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칸 (5)
이안이 극장을 나섰다.
함께 영화를 관람했던 최성령 편집장은 한국에 ‘아실리’ 같은 제대로 된 클래식 영화가 나타났다며 잔뜩 신이나 돌아갔다.
아까 보았던 거물 지휘자들과의 약속이 있다며.
역시 클래식 잡지사 편집장이랄까···.
함께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들에게 후기를 받아 알려준다는 그녀의 말에 위안을 삼았다.
그 덕분에 극장 앞을 서성이다가 배우들의 사진도 몇 장 찍을 수 있었다.
물론 그마저도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쉽진 않았지만, 그래도 뤼미에르 대극장에 비하면 이정도야 한가롭다고 할 수 있지.
배우들이 극장 앞을 떠나고, 이안은 근처 카페로 향했다.
‘확실히 크로아제트 거리에서 거리가 떨어져 있다 보니 카페도 상대적으로 한가하네.’
콘센트를 찾는 것도 그곳에서처럼 치열하지 않았다.
아침부터 편집장에게 시달리느라 배터리를 모두 소진한 노트북에 불이 들어온다.
그 사이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최성령 편집장의 문자였다.
[방금 지휘자님들 만나서 후기 듣는데, 반응이 장난 아니야.]
이안이 옆에 나온 커피를 호로록 들이켜며 얼른 답장을 보냈다.
[그래? 어떤데?]
[정리하자면······.]
사실 영화를 보는 내내 궁금했다.
이 엄청난 영화에 음악 거장들은 어떤 감상을 내놓을지 말이다.
그들은 필연적으로 음악적인 부분을 토대로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OST만으로 수 시간의 비행이 아깝지가 않은 영화. 하지만 그보다 더 값진 것을 발견할 수도 있는 작품······이라고 하시네.]
그 평가가 도착하고, 이안이 얼른 기사 쓸 준비를 마쳤다.
음악인들조차도 인정했다는 사실이···.
그냥 음악인도 아닌 거장들이 극찬했다는 사실이 굉장한 기삿거리가 될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자세히 얘기해줄래?]
최성령 편집장을 괴롭히며 기사를 써 내려갔다.
거장들의 극찬부터 자신의 생각까지.
쓸 거리가 넘쳐났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쓸 내용이 많으면 오히려 빠르게 기사를 완성하곤 했다.
글자 수조차 평소보다 훨씬 많이 눌러 담았음에도 10여 분만에 기사 두 편이 완성되어 있었다.
‘사진도 일단 이정도면 된 것 같고······.’
그렇게 기사의 마지막 마침표를 찍었을 때.
때마침 회사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조나 제임슨을 닮은 밉상 편집장이었다.
—아니, 방금 벨한테 기사를 받았어. 자넨 뤼미에르에 없었다면서?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에브리띵 헤픈’에 대한 프레스 스크리닝 기사를 왜 벨이 보내?
후배인 벨과 이미 통화를 마쳤는지, 그가 성질부터 낸다.
딱히 타격은 없었다. 놀랍지도 않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안은 평온한 표정이었다. 커피까지 한 모금 더 하고서,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엔터를 경쾌하게 누른다.
“메일 보냈어요. 확인해보세요.”
—무슨 메일? 아니, 벨이 왜 혼자 프레스 스크리닝에 들어갔냐니까? 설마 다른 기자들하고 노느라 그런 건 아니겠지? 사수가 그러면 후배가 뭘 배우겠어? 너 내가 그렇게 가르쳤어? 지금 영국에 있는 나도 칸 소식을 계속 확인하고 있는데, 현장에 간 놈이 농땡이를 피우면 어떡해? 너 에스파스 미라마르 극장 소식은 들었어? 들었을 리가 없지. 거기에 지금 음악인들이 엄청 와있다고 난리던데······난리······ 네가 갔구나?
잔소리를 쏟아내며 메일을 확인했는지 날카롭던 목소리가 확 꺾였다.
—그, 그래서 벨한테 뤼미에르 쪽을 맡긴 거였어!
언제 짜증을 냈냐는 듯 하하 웃으며 목소리를 높이는 편집장.
—역시, 이안. 내가 이러니까 신입들을 너한테 맡기는 거야. 보고 배우라고!
태세 전환이 배우 해도 될 정도로 변화무쌍하다.
은은한 통쾌함이 밀려왔지만, 그럼에도 지금까지 잔소릴 들은 억울함에 목소릴 가라앉혔다.
“편집장님.”
—으, 응?
“저 이 극장에서 저 극장 왔다 갔다 하고 하루 종일 기사까지 쓰느라 좀 피곤해서요.”
—어, 어. 그래. 피곤하겠네. 얼른 가서 쉬어.
뭉툭해진 목소리로 수고했다며 편집장이 전화를 끊었다.
“죽일까······.”
핸드폰을 보며 그런 생각을 잠깐 했지만 이내 그만뒀다.
이 양반이 죽어서도 스승이랍시고 나타나 잔소릴 할까 봐.
충분히 그럴 양반이라.
“역시 영화는 영화인 건가.”
’48시간의 위로’에서 나왔던 이상적인 사제 관계를 떠올리며 피식 웃은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페를 나와 크로아제트 거리로 돌아온 그.
이미 칸 영화제가 시작한 이후로 매일같이 그랬던 것처럼, 노천 카페엔 기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영화 후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 왔어?”
이안을 본 그들이 아까처럼 반겼다.
그리고 자리에 앉자, 그때부터 질문이 밀려들었다.
이미 이곳까지 에스파스 미라마르에서 상영한 ‘48시간의 위로’에 대한 소식이 퍼져 있었다.
하긴, 영국에 있는 편집장도 알 정도니 당연하겠지.
“아니, 대체 그런 거물들이 올 걸 어떻게 알고 간 거야?”
“지인이 알려줬어.”
“정보통이 있었구만? 우리한테도 귀뜸 좀 해주지 그랬어.”
“일단 정보가 확실하지도 않았고. 시간도 없었고. 그리고 내가 가자고 했어도 안 갔을 거 아냐.”
“그렇긴 하지.”
“‘에브리띵 헤픈’을 포기하고 갈 수 있는 건 자네밖에 없었을 거야.”
무려 경쟁작을 포기하고 비공식 섹션으로 향한 이안에 신기해하며 웃던 기자들이 본격적으로 영화에 대한 질문을 시작한다.
“그래서 영화는 어땠는데?”
“사실 OST로 주목 받은 영화잖아. 음악과 영화는 별개지.”
“어때,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였어?”
이안이 마지막 질문에 입꼬릴 끌어올리며 손바닥을 펼쳤다.
“잠깐만.”
그가 맥주 한잔을 단숨에 비웠다.
별로인 영화를 씹는 것도 좋은 술안주였지만, 뭐니 뭐니 해도 좋은 영화를 나 혼자 보고 추천할 때가 가장 최고의 술안주였다.
그리고 ‘48시간의 위로’는 그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좋은 영화였다.
“영화가 어땠냐면······.”
어쩌면 이번 칸 영화제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을 지도 모르는 그 장면들을 떠올리며, 이안이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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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들의 회동! 한서호 작곡에 전 세계 음악가들 모두 모였다>
<경쟁작보다 뜨거운 비공식 섹션의 주인공, ‘48시간의 위로’, 대체 어땠길래···>
<가슴 따뜻한 100분, 전율의 5분!>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마에스트로, 알버트 “음악을 들으러 갔다가 위로를 받고 나올 영화”>
<인생을 48시간으로 압축한다면 이 영화가 나올 것. USA 투데이, 데이먼 셰리 극찬.>
······포털 사이트엔 기사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라 하람 홍보팀 앞으로 날아오는 메일도 포화상태였다.
인터뷰를 원한다는 해외 기자들부터, 할리우드 진출을 돕겠다는 에이전시까지.
‘48시간의 위로’가 칸 영화제에서 뜻밖의 퍼포먼스를 보여주면서 가뜩이나 ‘악역’으로 들썩이던 홍보팀이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댓글 창 속 대중의 반응도 포털 사이트 메인과 메일함, 그리고 홍보팀 사무실의 분위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족과 함께 직접 칸에서 관람했습니다. 최고였습니다. 48시간은 우리 인생이었고, 이 영화는 인생을 위로하는 영화였네요. 한국에서 개봉하면 얼른 또 보고 싶습니다.
—미국 내에서 지금 ‘에브리띵 헤픈’보다 더 화제라고 함. 음악계는 완전히 난리고 ㅋㅋㅋ
—아니 그 정도라고? 또 국뽕 선전 아님?
—미국 반응 모아져있는 블로그 링크임. 가서 확인해보셈.
—어떤 영화인지 점점 더 궁금해진다. 마지막 5분이 엄청나다던데.
—클라이맥스는 당연히 쇼팽 콩쿠르 결승 장면일 텐데. 그걸 어떻게 연출했는지, 그게 너무 궁금하다.
—우리나라 언제 개봉이죠?
—6월 중순이요.
—아직 멀었네ㅜ 어떻게 기다리지···.
잠자코 댓글을 확인하던 홍보팀 직원들이 헛웃음을 머금었다.
이제는 무덤덤해질 만도 하건만.
매번 더 높은 곳에 올라 폭죽을 터트리는 백승결에 모두가 혀를 내두른다.
그때 팀장실에서 나온 홍보팀장이 넌지시 물었다.
“악플이나 물 흐리는 댓글은?”
“중간중간 있긴 해요. 금세 묻혀버리고 있지만.”
“잘 캡쳐해놔. 한 번에 달렸다가 잠잠했다가 또 한 번에 우르르 달리는 게 아주 수상하니까.”
“넵.”
“그나저나, 그런 댓글이 무색할 정도로 반응이 좋네.”
자신의 패드로 반응을 확인하는 홍보팀장에게 메일을 확인하던 직원이 말했다.
“기자들이 아주 난리에요. 자료 좀 달라고.”
“사진 좀 받아야겠네.”
“주철 씨한테 카메라라도 드릴 걸 그랬나. 핸드폰도 좀 오래되셨던데.”
직원이 선반 위에 올라가 있는 카메라 장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에 홍보팀장이 웃으며 고갤 흔들었다.
“아서라. 악필이 펜 바꾼다고 명필이 되냐. 현태 씨가 잘 찍었겠지. 영상 잘 캡쳐해서 쓰자.”
“연락해볼게요. 아, 그리고 헤드라인 몇 개 정해두려고 하는데 뭐라고 하는 게 좋을까요? 뭔가 좀 전 세계적으로 기사가 엄청 많이 올라오고 있다는 걸 강조하고 싶은데.”
직원의 물음에 여기저기서 답변이 튀어나왔다.
좋은 헤드라인을 뽑는 게 직원들 사이에서 나름의 경쟁이었다.
“기사가 파도처럼 밀려온다.”
“너무 식상하잖아요.”
“기사가 비처럼 쏟아 ···.”
“지난번에 썼어요.”
“해리포터의 벽난로처럼··· 은 어때요?”
“오, 그거 좋다. 벽난로에서 입학통지서 막 쏟아지던 장면 말하는 거지?”
그렇게 앞으로 홍보에 활용할 헤드라인을 뽑는데 열중하는 도중에 또 다른 직원이 불쑥 입맛을 다셨다.
“그나저나, 아쉽네요.”
“아쉬울 게 뭐 있어? 지금 반응도 더할 나위 없는데.”
“그러니까 아쉽죠. 이정도 반응인데 만약에 경쟁부문에 초정 받았으면······.”
꿀꺽 침을 삼킨 직원이 덧붙여 말했다.
“정말 수상 가능성도 있었을 거 아녜요.”
그 말에 모두가 고갤 주억거렸다.
“그건 그렇네···.”
“하긴, 이 정도 화제성이면 황금종려상까진 몰라도 다른 상들은 정말 가능성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아쉽긴 하네.”
그때 홍보팀장이 선반 위에 올려진 카메라를 돌아보며 툭 말했다.
“근데, 있긴 있잖아.”
“···?”
“비공식 섹션도 받을 수 있는 상.”
“······.”
그 순간, 몇몇 직원들은 아 하고 입을 벌렸고.
나머지 직원들은 내심 알고 있었다는 듯 헛웃음을 머금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48시간의 위로’도 받을 수 있는 상이 사실 딱 하나 있긴 했다.
하지만 직원들이 그 상에 대해 인지하지 못하거나 섣불리 얘길 꺼내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다.
그 딱 하나 있는 상이······.
공식 섹션인 경쟁, 비경쟁 부문과 ‘48시간의 위로’가 포함되어 있는 비공식 섹션까지.
칸 영화제에 출품한 모든 작품을 망라해 뽑는 상이었으니까.
그만큼 받을 확률이 극악인 상이었다.
폭탄을 던져놓고 으쓱거리는 홍보팀장을 보며 직원들이 하하하 마른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홍보팀장의 말이 이미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그들의 얼굴에 기대감이 가득 차오르기 시작한다.
마치 편지가 잔뜩 쌓인 해리네 벽난로처럼.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