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차기작의 행선지 (3)
자연스레 현태 형과 팀원은 멀찍이 자릴 옮기고,
김성운이 본격적으로 일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 너한테 들어온 작품은 굵직굵직한 것만 쳐도 9개야.”
운을 뗀 그가 샌프란시스코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야경을 훑으며 말했다.
“여기로 오겠다고 한 곳은 그중 세 군데고. 넷플리스, 디제니 플러스, 그리고 멀티온. 일명 3강이라 불리는 플랫폼들.”
“아직 대본은 못 받았죠?”
“응. 아마도 와서 너랑 얘길 나눠보고 주려는 것 같아.”
하긴, 어차피 이곳으로 와서 만나는데 굳이 대본을 미리 보낼 필요는 없었겠지.
확실히 그편이 보안 쪽으로도 유리하니까.
“그리고 영화 쪽은 이미 네가 가져간 대본들이고.”
미국에 들고 온 대본은 총 다섯 개.
비행기에서부터 틈틈이 읽었지만, 아쉽게도 격렬하게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작품은 없었다.
‘악의 링’이나 ‘눈속임’만큼은 아니더라도, 확 끌리는 무언가를 바랐는데···.
내 심드렁한 표정을 본 김성운이 끄덕거리며 말을 잇는다.
“오는 길에 추가로 하나 더 들어왔는데, 그건 TBS 지상파 드라마야. 거기도 대본은 만나서 주겠다는 식이더라고. 휴가 끝나고 너랑 같이 방송국으로 오라던데?”
“사실상 음방이랑 예능 빼고 다 들어오는 상황이네요.”
“아, 예능도 몇 개 들어왔어. 심지어 나주영 피디도 복수전 해야 된다고 널 찾더라. 마침 눈속임이 복수물이니까 복수 특집에도 딱 이라며 계속 연락이 온다.”
“아···.”
키득거리는 김성운을 보며 나도 피식 웃었다.
끈질기신 양반일세. 악역 특집 때 자존심이 많이 상하긴 했나? 그래도 그때 시청률도 엄청 잘 나왔는데 말이지. 아, 그러니 더더욱 다시 불러야 되는 건가?
“이러나 저러나, 좋은 상황이야.”
내가 나주영 피디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이, 대략적인 상황 설명을 마친 김성운이 그렇게 정리했다.
“머리가 좀 아프긴 해도 우리에겐 선택권이 생겼으니까. 그러니 이제부터 가장 중요한 건······ 네가 뭘 하고 싶으냐겠지.”
선택지를 나에게 넘긴 그가 환기시키듯 물었다.
“그나저나, 쉬는 동안 목표는 정했어? 해별이를 뛰어넘겠다···. 그 다음 목표 말이야.”
호기심 어린 그의 표정을 보며 내가 느릿하게, 하지만 확고하게 끄덕였다.
“네, 정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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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결이 덕분에 이런 호텔에서 묵네.”
호텔 수영장에 둥둥 떠 있던 임현태가 헛웃음을 삼켰다.
일반적인 출장이었다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애초에 미국에 올 일도 거의 없었겠지.
뮤튜브 제작과 관련해서 하람과 정식으로 계약을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팀원들한테 조금 미안하긴 하다, 그치? 어제 다녔던 곳 사진 몇 장 보내니까 거의 울던데.”
“맞아요. 근데······.”
수영장 끄트머리에 팔을 걸치고 끄덕거리면 팀원이 덧붙여 말했다.
“그래도 기분은 진짜 좋네요. 영상을 업으로 삼는 순간부터 목욕은 커녕 샤워하는 것조차 쉽지 않을 정도로 정신 없는 삶이었는데······내가 이렇게 호텔 수영장에 있다니! 심지어 미국에서!”
“그래, 너 너무 안 씻고 다니긴 했어.”
“지금 그 얘기가 아니잖아요! 그리고 뮤튜브 찍자고 우리 스카웃한 게 누군데요.”
“그건 나도 입이 열 개라도···.”
딱히 사과를 들으려는 건 아니었는지 팀원이 그새 다른 곳에 어그로가 끌렸다.
돌아보니 충분히 그럴만한 상황이었다.
“지금 저거··· 그거 맞죠? 헌팅?”
백승결이 선베드에 누워 대본을 읽고 있는데, 한 무리의 여성들이 접근했다. 그리고 대화를 나눈다.
심지어 백승결이 환하게 웃으며 그녀들과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금발 미녀들의 헌팅이라니···.”
“뭐 저렇게 신났어? 아주 딱 걸렸어.”
“어? 다들 다시 떠난다. 가서 무슨 얘기 했는지 물어볼까요?”
“안 그럴 생각이었어? 얼른 가자.”
임현태가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수영장에서 튀어나왔다. 팀원이 그 뒤를 종종종 따라왔다.
저돌적으로 다가오는 그들을 본 백승결이 선베드에서 몸을 일으키며 갸웃거렸다.
“···?”
“뭔데, 뭔데. 뭐라고 했어?
“카메라 없어요. 솔직하게.”
질문세례에 멍하니 바라보던 백승결이 입을 열었다.
“뭐 읽고 있냐고 관심을 보이길래.”
“보이길래?”
“설명해줬지.”
“······그게 끝?”
실토 끝의 허망함에 되묻는 임현태.
백승결이 대본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아, 이거 팀장님이 이번에 가져오신 건데, 그래도 내가 가져온 대본들보단 더 재밌긴 해. 저분들도 흥미롭대. 물론 그렇다고 이거다 싶을 정도로 끌리는 건 아닌데······ 이게 궁금한 게 아니었구나?”
그럼 그게 궁금했겠냐, 이런 표정으로 보는 둘.
백승결이 웃음을 터트린다.
“뭘 기대한 거야.”
“그러게. 우리가 너한테 뭘 기대하겠니.”
임현태 고갤 절레절레 흔들며 돌아섰다.
“저러니 왔다가 도망가지.”
그 뒤를 따르며 아쉬워하던 팀원이 속삭였다.
“저렇게 작품밖에 모르는 모습을 보면 확실히 팬들은 좋아하겠네요.”
“그치. 저 대본에 미친 쉐키. 팬 입장에선 안심하고 좋아할 만하지.”
“카메라를 가져와서 찍을 걸 그랬나요. 영상에 넣으면 팬들 반응 진짜 좋을 것 같은데.”
백승결의 일상을 담는 영상이지만, 어디까지나 목적은 홍보였다. 백승결의 매력적인 모습을 최대한 많이 보여줘야 하는.
그걸 잘해야 하람에서 나머지 배우들도 영상제작을 맡기게 될 테니 여러모로 영상을 잘 만드는 게 중요했다.
팀원의 말에 임현태가 어깰 으쓱거렸다.
“그건 걱정 마.”
“왜요?”
“우리 카메라 맨 한 명 더 생겼거든.”
“우리가요?”
갸우뚱하는 팀원을 보며 임현태가 시선을 돌렸다. 그곳을 따라가자 테이블에서 노트북으로 업무를 보던 김성운이 보였다.
그가 어느샌가 핸드폰으로 백승결을 찍고 있었다.
“봤냐. 저게 팀장급 매니저의 순발력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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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오후부터 손님들이 방문했다.
본격적으로 미팅이 시작된 거다.
“저희의 강점은 이미 성공이 보장된 IP들이 많다는 거겠죠. 이번에 우리 쪽에서 제안드리고 싶은 건, 다른 드라마들과 하나의 세계관을 공유하는 이 드라마입니다.”
가장 먼저 방문한 디제니 플러스의 직원들은 성공이 보장된 시리즈물들을 내세웠다.
“이 작품이 아시아권 국가들에서 미국이나 유럽만큼의 흥행을 하지 못했던 건, 아무래도 정서가 맞지 않아서가 큰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한국판 리메이크를 하면서 그런 부분들을 싹 고쳐보려고 합니다.”
반면, 넷플리스는 해외에서 흥행했던 작품을 국내용으로 리메이크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멀티온.
오랜만에 만난 댄이 환한 인사로 나를 반겼다.
“반가워요. 아주 오랜만이군요.”
“그러게요. 지난번 미국에 왔을 때 이후로 처음이네요. 잘 지내셨죠?”
“덕분에요. ‘악의 링’의 성공이 회사 분위기를 많이 바꿔놨거든요. 강력한 경쟁사인 넷플리스와 디제니를 미국에서부터 꺾어야 한다는 윗사람들의 생각을 바꿔놓았죠. 그 이후로 해외에서의 공격적인 마케팅이 가능해졌죠.”
“우리에겐 좋은 현상이네요. 여러모로.”
“그나저나, 영어가 이렇게 유창한 줄 몰랐어요. 로컬이라고 해도 전혀 어색함이 없는데······ 그땐 왜 통역을 썼던 거죠?”
정말 이상하다는 듯 묻는 댄에게 내가 툭 던지듯 말했다.
“그땐 못했거든요.”
“네?”
“공부를 하기 전이라서요.”
댄의 표정이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들어간다.
“공부를···짧게 했네요?”
“빠르게 했죠.”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사이, 잠시 회사 일로 자리를 비웠던 김성운이 돌아왔다.
댄은 의문을 해결하지 못하고 일 이야기로 넘어갔다.
“악의 링의 성공이 저희에겐 워낙 큰 이슈였죠. 사실상 아시아에서 자체 제작한 드라마로는 전무후무한 기록이고요.”
기분 좋은 자축 뒤로.
“그래서 저희는 그걸 전무한 기록으로 바꿔보려 합니다.”
자신의 계획을 풀어낸다.
“악의 링을 뛰어넘겠다는 말씀이시네요?”
“정확합니다. 배우님이 뛰어넘는 것엔 일가견이 있는 걸로 아는데요.”
해별이를 뛰어넘겠다던 내 목표에 대한 이야기겠지.
그가 이걸 아는 게 신기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놀랄 정도는 아니었다. 인터넷에 검색만 하면 그 목표를 이뤘다는 얘기가 한 트럭이니까.
“저에 대해 많이 알고 계시네요.”
“물론이죠. 팬이니까요.”
빙그레 웃으며 댄을 기다렸다. 아직 테이블 위에는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 곧 그가 대본을 꺼내리라 짐작했는데···.
“아직 대본은 없습니다.”
“네?”
“감독도 없고요.”
예상 외의 대답들이 이어졌다.
이번엔 내가 미궁에 빠진 것 같은 얼굴이겠지.
그 모습을 본 댄이 작게 웃으며 덧붙였다.
“‘악의 링’때 다른 거 다 제쳐두고 박혜정 작가님을 가장 먼저 선택했던 것처럼······. 이번엔 백승결 배우님을 선택한 거예요. 거기서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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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으, 작품도 감독도 아니고 배우를 가장 먼저 정하는 경우가 흔치 않잖아요?”
“그렇겠지. 작품에 어울리는 배우가 아니라 배우에 어울리는 작품을 찾겠다는 건데. 그게 딱 봐도 훨씬 어려울 것 같은데.”
팀원의 물음에 답하는 현태 형.
그의 말이 어느 정도 맞았다.
댄의 말은 내가 중심인 영화를 만들겠다는 소리였다.
단순히 주인공의 개념이 아니라.
나에게 맞는 작품과 감독, 그리고 배우들을 찾아내겠다는 것.
이게 확실히 엄청난 일이긴 하다. 감독이 작품보다 배우를 먼저 고르는 경우는 많아도, 플랫폼이 제작을 시작하는 단계에서 배우부터 선택하는 건 정말 드문 일이니까. 염두 정도라면 모를까.
옆에서 함께 고민 중이던 김성운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게 확실히 기분 좋은 상황이긴 한데, 반대로 생각하면 너무 불확실한 상황이기도 해.”
그 점은 나도 동의한다.
대본이 없다는 건, 결국 내가 뭘 하게 될지 알 수 없다는 뜻이니까.
만약 댄이 나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한 작품이 내 마음엔 영 별로라면?
물론 댄은 서로 조율을 해나갈 거라 말했지만, 그게 어디까지 가능할진 현재로선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멀티온을 설득하는 건, 눈속임 때 하람을 설득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겠지.’
그런 점에서 고민이 점점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엄청난 기회들이 발끝으로 굴러들어왔는데, 저마다 장단점이 명확해서 무언가 하나를 고르기 어려웠다.
그 모든 걸 뒤엎을 만큼 좋은 작품도 아직 없었고.
“우선, 한국 들어가면 TBS에도 가보자. 민우가 그 사이에 들어온 대본도 몇 개 있다고 하니 그것도 확인하고.”
지금 당장 선택해야 하는 문제는 아니었기에, 이 정도로 미팅을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이틀 정도 더 쉬었다. 하지만 이미 내 머릿속은 작품에 대한 생각들로 가득 차버렸다.
‘마냥 쉬는 것도 쉽지가 않네.’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화려한 수영장 대신 이야기가 넘실대는 대본에 빠져 그 속을 유영하고 싶었다.
그렇게 새로운 작품에 대한 갈증이 선베드에 누워 마시는 시원한 에이드로도 해결이 안 될 때쯤, 나는 한국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짧은 휴가가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