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배우 복귀했습니다-128화 (128/167)

128화 이제는 정말 (3)

Hollywood.

언덕에 올라간 새하얀 글자들을 본 적 있을 거다.

야자수가 정말 크고, 노을이 핑크빛으로 물드는.

수상할 정도로 디테일한 코스프레 가게가 다닥다닥 붙어있고, 바닥엔 유명 스타들의 손과 발자국이 찍혀있는.

영화의 본고장.

물론 이제는 그저 지역의 명칭이라기엔 너무 상징적인 이름이 되어버렸다.

지역이 아닌 미국에서 만들어지는 큰 규모의 상업영화들을 모두 할리우드라고 부르고 있었다.

어쨌든, 그 할리우드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사실 기회야 이전부터 간간이 있긴 했지만, 그땐 작품이나 역할이 별로였지.

하지만 지금은 모든 요소가 마음에 들었다. 내 흥미와 감을 모두 사로잡은 작품이 생겼다.

물론 내 가치를 증명해야만 했다.

이미 멀티온 드라마들과 칸 영화제로 나를 어느 정도 증명하긴 했지만.

그렇기에 지금 이 기회를 얻은 것일 뿐.

아직 나는 할리우드라는 초거대 자본이 보기에 그저 흥미로운 배우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러니 오늘이 중요했다.

곧 화상 통화로 오디션을 보게 될 테니 말이다.

크게 긴장되진 않는다.

솔직히 아예 안 된다.

하고 싶은 영화들이 많다.

욕심이 나는 영화들도 많다.

할리우드라는 곳이 궁금하고 도전해보고 싶긴 하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가야 한다는 생각도 없다.

내게 중요한 건.

작품이 얼마나 끌리느냐.

역할을 얼마나 잘 할 수 있느냐.

누구와 함께 일하느냐.

그리고······.

“배경이 이쪽이 예쁘냐. 이쪽이 예쁘냐.”

김성운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가 아주 진지한 얼굴로 카메라 방향을 세팅하고 있었다.

그 무거운 소파를 무슨 식탁 의자처럼 가볍게 들어 움직이던 김주철이 멈춰서서 눈알을 굴렸다.

“아무래도 한강 보이는 쪽이······.”

“그래?”

김성운이 카메라를 돌렸다. 그리고 이내 다시 원상 복귀를 시키며 고갤 내저었다.

“야 여기 안 되겠다. 베란다에 우리가 비쳐.”

“아, 제 생각이 짧았네요. 죄송합니다.”

내가 슬쩍 손을 들었다.

“혹시 제가 의견을 내도 되겠···.”

“미적 감각 떨어진다는 진단 받은 앤 빠져.”

···너무하네.

콧잔등을 긁으며 입맛을 다시자 그가 웃으며 정정했다.

“농담이야. 네가 찍힐 건데, 네 의견도 중요하지. 어디가 나을 거 같은데.”

“뭐니 뭐니 해도 우리 집의 자랑. 75인치 티···.”

“주철아. 그냥 흰 배경으로 가자.”

“넵.”

날 보고 있던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갤 돌렸다.

카메라를 옮긴다.

“주철아, 너마저.”

“형, 죄송하지만 티비는 진짜 아닙니다.”

“아니, 이게 그림이 나온다니까? 그걸로 해놓으면 액잔 줄 알아요, 사람들이.”

“야, 무시해. 무시해.”

김성운이 손을 휘휘 저으며 김주철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런다고 또 따라간다.

이제 상사는 김성운이라 이거지?

헛웃음을 흘리며 노트북을 연결하는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기계치에겐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이렇게 하는 게 맞나?”

“······글쎄요.”

“현태 언제 도착한대?”

“연락해보겠습니다.”

“얼른 해 봐. 오디션 볼 때, 통신이 원활해야 할 텐데 말이야.”

이윽고 현태 형이 와 모든 세팅을 마쳤다.

자리에 앉아 화면에 비치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화면에 상대방이 떠오르며 통화가 시작되었다.

대략 40대 중 후반 정도로 보이는 굉장히 차가운 인상의 중년 남자.

—우선 반갑습니다. ‘당신의 죽음을 막으면’의 감독을 맡은 크리스입니다.

“아, 예. 백승결이라고 합니다.”

짧은 인사가 오갔다.

그는 간단하게 오디션에 대해 설명했다.

지금 나와 하는 이 오디션이 무려 4차 오디션이라는 것과.

앞으로 6, 7차까지 오디션을 볼 생각이라는 것.

이 양반이 내 기를 죽이려고 그러나?

그런 삐뚜름한 생각이 스쳤지만, 개의치 않았다.

아까 말했듯이 난 지금 당장 꼭 할리우드에 가야 한다는 욕심은 없으니까.

—우선 연기를 먼저 보고 얘기를 나눠보도록 하죠.

본격적으로 오디션을 시작한 크리스 감독이 리딩할 대사를 짚어주었다.

—······이 부분 한번 읽어보시겠어요? 바로 하실 필요 없이, 앞뒤 문장 보시고 정확히 상황을 파악한 후에 연기 시작하시면 됩니다.

굉장히 신중한 모습이었다.

어울리는지 느낌만 보는 게 아닌, 지금 당장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디테일한 연기를 주문한다.

그래서 주문한 대로 보여주었다.

전체 대본이 아니라 중반부 이후부터의 내용은 전혀 모르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연기에 여러 요소가 개입하지 않았다.

결말이 이러니까···.

뒤에 이렇게 되니까···.

그런 고민들이 간혹 현재 연기에 영향을 미치곤 하는데, 지금은 정말 영화 속 캐릭터처럼 한 치 앞을 모르는 연기가 가능했다.

그렇게 한 장면, 한 장면.

원하는 대로, 주문하는 대로 연기를 보여주다 보니.

크리스 감독의 표정이 조금씩 변해갔다.

······네 번째 주문이 끝나고.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물어왔다.

“지금, 화면에 대본을 띄워놓으신 건가요?”

“아뇨?”

“그럼 지금까지 한 대사들 모두··· 외웠다는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아니··· 내가 어딜 시킬 줄 알고요?”

오랜만이다. 이런 반응.

그동안 한이연 감독등, 이미 내 기억력을 알고 있거나 그러려니 하는 사람들과 일을 하다 보니 과거엔 흔했던 반응이 새삼 새로웠다.

만약 할리우드에 간다면······.

‘정말 새로운 시작이겠구나.’

다시 나를 증명하고, 올라서야 하는구나.

이 순간이 바로 그 첫인상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첫인상은······.

강렬할수록 좋겠지.

“어딜 시키실지 모르죠.”

크리스 감독을 향해 어깨를 으쓱이며 씩 웃었다.

“근데, 다 외우면 어딜 시키든 상관없으니까.”

#

‘존나 멋있어.’

카메라에 잡힐까 구석에 바짝 붙어 속으로 감탄하는 김주철이었다.

기억력도 기억력인데, 저 상황에서 저렇게 답하는 여유가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거기에 자신감 있어 보이지만, 그렇다고 무례해 보이진 않는 표정까지.

‘얼른 성장해야지.’

무력99, 충성심99, 매니저력9···.

자신의 능력치를 수치화한다면 아마 이런 느낌일 터.

얼른 성장해서 도움이 되는 매니저가 되리라!

김주철이 그렇게 다짐했다.

오디션은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아직 5, 6, 7차가 남아서 앞으로 오디션을 그만큼 더 보게 되겠지만, 어쨌든.

김성운은 백승결 전용 밴을 타고 회사를 갔다.

뒤이어 김주철도 중간에 내려달라는 백승결을 회사 공용 미니밴 뒤에 태우고 회사로 복귀한다.

“이 신호 다음에서 내려주면 될 것 같아.”

“아, 넵.”

김주철이 끄덕거리며 넌지시 물었다.

“오늘은 택배 일 하실 때 같이 일하셨던 분들 만나시는 거예요?”

“어, 맞아.”

“꾸준히 만나시는구나.”

“넌 어때? 생활할 때 같이 있던 사람들 만나?”

“가끔 연락만 주고받아요. 그쪽에서 굳이 만나지 말자고 해요. 일반인이 자기네 같은 사람 만나서 좋을 게 뭐 있겠냐고.”

“네 생각 많이 해주는구나. 거기서도.”

“그런 것 같아요. 하하.”

마침 신호가 바뀌고 백승결이 차에서 내렸다.

다시 엑셀을 밟은 김주철이 속으로 되뇌었다.

‘회사 사람들 제외하고 가장 많이 만나는 건 작품 함께 했던 배우, 감독님들. 그리고 그다음으로는 택배 일 함께했던 동료분들······.’

백승결이 만나는 사람들을 머릿속에 쫙 그려 넣는 그였다.

감시 목적이라거나 그런 건 결코 아니고.

자신의 부족한 매니저력(?)을 키우기 위한 나름의 훈련이었다.

배우가 어딜 가고, 어떤 일을 하는지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어야 유사시에 대처가 가능하다는 김성운의 말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옛 인연들은 누구지?’

아주 가끔 백승결이 만나는 사람들이 있었다.

처음엔 택배 동료인가 싶었는데, 그것도 아니고.

물어보니 그냥 옛 인연들이라고만 답할 뿐 정확히 알려주지 않더라.

‘팀장님한테 물어볼까. 아, 현태 형한테 물어보는 게 빠르려나.’

그런 생각들을 하다 보니 어느새 도착한 회사 앞.

정확히는

회사 앞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하람이 아닌 FHN 엔터테인먼트 사옥 앞.

잠시 기다리자 시간 맞춰 모자를 뒤집어쓴 여자가 사옥에서 나왔다.

걸그룹 트리스의 멤버 유은하.

그녀가 꾸벅 인사하며 미니밴 뒤에 올라탄다.

“안녕하세요.”

“어. 어서 와.”

룸미러로 김주철이 그녀를 확인했다.

‘오늘도네.’

표정이 안 좋다. 목소리가 축축하다.

처음 봤을 때만 해도 꽤 밝았던 거로 기억하는데, 이상하지.

자신보다 어린 여자다 보니 성격대로 ‘무슨 일 있어?’ 물어보기도 뭐했다.

아직 그만큼 친하지도 않고.

‘아무래도 팀장님이랑 얘길 해봐야 할 것 같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자신이 꽤 매니저답다는 생각에 입꼬리가 올라가는 김주철이었다.

#

“음, 그래?”

—네. 그냥 하루 이틀이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점점 더 안 좋아 보여서요.

“일단 알겠어. 지금 복귀하는 중이지?”

—예.

“그래, 자세한 얘긴 와서 하자.”

김성운이 김주철과의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트리스 매니저한테 연락을 해볼까?’

물론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손님이 와 계셨으니까.

김성운이 찻잔을 들고 소파 앞으로 향했다.

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가 엉덩일 들썩거리며 공손히 찻잔을 받아들었다.

“감독님이 회사까지 어쩐일이세요.”

김성운의 물음에 푸른물 영화사에서 만났던, ‘범죄인도자’의 윤 감독이 마른 웃음을 흘렸다.

“그, 영화에 대해 연락이 없으셔서요.”

“아···.”

예상은 했다. 갑자기 윤 감독이 찾아올 일이 뭐가 있겠나. 생각해본다던 거 어떻게 됐어? 물어보는 것밖엔.

“그게, 아직 저희도 고민 중이라.”

“알죠. 고민 중이신 거. 근데 대표님이 그러시더라고요. 백승결 배우님이 할리우드 간다는 찌라시가 돈다고요.”

그것 때문에 몸이 달아서 왔구나.

김성운이 얼른 표정 관리를 하며 말했다.

“얘기 중인 건 맞습니다만, 아직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검토 중이에요. 저희 쪽에서도, 할리우드 쪽에서도. 물론 ‘범죄인도자’도 계속 고민하고 있고요.”

이 정도면 알겠다고 돌아가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윤 감독이 양손을 모으며 안달 난 표정을 지었다.

“팀장님, 저 좀 도와주세요.”

“네? 갑자기 그게 무슨···.”

“투자자들 중 배우님 안 들어오면 발 빼겠다는 분들이 계신답니다.”

김성운의 말문이 막혔다.

영화계에서 흔한 일이긴 했다.

배우가 누가 캐스팅 되느냐에 따라 투자금의 규모가 천차만별인 게 당연하니까.

특히나 ‘48시간의 위로’가 해외 극장에도 걸린다는 소식을 본 투자자들은 아쉬움에 땅을 쳤을 거다.

저 영화에 투자했어야 했는데!

현재 국내에 승결이보다 몸값이 높은 사람은 있어도, 승결이만큼 해외에서 인지도가 높은 배우는 없었다.

단순히 영화의 국내 흥행. 그 이상의 파이프라인을 원하는 그들에겐 지금으로서 승결이가 최선의 선택일 터.

“저희가 진짜 최대한 배려해드리겠습니다. 스케줄도 조정해달라는 대로 다 해드리고요. 어떻게··· 어떻게 안 될까요?”

“아니, 그게 저희도 아직······.”

“저 이번 영화 꼭······.”

윤 감독이 절절한 눈으로 김성운의 손을 잡았다.

“꼭 성공시켜야 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