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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배우 복귀했습니다-117화 (117/167)

117화 파급력의 끝에서 (1)

이른 아침, 뒷산을 달리는 중에 김주철에게 전화가 왔다.

걸음을 늦추고 핸드폰을 귀에 가져갔다.

‘악역’을 보느라 밤을 꼴딱 샜다며 흐흐 웃는 녀석.

“밤을 샜으면 얼른 자야지. 안 자고 뭐 해?”

—그냥··· 잠이 안 와서요. 근데 형은 깨어있을 것 같았어요.

정답이긴 한데···.

무슨 일 있나?

뛰느라 목젖을 정신없이 타종 중인 호흡을 가라앉혔다.

근처 벤치를 찾아 앉았다. 이 동네엔 이런 시설이 많은 것도 퍽 마음에 든단 말이지.

소매로 땀을 닦아내며 녀석이 주저리주저리 말하는 것을 잠자코 들었다.

물론 그 끝에서 김주철의 울컥 떨리는 목소릴 들을 줄은 몰랐다.

갑작스러웠지만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 짐작이 가거니와, 서러움 한점 없는 후련한 울음 같아서.

걱정이 덜 된달까.

—엄마가 형한테 너무 고맙대요. 흐···.

어울리지 않게 훌쩍이던 김주철이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웃으며 말했다.

내가 난감한 목소릴 냈다.

“그러시면 내가 널 막 부려먹기 죄송스럽잖아.”

—무슨 소리예요. 막 소처럼 부려먹어주세요! 공처럼 굴려주세요!

격하게 막 다뤄달라고 나서는 김주철.

곰 같은 녀석. 그것도 몸에 문신까지 있는 녀석이 애마냥 귀엽다는 생각이 드니 큰일이네.

아무튼, 기분 좋은 일이었다.

욕과 주먹 중 뭐부터 나갈지 경쟁하던 김주철이 점점 밝아지다 못해 귀여워진다는 건.

녀석이 완전히 바뀌고 있다는 거니까.

벤치에서 일어나며 작게 중얼거렸다.

“···작가님이 좋아하시겠네.”

—네?

어느 정도 이럴 거라 예상은 했었다. 그러니 김주철을 떠올리며 김미옥 작가에게 자신 있게 위로받는 사람이 있을 거라 답했었지.

그럼에도 막상 본인을 통해 확인받으니 느낌이 달랐다. 묘하다.

김미옥 작가가 스스로에게 던진 위로.

그게 나뿐만 아닌, 다른 이들도 위로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괜스레 두근거린다.

자신을 위한 이야기가.

남을 위할 수도 있구나.

‘그러면.’

나의 생각들이나 고민도.

이야기도······.

그 정도의 힘이 있을까?

‘쓰기 전까진 모를 일이지.’

글을 써보라고 만날 때마다 독촉(?)하는 김미옥 작가가 떠올라 피식 웃었다. 하도 들었더니 이젠 목소리가 자동 재생되는 것 같단 말이지.

그런 생각을 하며 집에 돌아와 테이블 위에 잔뜩 쌓여 있는 대본 뭉치를 바라본다.

연기가 저 안에 활자인 척 숨어있는 캐릭터들을 끄집어내는 거라면.

글을 쓰는 건 머릿속에 부유하던 생각들을 활자에 숨겨 나열하는 셈인가?

그런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놀고 있네. 너무 거창하잖아.

그냥······.

“일단은 가끔 떠오르는 것들을 끄적이는 정도만.”

딱 그 정도로만.

취미로 써볼까 싶었다.

#

······‘악역’이 미국 비영어권 1위에서 전체 1위로 올라서는 데는 5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

멀티온의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이목을 확 잡아끌고, 한 번 좋은 평이 터져 나오니, 입소문이 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미국인들에겐 너무 진지한 소재가 아니냐는 의문이 멀티온 내부에서도 내내 있어왔지만.

그런 걱정을 단번에 불식시키며 드라마의 화제성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관계자들은 이 상황에 내심 놀랐고, 평론가들은 극적인 전개와 블록버스터에 길들여져 있던 눈이 오히려 반대를 찾는 결과를 만들어냈다고 해석했다.

[한편, 공개 전까지만 해도 ‘악의 링’을 뛰어넘을 수 있을지 주목받았던 ‘악역’은 이제 더는 멀티온 내부에 적수가 없을 정도의 성공을 거두고 있다. 이대로 계속 상승해 과연 OTT 플랫폼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져올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는······.]

굿픽처스 직원이 대표실 문을 열었다.

어김없이 기사를 읽고 있는 박 대표의 모습에 직원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또 기사 보고 계시죠? 기자야 뭐야······.”

소파에 앉아 간단한 업무를 처리 중이던 한이연 감독이 대신 끄덕였다.

한이연 감독이 헛웃음을 머금으며 하소연했다.

“심지어 낭독도 하신다? 댓글까지 싹 다. 어떻게 생각해?”

“감사해요, 감독님. 감독님 아니었으면 저희가 여기서 듣고 있었어야 할 거예요.”

“내가 제물이었구나?”

황당해하던 한이연 감독이 무언가를 잊었던 사람처럼 얼른 핸드폰을 집어 든다.

그러더니 토도독, 손가락을 움직여 무언가를 적어 내려간다.

“현대판 제물···인신 공양··· 좋은데?”

“······.”

이를 멍하니 보던 직원이 혀를 내둘렀다.

“이런 대화에서도 아이디어를 얻으시는군요?”

“종종? 물론 좋은 대화여야지. 대표님이랑 얘기하면 떠오르는 게 한 개도 없어. 한 개도.”

“아, 이해해요···.”

이에 패드를 훑던 박 대표가 시선을 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너희들 당사자 앞에서 너무한 거 아니냐.”

이에 직원이 얼른 받아쳤다.

“그러니까, 남의 작품 반응 그만 보시고 밀린 서류 좀 확인 해주시죠. 누가 보면 ‘악역’이 우리가 제작한 드라마인 줄 알겠어요.”

“비슷하지. ‘악역’은 우리랑 함께 앞에서 끌고 뒤에서 미는 피를 나눈 형제잖아.”

“그건 멀티온 생각도 들어봐야 하는 거 아녜요?”

직원이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물었고.

“피가······ 승결이에요?”

한이연 감독이 작가다운 대답을 내놓았다.

낄낄대며 웃은 박 대표가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그 덕에 지금 우리 ‘48시간의 위로’가 덩달아 끓고 있다고. 특히 해외 사이트에서! 콩쿠르가 주 무대인 영화라 꽤나 신기한가 봐. 이 봐봐라. 레딧에서만 지금 백승결을 치면······.”

“대표님? 이것 좀 확인해주시라니까요?”

기자마냥 백승결의 소식을 전하려다가 단호하게 가로막힌 박 대표가 아쉬운 얼굴로 책상 위에 놓인 서류들을 집어든다.

고소하게 웃은 직원이 한이연 감독 옆으로 다가갔다.

“그나저나, 백 배우는 참 묘한 거 같아요.”

“왜?”

“예전에 저희끼리 그런 얘기 했었거든요. 백 배우는 왠지 응원하고 싶다고.”

그러자 박 대표가 슬쩍 다시 끼어들었다.

“그랬지.”

물론 직원의 눈초리에 이내 자신의 할 일로 돌아간다.

직원이 말을 이었다.

“저흰 그게 백 배우가 워낙 아역 때부터 짠한 이미지라 그렇다고 생각했었거든요. 연기 논란으로 연기가 어려워지고, 혼자 살면서 생계를 이어가고. 근데 솔직히 이젠······.”

“짠한 이미진 아니지.”

“그러니까요. 백 배우가 짠하다고 하기엔 저희 인생이 더······ 아무튼, 백 배우가 지금은 엄청 대단해져서 해외에서까지 거론될 정돈데. 짠할 처지가 절대 아닌데도 여전히 계속 응원을 하게 된단 말이죠. 그게 정말 신기한 것 같아요.”

그러자 한이연 감독이 이해가 간다는 듯 끄덕였다.

“맞아요. 그게 승결이 매력이죠.”

함께 주억거린 직원이 고갤 돌려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더니 말했다.

“아, 감독님. 투데이핫 기자 3시쯤 도착한다고 연락 왔어요. 슬슬 인터뷰 준비하시면 될 것 같아요.”

이에 한이연 감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표실에선 박 대표를 향한 직원의 잔소리가 계속되었다.

자리를 미팅룸으로 옮겨 거울을 확인하고, 인터뷰에서 말할 내용들을 점검하는 사이.

기자가 굿픽처스에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정말 팬입니다.”

“감사해요.”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서 마주 보고 앉았다.

패드와 녹음기를 꺼내든 기자가 본격적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눈속임’ 때도 정말 감탄했었는데, 너무 기대 중이에요.”

“눈속임때 기사를 정말 정성스럽게 써주셨더라고요. 인터뷰도 못 했는데 말이죠. 그래서 이번엔 꼭 인터뷰 하고 싶다고 대표님께 말씀드렸어요.”

“어휴, 영화가 너무 좋아서 좋다고 한 것뿐인데 이렇게 행운이 생겼네요. 다들 48시간의 위로에 관심이 많잖아요, 요즘. 백승결 배우가 전 세계적으로 빵빵 터지고 있으니까요.”

“그렇죠.”

“이런 상황에서 감독님의 단독 인터뷰는 아주 귀하단 말이죠.”

“감독 입장에서 개봉 전까진 인터뷰를 하는 게 아무래도 부담이 되죠. 홍보야 배우가 나서는 게 훨씬 더 효과 있고, 괜히 말실수할까, 색안경 끼워질까. 득보다 실이 많아 보이니까요.”

한이연 감독의 솔직한 대답에 기자가 물었다.

“그럼에도 인터뷰를 하시는 건 작품에 대한 자신감이라고 봐도 될까요?”

“기자님이 좋아서라니까요?”

능청스레 웃어 보인 한이연 감독이 입꼬릴 내리며 진지하게 답한다.

“물론 작품에 대한 자신감도 있죠. 아마 극장에 오신 분들 모두 깜짝 놀라실 겁니다. ‘눈속임’하고는 정말 결이 다른 영화거든요. 그 결을 만든 건 역시······.”

말끝을 늘린 그녀가 카메라 속에 담기던 장면들을 떠올렸다.

버디 무비. 제자가 죽은 스승과 만나 함께 거리를 걷는다는 줄거리의 특성상, 대부분의 장면에 두 사람이 걸려 있어야 했고.

자칫 그게 약점이 될 수도 있었지만.

“백승결 배우와 천광윤 선배님의 케미였죠.”

오히려 엄청난 연기들로 그 부분을 영화의 매력으로 바꾸었다.

그래 주리라 믿고 만든 영화였지만, 그럼에도 놀랐지.

촬영 내내 식은땀이 흘렀다.

만약 백승결이 이 영화를 거절했다면?

그리고 천광윤도 거절했다면?

끔직했다.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그 정도로······ 대단했다.

한이연 감독의 말에 기자도 동감한다는 듯 패드를 뒤적인다.

“맞아요. 모두가 두 사람의 재회에 아주 박수를 치고 있는 상황이죠. 이 사진이 정말 큰 화제잖아요.”

기자가 찾아서 보여준 건, 두 사진이 섞여있는 이미지였다.

‘해별이네’에서 어린 백승결과 지금보다 훨씬 젊은 천광윤이 함께 시골길을 걷고 있는 사진과 바르샤바 거리에서 두 사람이 함께 걷는 사진.

“이 사진 저도 봤어요. ‘해별이네’때 두 사람이 만났었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지만, 캐스팅하면서 딱히 고려했던 건 아니었는데··· 결과적으로 아주 행운이었다고 생각해요. 아주 노련하고 압도적인 연기와 신선하면서도 깊이 있는 연기를 한 씬에서 감상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정말 상상만 해도 두 사람이 관객들을 휘어잡는 그림이 그려지는데요?”

“감독들끼린 이렇게 얘길 하거든요. 화면을 공간으로 바꾸는 연기라고.”

“크으, 멋진 말이네요. 얼른 보고 싶어요. 아주 기대가 됩니다.”

“아, 그리고.”

“...?”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기 전에 한이연 감독이 얼른 덧붙여 말했다.

“방금 기자님이 두 사람이 관객들을 휘어잡는 그림이 그려진다고 하셨는데, 사실 세 사람입니다.”

“네? 아, 혹시 세 번째 멤버는 스태프인 건가요?”

그런 가슴 따뜻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아뇨. 씬에 보이는 두 사람 말고도 ‘48시간의 위로’에는 한 명이 더 있었거든요. 물론 화면 뒤에서요.”

그보단, 가슴 뜨거워지는 이야기지.

“화면 뒤에서요?”

“음악 영화인만큼, 음악이 중요했죠.”

그녀의 힌트에 기자가 아! 하고 손뼉을 쳤다.

“OST를 말하시는 거였군요?”

한이연 감독이 입꼬릴 쭉 끌어올렸다.

그리고 그동안 꽁꽁 숨겨왔던 이야기를 천천히 털어놓았다.

“맞아요. 바로 그 OST 말인데요······.”

이제 개봉 전, 마지막 불을 지필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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