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여긴 이기고 지는 게 없어 (5)
김주철은 백승결에게 깡패 수업(?)을 하는 동안 기억나는 모든 것들을 얘기했다.
물론 그처럼 기억력이 좋지 못하기에 많은 것들을 얘기하진 못했지만.
그가 원하는 내용들에는 대부분 답을 했던 것 같다.
독특한 경험이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이렇게 길게, 그리고 깊게 얘기해본 게 처음이었으니까.
그렇기에 당연히 궁금했다.
대체 이 이야기들로 그는 무엇을 하려는 걸까.
어떤 연기를 위해 이런 이야기들이 필요했을까.
그렇기에 도와달라는 말에 알겠다고 답했다.
살면서 언제 촬영장을 구경해보겠나, 하는 생각도 함께였다.
······그런 생각을 하며 도착한 집 앞.
어김없이 엄마가 나와 있었다.
말없이 다가가자 인기척을 느낀 어머니가 방긋 웃는다.
“오늘 날씨가 좋더라고.”
그 궁색한 변명에 김주철이 모른 척 끄덕이며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갤 들어 올렸다.
“그러게. 좋네.”
그렇게 한동안 하늘을 바라보다가 그가 말했다.
“아, 나 내일··· 좀 늦을 것 같아요.”
“내일? 얼마나?”
“밤을 새우고 들어올 수도 있을 것 같아. 아는 형님이 일을 좀 도와달라고 해서.”
노을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어머니의 두 눈이 내려앉았다.
시선을 느낀 김주철이 고갤 돌렸고, 조금 속상해졌다.
두 개밖에 안 되는 작은 웅덩이에 무슨 걱정이 저렇게 꾹꾹 눌러 담아져 있을까.
혀끝이 까끌거리는 것을 느끼며 김주철이 덧붙였다.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 말고.”
“아는 형님이라며. 그런 일 하는 사람들 말고 네가 아는 형이 누가······.”
벌컥 튀어나오려던 우려의 목소리가 멈췄다.
그녀에게도 보기가 몇 가지 없었을 터.
최근 들어 그가 누굴 만나고 있는지 알기에 자연스레 ‘그런 일 하는 사람’이 아닌 사람을 떠올렸다.
설마 하는 눈빛을 보며 김주철이 끄덕였다.
“맞아, 승결 형님··· 아니, 승결이 형.”
형님 소리에 질색을 하던 백승결을 떠올린 김주철이 말을 정정했다. 형님 소리가 입에 너무 붙어 있단 말이지.
“촬영장 일 도와드리러 가. 촬영이 밤 장면이라 늦어지면 날을 샐 수도 있는···.”
자초지종을 설명하려던 김주철이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말을 멈췄다.
걱정이 담겨있던 두 웅덩이가, 왈칵 넘칠 듯 그렁그렁했다.
“너무··· 너무 잘됐다.”
당황스러웠다.
이게 이렇게 눈물까지 글썽일 일인가? 고작 하루 일 돕는 게? 그런 의문이 들었다.
“아니, 한 번만 도와달라고 한 거야. 한 번만. 그러니까 다른 거 기대 마요.”
노파심에 덧붙였지만, 어머니는 실망하는 기색이 없었다.
애초에 다른 걸 기대한 게 아니었던 거다.
그 별 거 아닌 부탁이, 어머니에겐 꽤나 큰 희망처럼 느껴졌던 거다.
내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는, 시작점.
“다른 거 기대 안 해. 그냥··· 그렇게 널 돕는 사람이 있다는 게, 그래서 네가 다른 곳에도 눈을 돌릴 수 있다는 게 좋아서 그래.”
“아니 내가 돕는 거라니까?”
“그분이 돕는 거야. 솔직히 사람 구하려면 여기저기서 얼마나 쉽게 구하겠어. 그런데도 굳이 너한테 그런 제안을 하잖어.”
말이 안 통하네.
억울함을 호소하던 김주철이 이내 피식 웃었다.
집에 들어가서도 엄마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사람들한테 인사를 잘 해야 한다, 예의 바르게 행동해라···.
“아, 내일 입고갈 옷 꺼내놔. 엄마가 다려줄게.”
떠밀리듯 방으로 들어왔다.
옷장으로 다가서며 작게 중얼거렸다.
“······고작 일일 알바에 뭐 저렇게 좋아하냐.”
그리고 불과 몇 달 전과 확연히 달라진 반응을 떠올렸다.
“그땐 몇백을 가져와도 슬퍼해 놓고.”
명확한 차이를 상기하며 옷장을 뒤적였다.
옷이 몇 벌 있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다행히 정장은 한 벌 있었다.
깡패 일을 할 때도 이건 필수였으니까.
“그나저나. 이거······ 지금 맞기는 할까?”
새로 사기엔 이 덩치에 맞는 옷이 별로 없는데.
얼른 옷을 갈아입어 보았다.
다행히 맞는다.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던 김주철이 피식 웃었다.
그제야 고작 일일 알바에 신이 난 엄마를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그땐 몇백을 벌러 나가면서도 가슴 한쪽 구석이 답답했는데, 지금은······.
“좀··· 설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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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장으로 향하는 길이 조용하다.
차에 탄 사람은 세 명인데,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김주철이야 원래 과묵한 스타일이라고 쳐도, 현태 형이 이렇게 조용하다니.
그 이유야 알 것 같다만······.
“형, 무슨 말 좀 해봐.”
“···뭐, 왜.”
“조수석에 타면 운전자랑 떠드는 게 의무라며. 의무를 지켜.”
나를 돌아보며 눈으로 욕을 한 그가 쭈뼛거리며 김주철을 바라본다.
숲에서 곰을 만난 듯 아주 조심조심 말을 꺼냈다.
“······그, 점심은 드··· 먹었어요?”
“아, 예. 그리고 승결이 형의 형님이시면 저한테도 말 편하게 하시면 됩니다.”
“노력해보겠습니다.”
노력할 의지가 없는데?
바짝 긴장한 현태 형을 보며 키득거리는 사이, 촬영장에 도착했다.
진짜 건물을 짓고 있는 듯한 건설현장.
준비가 한창인 세트장을 보며 김주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긴, 나조차도 놀랍다. ‘악의 링’때도 느꼈지만 멀티온의 자본력이 엄청나긴 하나 보다.
이젠 정말 영화랑 차이가 별로 안 나는 거 같네.
그때 지나가던 스태프가 김주철을 보곤 말했다.
“어, 보조 출연자분이세요? 대기 장소는 이쪽이 아니라······.”
벙찐 김주철을 보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아녜요. 제 매니접니다.”
돌아본 스태프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아, 백승결 배우님! 죄, 죄송해요. 너무··· 풍채가 좋으셔서.”
“복장까지 진짜 오늘 출연할 사람 같긴 해. 오해할만 하셨어.”
내 말에 김주철이 정장 소매를 만지며 고갤 숙였다.
“아. 죄송합니다.”
“아뇨! 아뇨! 제가 죄송하죠.”
손을 휘적거린 스태프가 부리나케 도망가고, 우리는 대기실로 향했다.
곧바로 뮤튜브 촬영을 위해 카메라를 설치하는 현태 형.
멀뚱멀뚱 서 있는 김주철에게 편히 앉으라고 하고서 대본을 꺼내 들었다.
첫 촬영이기에 은은한 설렘이 맴돌았다.
주인공 오태구가 건설현장에서 용역일을 하다가, 가족의 부고를 듣게 되는 씬.
가볍게 대본을 펼쳐놓고 오늘 씬에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캐스팅된 배우들의 얼굴로 바꾼다.
그리고 계속 읽어내려갔다.
전부 외웠지만 촬영 직전 몰입하기엔 활자를 보는 것만 한 게 없었다.
이윽고, 준비는 모두 끝났다.
해당 씬이 담긴 페이지를 모두 넘기자, 나는 오태구로서 존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
대본 속에서만 움직이던 캐릭터들이 입체적으로 그려진다.
지금 당장 저 문을 열고 나가면 실존할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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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끗. 백승결의 대본을 본 김주철은 내심 감탄했다.
저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는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알면 알수록······ 쪽팔리네.’
기사를 통해 백승결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을 때도 그랬는데, 지금 실제로 그가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보니 부끄럽다 못해 감탄만 나온다.
‘저러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거구나.’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길도 결국, 내가 선택한 길이라고.
그러니 남탓만 할 게 아니라, 나아가야 한다고.
똑같이 힘든 시기를 겪었어도 이렇게나 다른 결과가 나온 건 핑계를 댈 수가 없었다.
오히려 자신보다도 그가 더 힘들었지 않았을까.
심지어 자신에겐 믿고 기다려주었던 어머니도 있었기에, 김주철은 백승결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대기실 안에서 얼마나 많은 생각과 감탄을 했을까.
촬영이 곧 시작된다는 안내에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다시 봐도 우와 소리가 절로 나오는 세트장.
수많은 배우들이 그곳에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서 기다리고 있었다.
주인공인 백승결을.
“······.”
괜스레 가슴이 펴지는 김주철이었다.
단순히 깡패들 사이에서 어깨를 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백승결을 바라보는 보조 출연자들의 눈에는 두려움 같은 게 없었다.
평소 무서워하는 눈빛을 많이 받아본 김주철이었기에 더 잘 알 수 있었다.
자신도, 자신보다 더 위에서 나름대로 떵떵거리며 군림하던 이들도 평생 받아본 적 없을 시선.
‘동경.’
그냥 저 사람의 위치나 힘, 재력을 닮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닌, 진짜 저 사람이 걸어가는 그 길을 따라 걷고 싶어하는, 진짜 동경.
그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며 준비된 세단에 올라타는 백승결이 보인다.
저 사람이 짜장면을 먹으면서 이것저것 물어보던 그 사람이 맞나 싶었다.
그 사이 주변에서 분주하게 촬영 준비를 하던 스태프들이 하나둘 세트장 밖으로 빠져나왔다.
곧 촬영이 시작되겠구나 생각하며 기대감을 끌어올리는데, 옆에서 딱 봐도 거물로 보이는 사람들이 촬영장에 나타났다. 매니저 여러 명을 이끌고서.
티비를 안 보는 그조차도 몇몇은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유명 배우들.
그들이 세트장으로 모여들었다.
“오, 아직 시작 안 했나 보네. 다행이다.”
“장면이 장면이다 보니 안전점검하느라 좀 걸렸나 봐.”
“좋네. 제대로 볼 수 있겠어.”
기대 어린 목소리들이 언뜻 언뜻 들려왔다.
자신들의 장면도 아닌데 나와서 구경하려는 것이다.
그쪽을 유심히 보던 김주철이 슬쩍 걸음을 옮겼다.
일행임에도 불구하고 세 걸음 정도 떨어져 있던 임현태에게로.
“저기.”
아까 대기실에서 찍었던 장면들을 돌려보던 임현태가 고갤 돌리더니 움츠러들었다.
“아 예, 옙··· 왜요?”
“궁금한 게 있어서요.”
“어, 말해요. 말해.”
빠르게 끄덕거리는 임현태에게 김주철이 물었다.
“원래 본인 촬영 차례도 아닌 배우들이 저렇게 나와서 구경하고 그래요? 제가 어제 인터넷에서 좀 알아봤는데, 원래 배우는 자기 촬영 때만 딱 나와서 찍고 대기실에서 쉰다고 하던데.”
나름대로 공부를 한 김주철이었다.
처음 해보는 일인 데다가 관심도 없던 분야이니 가서 어리바리하지 않으려면 대충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알고는 가야 하잖나.
물론 글은 읽기만 해도 졸음이 쏟아지는지라 영상으로만 봤다.
매니저는 무슨 일을 하는가? 뭐 대충 이런 제목의 영상이었지.
아무튼, 그 영상에선 대부분의 배우들이 대기실과 촬영장을 오가며 촬영을 진행한다고 설명했었다.
그제야 임현태의 시선도 배우들이 모여있는 쪽으로 돌아갔다.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임현태가 얼른 카메라 녹화버튼부터 눌렀다.
이미 대기실을 돌아다니며 허락을 모두 받은 상태라 그들을 찍는데 문제 될 건 없으리라.
렌즈를 배우들에게로 돌린 임현태가 김주철을 보며 웃었다.
“궁금한 거죠.”
그러니까 뭐가 궁금한 건데? 라는 표정의 김주철을 향해 말을 잇는다.
“백승결이 이번엔 어떤 연기를 보여줄지.”
“······.”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할지.”
김주철의 표정을 확인한 임현태가 되물었다.
“어때요?”
그리고 지금 그가 느끼는 바를 알고 있다는 듯, 뿌듯한 미소로 물었다.
“존나 멋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