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배우 복귀했습니다-105화 (105/167)

105화 동화였네요 (1)

다음날.

눈을 떠보니 집안에 고기 냄새가 진동했다.

자연스레 몸을 일으킨 김주철이 어슬렁 거실로 나왔다.

가스레인지 앞에 서 있던 그의 어머니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갤 돌린다.

“어, 일어났어?”

“뭐야?”

“수육.”

보통 아침(—일단 이미 점심이긴 하지만)엔 굳이 만들지 않는 음식이었지만 김주철의 식성은 어릴 적부터 유별났고, 아침에 삽겹살도 구워 먹었다.

엄마 말에 대한 대답은 김주철의 배가 대신했다.

꼬르륵거리는 배를 쓱쓱 쓸어내리며 그가 상을 편다.

“어제 몇 시에 들어왔어?”

“생각보다 일찍 끝났어. 4시쯤 들어온 거 같은데···.”

“그래서 생각보다 일찍 일어났구나?”

웃으며 식기를 들오고는 어머니.

김주철이 그것들을 건네받으며 물었다.

“엄만 일찍 잠든 거 같던데?”

“그러니까. 아들은 밤에 피곤하게 일하고 있는데, 야속하게 잠은 어찌나 잘 오던지.”

그 말을 하는 어머니의 개운한 표정을 보며 김주철이 고갤 떨궜다.

“미안.”

“뭐가?”

“그동안 제대로 못 자게 해서.”

“그게 네 탓인가.”

대수롭지 않게 받아친 어머니가 조금만 기다리라며 다시 불 앞으로 향한다.

그 뒷모습을 보며 김주철이 쓰게 웃었다.

자신의 탓이 맞았다.

어머니가 늘 집 앞에 나와 기다린 것도, 누군가에게 전화가 올 때마다 불안한 눈으로 바라본 것도.

이윽고 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수육을 담아 어머니가 돌아왔다.

“그나저나, 어제 일 어땠어? 엄마 그거 궁금해서 너 언제 일어나나 그것만 기다렸잖아.”

“재밌었어.”

“어머, 재미가 있었어?”

덤덤한 대답에도 격하게 돌아오는 반응.

김주철이 끄덕거리며 다시 어제를 떠올렸다.

확실히 재밌었다.

그리고······.

‘결국 하나의 목표를 위해서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일이더라고.’

거기에 한 손 거들고 싶어졌다.

적어도, 어제 촬영을 시작한 ‘악역’이란 드라마만이라도.

같이 나아가보고 싶었다.

“나 하고 싶은 게 생긴 것 같아.”

#

속마음을 툭 꺼내놓은 말이었다.

순간 드는 생각을 그대로 입 밖으로 내뱉은.

그 간단한 말에 어머니는 한참 동안 눈물을 보였다.

덕분에 수육을 다시 데워야 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식사를 마친 김주철이 밖으로 나왔다.

차를 반납하기 위해, 그리고 어떡하면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는지 묻기 위해.

약속장소인 하람 사옥으로 향했다.

사옥에 도착한 김주철이 백승결에게 받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이윽고 한 남자가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오···.”

작은 감탄사와 함께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

비슷한 정장인데 자신과는 달리 그런 쪽 느낌이 전혀 안 나는.

멀끔하면서도 어쩐지 전문적으로 보이는 남자가 다가왔다.

‘이 사람이 승결이 형이 말한 김성운 팀장님이구나.’

김주철이 얼른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네, 네. 승결이가 말한 분이시구나. 얘기 많이 들었어요.”

여유로운 표정의 김성운이 김주철에게 손을 내밀었다.

두 손으로 그가 건넨 손을 맞잡은 김주철이 다시 한번 머릴 숙인다.

그리고 고갤 들었을 때,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성운이 보였다.

“딱이네. 딱이야.”

작게 중얼거리는 김성운.

“...?”

뭐가 딱이라는 걸까?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가 대뜸 물었다.

“회사 구경 좀 할래요?”

#

“그래서, 주철인 어떻게 된 거예요?”

“안타깝게 됐지.”

내 물음에 김성운이 운전을 하다가 나지막하게 답했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덧붙여 말한다.

“안타까울 수밖에. 왜 이런 일을 하겠다고 제 발로 찾아왔을까···. 나야 너무 고맙다만···.”

이내 사악하게 키득거리는 김성운을 보며 나는 잠시 죄책감을 느꼈다.

잘 살고 있는 애를 괜히 끌어들였나.

“근데 확실히··· 옆에 있으면 든든하긴 하겠더라 걔. 딱 내가 찾던 인재상이야.”

“아니, 로드 매니저를 구하는데 왜 그렇게 덩치를 신경 쓴 거예요?”

“김주철이 너만 맡을 게 아니거든. 너랑 또 다른 배우 한 명. 그렇게 더블로 맡게 될 거야.”

“다른 배우 누구요?”

“전에 FHN엔터랑 오가는 이야기가 있다고 했잖아.”

“네.”

“최근에 FHN엔터 소속 아이돌 멤버 중에 연기돌로 자리 잡은 친구가 있어. 유은하라고. 그 친구의 연기에 관련된 부분만 우리 하람에서 맡기로 했거든.”

“그렇게도 가능하군요?”

“우리도 처음 시도해보는 방식이긴 해. FHN엔터 입장에선 아이돌 소속사라는 프레임이 큰 것을 보완할 수 있고, 우리 쪽에선 연기에 재능 있는 친구들을 계약 끝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되니 좋고.”

김성운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김주철을 여기랑 거기 데리고 다니면서 키워보려고. 유은하가 아이돌이다 보니 팬들이 많기도 하고, 그만큼 사생 같은 문제도 많거든.”

그래서 덩치나 인상을 그렇게 강조했던 거구나

끄덕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잘됐네.’

이게 뭐라고 ‘악역’을 멀티온과 성사시켰을 때만큼이나 기분이 좋은 걸까.

흐뭇해지는 기분을 안고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김미옥 작가의 건물.

꼭대기 층 작업실에 올라서자 커피잔을 든 그녀가 문을 열어주었다.

그녀의 책상엔 대본이 쌓여 있었다.

이미 최종화까지 집필을 끝낸 그녀가 다시 대본을 살피는 것에 의아해하자 그녀가 말했다.

“가편(—가편집본)을 받아보고 다시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백승결 배우의 오태구가 너무나 훌륭해서. 내 머릿속에 있던 오태구보다 더 글에 착 붙어서. 다시 보면 고치고 싶은 부분들이 분명 보이겠다 싶었거든요.”

“감사합니다.”

내 인사에 그녀도 화답했다.

“내가 감사하죠.”

“물론 감독님이나 콘티 짜시는 분들껜 제가 몹쓸 짓을 한 것 같지만요.”

덧붙인 말에 김미옥 작가가 웃었다. 나도 따라 가볍게 웃었다.

농담이었다. 품이 더 들기야 하겠지만, 그 결과가 확실히 더 좋은 방향이라면 그들도 오히려 환영할 것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혹은 환장하거나.

모두가 이번 드라마에 진심인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때 김미옥 작가가 대본을 정리하며 내게 말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글 한 번 써봐요.”

“제가요?”

“내가 작가 발굴하는 눈도 나쁘지 않은데, 지금까지 지켜본 백승결 배우는 그쪽으로도 분명 재능이 있을 것 같아요.”

내가 글을 쓴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말에 살짝 벙쪘다.

이에 김미옥 작가가 한번 생각해보라며 자연스럽게 주제를 넘긴다.

“그건 그렇고, 내가 백승결 배우를 부른 이유는 얘길 좀 나눠보고 싶어서예요. 고칠 게 있나 훑어보는 중에 여러 대사들이 떠올랐는데, 그걸 오태구가 말하는 모습이 직접 보고 싶어서요.”

“어떤 대사일지 기대되는데요?”

빙그레 웃으며 그녀와의 미팅을 이어갔다.

꽤나 오랫동안 대화를 하며 내가 그린 오태구에 대해서도 이야길 하게 되었고, 그녀는 여러 번 놀라며 즉석에서 대본을 고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글을 써보라던 그녀의 말이 다시 한번 생각났다.

아까는 의외라는 생각뿐이었는데, 지금 보니 나름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물론 지금은 오태구에 집중해야 하지.

그날 이후로 촬영이 계속 이어졌다.

가족을 잃고 모든 이들에게 악역 소릴 듣는 오태구.

촬영장에선 그가 되어 온갖 감정들을 다 쏟아냈고, 이따금 김미옥 작가와 만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그럴수록 작품의 짜임새나 특정 장면들의 은유가 더욱 견고해졌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5화까지의 촬영분을 마쳤을 때.

이번엔 한이연 감독에게 연락이 왔다.

전에 얘기했던 영화 대본이 완성된 것이다.

#

······오랜만에 본 한이연 감독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처음 ‘눈속임’을 집필할 때의 네추럴한 한이연 감독으로 말이다.

그것을 자신도 아는지 그녀가 날 보며 웃었다.

“그새 예전의 나로 돌아왔지?”

여기서 부정하면 그게 더 이상할 것 같지.

옅게 미소지으며 답했다.

“그래도 즐거워 보이세요.”

그러자 그녀가 씩 웃는다.

“당연하지. 역시 난 내 얼굴 꾸미고 이런 것보다 글을 쓸 때 더 행복해.”

그녀가 가방에서 대본을 꺼냈다.

고양이마냥 시선이 대본을 쫓았다.

“드디어 볼 수 있는 거예요?”

“휴우··· 너한테 처음 보여주는 거야. 떨린다.”

그러면서 대본을 건네는 한이연 감독.

마침내 손에 들린 종이뭉치를 내려다보았다.

이번엔 ‘눈속임’ 때와는 다르게 제목이 적혀 있었다.

[48시간의 위로]

“음악이 전혀 생각나지 않는 제목이네요.”

“맞아. 이번에도 눈속임 때처럼 음악은 그냥 표현의 방식일 뿐이니까. 이것도 정말 고민 많았다. 알다시피 내가 제목 정하는 걸 힘들어하잖아.”

고갤 끄덕였다. ‘눈속임’ 때도 그 제목이 나오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었지.

덕분에 김성운은 제목도 없는 대본을 가져온 것에 충격을 받았었고.

“원래는 그냥 ‘48시간’으로 하려고 했는데, 뭐랄까··· 제목이 좀 스릴러나 첩보물 장르 같더라고. 그래서 머리 쥐어뜯으며 다시 고민했지. 그때 딱 집필하며 들었던 음악이 떠오르더라고. ‘위로’라는 제목의 음악이었는데, 주제랑 너무 잘 맞는 거야. 이거다 싶었지.”

“한번 들어봐야겠네요.”

“꼭 들어봐. 그냥 듣기만 해도 눈물 날 정도로 좋은 노래니까. 정말 제목 그대로 내가 위로를 받는 느낌이라고 해야 되나. 게다가 위로라는 단어는···.”

감탄을 쏟아내던 한이연 감독이 손가락을 위로 들어 올렸다.

“위쪽으로, 같은 의미도 있잖아. 그게 주인공의 상황과도 묘하게 맞아떨어져서 딱이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48시간의 위로’군요. 어떤 내용일지 엄청 궁금해지네요.”

대본을 만지작거리며 말하자, 한이연 감독이 본격적으로 작품에 관련된 설명을 시작했다.

“스승과 제자. 사제 간의 이야기야. 일종의 버디 무비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말끝을 늘린 그녀가 덧붙였다.

“오로지 기억으로만 만날 수 있는 사이라는 게 다르지.”

“스승이 이미 세상을 떠난 건가요?”

“정확해. 역시 척하면 척.”

손가락을 튕기는 한이연 감독.

그녀는 잔뜩 신이 난 얼굴이었다.

“모두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쇼팽 콩쿠르에 참가한 젊은 피아니스트. 워낙 뛰어난 플레이어라 결승에 진출하게 되지만, 그동안 느껴온 극심한 부담감에 지칠 대로 지친 상태라 결국 한계에 도달하게 돼.”

그녀가 물 한 모금으로 입을 축이고서 말을 이어간다.

“그는 1년 전 죽은 스승을 떠올려. 자신의 인생에 유일한 버팀목이었거든. 그리고 기억에 의존해서 스승을 옆에 만들어내서 마지막 레슨을 해달라고 부탁하지.”

가만, 죽은 스승을 만들어낸다고?

“이거 장르가 판타지인가요?”

“글쎄?”

빙그레 웃는 한이연 감독을 보며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곧장 대본을 펼쳤다.

그리고 첫 페이지.

유망한 피아니스트이자 이 작품의 주인공인 이인호의 독백이 시작되었다.

눈은 독백을 따라 움직였고, 입은 눈을 따라 달싹였다.

“······그것은 부담감에 짓눌려 터져 나온 나의 소망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항우울제의 부작용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정말 어떤 초현실적인 판타지였을지도.]

갈팡질팡하는 목소리 뒤로.

[허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확신에 찬 목소리가 덧붙여진다.

[지친 현실은 희미했고, 내 옆에 나타난 허상은 선명했다는 거다.]

동시에, 이인호의 고개가 천천히 옆으로 향했다.

“선생님.”

[나를 음악의 길로 인도하고, 그 길을 아장아장 걸을 때부터 달리게 될 때까지. 마치 아버지처럼 옆에서 지켜보아준 스승님이······.]

[정말 그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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