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연주와 연기 (1)
한국예술대학교 캠퍼스 안에 위치한 카페.
피아노 학과에 3학년으로 재학 중인 최수빈이 공강인 친구들을 한자리에 불러모았다.
깜짝 놀랄만한 소식이 있다는 소리에 모인 친구들이었지만.
모이자마자 금세 다른 얘기들로 시끌벅적해진다.
각자의 이야기로 근황 토크를 마친 친구들이 비로소 최수빈에게 대체 무슨 일이냐며 농성을 피웠다.
잠시 뜸을 들이던 최수빈이 목소릴 낮추며 입을 뗐다.
“이거 엠바고인데······. 아니, 딱히 뭐 비밀로 해달라고 요청은 안 했는데, 아무튼.”
“그래서 뭔데. 뭐가 그렇게 거창해?”
“별 거 아니기만 해봐. 나 과 선배가 밥 사준다고 그러는 거 거절하고 왔다?”
“과 선배? 그때 그 복학생?”
“뭐야, 뭐야. 복학생 누군데?”
“야, 수빈이 얘기부터 좀 듣자.”
순식간에 다른 곳으로 휩쓸리는 이야기.
이에 최수빈이 말했다.
“나 이번에 아르바이트 하나 시작했어.”
“뭐야, 너 사운드필름에서 일 받고 있지 않았어?”
“설마 짤린 거야?”
“근데 짤리고 말고 할 게 있나? 프리랜서로 녹음 있을 때 불려가는 건데?”
“아, 그런가.”
걱정스러운 말들이 돌아오자 최수빈이 고갤 저었다.
“잘린 건 아니고.”
“그럼 투잡 같은 느낌인가? 학교까지 생각하면 쓰리잡이겠네. 그거 가능하겠어?”
“사운드필름에서 돈 많이 주잖아.”
“많이 주지. 대학생 아마추어 연주자에겐 과분할 정도로. 근데, 이 일도 사운드필름에서 준 거라.”
그녀의 대답에 친구들이 물었다.
“사운드필름에서? 무슨 일인데?”
“내가 삼수하면서 과외를 많이 해봤잖아.”
“그랬지.”
“진짜 끔찍한 시간이었는데, 그게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은 몰랐네.”
“대체 뭔데. 혹시 재벌집 아들 특별과외 뭐 이런 거라도 받은 거야?”
“SJ그룹 이런 데?”
친구들이 한마디씩 건네며 키득거렸다.
자신들이 생각하기에도 터무니없는 대답들이었다.
“좀 오바긴 하지?”
“많이. 아주 많이.”
“그래서 무슨 과외길래 그래?”
“백승결.”
이름 하나가 툭 던져졌다.
커피를 들이켜며 대답을 기다리던 친구들의 표정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백승결? 배우 백승결? 그 눈속임의··· 백승결?”
최수빈이 끄덕거렸고.
“허······ 야, 이게 더 오바잖아.”
“그러게. 차라리 재벌집 아들 과외가 더 현실적일 듯.”
“와 나였으면 페이 안 받아도 나머지 수업까지 매일 해준다.”
“옆선 보고만 있어도 세 시간 뚝딱이지.”
“그런 주제에 무슨 회사 짤리기라도 한 것마냥 고민이라고 하셨겠다?”
들썩거리는 친구들을 보며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진심 걱정이긴 해. 피아노를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는데, 대역 없이 촬영할 거래.”
“그런 경우 은근 많지 않아? 할리우드에서도 그런 영화 꽤 많았던 거 같은데?”
“보통은 그래도 조금씩 쳐본 배우들이거나 소리는 따로 입히는데, 백승결은 현장 녹음을 한대.”
“아, 소리까지 본인이!?”
“더 문제는 뭔 줄 알아? 연주할 곡이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이라는 거.”
과외할 곡의 정체까지 밝히자, 최수빈의 난감함이 이해되는 친구들이었다.
“아, 그건 좀······.”
“그 영화 우리 같은 전공생들은 보기 좀 힘들겠다.”
“그치? 음악이 곁다리도 아니고 심지어 뉴스보니까 배경이 콩쿠르라는데, 본인이 직접 연주한다? 거슬리는 게 한 두 가지가 아닐 텐데.”
“그러니까. 그래서 내가 고민인 거야. 거슬리는 건 둘째치고 어떻게 2달 만에 피아노 한 번도 안 쳐본 사람이 협주곡을 연주할 수 있게 만드냐는 거지. 얼른 집단지성의 힘 좀 빌려줘.”
“우선 가장 기본적인 부분을 노려야 하지 않을까?”
“예를 들면?”
“솔직히 현장 녹음을 한다고 해도 ‘소리’는 그 후에도 만질 수 있잖아.”
“맞아. 여차하면 후시로 다시 녹음해도 되고. 근데 영상은 그렇지가 않단 말이지.”
“손가락 번호 이상하고, 손가락 근육이 안 풀려서 약지랑 소지랑 같이 벌떡거려봐. 바로 어색하지.”
“확실히 그렇겠네.”
나온 이야기들을 최수빈이 노트에 적는다.
그 후로도 여러 이야기들이 오갔다.
어떻게 하면 최대한 덜 이상한 연주를 만들까.
그게 목표였다.
한참 동안 회의를 하다가 친구 한 명이 살짝 회의적인 표정으로 말했다.
“근데 아무리 그래도 가능할까? 쇼팽인데?”
“나도 솔직히 힘들 것 같긴 한데··· 일단 난 그렇게 의뢰를 받았으니 최선을 다 해봐야지.”
친구들과 헤어진 그녀가 곧장 하람의 사옥으로 향했다.
방문객 명단까지 확인하는 삼엄한 경계를 뚫고서 도착한 연습실.
아마도 연기나 뮤지컬 연습 등을 위해 존재하는 듯한 공간에 업라이트 피아노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앉아 건반을 누르고 있는 백승결.
순간, 와 하고 감탄해버릴 뻔했다.
피아노를 잘 쳐서는 당연히 아니고.
‘뭐 저렇게 잘생겼어?’
화면으로만 볼 때도 잘생긴 건 알았다.
그렇다고 아이돌처럼 꽃미남 상은 아니라, 크게 관심이 없었던 것도 사실.
그런데 막상 눈앞에서 보니 정말 잘생겼다.
심지어 그동안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았던 모습들이 하나의 얼굴에서 언뜻언뜻 보여 소름이 돋았다.
최수빈이 잠시 넋을 놓은 사이, 그녀가 온 것을 확인한 백승결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최수빈 선생님이세요?”
“아, 네.”
“반갑습니다. 백승결이라고 합니다.”
얼굴이 명함인 배우의 인사에 화답한 최수빈이 옆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다소 두서없이 수업이 시작되었다.
그녀는 친구들과 나름의 회의를 통해 생각해낸 것들을 풀어냈다.
“영화 촬영 특성상 손가락이 돌아가는 자연스러움이 중요할 것 같아요. 그게 어설픈 순간 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화면에서부터 튀어버리니까. 그래서 이 레슨에서 가장 중요한 게 초보인 티가 안 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끄덕거리는 백승결을 보며 최수빈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모든 음에 손가락 번호가 필요할 것 같아요. 다음에 어느 손가락이 눌러야 하는지, 그걸 명확하게 정하는 게 멈칫거리는 실수를 최대한 줄이는 방법일 테니까요. 여기 제가 숫자 적어놓은 거 보이시죠? 이 부분을 예로 들면···.”
그녀의 손이 피아노를 훑는다. 하지만 중간중간 절뚝거리듯 부자연스러웠다.
“이렇게 치는 것과.”
그리고 그녀가 다시 한번 같은 음들을 긁어내려 간다.
이번엔 미끄러지듯 자연스럽게.
“이렇게 치는 건 확실히 다르죠.”
“아~.”
“차이가 확 느껴지세요?”
“네. 확실히······.”
백승결이 고갤 주억거리며 건반을 바라본다.
“연기와 비슷한 부분이 있어요.”
“그런가요? 어떤 점이요?”
“어떤 발로 먼저 걸어서, 몇 발자국 뒤에, 어떤 손으로 컵을 잡을지······ 촬영 전에 동선과 연결을 체크하는 것 같네요. 아이러니하게도 화면에 자연스럽게 담기려면 어느 때보다 계획적이어야 하거든요.”
“맞아요. 연주도 마찬가지예요. 정확히 내가 어느 손가락으로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알고 있는 게 중요해요. 우선 가장 쉬운 부분부터. 여기 한 마디만 연습해볼게요.”
수업의 방식은 간단했다.
최수빈이 먼저 한 마디 연주를 보여주고, 백승결이 따라친다.
물론 어려운 화성이나 아직 소화할 수 없는 테크닉은 모두 빼버리고, 최대한 단순하게.
곡을 익히는 데 주력하기 위함이었다.
어차피 술 취한 사람처럼 손가락이 건반 위를 비틀댈 테니까.
오늘 하루 종일 그럴 거라 예상한 최수빈은 마음을 편하게 먹고 천천히 가르쳤다.
하지만 수업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자연스러우신데요? 손가락이 유연하신 건가?”
길쭉한 손가락이 삐걱거리지 않는다.
꽤나 물 흐르듯이 다음으로, 그다음으로 넘어간다.
심지어 반복될수록 손가락을 움직이는 게 익숙해진다.
그게 눈으로 보일 정도였다.
“정말 피아노 배우신 적이 한 번도 없으세요? 어릴 때라던가······.”
백승결이 그렇다며 끄덕거리자 최수빈이 헛웃음을 머금으며 진단했다.
“지금 배우님 손이 전혀 안 굳어있어요. 물론 어릴 때 배우다 관두면 오히려 더 굳는다는 얘기가 있긴 하지만, 이건 근거가 없는 이야기니까 그렇다 쳐도. 보통은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악기를 다뤄보지 않았으면 손가락이 굳어있는 게 정상이거든요.”
“전 정상이 아니군요.”
순진한 표정으로 으쓱거리는 백승결을 보며 최수빈이 피식 웃었다.
“어색함이 전혀 없어요. 예전부터 이렇게 움직여왔던 것처럼.”
“제가 몸 쓰는 걸 좀 잘하나 보더라고요.”
그래서 저렇게 매력적으로 웃나.
안면 근육마저 잘 쓰는 백승결에 또다시 넋을 놓았던 최수빈이 정신을 차리고 수업을 이어갔다.
그리고 더 크게 놀라버렸다.
수업이 끝날 때쯤, 다음에 배울 거라며 알려준 것들을 단번에 외워버렸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멍하니 바라보자, 그가 또 씩 웃는다.
“제가 기억력도 좋은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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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이 끝나고, 나는 궁금한 게 있다며 최수빈 선생님을 카페테리아로 이끌었다.
오는 내내 이곳저곳을 신기하게 둘러보는 그녀에게 커피 한 잔을 내려 건넸다.
그리고 가까운 테이블에 앉자, 따라 앉은 그녀가 물었다.
“그럼 바르샤바에서 촬영하는 건가요?”
“맞아요. 연습이 모두 끝나면, 한 보름 정도 가서 촬영하고 오게 될 것 같아요.”
“엄청 고생하시겠네요.”
“저보단 감독님과 제작진이 고생 많이 하시겠죠. 현지 장소들 섭외부터, 연주자들 캐스팅까지 많이 바쁘시더라고요.”
끄덕거리는 최수빈을 보다가, 내가 물었다.
“뭐 하나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말씀하세요.”
“클래식은 정해진 규칙이 있다고 들었어요.”
“다른 음악들에 비하면 좀 그런 편이죠. 그것도 최근엔 많이 달라졌지만요.”
“그게 ‘새로운 클래식’인가요?”
“맞아요.”
최수빈이 흐뭇하게 웃었다.
그럴 만도 한 게, 저 새로운 클래식이라는 개념을 만든 사람이 다름 아닌 한국 사람이기 때문.
새삼 클래식계에서 우리나라의 입지가 지난 10년 사이 절대적으로 되었단 말들이 확 와닿았다.
“어떻게 달라졌나요? 규칙을 깬 건가요?”
“아뇨. 규칙이란 틀 안에서 소리치는 거죠. 이전까진 틀 안에 담긴 것조차 작곡가인 고전 음악가들의 것을 모방했다면, 이젠 연주자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그게 더 중요해진 거예요.”
충분한 설명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이, 기능하겠다 싶은.
가져온 가방에서 주섬주섬 파일을 꺼냈다.
한창 읽고 있는 대본들 사이에서 종이 한 장을 쑤욱 뽑아 테이블 위에 올렸다.
“제가 연기해야 하는 캐릭터의 감정에 관해서 고민한 내용이에요.”
즉, 내가 해석한 ‘48시간의 위로’의 주인공 이인호였다.
특히 마지막 콩쿠르 결승 장면에서 그가 연주를 통해 보여줄 감정들.
“제가 연기는 어떻게 하는지 아는데, 연주로 무언가를 표현하는 방법은 전혀 몰라서요.”
“그러니까 이걸······ 연주로 표현하고 싶으시다고요?”
최수빈은 퍽 당황한 눈치였다.
수업 내내, 연주를 촬영 전까지 완성하기만 해도 솔직히 말도 안 되는 거라 강조했었는데.
거기에 뭔가를 더 담고 싶다 말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제가 잘은 모르지만, 연주도 연기와 비슷하다면······.”
종이를 받아 읽어내려가는 최수빈.
그녀를 보며 내가 말했다.
“담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것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