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배우 복귀했습니다-119화 (119/167)

119화 칸 (1)

영화인들에겐 꿈의 축제인 칸 영화제.

마치 피아니스트들의 쇼팽 콩쿠르와 같은 위상을 보이는 이 거대한 축제는 사실상 축제라는 말이 무색하게 경쟁의 전장이기도 하다.

전 세계 대작(대작)이라 평가받는 20여 작품이 황금종려상을 위해 진검승부를 겨루는 곳.

물론 ‘48시간의 위로’에겐 해당 사항이 없는 얘기였다.

한이연 감독의 말마따나 이제 상업 영화가 두 번째인 신인 감독이잖나.

국제 영화제 출품 기록도 전무한 그녀의 작품으로선 한 단계 아래인 비경쟁 부문도 불가능했다.

비경쟁이라는 평화적인 이름을 쓰고는 있지만, 상을 두고 경쟁만 하지 않는다뿐이지 이름 높은 감독들만의 축제인 것은 다를 바가 없으니 말이다.

당연히 박 대표의 목표는 경쟁 부문이나 비경쟁 부분이 속한 공식 섹션에 있지 않았다.

그와는 궤를 달리하는 비공식 섹션.

이렇게 몇 단계를 양보했음에도 불구하고 출품이 받아들여질 확률은 절반 이하로 예상됐다.

“아마 ‘악역’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을 수야 있겠지만 그렇다고 큰 도움이 되진 않을 거야. 한서호도 마찬가지고.”

박 대표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당연한 거라 아쉬울 것도 없다는 듯이.

“칸의 드높은 고집이지. OTT플랫폼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하고, 음악을 영화의 한 부분으로 인정은 하지만 그럼에도 좌지우지할 요소로는 쳐주지 않는.”

이에 한이연 감독은 살짝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자신의 작품을 ‘내 새끼’라고 부르며 소중히 여기는 그녀로서는 인정도 못 받는 무대에 자식을 떠미는 꼴처럼 느껴졌을 테니까.

하지만 박 대표의 생각은 달랐다.

“처음이 없으면 다음도 없어. 비공식 세션에 이름이라도 올려야, 나중에 네 새끼 더 큰 무대에 세울 수 있는 거야.”

결국, 학군 좋은 곳으로 이사하는 부모의 심정으로 한이연 감독이 결정을 마쳤다.

그녀와 편집자들이 출품을 위해 편집에 박차를 가했다.

그 사이, 나는 나만의 일들을 해야 했다.

‘악역’ 프로모션을 따라 정신없이 움직였다.

고민이 가득했던 굿픽처스와는 다르게, 멀티온 쪽은 가히 축제 분위기였다.

순식간에 시청시간 1억을 돌파했고, 와와 놀라는 사이에 ‘악의 링’을 뛰어넘었다.

“윤상희 부장이 속 좀 쓰리겠네.”

원래 김미옥 작가가 대본을 보냈던 TBS.

그런 그녀를 완전히 무시했던 그곳 부장을 떠올리며 김성운이 말했다.

이에 자초지종 설명을 들은 현태 형이 덧붙였다.

“좀이 아닐걸요. 아마 온갖 눈총을 다 받고 있을 텐데.”

“괜찮을까요? 방송국 갑질도 장난 아니라던데. 그때 성격 보니 윤상희 부장이 가만있을 위인도 아닌 것 같았고요.”

내가 묻자 김성운이 별걱정 없는 얼굴로 끄덕였다.

“예전에야 지상파가 드라마 예능 캐스팅 가지고 칼 휘두르고 그랬지, 이젠 지상파가 반드시 답은 아니잖아. 그걸 네가 증명하고 있는 중이고.”

“그리고 아마 대놓고 하람에 악감정을 티 내는 것도 못 하지 않을까요?”

과묵하게 듣고 있던 김주철이 가볍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그럴수록 김미옥 작가를 놓친 자기 무능을 더 티 내는 꼴이니까요.”

“그 말도 맞네. 이야, 주철이한테 이렇게 날카로운 면이?”

김성운의 칭찬에 얼굴이 벌게져 운전하는 김주철이었다.

“와, 사람 엄청 많네요.”

행사 장소에 도착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아직 행사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 모습을 현태 형이 얼른 카메라에 담는다.

“정말 국내외 할 것 없이 반응이 장난이 아니구나. 악역.”

“얼른 가보자. 부스 어떻게 꾸려놨을지 궁금하네.”

드르륵—.

진행요원이 안내하는 곳에서 밴의 문을 열어젖혔다.

일부러 대기줄 옆에 카펫을 깔아놔 차에서 내리자마자 플래시가 터지고, 환호가 밀려온다.

이렇듯 여기선 사람들의 환대를 받고, 저기선 한이연 감독과 편집자들의 다크서클이 먼저 마중 나오길 며칠.

양쪽 다 정신없는 와중에 출품 일을 코앞에 두고 일이 벌어졌다.

“그러니까···.”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고.

지금까지의 고민이 무색해지는 일.

“우리가 칸에 초청을 받았다고요?”

#

“······물론 예상했던 대로 비공식 세션에 배정을 받았어.”

예상 밖의 일이 연달아 두 번 일어나지는 않았다.

박 대표의 말에 한이연 감독이 담담하게 답했다.

“그건 출품하려고 했을 때도 예상했던 거잖아요. 심지어 확률도 절반 이하.”

“그렇지.”

예술영화라기엔 다소 상업적이고.

거장이라기엔 너무 신인이며.

최근 유명세가 불고 있다곤 하지만 칸의 심장인 뤼미에르나 드뷔시 극장에서 상영할 정도는 아닌 작품.

세계무대로 나갔을 때 ‘48시간의 위로’가 갖게 될 현주소였다.

오히려 그렇기에 한이연 감독의 작품이 초청을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일이긴 했다.

“사람 욕심이란 게 참 그렇네. 비경쟁까지만이라도 갔으면 어땠을까······.”

언제 출품에 의의를 두자고 했냐는 듯 아쉬워하는 박 대표에게 직원들이 현실을 일깨워주었다.

“비경쟁 부문에 들어간 감독 이름들 말씀드릴까요? 존 코비치, 마엘 드멍, 사무엘 스미스······.”

“알았어, 알았어. 그냥 욕심 좀 부려봤다 왜.”

영화인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명감독들의 이름이 줄줄이 이어지자 박 대표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이제······ 기사 낼까요?”

출품하기로 결정되었던 마당에 초청을 거절할 이유 따윈 없었다.

’48시간의 위로’의 칸 영화제 초청 소식이 인터넷을 타고 전해졌다.

국내 반응은 예상대로 뜨거웠다. 그리고 뜨거워 보글보글 끓다 보면 연기도 나고 물이 넘치기도 하는 법이었다.

잡음이 필연적으로 따라붙는다는 거다.

—‘48시간의 위로’ 깐느 가즈자!

—설마 이러다 황금종려상 받는 거 아냐?

—정보) 황금종려상은 경쟁 부문에서만 받을 수 있다.

—비공식 섹션은 사실상 1군, 2군도 아닌 3군의 위치지. 호들갑 떨 필요 없음. 이미 경쟁이나 비경쟁 부문에 올랐던 한국 작품들도 얼마나 많은데, 겨우 3군에 초정받은 작품을 빨아줌?

—그래도 한이연 감독이 초청받았다는 건 의미가 크다고 봄. 지금까지 한국에선 경력이 어느 정도 이상 되는 대가들만 다녀온 칸이잖음.

—글쎄. 이거야말로 한이연 감독이 인정받았다기보단 백승결, 한서호 빨 아님?

—하긴, 악역 기세 보니까 진짜 장난 아니긴 하더라. 전 세계적으로 대박 난 드라마의 주인공인데, 배우만 보고 부를 만도 하지. 확실히 우리나라가 드라마는 잘 만드는 듯. 아직 영화는 멀었지만.

—아니, 좀 응원해주면 안 되나? 꼭 여기서 이렇게 까내리고 그래야 만족함?

······늘상 있는 잡음이었다.

이러면 저렇다. 저러면 이렇다.

흔히 국뽕을 과하게 들이켜는 부류와 그것을 필요 이상으로 혐오하는 부류가 충돌하고, 이를 바라보며 나머지들이 답답해하며 참전하는.

그 사이에서 결국 등이 터져나가는 건 한이연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정신을 차려야했다. 등만 터져야 하지 멘탈까지 터질 순 없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온 힘을 다해서 영화를 완성해야 했으니까.

#

“머리에서 김 나는 것 같지 않아?”

편집실 안쪽을 훔쳐보며 내가 말했다.

옆에서 빵과 음료 등을 잔뜩 들고 서 있던 김주철이 보는 자기가 덥다며 혀를 내두른다.

고작 문에 달린 작은 창으로도 느껴질 정도로 자신을 갈아 넣고 있는 한이연 감독과 편집자들이었다.

“여기 냉장고 있으니까, 두고 가자.”

“안 들어가 보시고요?”

“저렇게 집중하고 있는데 도와주지 못할망정 집중을 깰 수야 없잖아.”

어깨를 으쓱거리며 돌아선다.

“그래도 이제 미국 가시잖아요.”

멀티온에서 준비한 현지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원래는 행사 몇 번이 기본이었는데, ‘악역’이 상상 이상으로 잘 되면서 수많은 일정이 덧붙여져 지금은 줄줄이 소시지가 되었지.

그래서 미국에서 충분히 일정을 소화하고서 곧장 칸으로 갈 예정이었다.

“전화로 연락하면 되지. 너도 잘하고 있고.”

“넵.”

한국에서 로드 일을 하다가 칸에서 만나게 될 김주철을 보며 씩 웃었다.

“나는 나 나름대로 미국에서 도울 방법을 찾아봐야겠다.”

#

1년 중 축제가 열리기에 가장 적합한 5월.

굿픽처스의 주요 인사들과 한이연 감독의 팀이 공항으로 모여들었다.

주인공인 백승결이 없었음에도 그들을 배웅하기 위해 꽤 많은 기자들이 공항에 나와 있었다.

“천광윤 배우님! 이미 수차례 칸을 다녀오신 입장에서 이번 초청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이연 감독님께 여쭙겠습니다. 비공식 섹션임에도 신인 감독으로서는 꽤나 이례적인 상황인데, 기분이 어떠신가요?”

배웅이라기엔 질문 세례가 대부분이었지만, 어쨌든 마지막 게이트를 넘어갈 땐 좋은 반응 기대하겠다는 응원이 뒤를 이었다.

모두의 기분이 붕 뜨기에 충분한 배웅이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 인천 공항에서의 반응.

칸에 도착하자마자 붕 뜬 기분이 이륙··· 아니, 비상 착륙했다.

“우릴 관광객으로 아는 것 같죠.”

“애초에 그런 생각 자체를 안 하는 것 같은데.”

“그럼 저 기자들은 다 뭘 기다리는······.”

비슷한 시간대, 다른 비행기.

그리고 같은 게이트로

경쟁 부문과 비경쟁 부문. 그러니까 공식 섹션의 작품들 중 한 팀이 들어왔다.

멀뚱멀뚱 서 있던 기자들이 순식간에 열띤 취재를 시작한다.

갑자기 쫙 집중되는 스포트라이트.

엄청난 환대를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퍽 김빠지는 광경이었다.

“기죽을 거 없지. 우린 아예 다른 리그인데.”

“그쵸. 맞아요.”

애써 서로를 위로하는 팀원들.

“웨스 스콧은 전세기 타고 오는 중이라네요. 찰리 톰린슨도 내일 도착한다고 하고. 공항 아주 박터지겠네.”

할리우드 스타들이 언제 들어오나를 확인하는 팀원에 한이연 감독이 중얼거렸다.

“승결이도 내일 들어오는데······.”

“타이밍이 참··· 하하.”

어색하게 웃는 팀원들 사이에서 굿픽처스 박 대표가 말했다.

“아, 그나저나 승결이 아주 미국에서 열일 중이던데.”

그의 말처럼 백승결이 미국에서 보여준 행보가 대단했다. 전역을 돌아다니며 ‘악역’을 홍보했고, 틈틈이 크고 작은 방송에 출연해 은근히 ‘48시간의 위로’ 얘기도 덧붙였다.

게다가 모 프로그램에선 피아노까지 쳤지.

그 덕인지 모르지만, 적어도 미국에서 ‘악역’은 올해 가장 성공한 OTT플랫폼 드라마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다.

“방송 보는데, 승결이가 이런 성격이었나 싶었다니까요.”

“확실히··· 아니지. ‘악역’도 ‘악역’이지만 우리 영화를 어떻게든 좀 더 알리려는 게 보이더라.”

이에 함께 프랑스 땅을 밟은 김주철이 툭 던지듯 말했다.

“······방법을 찾으신 거구나.”

“응?”

옆에 있던 스크립터 손기훈이 바라보자, 김주철이 덧붙였다.

“다들 한국에서 열심히 일하고 계시니 형도 미국에서 도울 방법을 찾겠다고 했었거든요.”

그렇게 백승결은 김주철의 말마따나 방법을 찾은 듯했다.

보다 더 적극적인 활동과 다소 뻔뻔하더라도 철판 깔고 차기작 이야길 꺼내며 필요할 땐 피아노도 치는 것으로.

백승결의 성격과 그게 얼마나 맞지 않은 지 잘 알고 있는 그들에겐 이게 나름의 각성제로 작용했다.

“승결이가 미국에서 으쌰으쌰하고 있는데, 우리가 여기서 주눅 들어 있을 수만은 없지.”

한이연 감독이 눈을 부릅뜨며 가방을 고쳐 맸다.

“우리 내일 승결이 오면 다 같이 마중 나오죠.”

그녀의 이어지는 말에 팀원들이 동조한다.

“누구보다 환호해주는 거예요.”

“웨스 스콧? 찰리 톰린슨? 어림도 없지.”

“공항 경찰 부릅니다. 제가.”

비공식 섹션 초청작, ‘48시간의 위로’ 팀이 낄낄 거리며 내일을 기약했다.

칸 영화제는 이미, 공항에서부터 시작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