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끌어내리지 못할 높이까지 (4)
······그새 사람 인상이 저렇게까지 바뀌나.
첫 미팅에서의 얼굴을 아주 잘 기억한다.
벌써 여섯 작품째 영화관에 본인 작품을 건 감독치고는 고집이 없어 보였다.
그게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냥 줏대가 없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나를 어떻게든 잡으려던 눈빛이 지금은 길가에 돌멩이 보는 듯하다.
슬쩍 고갤 돌려 김성운을 보았다.
이번 영화를 꼭 성공시켜야 한다며 그의 간절하다 못해 절절한 모습까지 봤다던 그는 더욱 당황한 표정이었다.
당신 그때 그 사무실로 찾아왔던 윤 감독이 맞아? 라는 얼굴이었다.
“오늘 미팅 잡혀 있었잖아요.”
“아··· 네. 그렇죠. 그런데 지금 상황이······ 못 오실 줄 알았어요.”
자리에 앉은 윤 감독이 과자 하나를 뜯어 입에 넣는다.
그가 입을 우물거리며 양손으로 눈을 비비적거렸다. 하품이 이어졌다.
그 모습을 벙벙하게 지켜보던 김성운이 내 눈치를 본다.
이어서 그가 표정 관리를 하며 말했다.
“지금 승결이 얘기로 좀 시끌시끌하긴 하죠. 근데 그거 곧 정정 기사 나갈 겁니다. 그러니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아··· 그런가요? 정정 기사······ 네, 뭐. 일단 알겠습니다.”
지난 미팅 때 눈을 반짝이며 ‘범죄인도자’에 대해 이야기하던 윤 감독이.
지금은 무미건조하다 못해 심드렁하다.
이번엔 내가 슬쩍 김성운의 눈치를 보았다.
미소를 짓고 있다. 환하게.
저 정도는 웃어야 가려질 만큼 열받은 것 같은데···.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보다 과자가 더 중요한 듯 아그작 아그작 씹고 있는 윤 감독.
내가 가져온 대본을 테이블 위에 꺼냈다.
윤 감독의 시선이 대본 위로 올라탔다.
표지를 넘기며 내가 말했다.
“우선, 제가 궁금한 점들을 정리해왔습니다.”
“궁금한 거요?”
“네. 대본을 보면서 연출적인 부분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았거든요. 예를 들어 주인공이 범죄 현장을 들이닥치는 장면에서 창문을 통해 빠져나가는 범죄자를 카메라가 어떤 식으로 잡을 건지, 라던가. 여기 보시면 주인공이 이 조직의 수뇌부를 만나기 위해서······.”
대본을 펼쳐놓고 이야길 이어갔다.
내가 대본을 통해서 그린 장면이 감독이 그린 연출과 맞아떨어지는지, 그걸 교차 점검 하기 위해서였다.
그 모든 이야기가 공허한 울림이었다는 걸 깨달은 건···.
“그러면 이 부분은 감독님이 어떻게 연출하실 건지. 그것도 궁금합니다.”
질문을 쏟아낸 뒤.
과자를 세 봉지째 까먹고 있던 윤 감독이 손에 묻은 과자 부스러기를 탁탁 털며 나를 불렀다.
“근데요, 승결 씨.”
지난번 미팅 땐 배우님이라고 부르던 호칭이 어느새 ~씨로 바뀌어 있었다.
“작품에 대해 궁금한 게 많으신 것 같은데··· 아무래도 이게 먼저 아닌가 싶어서요.”
머뭇 머뭇. 아주 어렵게 이 말을 꺼낸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그가.
입가를 슥 훔치며 내게 물었다.
“이거, 작품 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네?”
해달라던 사람이 할 수 있겠냐고 묻는 희한한 상황이었다.
내가 되묻자, 그가 오만상을 쓰며 말했다.
“이게 참 난감합니다, 저희도. 문제가 생긴 배우와 일하는 게 아무래도 좀······ 뭔 말인지 아시죠?”
“곧 해결될 거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옆에서 김성운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그의 인내심이 마지노선에 걸쳐 달랑거리고 있었다.
“하하······ 팀장님을 못 믿는 게 아닙니다. 배우님이 잘못했다는 건 더더욱 아니고요. 다만 제가 겁이 많아요, 겁이. 근데 투자자분들도 겁 많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럽죠. 잘 아시잖아요?”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슬쩍슬쩍 김성운의 눈치를 보며 윤 감독이 말을 이어간다.
“이미 그런 프레임이 씌워졌으면 해결해도 이미지 회복에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게다가 앞으로 또 뭐가 터질지도 장담 못 하고요. 투자자들은 그런 리스크에 투자 안 하려고 들 텐데······ 그럼 안 되잖아요. 지난 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이 영화를 꼭 성공시켜야 하거든요.”
주절주절 떠들던 윤 감독이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덧붙였다.
이 작품에 내 자리는 없다고.
“그래도 뭐, 할리우드는 그런 거 신경 안 쓰지 않겠어요? 하하하.”
#
“······어후, 쫄려라. 호구 새낀 줄 알았는데, 성깔 있네.”
백승결과 하람 팀장이 나가고.
윤 감독이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와 마른 입술을 적시며 날름거렸다.
만만하게만 봤던 하람의 김성운 팀장의 눈빛이 사람 하나 죽일 기세였다.
“에이씨.”
그 앞에선 찔끔거리다가 시야에서 사라지니 불쑥 성질이 나는 윤 감독이었다.
“아니, 뭐 지가 하람 본부장이라도 돼? 내가 감독인데 어쩔거야. 누가 빚투 터지래?”
뒤늦게 자존심을 세우는데, 그때 부하 직원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감독님.”
“어, 왔냐.”
부하 직원이 호기심어린 얼굴로 묻는다.
“미팅은, 어떻게 됐어요?”
“뭘 어떻게 돼. 이 작품 하고 싶다고 사정 사정하는 거 잘 타일러 보냈지.”
거짓말이었다. 부하 직원한테 쫄아서 얼른 보내버렸다는 소릴 할 순 없잖나.
“근데, 투자자들이 백승결 배우 원하는 거 아니었어요? 백승결 배우 아니면 투자 안 하겠다고 하시는 분들이 꽤 있었다면서요.”
윤 감독의 용단에 부하 직원은 약간의 걱정을 보였다.
이에 윤 감독이 고갤 저었다.
“투자자들이 그렇게 원했던 건 해외에서도 먹힐 백승결이야.”
“네?”
“해외에서만 먹히는 백승결이 아니야. 빚쟁이 아빠 연대책임 지느라 이미지 박살 났는데, 어떤 투자자가 반기겠냐.”
“아······ 그건 그렇겠네요.”
그제야 납득하는 부하 직원.
윤 감독이 신이나 덧붙인다.
“그렇다니까. 콩알탄만한 리스크도 싫어하는 양반들이 심지에 불이 붙은 폭탄을 왜 안고 가겠어.”
“그럼 이제 어떡하시려구요? 그래도 주인공 캐스팅은 해야 하잖아요?”
이어지는 물음에 윤 감독이 흐음, 침음성을 삼키며 머릴 긁적였다.
말은 이렇게 쉽게 해도 여러모로 상황이 복잡해지긴 했다.
지금까지 일이 순조로웠던 것은, 백승결이라는 절대적인 패가 있어서 모여든 투자자들이었으니까.
물론 투자자들도 백승결을 밀어낸 자신의 결정에 동의할 것은 분명하겠다만······.
“문제는 그들을 어떻게 다시 구워삶느냐는 거지.”
“지금으로선 백승결만큼 핫한 인물이 없지 않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없는데······.”
“한 명으로 안 되면 여러 명으로 승부를 봐야지. 아무래도 주연 캐스팅을 한 번 갈아엎긴 해야겠는데······.”
“또 요?”
“야, 투자 받으려면 또 요가 아니라 또 또요도 필요하면 갈아엎어야지. 백승결 한 명으로 될 거 이젠 주연 배우들 전부 입맛에 맞게 맞춰줘야 할 거 아냐. 어차피 아직 계약서에 도장들도 안 찍었고.”
이렇게 된 거 아예 투자자들의 입맛에 맞춰 새로운 판을 만들어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한 윤 감독.
그가 여전히 백승결을 주제로 불타오르고 있는 인터넷을 확인하며 안도했다.
“그래도 영화 들어가기 전에 터져서 얼마나 다행이냐. 크랭크인 들어갔는데 이 지랄 났으면 와······ 빚쟁이들만 피해자가 아니라, 나도 피해자가 될 뻔했잖아. 민폐네. 민폐야.”
투덜거리던 윤 감독이 갑자기 미간을 확 찌푸린다.
“아니지, 아니지. 나 이미 피해자지?”
부하직원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목소릴 낮춘 그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쯧······. 회사까지 찾아가서 그렇게 굽신 거렸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안 그랬지. 쪽팔리게,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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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말 없이 푸른물 영화사에서 나와 밴에 올라탔다.
뒷좌석에 앉아 안전벨트부터 맸다. 오늘은 아마 운전이 거칠 예정인 것 같아서.
에어백은 어디서 터지더라···.
그쪽에 붙어있어야겠는데.
그러다 룸미러에 비친 김성운을 보았다.
여전히 머리 위에서 스팀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얼굴도 붉다.
윤 감독이 조금만 더 눈치 없는 사람이었다면, 거기서 한바탕 소란이 났으리라.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러자 김성운이 홱 고갤 들어 올리며 날 노려본다.
“웃기냐.”
“네. 웃겨요.”
“······.”
하,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릴 낸 그가.
“그래, 너라도 웃어라.”
이내 포기하고 고갤 흔들었다.
“어디 가서 매니저 경력 오래 됐다고 말하면 안 되겠다. 미안해. 저런 새끼 하나 구분 못 해서 너한테 이딴 수모를······.”
“전 괜찮다니까요. 그리고 어느 정도 눈치 채시고 소문까지 알아보셨잖아요.”
“그건 그래. 어쩐지 쎄~했단 말이지, 내가!”
맞장구치던 김성운이 멈칫거렸다.
이내 그게 뭐가 중요하냐며 다시 풀이 죽는다.
“그래도 워낙 간절해 보여서 그러려니 했는데. 연기였나? 저런 연기력으로 왜 감독을 처 하고 있어? 연기자를 했으면 대성을 했겠네!”
“다시 올라가서 스카웃 할까요? 하람에 배우로 와달라고?”
“야잇······.”
그제야 크게 웃음을 터트리는 김성운.
누그러든 분위기에 내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연기가 아니었을지도 모르죠. 오히려 너무 간절해서, 그 간절함에 제가 이젠 방해가 돼서 잘라냈나 보죠.”
“뭐야. 주철이가 천사라고 해주니까 이제 진짜 천사 컨셉으로 가는 거야?”
“그건 아니고요.”
어깨를 으쓱거렸다.
크게 화가 나진 않았다.
빚투라는 게 제작자 입장에서 얼마나 리스크가 큰지 모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물론 좀 더 매너 좋게 거절할 방법이 많았음에도 저런 식으로 나온 윤 감독에 대해선 유감이지만.
이로써 내 고민거리가 하나 줄은 것도 사실이다.
‘아니, 선택지가 줄었다고 생각해야 하나.’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울적해져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좋은 작품이었는데 말이죠.”
유일하게 그 점이 못내 아쉬웠다.
내 말에 멍하니 나를 바라보던 김성운이 깊게 탄식한다.
“이 와중에 작품이 아깝냐. 너도 진짜···.”
정상은 아니야, 정상은.
중얼거리던 김성운이 고개를 흔들거리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번엔 네 감이 틀렸으면 좋겠다. ‘범죄인도자’인지 뭔지, 콱 망해버렸으면 좋겠어.”
그의 말에 낄낄 웃다가 내가 말했다.
“그것보단··· 우리가 잘 되죠. 다른 작품으로.”
그게 할리우드가 되었든.
할리우드조차도 불발된다면, 또 다른 작품이 되었든.
내 다음 작품으로.
그러자 김성운이 농담조로 받아쳤다.
“야, 원래 야구도 내가 응원하는 팀 플레이오프 진출하는 것보다, 라이벌팀 떨어지는 게 더 기분 좋은 거 모르냐.”
“전 그래도 제가 잘 됐으면 좋겠는데요?”
어깨를 으쓱거리며 웃었다.
이에 김성운도 룸미러로 날 보며 웃음 짓는다.
“사실 그게 맞지. 남 못 되는 게 나한테 무슨 득이 된다고. 내가 잘 돼야지.”
“그렇다니까요.”
“그래, 꼭 잘 되자. 아니, 존나 잘 되자.”
다짐하듯 힘있게 말한 김성운이 덧붙여 말했다.
“넌 차기작 준비만 열심히 해. 지금 너 끌어내리려고 난리 치는 문제들은 우리가 해결할 테니까.”
이어서 그가 서늘하게 입꼬릴 올리며 주억거렸다.
“각자 잘하는 거 하자. 각자 잘하는 거.”