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연주와 연기 (2)
“클래식이라는 소재에 대한 반응은 뜨거운데······.”
굿픽처스 대표실.
핸드폰으로 인터넷 반응을 살피던 한이연 감독이 덧붙여 말했다.
“문제는 OST와 배우 캐스팅이네요.”
콘티도 거의 다 완성되어가는데, 제작과 관련된 부분들이 좀처럼 매듭지어지지 않고 있었다.
이에 굿픽처스 박 대표가 눈을 비비며 되물었다.
“사운드필름에선 아직 소식이 없어?”
그도 홍보 관련해서 줄기차게 미팅을 다니느라 퍽 피곤한 모습이었다.
“네. 저희 쪽에서 요청한 게 사실 유명 작곡가들이다 보니, 다들 할리우드 쪽 프로젝트로 미국에 가 있거나 스케줄이 꽉 차 있대요. 지금 그 틈을 만드는 중이라고는 하는데······쉽지 않죠.”
“난감하네. 이번 영화의 핵심은 음악일 텐데 말이야······.”
부정할 수 없는 말에 한이연 감독이 끄덕거렸다.
“유명 작곡가를 포기해야 할까 봐요. 우리 입장에서도 바빠서 후뚜루 마뚜루 만들어주는 건 지양하고 싶기도 하고요.”
“하긴. 완전 정상급 작곡가 아니면 사실 작곡가 때문에 영화를 보는 경우는 없잖아? 사운드필름 정도면 유명하지 않아도 곡 잘 만드는 작곡가가 분명히 있을 거고.”
박 대표의 합리화가 맹렬히 돌아갔다.
작품에 양보란 게 없는 한이연 감독도 이 부분에서만큼은 한 걸음 물러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촬영지가 국내가 아닌 해외 로케이지 않나.
지구 반대편 바르샤바까지 가야 하는데, 일정이 꼬이면 큰일이었다.
그러니 닥친 문제들을 얼른 마무리 지어야 했다.
주억거리는 한이연 감독을 보며 박 대표가 말을 잇는다.
“그래, 되는대로 하는 거지. 언젠 뭐 풍족하게 했나. 일단 우린 백 배우 잡았으니 그거면 된 거지. 승결이가 또 우리 굿픽쳐스 행운의 부적이잖아. 전작에서 이태관 배우랑 고하윤을 끌고 온 것도 녀석이었고.”
이에 한이연 감독이 피식 웃었다.
백승결. 그 이름을 들으니 복잡해졌던 머리가 조금은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괜한 자신감도 생긴다.
전작이자 데뷔작인 ‘눈속임’을 속된말로 멱살 잡고 끌어올린 게 바로 백승결이었으니까.
물론 이번에도 승결이가 뭔가를 해주려나?
이런 기대가 있는 건 절대 아니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배우다.
배우가 갑자기 어디서 유명 작곡가를 데려오고, 스케줄 문제로 곤욕인 캐스팅을 성사시키겠나.
다만 박 대표가 말한 ‘행운의 부적‘이란 별명(?)에 동의할 뿐이었다.
지금만 해도 백승결이 주인공이란 사실을 상기하니 마음이 편해지지 않나.
“확실히······.”
한이연 감독이 가볍게 웃으며 끄덕거렸다.
“승결이가 든든하긴 하죠.”
#
한편, 백승결과의 첫 수업을 마친 최수빈이 향한 곳은 영화 음악 제작 전문, 사운드필름이었다.
수차례 이곳에서 녹음을 했던 그녀에게도 여전히 감회가 새로운 곳이다.
전세계에서 의뢰가 쏟아질 정도로 대단한 회사인 동시에, 연주자를 키워내는 학교이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쉼터와도 같은 곳.
복도를 거닐던 최수빈이 붉은 불이 들어온 방 앞에서 까치발을 들었다.
방음문에 달린 작은 창 너머, 5중주 규모의 녹음이 진행되고 있었다.
“오, 강준서 바이올리니스트다.”
문 너머로 어떤 소리도 들어가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괜히 작게 중얼거린 그녀가 신기해하며 돌아섰다.
나머지 방도 힐끗거리다가 복도 끝에 있는 카페테리아에 앉았다.
오늘 누가 와서 녹음을 하고 있는지 볼 수 있게 이런 구조로 만들었다지.
‘역시 좋다.’
이곳에 자신이 속해있다는 게 새삼 감회가 새로운 그녀였다.
‘열심히 해야지.’
최수빈이 다짐했다.
아직 데모 녹음 정도밖에 참여한 적이 없는 그녀다.
그런 만큼 자신이 이번에 맡게 된 백승결 코칭을 성공적으로 해내고 싶은 그녀였다.
‘쉽진 않겠지만.’
그녀가 백승결에게 받은 종이를 꺼내 들었다.
그가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에 담고 싶다고 한 감정들.
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어렵다, 어려워······.”
첫사랑이란 테마를 가진 쇼팽 협주곡 2번에.
[나를 음악으로 이끈 스승님······.]
사제 간의 감정을 담으려 한다니.
물론 처음에만 고개가 갸웃거렸고, 읽다 보니 자연스레 고개가 끄덕여졌다.
백승결은 두 이질적인 느낌을 ‘그리움’이란 카테고리로 묶었다.
‘확실히 이러면······ 납득이 되지.’
‘그리움’만큼은 둘 중 어느 것이 더 크다고 말하기 어려울 테니까.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였다.
‘콩쿠르 나갈 때나 고민하던 걸 또 하게 될 줄이야···.’
최수빈이 골치 아파하며 머리를 흔들던 그때.
“뭐가 그렇게 어려운데?”
앞쪽에서 툭 굴러온 목소리.
화들짝 놀라 시선을 들어 올리자 팀장님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 팀장님.”
사운드필름의 모든 작곡가들을 관리하고 있는.
그리고 본인조차도 젊은 거장이라 불리는 한서호 다음으로 유명한 작곡가.
유채봄 팀장.
그녀가 웃으며 물었다.
“오늘 녹음 있어?”
“아뇨. 그냥 놀러 왔어요.”
“그래? 잘됐다. 커피 한잔하려고 했는데 같이 할래?”
“조, 좋아요!”
최수빈이 잔뜩 상기된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팬심이었다.
피식 웃은 유채봄 팀장이 커피머신으로 다가가며 묻는다.
“그러고 보니 오늘 아니야? 백승결 배우 수업.”
“맞아요. 오늘 첫 수업이었어요.”
“어땠어? 아, 하긴 수업 한 번에 뭐가 파악이 될 리가 없겠지.”
단정적으로 끄덕이는 그녀에게 최수빈이 말했다.
“솔직히···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우리도 처음에 들었을 때 힘들 거라 생각은 했어. 콩쿠르 장면을 배우가 대역 없이 한다는 게. 심지어 협주곡이잖아. 오케스트라랑 합을 맞춰야 하는데···. 뭐, 감독님이 하는 데까진 해보겠다니 알겠다고 했지만.”
“그렇죠. 근데······.”
잠시 머뭇거리던 최수빈이 답했다.
“가능할지도 모르겠어요.”
이에 커피를 내리던 유채봄 팀장의 고개가 돌아갔다.
살짝 놀란 눈빛이었다.
“그 정도의 음악적 재능이 있다고?”
“음악적······.”
최수빈이 말꼬릴 흘리며 미간을 모았다.
그걸 ‘음악적’이라고 할 수 있나?
순간 의문이 드는 최수빈이었다.
“그렇다기보단 다른 재능으로 덮어버리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응? 그게 뭐야.”
한 번 보여주면 놀랍도록 잘 따라 하는 눈과 그에 맞게 움직여주는 손가락.
그리고 그 복잡한 악보를 통째로 외워버린 기억력까지.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음악적 재능이라기보단.
“연기력.”
······이라 불러야 할 것 같았으니까.
“연주가 아닌 연기를 하는 것 같았어요.”
“그래? 흥미롭네.”
유채봄 팀장이 부드럽게 웃으며 커피 두 잔을 들고 돌아왔다.
테이블 위에 잔을 내려놓은 그녀의 시선이 최수빈이 꺼내놓은 종이 위로 향했다.
“근데 그건 뭐야?”
“아, 이거요?”
덩달아 다시 자리에 앉은 최수빈이 종이를 집어 들었다.
“백승결 배우가 요청한 거예요. 연주에서 이런 느낌을 내고 싶다고 해서요.”
“한 번 봐도 되나?”
“사운드필름에서 진행하는 영화니 괜찮지 않을까요?”
그렇게 종이가 유채봄 팀장에게로 넘어갔다.
그녀의 두 눈이 종이 위를 훑었다.
그리 긴 내용은 아니었지만.
“잘생긴 사람이 글도 잘 쓰네. 못하는 게 대체 뭐냐.”
여운을 길게 남기는 글이었다.
종이를 내려놓으며 옅게 웃는 유채봄 팀장.
최수빈은 그녀의 웃음이 어쩐지 슬프게 느껴져 의아했다.
뒤이어 유채봄 팀장이 그 이유를 설명한다.
“그나저나, 슬프네. 돌아가신 스승을 그리워하는 제자라니······.”
팀장님도 굉장히 감성적인 사람이라 생각하며 최수빈이 끄덕거리는데.
유채봄 팀장이 툭 덧붙여 말했다.
“누구 생각나게.”
다음 순간, 그녀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이거 나 좀 찍어갈게.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
다음날.
새벽부터 오후까지 이어진 ‘악역’의 촬영.
함께 밤을 새운 배우들이 국밥에 소주를 외치며 흥청거렸지만.
그 틈에서 빠져나와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옷부터 갈아입고 나와 거실에 멀뚱멀뚱 서 있는 김주철에게 말했다.
“왜 서 있어. 편하게 쉬고 있어.”
“형은 곡 연습하실 거죠?”
“응.”
“근데 제가 어떻게 편하게 쉬어요. 옆에서 악보라도 넘기겠습니다.”
저게 장난이 아니란 걸 알기에 얼른 고갤 저었다.
“그냥 티비 보고 있어. 정 불편하면 나 모니터링 좀 해주고. 이번에 연예리포트에서 ‘악역’ 촬영장 온다는데 대충 어떤 질문들 하는지 알려주면 돼.”
“알겠습니다.”
그제야 티비를 틀며 소파로 향하는 김주철.
방으로 들어가 어제 배운 것들을 한참 동안 복습하다 나왔다.
“여어~.”
객이 한 명 더 늘었다.
현태 형이 손을 휘적거리며 다가와 방안을 살핀다.
“연습하는 거 카메라로 잘 찍고 있지?”
“그렇긴 한데··· 이거 쓸 수 있겠어? 너무 틀리는데.”
“그런 부분이 있어야 나중에 완성됐을 때 카타르시스가 있는 거지. 잘 찍어놔야 된다? 너 브이로그 좀 많이 올려달라고 사람들이 아주 난리야. 네가 일, 집. 일, 집. 이러니까 뭐 쓸만한 게 있어야지.”
잔소리에 시동을 거는 현태 형.
때마침 김성운이 도착했다. 나이스 타이밍.
“다들 배고프지?”
양손 무겁게 나타난 김성운이 식탁으로 향했다.
화색이 된 현태 형이 배를 슥슥 문지르며 다가간다.
“마침 허기졌었는데. 뭘 그렇게 사 오셨어요.”
“치킨.”
“크으, 여기 맥주 없지?”
돌아보며 묻는 현태 형에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지난번에 형이 사온 건 다 먹었을걸?”
물론 내가 먹은 건 아니다.
일주일에 두 세 번은 모이는 것 같은 이 조합이 먹은 거지.
아, 중간에 동네 주민 이강현이 한 번 와서 두 캔 정도 먹었고.
그러자 소파에서 일어나 있던 김주철이 물었다.
“사 올까요?”
“어······.”
“왜 그러라고 시키질 못하니.”
뻐끔거리는 현태 형을 보며 김성운이 낄낄 거렸다.
“······그, 그럴래?”
“다녀오겠습니다.”
“야, 카드. 카드 가져가야지.”
이들만 오면 시끌벅적하다.
솔직히 이전 집에서 이사 올 때만 해도 갑자기 확 커진 크기에 적응하기 힘들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이렇게 자주 붐비니 그럴 새가 없다.
치킨을 먹으며 한참을 떠들다가 나 혼자 방으로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디지털 피아노 앞에 앉았다.
바깥이 떠들썩했지만, 헤드셋을 끼니 조용해졌다.
‘······이어서 해볼까.’
건반을 내려다보며 손가락을 움직인다.
연주······ 라기엔 고작 왼손이었다.
그마저도 단순화시킨 단일 멜로디.
대신 나는 두 가지 악보를 머릿속에 펼쳤다.
하나는 음표들이 무수히 많이 찍힌 쇼팽의 악보.
또 하나는 그리운 순간들이 음표처럼 새겨진 이인호의 기억.
‘눈속임’ 촬영을 위해 미술을 배웠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땐 흉내만 낼 뿐. 결과물은 내가 그린 그림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엔 내가 연주를 해야 했다.
부담이 된다.
연주를 잘하지 못할까 봐서가 아니라.
연주하기에 급급해서 이인호를 제대로 연기하지 못할까 봐.
그러니 무엇하나 놓칠 수가 없다.
연주도 연기도.
‘그냥 언어가 다르다고 생각하자. 영어처럼.’
연주에 감정을 담고.
그 연주를 연기해야 한다.
‘그러니까 통역··· 같은 거지.’
분명 지금까지 해왔던 연기와는 전혀 달랐지만.
어렵게 생각하진 않기로 했다.
첫사랑에 대한 쇼팽의 기억도.
스승에 대한 이인호의 기억도.
그리고 이 어설픈 연주까지도.
결국, 하고자 하는 말은 같으니까.
······나는 당신이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