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여긴 이기고 지는 게 없어 (4)
체육관 근처에 있는 중식집.
칸막이가 있는 자리에 앉아 메뉴를 시켰다.
그리고 다시 찾아온 침묵.
그것을 깨고서 내가 말했다.
“고마워요.”
“······.”
대답은 없었다. 대신 종이와 펜을 테이블 위에 올린다. 갑자기 말을 못 하게 돼서 글로 대화를 해야 하는 건······.
“그, 사인 하나만 해주세요. 엄마가 좋아해요.”
아니구나.
허무맹랑한 상상에서 빠져나와 펜을 들었다.
그리고 멋들어지게 사인을 하고서 그에게 물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김주철입니다.”
“···.”
“···?”
멀뚱멀뚱 바라보는 곰(?) 같은 그를 보며 피식 웃었다.
“어머니 성함이요.”
“아, 이은숙이요.”
민망하게 긁적거리는 김주철.
‘이은숙님 행복하세요’ 라는 말까지 적어놓고서 종이를 돌려주었다.
조심조심 종이를 챙기는 그의 모습이 퍽 의외였다.
그리고······.
“되게, 같잖게 생각했어요.”
의외인 면은 나에게도 있었나 보다.
머뭇거리던 김주철이 갑자기 꺼낸 이야기에서 그가 바라본 나를 알 수 있었다.
“고생 따위 모르는 사람일 거라고, 그래서 그렇게 해맑게 묻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아니더라고요. 제가 제멋대로 생각한 거더라고요.”
“고맙네요. 그만큼 얼굴 상태가 좋다는 말이잖아요.”
어깨를 으쓱거리자 아주 조금 입꼬릴 올리는 김주철.
“긍정적이시네요.”
“최근 들어 아는 형이 그러더라고요. 어렸을 때부터 내가 어떤 일이 있어도 단단해서, 긍정적이라서 멋있었다고. 그런 적 한 번도 없었는데 말이죠.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그렇게 살아보기로 했어요.”
현태 형과 했던 말을 떠올리며 답하자, 김주철이 별 대답 없이 주억거린다.
그리고 테이블을 솥뚜껑만 한 손으로 만지작거리다가 툭 말했다.
“아무튼, 무례하게 굴어서 죄송합니다. 그런데도 사인도 받고, 밥도 시켰으니 값은 얼마든지 치를게요. 질문하세요. 전 말주변이 없어서 묻는 말에 답하겠습니다.”
말투가 왜 저렇게 비장해.
무슨 죗값을 치르겠다는 말투에 황당하게 그를 바라보다가.
머릿속에 저장해둔 기억들 중 그에게 묻고 싶었던 것들을 끄집어냈다.
줄줄이 딸려 나오는 질문 중에 가장 기본적인 것들부터 물었다.
“그 일은 왜 그만둔 거예요?”
“엄마 소원이라서요.”
“효자네요.”
“효자였으면 애초에 그런 일을 시작 안 했겠죠.”
그 말은 또 지극히 맞는 말이라 끄덕거리며 덧붙였다.
“그럼 거기서부터 시작해보죠. 어쩌다 그 길로 가게 된 거예요?”
“고등학생 때 알던 형한테 클럽에서 가드 알바 할 생각 없냐고 연락이 와서······.”
중간에 음식들이 나와서도 대화를 이어갔다. 말이 대화지 질의응답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음식을 싹싹 비우고도 해야 할 질문이 한참 남아 안주거리와 고량주도 하나 시켰다.
아까부터 마시고 싶어 하는 눈치더라고.
조금 술이 들어가면 더 많은 이야길 편하게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도 있었는데, 이건 뭐.
간도 곰인가 보다. 한 병을 다 비웠는데도 멀쩡하네.
시간도 늦었겠다, 오늘만 날이 아니니 마지막으로 물었다.
“이 일은 왜 시작한 거예요?”
“깡패를 관두고 나서 몸이 근질근질하더라고요. 살도 많이 찌고. 희안하게 막노동은 힘들어 죽겠는데도 살이 잘 안 빠지더라고요. 아무튼, 그냥 헬스 하는 것보단 재밌을 것 같았어요.”
“근데 코치님께 듣기로는 격투기 준비도 생각 있다던데···.”
“할 줄 아는 게 몸 쓰는 것밖에 없잖아요.”
“하고 싶진 않고요?”
“엄마는 더 이상 몸 안 다치는 일 원하세요.”
심플한 대답이었지만, 그래서 명확했다.
돈을 벌어야 하는데 언제까지 막노동만 할 수는 없고, 그러면 뭐라도 해야 하는데 할 줄 아는 게 마땅치 않은 상황인 거다.
“본인은요? 무슨 일이 하고 싶어요?”
“딱히 없어요. 뭐든 돈 벌 수 있는 일을 해야죠. 근데 사무실에 앉아만 있는 건 힘들 것 같아요. 가만히 못 있는 성격이라. 물론 그쪽에서도 저 같은 사람 안 뽑겠지만요.”
작게 웃는 김주철을 보며 내가 슬쩍 물었다.
“몸은 안 다치는데, 힘든 일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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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로 나는 운동이 끝나고서 김주철과 한 두 시간씩은 꼭 이야길 나눴다.
하루만의 미팅으론 부족했다.
대본이 진행되며 궁금한 것들이 추가로 생겼고, 그에겐 수많은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기억을 돋굴 시간이 필요했다.
집에서 누워 곰곰이 생각하다가 떠오른 대답들을 다음날 나에게 들려주었지.
그러다 보니 제법 친해지기도 했다. 나만의 생각일진 모르겠지만······.
장난을 쳐도 죽이려 하거나 협박하거나 눈을 부릅뜨지도 않잖아.
이 정도면 친한 거 아닌가.
‘오히려 이젠 너무 과하게 깍듯해서 문제지.’
일하던 업계(?)가 업계인지라 윗사람 대우를 너무 해준달까.
얼마 전까지 말 걸지 말라고 경고하던 그 무서운 사람이 맞나 싶네.
어쨌든, 며칠간 대화를 나누며 나는 원하는 이야기들을 거의 다 들을 수 있었다.
과연 한 명만으로 내가 ‘오태구’라는 지도를 완성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충분하네.’
그런 걱정이 무색했다.
김주철과 극중 주인공인 오태구의 성격은 완전히 달랐지만.
그럼에도 걷고 있는 길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과거를 후회하는 길.
그것만으로 두 사람은 꽤나 비슷한 족적이 있었다.
예컨대, 이제 마지막 8화만을 앞두고 있는 ‘악역’의 스토리는 과거와 현재를 번갈아 가며 조명한다.
악역을 자처해야 했던 과거와 그 과거를 후회하는 현재.
‘그게 김주철의 과거와 현재와 맞닿아있다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지.’
처음엔 괴롭힘 당하는 동생을 지키기 위해서 오태구는 강한 척을 해야 했다.
애초에 겁이 없었고, 또래 아이들보다 운동신경이 좋았던 그에겐 그게 또 아주 잘 맞았다.
남들 위에 군림하는 것.
그럼에도 딱히 나쁜짓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오태구를 따르는 양아치들은 달랐지.
서슴없이 다른 학생들을 괴롭히고 돈도 뜯어냈다.
그리고 오태구는 그런 친구들을 막을 수 없었다.
‘군림하는 사자가 하이에나의 모든 행동을 저지했다간 언젠가 자신이 먹이가 될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오태구는 친구들 때문에 자연스레 학생들 사이에서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그걸 알고 찾아온 깡패들과 엮이게 되며 자연스레 그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때도 선택권은 없었다.
자신을 홀로 키운 어머니의 포장마차가 그들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다른 길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오태구는 지키고, 지켰다.
하지만 그토록 지키려고 한 것들이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었고, 허무했다.
갑작스러운 사고.
동생과 엄마를 동시에 잃었다.
지켜내려 했던 것들이 한순간에 휘발된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할까.
방황하던 오태구는 일단 자신의 일을 그만 둔다.
그러자 함께 일하던 이들에게 배신자로 낙인이 찍혔다.
그는 그렇게 동료들에게 악역이 되었다.
그리고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사회로 나가니, 그는 모든 이들에게 악역이었다.
어쩔 수 없게만 느껴졌던 선택의 고리에서 어느 것도 끊어내지 못한 이의 현재.
‘······닮았네.’
그동안 들은 김주철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오태구 이야기의 종장인 8화 대본을 내려놓았다.
재밌었다, 라는 말이 잘 안 나온다.
대신 생각이 많아졌다. 그리고 그 생각들이 아주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참지 못하고 마지막화 대본을 먼저 본 김성운이 왜 ‘내가 잘 살고 있는지 점검하게 되네.’라고 했는지 확 이해가 갔다.
그렇게 한참을 복기하다가, 앞에서 커피를 마시며 업무 중인 김성운에게 말했다.
“제가 누굴 걱정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그치? 나 너무 일 열심히 하지? 걱정 고맙다.”
휘유. 능청스레 한숨을 내쉬는 김성운.
강탈당한 걱정에 멍하니 바라보자, 그가 피식 웃으며 묻는다.
“그 몸에 문신 있다는 애 말하는 거지?”
끄덕이자 김성운이 커피를 홀짝이며 답했다.
“좋은 현상이네.”
“···?”
“네 앞가림만 하기 바빴던 네가, 누군가를 걱정할 정도로 성장했다는 거잖아.”
그런가.
하긴, 지금까진 내가 누굴 걱정할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컸지.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게 뭔데?”
그렇기에 이어지는 김성운의 질문에.
‘내가 하고 싶은 거?’
고민이 이어졌고.
그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돕고 싶어요.”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아니, 사실 알 것도 같다.
많은 것들이 나와는 다르지만, 그만큼 많은 게 나와 닮아있어서.
어쩔 수 없었던 선택과 후회까지도 이해할 수 있어서.
그래서 그런 것 같지.
스스로 나름의 이유를 떠올리는데, 김성운이 간결하게 말한다.
“그럼 도와. 한이연 감독의 ‘눈속임’ 제작을 도왔던 것처럼.”
“그때, 그건 제가 필요해서···.”
그때와는 엄연히 다른 경우라 말하려 하다가 멈칫했다.
시선을 내려 ‘악역’의 8화 대본을 보았다.
정확히는 방금 전 확인한 ‘악역’의 결말을 떠올렸다.
“그러네. 이것도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겠네요.”
극중 오태구는 이미 망쳐버린 자신의 과거에 갈팡질팡을 하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해답을 찾는다.
자신처럼 후회의 길에 들어서려는 사람들을 돕기 시작한 것이다.
남의 인생을 도와야겠다는 거창한 이유가 아니었다.
그건 오히려 자신을 돕는 길이었다.
그게 바로 오태구가 찾은 ‘자기구원’의 방식이었던 거다.
나는 지금까지 ‘악역’의 주인공 오태구가 김주철과 퍽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이건, 내 이야기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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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의 마지막화 대본을 읽으며 궁금했던 것들을 한보따리 들고서 김주철에게 쏟아냈다.
당장에 답할 수 있는 것은 그날, 그렇지 못한 것은 며칠 후에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고대하던 첫 촬영이 다가오고 있었다.
“고맙다. 덕분에 준비 잘했어.”
그리고 촬영 전날.
나는 김주철에게 고맙다고 말하며 어느 정도의 성의를 건넸다.
하지만 곰 같은 녀석이 괜찮다며 작정하고 안 받으려고 하니 방법이 없었다.
결국 김주철의 품이 아닌 가방 안에 봉투를 넣으며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원래 인터뷰 해줬으면 받는 거라니까··· 휴. 아 참, 너 운전 할 줄 알아?”
손바닥을 탁탁 털다가 불쑥 그에게 물었다.
김주철이 잠시 의아해하다가 이내 끄덕인다.
“네.”
“아니, 오토바이 말고.”
“······저 1종 보통입니다. 뒤에서 물잔 들고 있어도 안 넘쳐요.”
발끈하는 김주철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래? 그럼 너 내일 나랑 같이 갈래?”
“네?”
“나 담당해주시는 팀장님이 내일 중요한 미팅이 있으시대. 그래서 운전을 해야 하는데 내가 운전을 잘 못 해.”
“형님, 택배 운전 하셨···.”
“너 나에 대해서 좀 조사했나보다?”
“어머니가 팬이라니까요.”
아는 게 당연하지 않겠냐는 물음에 내가 고갤 흔들었다.
“몰라. 그냥 운전해. 핸들 공포증 생겼어.”
“핸들 공포··· 그게 무슨······.”
“아무튼, 나랑 같이 촬영장 가자.”
다시 한번 그렇게 통보(?)하고서 덧붙여 물었다.
“궁금하지 않아? 네 도움으로 내가 어떤 연기를 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