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칸 (2)
“저~기지? 우리 영화가 상영될 극장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고풍스러운 건물들 사이를 노려보던 한이연 감독의 물음에 스크립터 손기훈이 주섬주섬 배낭에서 지도를 꺼냈다.
여러 겹 접혀 있는 지도를 펼치자 극장들의 위치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맞네요. 저~기 섬처럼 떨어진 극장.”
뤼미에르, 드뷔시 극장 등이 있는 메인스트리트.
크로아제트에선 한참이나 떨어진 곳.
“머네요.”
“멀다.”
“그러게···.”
어렴풋이 보이는 극장 뚜껑을 스치듯 바라보며 일행들이 아쉬운 목소릴 냈다.
그리고, 찰칵.
김주철이 사진을 찍다가 몰려든 시선에 움찔거렸다.
“죄, 죄송합니다. 팀장님이 많이 찍어두라고 하셔서···.”
커다란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은 반응에 일행들의 심각했던 표정이 잠시나마 펴졌다.
그렇게 ‘48시간의 위로’ 제작진을 태운 버스가 거리를 가로지른다.
수많은 관광객들. 하지만 평범한 관광객이라기엔 그렇지 못한 인상의 사람들이 꽤 많이 거리에 나와 있었다.
전 세계 날고 기는 제작자들이 모이다 보니 그들의 눈에 한 번이라도 들기 위해 차려입고 온 이들이 잔뜩이었다.
“분위기 장난 아니네요. 이게 영화제야 패션위크야.”
우와아아아앙—!
“···모터쇼 같기도 하고요.”
모두의 시선이 움직였다.
부가티 한 대가 굉음을 내며 사라진다.
옴매 기죽어, 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광경.
저들조차도 이 기간만큼은 그저 조연··· 아니, 단역 정도에 불과했다.
주인공은 저기 뤼미에르 대극장에서 레드카펫을 밟을 감독과 배우들.
’48시간의 위로’가 상영될 곳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크로아제트를 훑으며 공항에 다다랐다.
이곳은 뤼미에르나 드뷔시 극장 앞보다 더하다.
이미 아침부터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관광객들도 영화 보긴 글렀으니 배우 얼굴이라도 보자는 일념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한이연 감독 일행들.
이윽고, 게이트 너머에서 사람들이 쏟아져나왔다.
대부분은 관광객이었다. 그중 SNS에서 핫한 인플루언서들이나 모델들이 꽤 있었지만, 역시나 사람들의 관심 밖이었다.
그렇게 단역들이 모두 쏟아져나오고,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다시 한번 게이트가 열렸다.
비로소 웅성거림이 커지며 플래시가 미친듯이 깜빡거리기 시작한다.
비명소리가 솟아올랐고, 환호가 거세게 범람한다.
“찰리 톰린슨이다···.”
일행들조차도 신기한 눈으로 태풍의 눈이 된 지점을 바라보았다.
무려 경쟁 부문. 거기서도 황금종려상에 가장 가까운 영화들 중 하나.
‘에브리띵 헤픈’의 주인공인 찰리 톰린슨이 무심한 눈으로 자신에게 환호하는 객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일행들의 시야에 익숙한 얼굴이 걸려들었다.
백승결과 김성운, 그리고 임현태까지.
그들이 옆으로 삐져나와 이쪽을 보곤 다가온다.
스크립터 손기훈이 양손을 흔들며 말했다.
“우리도 환호 해줘야죠?”
“물론이지. 하나, 둘, 셋···.”
“백승···!”
힘껏 소리치려던 일행들.
그때 서로를 마주 보던 반가운 표정을 인파가 갈라버렸다.
찰리 톰린슨에 난리던 사람들이 왜 갑자기 이쪽으로?
모두가 벙벙한 표정으로 사람들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다른 배우가 도착한 걸까?
그치. 도착을 하긴 했지. 다른 배우가.
아니··· 우리 배우가.
“지, 지금 저 사람들 다 승결이한테······.”
꽤 많은 수의 기자들이 그쪽으로 몰려들었다.
관광객들 중 일부도 함께 움직였다.
순식간에 인파가 양쪽으로 갈렸다.
물론 찰리 톰린슨 쪽에 몰린 인원이 훨씬 많았지만, 한이연 감독 일행에게 지금 상황만으로도 퍽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죠?”
“‘악역’ 때문인가?”
“그런가 봐요. 미국에서 홍보 활동하던 일주일 동안 전 세계 30여 개 나라에서 1등 했다더니······.”
어제 자신들이 입국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광경이었다.
새삼 깨닫게 된다. 적어도 OTT 플랫폼 쪽에서 지금 백승결의 위상이, 찰리 톰린슨이라는 할리우드 배우 앞에서도 묻히지 않을 정도라는 게.
한이연 감독이 이 정신없는 상황을 바라보다가 문득 떠올렸다.
“거장···.”
바르샤바 촬영지에서 천광윤 배우와 나눴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한서호의 이름만으로 불가능한 장소섭외가 가능해졌듯.
그런 거장이 영화계, 배우계에도 탄생해야 한다고 말했었지.
어쩌면 그 시작점에 자신이 서 있는 건 아닐까.
자연스레 한이연 감독이 옆을 돌아보았다.
천광윤 배우가 깊은 눈으로 백승결을 둘러싼 인파를 지켜보고 있었다.
할리우드에 도전했지만, 참패를 맛봤던 배우.
그럼에도 꾸준히 그곳의 문을 두드렸지만, 끝끝내 제대로 활약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던 국민 배우.
그가 한이연 감독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린다.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이 작게 웃었다.
“왜 그렇게 보는가.”
“궁금해서요. 선배님은 어떻게 보고 계실지.”
“저기에 서 있는 게 내가 아니라 아쉬워할 것 같았나?”
“아뇨. 기뻐하실 것 같았어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확인한 두 사람이 입꼬릴 더욱 끌어올린다.
그리고 다시 백승결을 덮친 환대의 파도를 바라보았다.
“맞아. 내가 그토록 보고팠던 광경이네.”
천광윤이 가슴 벅찬 표정으로 말했다.
수없이 해외 진출의 문을 두드렸던 사람으로서.
이 순간을, 몹시 기다렸다는 듯이.
“그 주인공이 꼭 나일 필요는 없지.”
#
“솔직히······.”
스크립터 손기훈이 아주 진지한 목소리로 화두를 던졌다.
“누가 받을 거 같아요? 황금종려상?”
버스 안에 탄 모든 이들이 팔짱을 끼고 고민을 시작한다.
그야말로 별들의 전쟁이었다.
칸 영화제는 밥 먹듯이 드나드는 거장들의 경쟁.
경쟁 부문 스물두 작품 중, 가장 유력하다 손꼽히는 다섯 작품.
그중에 최고상의 주인이 누가 될지는 쉽게 선택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아무래도 ‘굶주린 사자’가 받지 않을까요?”
“난 ‘에브리띵 헤픈’에 한 표. 아까 공항에서 보니까 기세가 장난 아니더라.”
“저는 ‘버킹엄’이요.”
“‘버킹엄’은 너무 블록버스터 감성이던데. 그러면 최고상 타기 어려워.”
“아, 그러고 보니 액션 쪽은 상 받기가······.”
해당 영화들을 아직 보지 못했으니 제대로된 평가는 어려웠다.
다만 감독의 전작들을 훑으면서 어느 쪽이 이곳 칸 영화제의 취향인지는 유추해볼 수 있었다.
감독에게도 쉽게 숨길 수 없는 연출의 색감이 있으니까.
“빌 맥쉐인 감독은 전작에서 사회적인 문제 다루고 그러지 않았어요?”
“그거 공포영화 아니었어?”
“그렇긴 한데, 어린 아이들 대상으로한 인신매매 이쪽에 대해 꼬집는 영화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그 왜 주인공이 마을에서 벗어나기 전에······.”
작품에 대해 이야길 나누던 사람들이 무언가 막힐 때면 나를 본다.
“맞아요. 그랬어요.”
그러면 나는 정답을 얘기했다.
적어도 내가 봤던 영화라면,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다 기억하고 있으니까.
대사는 물론이고, 연출부터 구도. 심지어 조명과 미장센의 배치까지.
이렇게 몇 번 오류를 잡거나 기억이 맞는지 확인해주자, 옆에서 한이연 감독이 피식 웃었다.
그 소리에 돌아보자 그녀가 어깨를 으쓱거린다.
“정말 멋진 능력인 것 같아.”
“네?”
“기억력 말이야. 사실 기억력이란 것 자체에 수능 때 이후로 크게 신경 써본 적이 없었는데. 널 보니까 느낌이 완전 다르네.”
어느새 토론을 마치고 그녀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일행들.
한이연 감독이 말을 이었다.
“기억을 제대로, 오래 한다는 건. 연기를 할 때 빼내서 볼 수 있는 책의 양이 많다는 것 같달까. 그러니 남들의 기억력이 고작 책 하나, 책장 한 줄 정도라면, 승결이는······도서관인 거지.”
도서관······.
맞는 표현인 것 같았다.
실제로 어떤 기억을 끄집어낼 때 책장에서 책을 꺼내어 펼치는 느낌이니까.
연기에 도움이 되는 것도 부정할 수 없었고.
“고도로 발달된 기억력은 초능력과 다를 게 없다.”
이어지는 손기훈의 농담에 헛웃음을 머금었다.
그때였다. 긴장된다며 보드카를 원샷한 박 대표가 입을 연 것은.
“도착했어.”
버스 안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우, 우리 다른 영화 얘기나 할까. 너무 긴장이 돼서······.’
박 대표의 제안으로 시작한 이야기가 그의 말을 끝으로 효력을 다했다.
버스 안에 공기가 달라진다.
모두가 창밖을 보았다.
사람이 아예 없진 않았지만, 그냥 프랑스 관광지인가 보다 해도 될 정도로 영화제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풍경.
버스가 서서히 멈춰선다.
‘아무도 안 왔으면 어쩌지?’
누군가의 걱정도···.
‘반응이 별로면 어떡하지?’
누군가의 불안함도···.
이제 낱낱이 발가벗겨질 차례였다.
한이연 감독이 천천히 심호흡을 한다.
눈을 감은 천광윤이 보였다. 그조차도 긴장하고 있었다.
당연히 나도 마찬가지.
심장이 차오르다 못해 귀까지 올라왔는지 심장박동이 바로 귀에서 울리는 듯했다.
내가 말했다.
“감사해요.”
짧게 내뱉자 버스 안 모든 이들의 시선이 몰려들었다.
조금 오글거리지만. 그런 거 진짜 못 하는 성격이지만.
마치 건배사를 하듯이 덧붙여 말했다.
“최고의 영화를 만들어주셔서.”
그리고 버스에서 내리기 위해 몸을 일으키며 씩 웃었다.
“사실, 제가 듣고 싶은 말이었어요.”
살짝 감동에 젖어 들었던 한이연 감독이 웃음을 터트린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
그들을 보며 별 거 아닌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러니 들으러 가보죠. 지금.”
#
“팬미팅 언제 해요?”
칸에서 이 질문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만난 한국인 팬.
정작 그걸 기획하고 있는 김성운은 배우가 아니라서 저 멀리에 있었다.
“곧··· 하지 않을까요?”
“얼른 했으면 좋겠어요!”
눈을 반짝이는 팬에게 나도 그렇다 말하고서 다시 걸음을 옮겼다.
가끔 터지는 플래시.
그리고 한국어로 터져 나오는 환호성.
주변 풍경이 이국적인··· 한국 시사회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극장으로 올라가는 길.
역시 사람이 적다.
아직 상영 시간이 좀 남긴 했지만, 이미 저 멀리 뤼미에르 대극장에선 하늘을 향해 색색의 조명이 쏘아지고 아주 난리가 났다.
“백승결 화이팅~!”
그때 들려오는 팬들의 외침.
낯익은 얼굴들에 아는 척을 하고서 다시 걸음을 옮긴다.
옆에서 함께 걷던 천광윤이 말했다.
“역시 대단하네.”
“네?”
“기억력 말이야. 아까 버스 안에서도 그렇고, 여전히 놀라워.”
그의 말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해별이네 때도 그렇게 놀라웠지.”
“······.”
“매일이 놀라움의 연속이었어. 촬영장에 나갈 때마다 기대가 됐지. 어떻게 이 어린 소년이 이토록 대단한 연기를 펼칠 수 있었을까. 마치 내가 어떤 대단한 이야기의 앞부분을 보고 있는 것 같았지.”
“······.”
우리는 계단을 뚜벅뚜벅 걸었다.
이따금 들려오는 환호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궁금했어. 그토록 대단하던 아이가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연기하는 게. 이상했지. 하지만 모든 이들의 질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아이에게 대뜸 연락해 물어볼 수는 없었어.”
“······.”
“무례한 질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십 수년 동안 궁금해했으니 이젠 해야겠네.
“어떤···.”
“고작 10대의 아이가 할 수 있는 연기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어. 그토록 찬란한 재능은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 아이가 지금 다시 복귀하여 연기하는 것을 보며 다시 한번 생각했지. 정말 맞을지도 모르겠다고.”
마지막 계단을 올랐다.
이제 레드카펫이었다.
천광윤이 다시 말문을 연다.
“혹시 그 아이가.”
그리고 다음 순간, 이어지는 그의 말에 내가 덜컥 걸음을 멈췄다.
“······일부러 그랬던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