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칸 (4)
극장에 앉아 내가 출연한 영화를 지켜본다는 건 참 묘한 느낌이다.
더군다나 해외에서, 그것도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영화제에 영화를 선보이는 자리에서.
이렇게 완성본을 지켜보고 있으니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이 울컥거렸다.
나로서도 처음 보는, 완성된 ‘48시간의 위로’.
가편집본과 비교해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었다.
솔직히 이전의 가편집본도 흠잡을 데 없다 생각했는데, 이렇게 완성본을 보니 너무 안일한 생각이었나 싶다.
‘이 정도로 더 나아질 수도 있구나.’
편집은 좀 더 정교해졌고, 정적인 분위기를 타파하기 위해서인지 컷은 더욱 많아졌다.
그게 뚝뚝 끊기지 않고 물 흐르듯 부드럽다.
원래 그렇게 계획해서 찍은 것처럼.
‘대단하다. 영화 하나를 더 찍은 셈이었겠네.’
한이연 감독과 편집자들이 만날 때마다 실시간으로 늙어갔던 이유가 고스란히 보여진다.
정말 새로운 영화가 눈앞에서 상영 중이었다.
내심 감회가 새로워진다.
처음 대본을 확인했을 때가 떠올라서였다.
이 글은 분명 좋은 영화가 될 것 같다 느꼈고, 그만큼 끌렸었지.
그 결과물이 이렇듯 완벽하게 완성되어 돌아오는 건······ 정말이지 짜릿했다.
오랫동안 들고 있던 패가 조커였다는 걸 확인하는 것 같달까.
‘하지만 조커가 있다고 게임에서 반드시 이기는 건 아니잖아.’
단순히 좋은 작품이라는 것만으로 흥행을 보장하진 못한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까지 끌렸던 작품들이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다.
흥행의 크고 작음만 달랐을 뿐, 모두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결과를 냈었지.
그런 점에서 내가 가진 감은 좋은 영화를 구분하는 동시에, 흥행에 성공하는 영화를 골라내는 것 같았다.
갑자기 뭐 초능력 같은 얘길 하려는 건 아니고.
내가 그런 쪽으로 예민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대중성과 예술성 그 사이에서 줄을 잘 탄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고.
그렇게 나에 대해 돌아보니, 자연스레 더욱 궁금해지는 것이 있었다.
그동안 국내에서만 증명해왔던 내 감이, 과연 여기서도.
해외에서도 통할까?
화면에 가득 담긴 내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글쎄······.
‘곧 알게 되겠지.’
#
“······.”
한편, 백승결의 등장에 영국에서 온 기자, 이안은 소리 없이 감탄했다.
우선 가장 먼저 ‘악역’의 오태구라는 주인공과는 전혀 다른 느낌에 놀랐다.
불과 얼마 전에 드라마 ‘악역’을 전부 본 터라 그 차이가 더욱 명확하게 느껴진다.
날티나는 거친 느낌의 마피아가, 어느새 엘리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고요한 남자로 변해있었다.
‘꽤 좋은 관전 포인트겠는걸.’
마침 본 날짜가 얼마 지나지 않아 ‘악역’의 주인공인 오태구가 꽤나 생생하게 기억났다.
같은 배우가 과연 얼마나 다른 연기를 펼쳤을까.
그 점을 파고들면 괜찮은 기삿거리가 나오리라.
이안이 흥미로운 눈으로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했다.
화면 속 백승결. 그러니까, 주인공의 시선이 묘비에 닿았다.
[모든 걸 연주하라.]
그곳에 새겨진 글귀를 확인한 주인공이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을 정리한다.
그럼에도 자꾸 바람이 불어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맘처럼 되지 않는다.
연거푸 머릴 쓸어넘기던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이젠 모르겠어요.⌟
그리고 울리는 퍼석퍼석한 목소리.
⌜······다녀올게요.⌟
주인공이 돌아서며 장면이 바뀌었다.
푸른 하늘이 보이고, 헤드셋을 낀 주인공이 비행기에서 눈을 뜬다.
쇼팽으로 가득한 도시, 바르샤바의 전경을 카메라가 쭉 훑는다.
그리고 이 축제 분위기 속 얇은 긴장감이 흐르는 좁은 거리를 주인공이 걷는다.
뒤이어 엄청난 양의 스케줄을 소화해내는 주인공의 모습이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이안은 주인공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수많은 이들이 그의 이름을 호명해서였다.
이인호.
그가 쉴 새 없이 시달렸다.
장노출에 의해 번지는 사람들.
시간의 흐름이 잔상을 통해 연출된다.
동시에 화면도 함께 불안하게 휘청휘청 흔들리기 시작했다.
째깍. 째깍. 째깍———.
다시 들려오는 초침 소리.
괜스레 사람 마음을 조급하게 만드는 그 소리가 점점 커지며 중간 중간 플래시 터지는 소리와 어우러져 리듬을 만들어낸다.
점차 초침 소리가 빨라지며 화면의 전환도 덩달아 빨라진다.
⌜이번에 콩쿠르 본선에 진출하신 걸 축하드립니다.⌟
⌜이번 라운드에선 어떤 각오로······.⌟
⌜결승에 이름을 올리신 것 축하드립니다! 정말 최고의 기량으로······.⌟
⌜스승이신 염승원 교수님께서도 하늘에서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하실 것······.⌟
⌜응원하고 계신 국민들께 한마디···.⌟
기자들의 목소리가 쉴 새 없이 이어진다.
이인호가 비틀거리며 그들의 질문에 답하고.
그리고 마침내.
쿵—.
호텔 방문을 닫고서 이인호가 그대로 허물어졌다.
비로소 적막이 찾아왔다.
쥐 죽은 듯 고요한 호텔 방.
쭈그려 앉아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있던 이인호가 비틀비틀 침대로 향한다.
협탁에 올려진 반쯤 남은 물컵을 들고서, 우울증 약을 복용한 그가 그대로 몸을 내던졌다.
털썩. 대자로 널브러진 그가 천장을 바라본다.
고급스러운 무늬의 천장.
그곳에 새겨진 패턴을 쫓던 눈이 피곤했는지 그가 질끈 눈을 감았다.
⌜파이널 라운드까지 오십···칠 시간⌟
그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한숨이 뒤를 이었다.
······이안은 어느새 함께 숨을 내뱉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감탄을 거듭한다.
슬쩍 옆을 돌아보았다.
극장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이 숨죽여 이인호의 시선을 따라오고 있었다.
음악의 거장들이 지금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너무 궁금했지만, 그러기엔 그들은 너무 멀었다.
대신 함께 영화를 관람하고 있던 최성령 편집장을 보았다.
그녀는 화면을 향해 쏟아질 것처럼 상체가 앞으로 나와 있었다.
이안의 시선을 느낀 그녀가 돌아본다.
뒤이어 말없이 엄지를 치켜세우는 그녀.
클래식 잡지사의 편집장에게도 이 영화가 꽤나 합격점에 있나 보다.
넌 어떠냐는 듯 턱짓하는 최성령 편집장에 이안이 씩 웃었다.
적어도 지금까진 모든 요소가 최고였다.
연출은 말할 것도 없다.
들어오기 전 감독이 누구인지 대충 훑어 봤었지만, 좀 더 자세히 확인하지 않은 게 아쉬울 정도로 대단한 감독이었다.
음악? 미쳤다.
중간 중간 흘러나오는 음악은 연출과 함께 어우러져 배경음과 효과음의 사이를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게다가 적재적소에 들어가는 피아노 소리는 또 하나의 대사를 듣는 듯한 느낌을 자아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목할만한 점은 주인공의 연기였다.
백승결의 연기는 초 단위로 경악스러울 정도였다.
경박한 깡패와 세상에 홀로 남겨진 남자의 큰 간극을 자유롭게 오가며 캐릭터를 완성한 ‘악역’ 때와는 달리.
‘48시간의 위로’에서 백승결은, 시종일관 불안정하다.
유일하게 의지할 곳인 스승이 세상을 떠나고, 위태롭게 앞을 향해 나아가는 청년의 연기를 너무나 완벽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모두의 기대에 짓눌려 휘청이고 있는 주인공을 완벽히 표현해냈다.
작은 표정이, 몸짓이······.
분장보다 더 큰 차이점을 만들어 이전 작품과 전혀 다른 사람을 표현해내고 있다.
이로써 관객들에게 자연스레 이인호의 서사와 감정이 스며들고 있었다.
‘대체, 캐릭터를 얼마나 연구한 거야.’
연출, 음악, 연기.
이 모든 게 톱니바퀴처럼 서로에게 맞물려 영화가 굴러가고 있었다.
극장 안에 숨죽이고 있는 모두를 태우고서.
그렇게 이안이 디테일한 요소에까지 감탄하는 사이.
······이인호의 귓가에 째깍 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무거운 음악이 깔리고 그 위로 째깍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진다.
또다시 플래시 소리가 들려오며 이인호가 얼굴을 양손으로 감쌌다.
⌜숨 막혀.⌟
묘비 앞에서보다 훨씬 거칠어진 목소리와 함께.
시야가 가려지듯 화면이 검게 물들었다.
······이안이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정말 함께 숨이 턱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완벽히 이인호의 호텔 방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은 연기와 연출, 미장센과 음악이 모두 어우러져 만들어낸 최상의 결과물이었다.
아직 놀라기엔 고작 초반부일 뿐이긴 하다.
이안은 그렇게 신중하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잔뜩 흥분하고 있었다.
그래, 아직 초반부.
하지만 지금까지 보여준 퀄리티대로.
이대로만 끝까지 이어진다면······.
그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마른 침을 삼켰다.
‘일단, 마저 보자.’
불확실한 미래를 상상하기보단.
지금은 이 영화의 내용을 눈에 담는 게 먼저였다.
#
105분의 러닝타임이 끝나고.
에스파스 미라마르 극장에서 사람들이 밀려나왔다.
기대를 안고 들어간 팬들과 한국인 기자들은 물론이고.
큰 기대 없이 시간을 때울 겸 자리를 채웠던 외국인들마저도 아직 극장 안에 있는 것처럼 감탄을 거듭하고 있었다.
7분간 이어진 기립박수조차도 그들의 흥분을 모두 토해내기엔 무리였다.
“······최고였어.”
한 백인 여자가 불어로 중얼거리며 그 행렬에 동참했다.
그러자 그녀의 친구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생색을 냈다.
“어때, 보길 잘했지? 재밌을 거라니까.”
“아니, 내용은 솔직히 별것 없잖아.”
“그렇지.”
“주인공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마침내 본인의 음악을 찾는 이야기. 이게 전부고.”
“맞아.”
“심지어 분위기도 정적여. 근데 왜 이렇게 스펙타클하냐고.”
“내가 그랬잖아. 백승결 영화 중에 재미없었던 게 없다고.”
“백승결···.”
기억하려는 듯 곱씹은 백인 여자가 웃었다.
“연기 진짜 잘하더라.”
“그래서 섹시하지.”
“아니, 연주는 또 왜 잘해?”
“그래서 섹시하고.”
“······.”
앵무새처럼 같은 얘기로 결론 짓는 친구를 보며 백인 여자가 고갤 흔들었다.
“야, 넌 모든 칭찬이 섹시하다로······ 어?”
그러다 불쑥 시선 끄트머리에 들어왔던 남자에 고개가 돌아갔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친구가 낄낄 거렸다.
“지는.”
“아니, 그게 아니라.”
“아니긴. 그래, 눈 돌아갈 정도로 섹시하더라.”
“아 쫌. 그게 아니라. 분명, 한서······.”
방금 옆을 스치듯 지나간 사람의 이름을 내뱉으려는데, 비웃던 친구가 극장 앞에 나타난 일단의 무리를 보며 꽥 비명을 질렀다.
“대박, 백승결! 방금 영화에서 본 다른 배우들도 있네!?”
순식간에 극장 앞 분위기가 바뀌었다.
감탄을 하던 이들이 너도나도 내달리기 시작했다.
한국인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외국인들까지 배우들을 보기 위해 성화였다.
“나도 사인 받을래!”
옆에 있던 친구가 아래쪽으로 와다다 뛰어 내려갔다.
백인 여자는 고갤 돌려 아까 본 남자를 찾았다.
하지만 그새 시야에서 사라진 남자.
“아, 분명 맞는 것 같은데······.”
갸웃거리던 그녀도 이내 친구를 따라 발걸음을 돌렸다.
“야, 빨리 와! 사진도 찍자!”
“알겠으니까 천천히 좀 가!”
극장을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이름은 커녕 얼굴도 모르던 배우들.
하지만 영화가 끝난 지금.
뤼미에르 대극장의 레드카펫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극장 앞으로 모여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