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배우 복귀했습니다-124화 (124/167)

124화 칸 (6)

“황금 카메라상.”

박 대표의 눈이 황금처럼 반짝였다.

그의 말에 모두가 홀린 듯 시선을 모았다.

대부분이 반쯤 감겨 졸린 눈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어제 저녁, 르뮈에르 대극장과 드뷔시 극장에서 ‘굶주린 사자’부터 연달아 세 개의 작품을 보고서.

자리를 옮겨 비공식 섹션의 영화까지 섭렵한 내가 가장 멀쩡했다.

술을 안 마셨거든.

어쨌든, 박 대표가 말문을 연 단어 ‘황금 카메라상’은 모두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칸 영화제에 처음으로 출품된 모든 작품에 기회가 주어지는 상.

그러니 당연히 비공식 섹션인 ‘48시간의 위로’도 수상 가능성에 발을 걸칠 수 있다는 게 이론상 가능하긴 하지만······.

“우리가 거기 후보에 올랐어.”

그게 진짜 현실이 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벙벙한 분위기가 한동안 지속되었다.

“즉, 폐막식 때까지 칸에 체류해야 한다는 소리지.”

알콜 냄새를 풍기던 모두의 취기가 날아가고.

그제야 입을 쩍 벌리는 사람들.

나도 그들 중 한 명으로서 크게 놀라는 중이었다.

아니, 단순히 놀랐다고 퉁치기엔 그보다 더한 감정이 뒤따른다.

극장에 상영되는 우리 영화를 보면서 계속 의문을 던졌잖아.

나의 감이, 작품을 보는 선구안이······.

인종과 언어부터 문화까지 전부 다른 해외에서도 과연 먹힐지.

그 결과가 예기치도 못한 상황에 툭 눈앞에 떨어진 느낌이었다.

뒤이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젠··· 나를 믿어도 되는 걸까?’

나를 믿는 것.

정확히는······.

‘내 선택이 더는 주변을 불행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

그 목표가 이제는 정말 가까워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입꼬릴 올리며 환호하는 멤버들을 보았다.

이 사실을 미리 들었는지 크게 동요하지 않는 한이연 감독.

대신 우리 반응에 조금 울컥했는지 빙그레 웃으며 눈가를 빠르게 훔치는 게 포착되었다.

한편, 천광윤의 매니저는 퍽 난감한 표정이었다.

어쨌든, 이곳에서 며칠 더 묵는 게 불가피해졌잖나.

안 그래도 바쁜 스케줄 다 제쳐두고 영화를 찍었고 갑자기 영화제에 초청되어 여기까지 왔는데, 더 있어야 한다니.

패드를 켜놓고 이리저리 전화를 돌리며 스케줄 테트리스 중인 매니저의 모습에 천광윤이 멋쩍은 미소를 짓는다. 꽤나 미안한 눈치였다.

김성운은 곧장 쇼핑 리스트를 작성했다. 그중에서도 아내 선물이 가장 먼저였다.

현태 형은 어디서 뮤튜브를 찍을까 지도를 펼쳤고.

김주철이 주섬주섬 핸드폰을 꺼내서 전화를 거는 모습도 보인다.

“어, 엄마. 나 한국 가는 게 조금 늦을 거 같아서··· 아니, 문제가 아니라 좋은 일이야. 무슨 일이냐고?”

얼른 핸드폰을 귀에서 떼어내 눈을 껌뻑거리는 김주철에게 박 대표가 곧 기사 뜰 거라며 괜찮다고 눈짓했다.

그러자 김주철이 본인 어깨가 들썩해서는 핸드폰을 들고 사라진다.

이를 본 박 대표가 피식 웃었다.

“아니, 쟤 왜 이렇게 귀여워? 처음에 봤을 땐 인상이 너무 험악해서 뭐 어디 생활하다 온 애인 줄 알았더니.”

“······.”

지도에 촬영할만한 장소를 매직으로 표시하던 임현태가 슬그머니 고갤 들었다.

박 대표를 바라본 그가 이내 ‘언젠간 아시게 되겠지···.’라는 말을 하며 다시 지도를 훑는다.

“그럼 전 그동안 칸 주변 도시들을 돌면서 제대로 관광을 즐겨보겠습니다.”

그때, 스크립터 손기훈이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고.

“인터뷰가 줄줄이야.”

한이연 감독이 얼른 답했다.

“근데요?”

“나랑 같이 다녀야지. 내 매니저잖아.”

“저 스크립터인데요.”

“그게 그거지.”

“어떻게 그게 그거지?”

억울해하는 손기훈에게 좋은 말 할 때 서포트하라고 압력을 넣는 한이연 감독.

각양각색으로 좋은 소식을 맞이하는 동료··· 팀원들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다가.

나도 설레는 마음으로 종이 하나를 꺼냈다.

칸 영화제 스케줄표였다.

인터뷰를 최대한 아침 일찍이나 오후 늦게로 미루면······ 보고 싶었던 영화들을 대부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떤 작품을 보려고?”

어느새 다가온 천광윤이 슬쩍 물어왔다.

종이를 가만히 훑다가 내가 웃으며 답했다.

“아무래도 어떤 걸 안 볼지 말씀드리는 게 빠를 것 같은데요. 하하.”

“나도 처음 칸에 왔을 때 그런 식으로 계획을 짰었지. 근데 그렇게 영화를 많이 보면 머리도 아프고 내용도 다 섞여서 기억도 잘······.”

우뚝 말을 멈춘 천광윤이 푸슬푸슬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아냐. 내가 지금 누구 걱정을.”

씩 웃으며 보지 않을 영화들을 체크해 나갔다.

······근데 인생사 계획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는 말이 정말 맞는 말이었다.

나를 알아보는 이들이 많아져 거리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는데 애로사항이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지.

결국, 김성운이 챙겨온 안경과 모자 등을 착용하고 나서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리고 칸에 있는 모든 극장을 오가며 인생에서 가장 많은 영화를 몰아보기를 며칠.

어느새 황금 카메라상의 주인이 밝혀질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

“천 선배님은요?”

호텔 근처 레스토랑.

한이연 감독의 물음에 방금 도착한 천광윤 매니저가 그의 부재를 설명했다.

“친구분 만난다고 하시더라고요.”

자연스레 식사가 이어졌고, 뒤풀이는 호텔에 있는 라운지바로 다 함께 이동했다.

쇼핑부터 관광, 그리고 영화제에 출품된 영화들 얘기로 테이블이 조용할 새가 없었다.

“그것도 정말 재밌더라고요.”

한이연 감독도 나만큼이나 많은 영화를 보러 다니며 영화제를 만끽 중이었다.

며칠간 본 영화들에 대한 단상을 쭉 늘어놓던 그녀가 칵테일 잔을 들어 올리며 감상평을 일축한다.

“그래도 제 영화라서가 아니라. 우리 작품이라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우리 영화가 제일이었어요.”

자신감 넘치는 건배사에 모두가 잔을 부딪쳤다.

술자리가 무르익었다.

잠시 바람도 쐴 겸 라운지 한쪽에 있는 테라스에 나왔다.

영화제를 머금은 칸의 전경은 며칠째 보아도 질리지가 않는다.

“이 자체가 하나의 영화 같네.”

중얼거리며 난간에 기대는데, 테라스 손님이 한 명 더 늘었다.

이미 한 번 얼큰하게 취했다가 어느 정도 깬 한이연 감독이었다.

“와 여기 뷰 죽이네.”

“그죠?”

그녀도 다가와 난간에 기댔다.

내가 보던 전경을 눈에 담던 그녀가 툭 던지듯 말했다.

“좋네. 칸 영화제.”

가벼운 목소리였지만, 어느 때보다 진심이 묻어났다.

동시에 벅차는 감정도 있는 것 같아서, 더욱 동감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까지 내가 그랬으니까.

“그러니까요.”

빙긋 웃은 한이연 감독이 가만히 칸을 내려다본다.

그러다 불쑥 내 쪽을 돌아보며 말을 꺼냈다.

“아, 나 궁금한 거 있었어.”

“어떤 거요?”

“너를 믿겠다는 목표. 이젠 이뤘어?”

갑자기 튀어나온 주제에 내가 멀뚱거리자 그녀가 어깰 으쓱거렸다.

“아니, 오늘 인터뷰를 하는데 기자가 그러더라고, 다음 목표는 수상이냐고. 그 질문 듣는데 네 목표는 얼마나 이뤄졌는지 궁금해지더라. 첫 목표야 ‘해별이네’ 성적과 위상을 뛰어넘는 거로 그나마 명확한 기준이 있었지만 사실 두 번째 목표는 너무 추상적이잖아.”

확실히 그녀의 말이 맞았다.

나를 믿는다는 건 꽤나 추상적이지.

나도 그걸 알기에 곰곰이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그때 인터뷰에서 두 번째 목표가 뭐냐는 질문에 왜 그렇게 대답했을까.

그리고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더 솔직해질 수 없어서라고.

추상적인 목표에 진짜 바라는 것을 숨긴 거라고.

아마 내가 진짜 대답했어야 하는 목표는 이거 아니었을까.

‘내 선택이······ 더는 주변을 불행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

그래서 주변을 불행하게 만드는 존재 같았던 어린 나를 용서하고 믿는 것.

근데 그게 참 쉽지가 않다.

계속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으면서도, 불현듯 불안함이 몰려온다.

선택에 의심하고, 두려워한다.

그런 사람이 그렇게 저돌적으로 작품을 하기 위해 행동했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오히려 그래서 그렇게 밀어붙였다.

‘증명하고 싶어서.’

그렇게 꽤 여러 번 증명했지만. 여전히 목표를 이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게 문제지.

“글쎄요. 내일 수상하면 믿어지려나요.”

내가 애써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충분히 그럴 만하겠다며 한이연 감독이 주억거렸다.

“수상하면 정말 엄청나긴 하겠지. 스스로를 믿어도 되겠다 싶을 만큼 대단할 거야. 그치?”

다음 순간, 그녀가 고개를 기울였다.

“근데, 뭔가를 이루고 믿는 건······그냥 팩트 아닌가? 잘했으니 믿는다고 말하는 거잖아. 그건 누가 못하겠어. 진짜 믿는 게 맞나, 그게.”

“······.”

“진짜 믿는 건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나를 그냥 믿는 게 아닌가? 내가 좀 그랬거든.”

근자감.

세 글자를 말하며 민망한 듯 웃는 한이연 감독.

그녀가 덧붙여 말했다.

“난 나 때문에 작품이 손해를 본다고 생각했어. 오로지 한이연이라는 무명소졸 때문. 내 새낀 최고니까. 그만큼 나는 나의 현실을 잘 알지만, 내 작품은 믿었던 거야. 그러니 마침내 너라는 배우를 만날 수 있는 자리가 왔을 때 뻔뻔하게 대본을 챙겼지. 기억나? 내가 그때 술자리에 대본 챙겨간 거. 그거 사실 작정하고 너 보여줄 생각으로 들고 간 거였거든.”

비하인드 스토리를 풀어낸 그녀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며 말을 이었다.

“물론 네가 그렇게 덥석 물어줄 줄은 몰랐지만. 그 덕분에 한이연이란 무명소졸의 영화에 너와 이태관 선배, 고하윤이라는 유명대협들이 참여해 꿈만 같은 작품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지. 얼마나 행복하던지······.”

나로 인해 행복했다는 말이 왜 이토록 듣기 좋을까.

그토록 듣고 싶었기 때문일까.

“그러니까, 너 이미 잘하고 있어. 네 덕분에 잘된 내가 감히 말한다.”

“혹시, 다음 작품 무협이에요? 무명소졸···유명대협···.”

“푸하핫! 아냐, 아냐. 어제 자기 전에 본 영화가 무협이었어.”

극장을 그렇게 돌아다니며 영화를 봤는데, 자기 전에 또 봤어?

진짜 대단한 양반······.

내가 혀를 내두르는 사이, 한참을 웃던 그녀가 말을 맺었다.

“아무튼, 그냥 내가 최근에 자주 했던 생각이야. 너무 꼰대 같았나?”

“전혀요.”

나도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감독님 같았어요.”

“감독님?”

“오케이 사인을 받은 기분이에요. 지금 제 인생에.”

“···어후, 부담되네. 괜히 얘기했다.”

언제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냐는 듯 쭈글거리는 한이연 감독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다시 칸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두 번째 목표였던 ‘나를 믿고 싶다’는 건.

애초에 목표라 불리기에 적합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한이연 감독의 말마따나, 나를 믿는다는 건.

그저 내가 지금 당장 시작하면 될 일인······.

목표보단 다짐에 가까운 거니까.

휘이이잉——.

기분 좋은 바람이 분다.

곧 다가올 폐막식에서 만약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한다면.

그땐 두 번째 목표를 이뤘다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아무래도, 오늘인가 보다.

내가 두 번째 목표를 이루는 건.

나를 온전히 믿게 되는 건.

지금. 내가 그러기로 다짐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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