하는 말인데. 우리 하람은 배우에게 돈을 절대 밀리는 법이 없어. 줄 거 다 주고.”

“그렇겠죠. 쟤 돈 쓸 줄 모르는 거 제가 다 압니다.”

얼씨구. 내 험담(?)할 때만큼은 쿵짝이 좀 맞네.

황당해하며 바라보자 현태 형이 히죽 웃으며 나를 달랜다.

“어울려. 어울려. 월세 천씩 줘가면서 한강뷰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화려하게 사는 것보다 진득~하니 전세로 이런 데 사는 네가 나는 참 좋다.”

그러고 있는 사이 짜장면 배달 왔다.

현태 형이 그릇을 세팅하는 사이, 식기를 가지러 부엌으로 왔다.

이렇게나 걸어야 싱크대에 도착한다니! 다르긴 다르구나.

내심 감탄하는데, 뒤이어 냉장고에 넣어둔 술을 가지러 온 김성운이 물었다.

“원래 동네 분들은 다 보고 온 거야?”

그의 말에 끄덕거렸다.

어제 전부 돌았지. 슈퍼 주인 할머니 동네 미술 학원 선생님까지, 그동안 도움을 받았던 모든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모두가 나를 축하해줬지만 정작 그 축하를 받은 나는 기분이 참 묘했지.

자연스럽게 술자리가 이어졌다.

이사가 완전히 다 끝났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제부턴 집주인인 내가 정리를 해야 할 때.

현태 형이 탕수육을 입에 넣으며 잔을 들어 올렸다.

김성운이 슬쩍 잔을 올려 맞춰준다.

“크으, 형님. 아, 형님이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

“아무튼, 얘랑 놀 땐 매번 물잔에 짠을 했는데. 이렇게 술잔에 건배를 하는 날이 올 줄이야! 감동적입니다.”

단무지를 오도독 씹다가 어이가 없어서 돌아보았다.

“혼자서도 잘만 마시잖아.”

그러자 김성운이 단호히 말했다.

“그게 느낌이 다르지.”

“그죠? 얜 너무 모른다니까요? 형님이 제 마음을 이해해주시네!”

······내 험담할 때만 쿵짝이 맞던 두 사람에게 술까지 들어가니 죽이 점점 더 잘 맞는다.

#

적당히 술잔이 오가다가, 너무 늦기 전에 김성운은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나는 뒷정리를 시작했다.

결국, 이사는 집주인 손에서 마무리가 되어야 하는 법.

자잘한 물건들을 제 자리에 가져다 놓고, 몇장 없는 엄마의 사진들을 걸어두었다.

얼마 전 그린 초상화는 밖으로 가져 나왔다. 구석에 놓여 있던 작은 상자 하나와 함께.

초상화는 아일랜드 식탁 위에 올려놓고, 상자는 곧장 베란다로 나가 작은 창고에 쑤셔 넣었다.

그렇게 아버지의 영정 사진까지 처리하고서, 손을 탁탁 털며 거실로 돌아왔다.

“다 끝났어?”

그런 나를 보며 남은 맥주를 홀짝거리는 현태 형.

아무래도 갈 생각 자체가 없어 보이는데···.

“일단은. 나머진 살면서 정리하려고.”

그리고 옆에 앉아 핸드폰으로 휴가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멀티온 갔을 때, 미국이 정말 괜찮긴 했는데 다시 한번 가볼까? 혼자라 느낌이 다를 것 같긴 한데.

아니면 살짝 옆 동네?

그런 생각을 하며 폭풍 검색을 하고 있는데, 옆에서 현태 형도 핸드폰을 보다가 감탄한다.

“크으, 네 근황 마라톤 영상 조회수 몇인 줄 알아?”

“요즘 안 봤는데.”

“900만을 넘겼다. 이것도 곧 1000만이야. 게다가 악의 링 때문인지 외국인 댓글도 엄청 많다.”

“신기하네···.”

“그나저나, 어머니 그림은 언제 가져다 놓을 거야?”

대화의 끝에서 현태 형이 아일랜드 식탁 위에 올려둔 엄마의 초상화를 보며 말했다.

“···조만간 가야지.”

“내일 가자.”

“내일?”

“그래.”

끄덕거리는 현태 형을 보며 툭 물었다.

“자고 가겠다는 거구나?”

“흐흐, 집이 참 좋아. 한강은 안 보이지만.”

들켰다는 듯 창밖을 바라보는 현태 형.

“그래. 오랜만에 자고 가.”

정말 오랜만이긴 하다.

족히 10년은 된 것 같은데?

그땐 게임도 하고 성인이 된 현태 형의 이런저런 이야기도 들으면서 밤새 놀았었지.

그때 생각을 하다가 문득 궁금해져 물었다.

“형은 나랑 나이 차이도 많은데, 왜 나랑 놀았어? 동네에서 왕따였어?”

“야, 나처럼 인싸가 왕따였겠냐.”

“친구 없었구나?”

“아니라니까. 솔직히 말해줘?”

되물은 현태 형이 맥주캔을 입에 털어 넣으며 말을 이었다.

“넌 아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집이 엄청 가난했거든. 근데 네 집에 가잖아? 어머니가 엄청 맛있는 걸 해주셔. 그래서 계속 갔지.”

“급식소였네.”

“흐흐, 그런 셈이지. 그러다 네가 해별이네로 빵 뜨고, 더 잘살게 되었고. 와 그러니까 집도 좋아지고 게임기에 갈 때마다 치킨, 피자에······. 그러다 네가 진짜 좋아진 건 언젠 줄 아냐?”

“피자 양보할 때?”

내 말에 쿡쿡거리던 현태 형이 덧붙여 말했다.

“네가 해별이네 이후로 힘들 때.”

“···?”

“그때 난 네가 무지 힘들어할 줄 알았다? 나라면 그랬을 거 같았거든. 근데 그 12살 정도밖에 안 되는 애가··· 단단하더라. 고작 초딩인데. 그런 애한테 온갖 비난이 쏟아지는데. 넌 조금도 달라지지 않더라고. 나보다도··· 아니, 내가 만난 어른들보다도 더 어른스럽다는 생각이 들더라.”

쭉 이야기한 그가 풀풀 웃으며 다시 맥주 캔을 들었다.

“그래서 진짜 친구 하기로 했지. 나보다 한참 어린 동생이 존경스러워서.”

조금 멍한 기분으로 그 얘길 듣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형의 눈으로 본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네.”

그러자 현태 형이 피식 웃는다.

“이제 알았냐. 그러니 네가 배우를 하는 거지.”

“그러게. 왜 몰랐을까.”

천천히 시선이 돌아갔다. 베란다 쪽으로.

저 끝에 쑤셔 넣은 상자가 자연스레 떠올라서.

“근데 실상은 여전히 아버지 사진이 담긴 상자만 봐도 욱하고 아파해. 그렇게 괜찮은 사람이 아니지.”

“야, 그건······.”

“그러니, 나 좀 찍어줘.”

“으, 응?”

고개를 돌려 현태 형을 보았다.

“형이 맨날 말했던 거. 그거 찍어달라고.”

“뭐··· 브이로그?”

“뭐가 됐든.”

그렇게 답하고서 씩 웃었다.

“나도 보고 싶네. 형이 보는 것처럼, 꽤 괜찮은 나.”

#

작은 캔버스를 유골함 옆에 올려놓았다.

함께 사 온 꽃과 함께.

“난 엄마의 사진이 좋고, 엄마는 이 그림을 더 좋아할 것 같아서.”

그리고 나름의 이유와······.

“영화 내리고 나서야 왔네. 천만 넘었어. 정확히는 1130만.”

내 근황.

“아, 그리고 나 휴가 가. 그것도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그리고 근 미래의 계획까지 전하고서, 가벼워진 마음으로 건물을 나섰다.

흡연 구역 쪽으로 가자 담배를 피우며 기다리고 있던 현태 형이 보였다.

이윽고 담배를 다 피고서 다가오는 현태 형.

“네가 어제 얘기한 거. 사장님한테 말해봤거든?”

“응. 뭐라셔?”

“우리 쪽에선 쌍수를 들고 환영. 이 양반 지금 엄청 들떴어. 아예 너뿐만 아니라 하람 소속 배우들 전부 찍을 생각까지 이미 큰 그림 그린 것 같더라니까?”

“잘됐네. 팀장님도 안 될 이유가 없다면서 오히려 좋아하시던데.”

“그럼 확정된 거나 마찬가지네? 넌 이제 마음 편하게 휴가 갈 준비만 해. 나머진 내가 싹 다 준비할 테니까. 나 혼자는 촬영이 좀 빡세니까 직원 한 명 더 해서 셋이 가자.”

끄덕거리는데 때마침 핸드폰이 울렸다. 김성운이었다.

“네, 팀장님.”

—그 휴가가 가려는 데가 샌프란시스코라고 했지?

다짜고짜 묻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했다.

답하고 나니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얼른 물었다.

“설마, 또 뭐가 들어왔나요?”

—아냐, 아냐. 아직은.

아직은?

“그럼 제가 어디로 가야 하는 거예요?”

—그것도 아냐. 휴가 잘 즐기다가. 그러다가 거기서 며칠만 비우면 될 것 같아.

“···?”

—댄이 네 여행지로 방문하겠대. 멀티온이 네 차기작을 꼭 잡고 싶은가 보더라고.

뜻밖의 대답에 살짝 놀랐다. 그리고 이내 의아해져 물었다.

“근데 왜 며칠이에요?”

—그야······.

말끝을 늘린 김성운이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멀티온에서만 연락이 온 게 아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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