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차기작의 행선지 (2)
—전부 네가 있는 곳으로 찾아오겠대. 그래서 나도 그때 맞춰서 샌프란시스코로 넘어갈 생각인데, 어때?
플랫폼에서 그렇게까지 하겠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애초에 이번 휴가의 목적이 다음 목표와 차기작에 대한 고민이기도 했으니 말이지.
전화를 끊고서 현태 형의 차에 올라탔다.
기다리고 있던 현태 형이 팀장님의 전화였단 말에 궁금해하길래, 들은 내용들을 풀어서 설명했다.
이야기를 할 수록 현태 형의 표정이 점점 더 격해져 간다.
“······그렇다더라고.”
“이야! 네가 있는 샌프란시스코까지 찾아오겠다고? 그것도 멀티온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플랫폼들도? 크으, 미쳤구만? 성공했다, 성공했어. 그럼 다들 백지수표 한 장씩 들고 오는 거 아냐? 집을 좀만 더 늦게 이사하지!”
결론이 왜 그렇게 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기분 좋은 일임은 분명했다.
백지수표까진 아니어도 충분히 높은 금액의 출연료를 받게 될 거란 것도 동의하고.
그새 다른 천만 배우들의 출연료를 찾아보던 현태 형이 내게 물었다.
“선택지가 많아진 만큼 고민을 많이 하긴 해야겠다. 뭐가 너한테 가장 좋을지.”
“그러게.”
영화는 꾸준히 들어오고 있다.
지상파, 공중파 드라마들도 마찬가지. 거기에 OTT 플랫폼까지 생각하면 갈 수 있는 길이 너무 많다.
앞만 보고 가면 되었던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이제는 어떤 길도 갈 수 있었다.
그만큼······.
“선택이 무거워졌네.”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하고 싶었다.
과거에는 일부러 좌초할 배에 올라탔지만, 더는 그래야 하는 이유도,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복귀 후 참여했던 모든 작품들이 성공했다는 것도 그런 부담에 한 몫 거들었다.
<아역 출신의 징크스를 깬 백승결, 손만 대면 대박>
<종갓집막내딸<대원군<그림자변호<악의링<눈속임, 백승결의 성공 비례식>
<천만 영화 눈속임으로 당당히 흥행보증수표에 올라선 백승결>
이런 기사들이 심심치 않게 뜰만큼, 사람들은 나의 성공에 관심이 많았다.
덩달아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다는 욕심도 점점 커지고 있었다.
이 정도면 다음 목표를 ‘실패하지 않기’로 정해야 하나 싶네.
내가 선택이 무겁단 소릴 하고서 무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자, 살짝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현태 형.
그를 보고 걱정 말라는 듯 씩 웃어 보였다.
“휴가 가서 생각해보지 뭐.”
#
······며칠 후, 나는 짐을 한 보따리 챙겨 공항으로 향했다.
곧 미국에서 보자는 김성운의 배웅을 받고서 들어서자, 이번엔 현태 형과 그의 팀원이 나를 반겼다.
“짠.”
현태 형이 캐리어 위에 올려두었던 카메라 가방을 들어 올리며 자랑한다.
내가 지난번에 미국 여행에서 신승찬의 도움을 받아 샀던 그 가방이었다.
“잘 어울리네. 그나저나, 근황 마라톤은?”
“다 넘겼지. 팀원들한테.”
“그래도 되는 거야?”
“안 될 거 있나.”
대수롭지 않게 답한 그가 작게 속삭였다.
“내가 볼 땐 이게 더 조회수 많이 나올 거야.”
옆에서 따라온 직원도 그럴 거라며 동조한다.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게이트로 걸음을 옮겼다.
10시간 넘는 거리.
안에서 영화 한 편 보고, 김성운에게 차에서 전달받은 대본들을 읽다 보니 금세 땅이 보이기 시작했다.
“대본 없었으면 큰일 날뻔했네.”
순식간에 지나간 시간에 작게 중얼거리며 대본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산 하나 없이 평평하고, 바둑판처럼 격자로 쪼개진 도시를 내려다보며 착륙을 기다렸다.
“내가 살다 살다 미국 출장을 오다니···!”
마침내 밟은 미국 땅.
팀원이 감격에 잠긴 얼굴로 가방을 뒤적여 카메라를 꺼내 든다. 프로는 프로네.
현태 형은 진즉에 카메라로 나를 찍고 있었다.
“굳이 지금부터 찍을 필요가 있을까? 쓸 것만 찍으면 되잖아?”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이게 영환 줄 알아. 원래 뮤튜브는 다 찍어놓고 뭐 쓸지 생각하는 거야.”
“굉장히 좀······.”
미간을 좁히며 다음 말을 솎아내자, 현태 형이 눈을 가늘게 떴다.
“너 비효율적이라고 하려 했지?”
“아닌데요.”
“갑자기 존댓말을 쓰시네. 맞나 본데?”
“얼른 가자.”
코너에 몰리기 전에 얼른 발걸음을 옮겼다.
보통 관광객들은 바트를 타고 공항에서 도심으로 넘어간다는데, 우리는 따로 택시를 잡았다.
알아보는 이들이 은근히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그 선택은 탁월했다.
호텔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날 알아보는 이가 벌써 두 명째이니 말이다.
“그나마 호텔은 분위기가 이래서 그런지 막 누구누구다! 하고 달려들진 않는 거 같아.”
“맞아요. 확실히 장소에 따라 팬들 반응도 다른 것 같아요.”
두 사람이 촬영 관련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드는 사이, 나는 호텔 체크인을 마쳤다.
먼저 짐부터 풀고서 호텔 안에 있는 식당에서 허기부터 해결했다.
그리고서 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되었다.
“미술관을··· 다녔어?”
붉은색 벽돌로 지어진 커다란 건물을 올려다보며 현태 형이 중얼거렸다.
샌프란시스코 현대 미술관.
내 첫 행선지가 여기라는 것에 살짝 놀란 눈치였다.
“아니. 처음 와봐.”
“여기 유명한 데야? 관광지?”
“그렇기도 한데, 그것보다 특별전시 중인 분이 유명하더라고.”
“누군데?”
“닐 하우저. 미술계의 거장이래. 대표작이······.”
오기 전에 한 번 읽었던 내용을 술술 설명하자, 오디오가 겹칠세라 잠자코 카메라를 들고 있는 현태 형. 옆에서 팀원은 미술관을 찍는다.
그러다 내가 설명에 마침표를 찍자, 얼른 물어왔다.
“앞으로 일정 좀 설명해줘. 휴가인 만큼 우리는 정말 뒤 따라다닌다는 컨셉이지만, 앞으로 어디 갈지 정도는 알고 있어야겠네.”
“일단 오늘은 여기랑 다른 미술관, 이렇게 두 곳을 갈 생각이고, 내일은 그냥 느긋하게 시내 구경하려고, 그리고 다음 날은 비행기 타고 라스베가스 가서 격투기 경기 보고······.”
여행 계획을 모두 들은 현태 형의 표정이 가관이다.
“그 혹시··· 눈속임 2 나오니? 아니면 악의 링 시즌2 나와? 무슨 일정이 이러냐.”
이에 어깨를 으쓱거리며 답했다.
“궁금했거든. 내가 잘 연기한 걸까. 그 현장에서 직접 확인하고 싶었어.”
“너도 참··· 이거 휴가 맞는 거지? 쉬는 거지?”
당연하지, 라며 끄덕이자 현태 형이 끄덕거린다.
“그래, 네가 쉬는 중 맞으면 됐지.”
그렇게 미술관 관람이 시작되었다.
중간에 팀원이 전시를 보는 내 사진을 찍어줬다. SNS에 올리시라면서.
홍보팀에서 뭐라도 좀 올리라며 닦달하던 게 생각나 얼른 업로드했다.
‘좋아요’가 빠르게 올라가고, 댓글이 무슨 채팅창처럼 줄줄이 달린다.
그 중엔 의외의 인물도 있었다.
[shinsc125: 부럽다]
신승찬이었다. 아니, 의외는 아닌가? 미술관 다니는 걸 좋아했으니까.
뭔가 숙제를 끝낸 기분으로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서 다시 전시에 집중했다.
보는 내내 여러 감각이 꿈틀거렸다.
이 미술가가 왜 거장인지, 고작 화가 흉내만 내봤던 나조차도 이해가 갔다.
‘눈속임을 찍기 전에 와봤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런 아쉬움도 남았다. 그만큼 다채로운 경험이었다.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지.’
나는 오늘의 경험을 아주 오랫동안 기억할 테고.
언젠간, 이 순간 느낀 감정들을 책장에 꽂혀있는 책처럼 꺼내어 필요에 맞게 사용할 순간이 올 거라 생각했다.
그런 생각으로 아쉬움을 달래고서 미술관을 나서는데, 카메라에 관심이 끌린 건지 몇몇 사람들이 내 쪽을 기웃거리다가 이내 나를 알아보기까지 했다.
“백승결이잖아!”
“누구?”
“아, 너랑 같이 봤잖아. 악의 링, 서귀호!”
“아! 알아!”
아직은 백승결이란 이름보다 서귀호라는 캐릭터가 유명한 나였다.
하지만 역할이 역할이라서일까.
주춤주춤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그제야 다가와 사인과 사진 요청을 하는 사람들.
더 사람들이 몰리기 전에 재빨리 사진을 찍고서 근처에 사람이 적어 보이는 카페로 이동했다.
“생각보다 많이 알아보네.”
그럴 만도 하긴 했다.
LA 시내에서 신승찬과 함께 포위당했던 그 때에 비하면 ‘악의 링’을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시청했으니까.
“그래도 여긴 남한테 별로 관심이 없어서 그나마 다행인 거야. 한국이었어 봐. 카메라 두 대가 한 사람을 찍는 것만으로도 어그로 엄청나게 끌렸지.”
“다음부턴 어디 아프리카를 가야 하나?”
“아니죠. 그래서 더 여길 와야죠.”
“···?”
“뮤튭각이 미쳤잖아요. 미국인들이 알아보는 백승결. 이거 완전 국뽕 컨텐츠인데. 제목도 이렇게 지어야 하는 거 아녜요? 세계를 점령한 한국의 배우!”
그녀의 말에 쿡쿡대던 현태 형이 날 보며 말꼬릴 올린다.
“어때. 그 ‘뮤미괴’가 나만이 아니지?”
그러자 팀원이 물었다.
“엥, 뮤미괴는 또 무슨 말이에요?”
“뮤늅각에 미친 괴물.”
“으엑. 누가 요즘 그런 말을 써요.”
“······.”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그녀가 나를 돌아본다.
그리고 이내 눈치를 채곤 쭈글거렸다.
“아, 죄송해요···.”
“아뇨. 제가 죄송하죠. 요즘 그런 말을 써서.”
옆에서 현태 형이 크게 웃으며 놀려댄다.
“너 이제 큰일 났다. 승결이 얘 뒤끝 엄청 긴데.”
“아뇨, 전 피디님이 만든 말인 줄 알고··· 피디님 놀리려고 한 거예요. 진짜.”
“카메라에도 다 녹화됐는데 승결이 팬들 감당 가능하겠어?”
“배우님한테 한 거 아니라니깐요. 여러분 제가요 정말로요······.”
갑자기 카메라에 해명까지 하는 팀원.
그녀를 놀리던 현태 형이 씩 웃으며 나를 돌아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거 조회수 대박일 거 같다.”
#
며칠 후, 김성운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라스베가스에서 돌아와 휴식을 즐기고 있던 우리는 라운지로 향했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성운이 우릴 반긴다.
“얼굴이 좀 타긴 한 것 같네.”
“여기 날씨가 너무 좋더라고요.”
짧은 인사를 나누고서 둘러앉았다. 그러자 김성운이 몹시 궁금한 게 있는 얼굴로 현태 형을 불렀다.
“아니, 현태야. 대체 뮤튜브는 어떻게 꼬신 거야? 우리가 할 생각 있냐고 물었을 땐 그럴 생각 없다고 딱 못 박았었는데.”
“아, 그게···.”
현태 형이 슬쩍 날 본다. 그날 나름대로 속깊은 얘길 나눈 터라 뭐라 말하기 어려워 보였······.
“칭찬을 해줬어요.”
“칭찬?”
“고래도 춤추게 한다잖아요. 예쁘다~예쁘다 칭찬하니까 하겠다고 그러던데요?”
그걸 저렇게 요약하네···.
황당한 얼굴로 현태 형을 보는데, 이번엔 김성운이 날 본다. 빤히.
안 좋은 예감이 나를 덮쳤다.
“하, 하지 마요.”
“예쁘다.”
“윽.”
“예쁘다.”
“으아악.”
진심으로 소름이 돋아버렸다.
내가 비명까지 지르자 김성운이 껄껄대며 웃는다. 현태 형과 팀원도 마찬가지.
“확실히 이런 거에 약하네. 얘가.”
한동안 웃음을 멈추지 못하던 김성운이 마침 나온 커피를 한 입 들이켰다.
그리고 잔을 내려놓으며 화제를 전환했다.
“이제 일 얘기 좀 해보자. 가져간 대본들은 다 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