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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배우 복귀했습니다-127화 (127/167)

127화 이제는 정말 (2)

아주 오랜만에 조용한 아침이었다.

칸 영화제 이후로 계속 인터뷰에 시달렸잖나.

원래 이 시간이면 김성운이나 김주철이 끌고 온 밴 안에 앉아 스케줄을 듣고 있었는데, 소파에 앉아 있으니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번에 밴을 회사에서 바꿔줬는데, 그 비싼 차의 시트가 중고거래한 소파만 못했다.

“간만에 여유로우니 좋네.”

정신없는 생활에서 한 발짝 멀어지니 정신이 탕아마냥 다시 문을 두드렸다.

커튼을 모두 걷고서 한강이 조금 보이는 유사 한강뷰(?)에서 창밖을 보며 따뜻한 우유를 홀짝거리니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기분이 좋으니······.

“눈이 근질거리네.”

뭔가 보고 싶었다. 영화가 되었든, 드라마가 되었든, 책이 되었든.

뭐니 뭐니 해도 그중 제일은 대본이라.

쩝.

문제는 대본이 없다는 것.

모두 읽었다. 읽었으니 외웠다.

다시 펼쳐놓고 펜을 꺼내 파고들만큼 끌리는 작품도 없었다.

기분이 확 나빠지려고 그래?

그나마 다행인 건 오늘 김성운이 일주일 동안 들어온 대본을 가지고 오겠다고 한 점이었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아직 시간이 좀 남았네.

‘조깅은 아침에 했고.’

‘체육관은 오늘 안 열고.’

‘그림은 물감이 동났고.’

‘피아노는 좀··· 물려.’

‘48시간의 위로’의 마지막 장면을 위해 너무 많이 쳐서일까.

이미 촬영이 종료된 지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쳐다보기도 싫어 덮개를 씌워놨다.

“역시 연주는 연기가 아니네.”

둘이 같다는 마음으로 연기를 준비하고, 촬영을 했지만.

어디까지나 연기를 위한 연주였을 뿐.

막상 촬영이 끝나고 연기에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드니 의욕이 확 꺾였다.

“······다음 목표나 생각해볼까?”

두 번째 목표를 이루고서, 나는 틈틈이 다음에 대해 생각 중이었다.

이렇게 목표를 만드는 게, 연기라는 반복적인 일을 하는데 있어 어떤 방향성을 갖게 해주는 것 같아서.

여러모로 꽤나 도움이 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첫 번째 목표는 내 과거를 넘어섰고.

두 번째 목표는 나를 믿게 되었다.

그러면 세 번째는?

“이번엔 아예 반대로 물어볼까?”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게 뭔지, 주변에 물어볼까 싶어졌다.

그동안 목표를 하나씩 이뤄나가면서.

혼자서 목표를 이루기 위해 끙끙거리는 것보단, 목표를 공유하고 도움을 받는 게 훨씬 좋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칸 영화제에서 한이연 감독의 조언에 두 번째 목표를 이룰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동안 내가 너무 혼자에 익숙해져 있었긴 하지.’

배우로 복귀하고서 계속 사람들과 함께인데 무슨 혼자에 익숙해지느냐고 의아할 수 있겠지만.

돌이켜보면 그동안 나는 무언가 문제가 있으면 혼자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하람의 직원들과 함께 작품을 만드는 제작진을 하나의 팀이라 생각하면서도.

정작 촬영장에서 나오는 순간 또 혼자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내가 잘못 생각했다.

이제는 내 주변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걸.

천광윤, 이태관, 김미옥, 한이연, 유종원 등등······.

내가 배우고, 기댈 수 있는 진짜 어른들이 많아졌다는 걸.

이제는 안다.

‘언제 한번 수상 소감 할 일이 있으면 쭉 읊어 들려야 하나.’

실실 웃으며 책상 앞에 앉았다.

무언가 떠올랐고, 그 생각들을 옮기기엔 책상 위에 올려진 노트북만한 게 없었다.

노트북을 펼쳐 타이핑을 하려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읽은 대본이 없으니 직접 쓰려고?’

내가 생각해도 좀 그러네.

질리는 타입이야.

스스로를 그렇게 평가하며 속을 움직였다.

딱히 대본의 형식을 짜고 시작한 건 아니지만,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한 달에 보는 대본의 양이 상당하다 보니 자연스레 내 글도 대본의 형태를 따라가게 되었다.

“······이게 맞나.”

물론 내가 대본을 잘 본다고 해서, 감이 좋다고 해서.

좋은 대본을 쓰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게 그렇게 쉬운 문제일 리가 없기에.

‘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이건 그냥 가벼운 취미일 뿐.’

배우의 입장에 서서 키보드를 두드려본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그만큼 집중해서 글을 쓰다가 등받이에 기댔다.

이내, 머리를 헝클어트리고 바람 빠지는 소리 비슷하게 웃어버렸다.

“와······ 이건 누군한테 절대 못 보여주겠네.”

그럼 그렇지.

쉬울 리가.

그래도 일단 쭉 써서 이렇게 보니, 남의 대본을 보는 것처럼 어딜 고쳐야 하는지가 보인다.

그동안 대본을 보며 아쉬웠던 적이 많았잖아.

이건 이렇게만 고쳐도 좋을 것 같은데.

이 부분에선 이렇게 하는 게 더 캐릭터에 맞지 않나?

이 대사보다는 조금 비틀어서 이렇게 치는 게······.

그땐 내가 작가가 아니니 고칠 수가 없었는데.

지금은 상관없잖나.

그래서 고쳐본다.

내가 쓴 엉터리 대본을 내 입맛에 맞게.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어느 정도 수정을 마치고서 다시 한번 읽어보았다.

“이젠 좀 볼만······.”

그때 현관문 초인종이 울렸다.

김성운의 목소리에 얼른 문으로 다가가 문고릴 잡아 밀었다.

그러자 상자를 들고서 낑낑거리고 있는 김성운이 보였다.

“비켜봐, 비켜.”

몸을 돌리자 그가 얼른 집안으로 들어와 상자부터 내려놓았다.

안에는 예상했던 대로 대본이 한가득이었다.

그제야 곳간이 쌀가마니로 가득 찬 것처럼 마음이 든든해진다. 인심이 절로 나겠어.

“마실 거 드릴까요? 주스?”

“콜라 있냐.”

“······.”

“사이다는.”

“······.”

“그럼 뭐가 있어, 대체?”

“우유···.”

“말고.”

“······.”

“물 줘, 물.”

그건 얼른 대령할 수 있지.

얼음 동동 띄운 찬물을 벌컥벌컥 마신 김성운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휴······.”

상자를 내려놓으며 혼까지 내동댕이친듯한 표정을 보며 말했다.

“연락하셔서 같이 들지 그랬어요.”

“됐어. 운동 부족이야. 이럴 때라도 운동해야지.”

하긴.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해 살이 꽤 찌긴 하셨죠··· 라는 말은 묻어두었다.

전쟁 직전 가족 사진 보는 병사처럼, 너무 사망 플래그라.

“근데 차가 꽤 막히나 봐요.”

“왜?”

“아니, 40분 정도면 오신다고 했는데 지금······.”

고개를 돌려 벽시계를 찾았다.

그리고 벙쪘다.

김성운이 무슨 소릴 하냐는 듯 묻는다.

“겁나 뻥 뚫려서 30분도 안 걸려서 왔는데?”

“어······그거 밖에 안 지났구나.”

한 2, 3시간은 훌쩍 넘었을 줄 알았다.

그 정도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썼고.

또 그만큼 많이 쓰기도 했지.

‘엄청 몰입했나 보네, 나.’

재밌긴 했지.

혼자 실실거리자 김성운이 물었다.

“왜?”

순간 보여줄까? 하는 생각이 솟아났다.

창작자의 본능이 이런 걸까.

고작 30분 동안 후다닥 쓰고, 후뚜루마뚜루 고친 글을 감히 보여주고 싶다는 용기가 나게 하다니.

“아녜요. 생각보다 시간이 얼마 안 지나서.”

“오랜만에 푹 쉬니까 시간관념이 없어지지? 그나저나, 현태는 없네?”

“본인 집 가는 날도 있어야죠.”

“그치. 모처럼 쉬는 날인데 비켜줘야지.”

낄낄 웃으며 김성운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내게 손짓했다.

여전히 소파는 그저 등받이일 뿐이었다.

“자 앉아봐. 이게 일단 1차적으로 가져온 것들이야.”

나도 물 한 잔 마시려다가 순간 입에 머금은 물을 뿜을 뻔했다.

놀란 눈으로 상자를 훑었다.

“이게요?”

“엉.”

이미 저것만 해도 수십 작품은 되어 보이는데?

“그러니 잘 봐봐. 이 안에서 네 맘에 쏙 드는 작품이 없겠냐. 특히 이쪽. 이쪽에서 잘 찾아봐.”

김성운이 굉장히 편파적인 손끝으로 한쪽을 가리킨다.

다가가 쪼그려 앉아 살피니 그쪽은 죄다 대본이 알파벳이었다.

“어디 볼까요. 제가 할리우드를 도전할 마음이 생길지.”

웃으며 제대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며칠.

대본을 모두 읽고서 내가 추린 작품은 총 세 개였다.

우선 그중 두 작품은 한국 영화였다.

김성운이 실망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할리우드던 발리우드던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선택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도 나머지 한 작품은 할리우드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유는 명확했다.

비록 전체 대본은 아니지만, 흥미로운 도입부.

확 끌리는 시놉과······.

가장 중요한, 역할.

비중이 크진 않다.

하지만 뻔한 동양인의 역할이 아니라는 점에서 마음이 동했다. 감도 함께 요동쳤지.

이 영화 성공할 것 같다고.

“오~케이!”

비로소 기뻐하는 김성운이었다.

심지어 들어온 대본 중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스케일이 큰 영화였다.

“너무 좋아하시면 안 돼요. 그쪽에서 오디션 보고 뽑아줄지도 미지수이고, 또 저도 개인적으론 역할이 큰 한국 영화 쪽이 아직은 좀 더 끌리거든요.”

“양쪽 다는 힘들겠지?”

“동시 촬영이요? 집중하기 힘들지 않을까요.”

“그건 그래.”

‘악역’과 ‘48시간의 위로’는 촬영이 거의 겹치지 않았는데도 일정 조율이 쉽지 않았다.

게다가 촬영 이후엔 멀티온 행사 다니랴, 칸 영화제 가랴, 인터뷰하랴.

오히려 더 힘들었지.

다행히 김성운도 지금 필요한 건 양보다 질이라며 한 영화에 집중하는 걸 동의했다.

#

마음에 드는 대본이 정해지자 곧바로 진척이 이뤄졌다.

감독 혹은 제작사 대표들과 약속이 잡혔다.

처음으로 향한 곳은 꽤 유명한 제작사인 ‘무비연’.

영화의 이름은 ‘인두겁’.

그리 큰 규모의 영화는 아니었지만, 소재 자체가 꽤나 흥미롭고, 무엇보다 그 소재만으로 끌렸던 영화였다.

조선 시대 배경의 사극 공포영화라니.

하지만 하람으로 보내온 맛보기 대본이 아닌 전체 대본을 받아 읽어보자 처음 느꼈던 것만큼의 재미는 없었다. 용두사미랄까.

일단 홀드를 해놓고, 이번엔 다른 제작사로 향했다.

꽤 오래전부터 충무로 터줏대감 노릇을 하던 영화사, ‘푸른 물’.

영화의 이름은 ‘범죄인도자’.

사실 이쪽은 애초부터 전체 대본을 보내줬기에 실망할 건 없었다.

다만 영화를 제작하는 회사의 분위기와 감독의 성향은 제대로 봐둘 필요가 있었다.

내가 가진 선구안이 언제 삐끗할 수 있을까?

그걸 곰곰이 생각해보니 결국 ‘사람’이더라고.

투자자가 영화의 퀄리티에는 관심이 없고, 허구한 날 예산 삭감에 주력한다거나.

영화사 대표가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해 갑자기 빚더미에 앉는다거나.

감독이 대본과는 다르게 갑자기 고집을 부린다거나.

아니면 배우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거나.

뭐 그런, 연예계에선 자연재해쯤으로 취급되는 일들 말이다.

“어유,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미팅이 끝나고, 인사를 하고서 대표실을 나섰다.

함께 따라 나온 감독이 다시 한번 인사를 하며 덧붙인다.

“정말 배우님이랑 함께할 수 있으면 원이 없겠네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어휴, 좋게 안 보일 수가 없죠. 백승결 배우님이신데.”

“하하. 저희가 빠른 시일 내에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감독의 배웅까지 받으며 차에 올라탔다.

김성운이 룸미러로 보이는 감독을 바라보며 말했다.

“살다 살다 차까지 배웅해주는 감독은 또 처음이네. 누가 보면 신인인 줄 알겠어.”

“그러니까요.

“하긴 신인은 아니지만 지난번 영화를 크게 말아먹었잖아. 이번엔 절박하긴 하겠지.”

'범죄인도자'를 맡게 된 감독.

여전히 룸미러에 작게 보이는 저 윤 감독은 김성운의 말대로 크게 한 번 말아먹은 감독이었다.

그런 감독이 푸른물이라는 자금줄 빵빵한 제작사와 함께 대작 영화를 만들게 되었으니, 이게 마지막 동아줄 같았으리라.

“해외 진출도 염두하고 있는 것 같던데, 그럼 지금 너만한 선택지가 없긴 하지.”

끄덕거리며 손을 뻗었다.

가방에 넣어두었던 대본들 중 하나를 꺼내 들자, 김성운이 살짝 업된 톤으로 말했다.

“자, 이제 하나 남았네.”

“팀장님한텐 이제야 하나 시작하는 거 아녜요?”

“에이, 그 정돈 아니고.”

부정하는가 싶던 김성운이 이내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킬킬거리며 덧붙였다.

“좀 설레긴 하네.”

함께 웃으며 할리우드에서 보내온 대본을 다시 한번 훑었다.

그리고 툭 내뱉었다.

“저도 궁금하긴 하네요.”

지금껏 해외 자본이 들어와도 줄곧 한국식 촬영장에서만 연기를 해왔기에.

내심 호기심이 동한다.

“······대체 어떤 곳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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